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그립습니다 서해 최학송 소설가.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 182

정종배 2018. 3. 11. 11:56


금요_182_최서해-OK.pdf






오랜만에 소식 전합니다.


3.16일 금요일 오후 3시

서울 남산 밑 문학의 집 서울에서 행사를 갖습니다.


시간 내주시어 응원하여 주시옵길


망우리공원 서해 최학송 소설가 묘지 관리인으로 인연을 맺어

최학송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제자들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5년 전 문학의 집 서울 관장이신 김후란 시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잊지 않고 행사를 마련해 주시어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문운이 왕성하시고

뜻하시는 바 다 이루기시길 빕니다.


정종배 올림


작가의 말

 

아호의 유래

나의 아버지의 아호는 경남(耕南)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 <苧谷>이라 불렀다. 저곡이란 서울 부근에 있는 동리 이름었는데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가지고 함경도로 부임하기 전에 거기에 가 계시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다서 <曙海>라고 고치었다. 그 까닭은 나의 고을 성진은 해항인 것만치 나는 바다와 친할 기회를 많이 갖고 그에 따라 바다의 너른 맛, 깨끗한 맛에 마음이 반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바다에 나가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그 바다의 절경을 찬미하였다. 소년 공상에 마지막에는 바다를 영웅의 기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영웅의 기품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웃으우나 그 때는 그를 동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호를 <새벽의 바다>로 고친 것이었다.

 

내가 본 나

한 말로 표현하면 그저 못생겼지요. 남은 나를 털털하고 좋다고 하나 나는 그것을 교활한 소치라고 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시종(始終)이 여일(如一)치 못하고 과단성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도 곧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워서야 분개를 합니다그려 허허....... 참 못생겼지요(명사의 自我觀, <別乾坤> 1930.5)

 

내가 본 내 얼굴

관상박사 배상철씨가 <骨相學上美男子>라고 그럽디다. 오직 얼굴이 못생겼으면 그런 말을 했겠소(<別乾坤> 1931.2)

 

홍염과 탈출기

나의 소설에 紅焰이라는 것이 있다. 그 소설을 쓴 동기는 나의 장모되는 분이 홍염에 나오는 <달니소>라는 북간도의 궁벽한 산골에서 돌아가셨다. 장모되는 분은 슬하에 딸 하나밖에 두지 못하셨는데 필연 만리타국에 가서 돌아가실 때 자식조차 보지 못한 설움으로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사위라는 사내에게 기쁜 마음으로 맡기었다 할지라도 딸을 보지 못하는 감정에 이르러는 남에게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질 것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딸이나 사위를 죽을 때까지 조차 만나 보지 못하게 되는 그 눈물겨운 원인이 어디있느냐. 모두 다 빈곤 때문이었다. 빈곤 때문에 그 분은 간도에 가셨고 빈곤 때문에 출가여식을 만나지도 못하였고 빈곤 때문에 궁사(窮死)하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어떤 전형을 발견하였다. 즉 궁사하시는 장모를 통하여 일시대적 조선 사람들의 전형을 바라보았다.

나의 소설가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결말을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사실 3 공상 7이라 할 것이다. 그 때는 스물 두 살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그 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인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전연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엿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脫出記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 때의 심정을 일호가차(一毫假借)이 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증언

 

서해 최학송은 1924토혈」 「고국등으로 등단하여 1932년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문학적으로 드러낸, 독특한 수법으로 자신의 작품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현대 문학사상 여명기 작가가 그랬듯이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각 장르에 걸쳐 자기 문학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야심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충실히 묘파하여 성실한 작가적 입장을 고수했다. 서해는 1920년대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 전영택 등과 동렬에 위치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곽근 문학평론가

 

 

 

 

 

 

曙海 최학송 소설가 약력

 

 

1901(1) : 121일 함북 성진군 임명면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 있 지 않고, 한말 지방 소관리 지냄. 모친은 김소사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져 있음. 아명은 저곡(苧谷). 본명은 학송. 호를 설봉 설봉산인 풍년년으로 쓴 적도 있음.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는 졸업한 듯. 어려서 한문 공부를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많이 했음.

1905(5) : 한동안 함북 성진시 한천리 254번지 김순기(외숙부) 집에서 기거함.

