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이야기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정종배 2022. 3. 1. 06:49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3.1혁명 103주기를 맞이하여 2월 27일 고향 함평 출신 독립운동가 김철 생가 및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일강 김철은 1886년 10월 15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1934년 6월 29일 중국 항저우에서 순국했다.

일강 김철의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 1919년 3월 하순 대한독립임시사무소 설치에 참여, 1919년 5월 3일 재무부위원, 1919년 7월 대한적십자회 상의원, 1919년 8월 5일 임정 교통차장, 1920년 1월 의용단 조직에 참여, 1920년 3월 10일 임정 지방선전부 부총판, 1920년 5월 28일 육군무관학교 교관, 1922년 3월 상해 대한교민단장, 1924년 5월 31일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 12월 16일 임정 법무장, 1927년 8월 19일 임정 군무장,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1931년 11월 중한항일대동맹 한국측 상무위원, 1932년 7월 임정 자격심사위원, 1933년 10월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했다.

일강 김철은 1886년 10월 15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에서 아버지 김동진(金東鎭)과 어머니 전주 이씨의 4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영산永山이며 자는 성필成弼, 호는 일강一江, 어릴 때 이름은 영탁永鐸, 이명은 김중청金重淸이다.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1908년 9월부터 1909년 2월까지 영광의 사립 광흥학교光興學校에서 공부하였다. 이어 1909년 5월부터 1912년 3월까지 법관양성소에서 공부하였으며,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였다. 1915년에 귀국하였다.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눠주며 노비를 풀어 주었다. 일제가 식민통치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자 국내에서의 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7년 11월 4일 상하이에 도착하였고, 이때 영탁에서 철澈로 이름을 바꾼 것 같다. 상하이 도착 후 주소를 상하이 해송양행海松洋行에 두었다. 해송양행은 1901년 평남 중화군에서 상하이로 건너간 한진교가 운영하던 약제상으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연락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각지로 대표를 보내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파리대표의 활동자금을 모으고 또 이를 후원하고자 국내외에 걸친 독립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우선 자금모집을 위해 전남 영광으로 돌아와 동창 조병모의 집에 머무르며 지방유지들의 협력을 얻고 또 자기 몫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다.

당시 자신의 소유로 전남 함평에 논 1정 5반 값 3천엔, 화전 5반보 값 2백엔, 초가집 1동 12평 값 2백엔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천도교측에서도 3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송금받기로 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런데 일제는 1920년 7월 17일자 궐석 재판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며 그에게 5년형을 선고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대한독립임시사무소’ 설치에 참여하였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로 329호 건물에 마련된 대한독립임시사무소는 각국을 향해 독립을 선언하면서 임시정부 조직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선우혁과 함께 재무를 담당하였다. 그해 4월 10일 개최된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장병준張柄俊 이명 張炳俊, 한남수와 함께 전라도의원으로 당선되어 약 4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1년 3월 18일 김인전, 나용균, 정광호와 함께 전라도의원으로 출석하였다.

1919년 5월 3일 구영필, 김응선, 김홍권, 서성권, 송세호, 최완, 한남수와 함께 임정 재무부위원으로 선임되어 그해 7월 6일까지 두 달여 동안 활동하였다. 그해 8월 5일 교통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 3월 3일까지 1년 7개월 동안 재임하였다. 그중 1919년 11월 26일부터 12월 3일까지 총장 문창범이 취임하지 않아 교통총장대리로 활동하였다.

1920년 3월 10일 임정 지방선전부 부총판으로 임명되었다. 국내통치를 위한 관공리의 행정 연결선이었던 연통제가 무력화되면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지방선전부였다. 1920년 5월 28일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11월 18일에는 육군무관학교 학도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 임정 군무부 직할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는 육군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임정의 사관학교로 2회 졸업생을 낸 이후 폐교되었다. 따라서 그가 육군무관학교 교관 및 중대장으로 활동한 기간은 약 7개월이었다.

한편 1919년 7월에는 대한적십자회의 21명 상常의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 1월 김구, 김순애, 손정도, 윤현진 등과 같이 의용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의용단은 1920년 8월 12일 일제에 검거되어 일제와의 전쟁이 시작되면 군사로서 조국에 봉사한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0년 2월, 여러 번 기고하였던 『독립신문』의 재정난 타개를 위해 주식모집발기위원회의 찬성원이 되었다.

1921년 8월 한중호조총사의 평의원으로 선정되었다. 광동정부(廣東政府, 국민당)의 공식 협력을 얻기 위해 먼저 민간 차원의 협력 관계를 창출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1921년 9월 19일 여운형, 한진교 등 14명과 함께 상하이 교민단 본구 임원이 되었다.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는 교민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월 13일 교민단 학무위원 8명 중 1명으로 당선되었고, 1931년 10월 31일 김사집, 안창호와 함께 교민단 심판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11월부터 대한교민단은 교민단장제를 폐지하고 합의제인 정무위원제로 변경하였는데 김와 함께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즉 1921년 9월 상하이 교민단 본구 임원이 된 이후 1932년 윤봉길의거로 인하여 항주로 피신하기까지 계속하여 교민단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다.

1922년 7월 시사책진회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22년 8월 11일 해체되었다.

1921넌 5월 29일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 발기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가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중 회계를 담당하였다.

1923년 1월 3일 교회당인 삼일당에서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5월 15일까지 4개월여 동안 63회가 열렸다. 국민대표회의에 전남대표로 참석했고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던 바, 그동안의 독립운동 과정을 반성하고 임정을 운동의 실천에 맞도록 개조하여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1924년 5월 31일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는데, 1924년 12월 17일 사임을 요청하여 해임되었다. 1925년 2월 25일