1913(13) : 나무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음 등 힘에 부친 일을 함.

1915(15) : 시장 거리에 나가 청춘』 『학지광등의 잡지를 사다가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읽음(이런 일이 당분간 계속됨).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 경에 가 있는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음.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 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보내주기도 함.

1918(18) : 춘원의 무정에 크게 감명 받음. 간도로 이주하여 유량 생활 시작. 여기서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함.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음). 이혼한 이유는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 는 곧 사망. 부두노동자, 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함.

1921(21) : 7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 있지 않음)와의 사이에서 딸 백금을 서간도에서 낳음.

1922(22) :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을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 해 죽음.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남.

1923(23) : 봄에 간도에서 귀국.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함. 서해라는 필명 쓰기 시작함.

파인과 연락 시작함. 생활이 안전 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 경성 성진 등지를 떠 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함.

1924(24) :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함. 8 월말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뭄. 10월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3 개월 기거함. 여기서 탈출기도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 공부함. 1115일 어 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 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개 제하여 발표함. 주지(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옴.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 와 딸 백금을 나두고 출분.

1925(25) : 2조선문단사 입사. 방인근 집에 기거함. 조선문단을 통해 작품 발표가 많아지자 일약 중견 작가로 발돋움하여 각종 잡지의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 시작함. 414일 백금이 병사함. 김기진의 권유로 KAPF에 가입. 81일부터 9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영광 불갑산 연실봉 조선 8)

1926(26) : 1월초 전남 영광 도착.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 4월 문우 조운 의 누이 분려와 조선문단사에서 결혼. 명륜동 2가에서 살림 시작. 6조선문단이 통권 17호로 휴간되자 현대평론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종사.

1927(27) : 11일 장남 백() 출생. 1월 범 문단 조직으로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 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음.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 조선문단이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됨. 조선문단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하여 앙숙이 됨.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 55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회에서 소설작법론 강연.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편집. 조운의 어머니 기생 출신.

1928(28) : 8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됨. 중외일보기자.

1929(29) : 2월 둘째 딸 출생. 5월 성해 회월 일엽 팔봉 독견 승일 은상 석구 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 신생의 문예 추천 작가로 위촉. KAPF 탈퇴.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음. 가을에 매일신보기자가 됨.

1930(30) :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학예부장이 됨. 두 살 된 둘 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의 명창 이동백 김소희 가야금 병창으로 유명한 송 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임.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다님. 고영환 이승만과 함께 체부동의 노 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삶.

1931(31) : 5월 창작집 홍염삼천리사에서 간행. 8월 제주도 여행. 부친 10년 만에 찾아 와 몇 달간 머물다 다시 간도로 떠남.

1932(32) : 54삼천리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 김원주(金元周) 방인근 이광 수 현진건 최상덕 김억 이익상 김원주(金源珠)와 함께 초대 됨. 위병이 부쩍 심해져 6 월 초순 자리에 눕게 됨. 병명은 위문협착증.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 76 일 수술을 받기 위해 의전병원으로 옮김. 7일 대수술 뒤 과다한 출혈.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의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 함. 79일 오전 4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둠. 사망진단서는 의전병원 교수 유상규 이름으로 싸 인 되어 있음. 당시 가족은 아들 백()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종로구 체부동 118번 지. 711일 장례식은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 묘지. 이광수 김 동인 염상섭 김팔봉 김억 방인근 심훈 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하여, 이처 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고 전해짐. 자동차도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룸.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 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씀.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 崔鶴松之柩)’라고 씀. 7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 김 동환 박종화 주요한 양건식 이병기 방인근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결 성. 9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남.

1933: 7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堅志洞) 시천교당(侍天 敎堂)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

1934: 6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 묘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

1935: 69일 아내 조분려 사망

1958: 925일 망우리 공동 묘지로 이장(이장준비위원회 예총회장 이산 김광섭)

1966: 1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년 기념회 개최. 박웅 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배우 김기욱이 혈흔낭독.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의 생 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

1974년 박태순 작가지망(문학사상, 1974. 10월호)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2003년 곽근 교수 묘지 재발견하여 공론화.

2004년 우리문학기림회(회장 이명재 교수)에서 문학비 세움.

2010년 정종배 시인 묘지 관리인으로 등재.

2012년 최학송기념사업회 결성(회장 곽근 교수)

20177월 서해최학송 85주기 추모식 거행.

 

 

 

 

 

 

 

 

 

서해 관련 시

 

 

 

追憶

 

李秉岐

 

한손에 광이잡고 또한손에 붓을들어

선흔 두해를 살어예는 그동안을

오로지 괴로움만으로 싸워올뿐이드냐

 

외로운 옴이되어 남달리 믿업더니

내뒤는 오든그대 그를앞서 가는고야

다시는 뉘를 다리고 이내스름말하리

 

머리 희젓한데 석양은 빛여든다

하얀 모래서리 솔닢은 파라코나

고곧에 그대는 홀로 깊이 잠을드느냐

 

안애와 아들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또한 이세상에 못다푸든 슳음을

黃泉에 누운 몸이라도 어이하여잊으리

 

冊床 한머리에 다만홀로 비겨앉어

血痕紅焰을 뒤적어려 불때마다

새로이 그리운 마음에 내모견대하옵네

(삼천리, 1932. 8)

 

 

哭 崔曙海(추도시)

 

박종화

 

 

曙海 l 가다 하니 참말로 꿈이로다.

三月 술잔 들어 세상일 웃고웃고

아허허 生前永訣 가슴 무여지옵네.

 

앞에 울고 부는 偏母 孤子 弱妻

버리고 도스실 제 눈이나 감았으리.

목메어 哭之慟하되 영영 대답 없구나.

 

남달리 겪은 고초 이로써 궂기셨다.

칼 짚고 仗義隨陳 이것도 해보았네.

平生에 품은 큰 뜻을 누굴 주고 가는고.

 

北邙山 十里길에 붉은 기 번득일 제

큰길이 無色코야 뉘 있어 또 이으리.

바람도 설운 양하여 빗발 모라 뿌리에.

(7.10 ), (동아일보, 1932. 7.12일 발표)

 

 

 

曙海

 

조운

 

무릎 위에 너를 눕히고

피 식은 걸 굽어볼 때

그때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원했던고.

 

부디나

누이와 바꾸어 죽어다오.

가다오.

 

누이가 죽어지고

曙海 네가 살았으면

죽음은 설어워도

삶은 섧지 안하려든

이 설움 또 저 설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

 

늙으신 어버이와

젊은 아내

어린 아이

 

이를 두고 가는 죽음이야

너뿐이랴.

 

네 살도 나도 아도 아빠를 잃었다.

큰 설움은 아니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보지 못한 설움

 

千古에 남은 말을

뼈 맺히는 일지니

 

한 마디

더 했더라면

어떤 애기였을꼬.

(曺雲時調集, 朝鮮社, 1947. 5)

 

 

 

서해여, 핀을 읊엇노라

 

金岸曙

 

1

이핀이 어인핀고, 알길이 없네.

실비도 사운사운 쓸슬한이날

외로히 굴러도네, 病室구석을.

人生도 이같으리, 모다모를길

 

2

구석구석 病室을 헤매도는양,

主人이 누구든가, 넓은이세상.

바람대로 이몸은 南北도노라.

손에 드니 님생각 다시 살틀타.

 

3

그지아비 들어 에 울을제

그지어미 깜한밤 아늘 웨첫네.

이핀이 어인핀고, 그지어미의

설은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

 

4

검은머리 긴털에 느러진 사랑,

보람없는 사랑에 들어 누니

無心, 아가씨의 때늦은 心情,

잠든이야 알것가, 핀만 남았네.

 

5

아츰저녁 새단장 검은머리핀.

흰손끝에 감들든 검은머리핀.

主人은 어데가고 핀만 남엇노.

생각은 百千이라, 검은머리핀.

 

6

曙海, 瞑目하라, 平安이 가라.

핀을 두고 後日을 약속한 우리,

이날에 그대가니 핀도 잃노라.

내노래뿐 외로이 그대를 우네.

(1932. 7.10)

(동광36, 1932. 8)

 

 

 

哭 曙海

 

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

 

 

 

 

 

 

 

 

 

 

 

 

 

 

 

 


금요_182_최서해-OK.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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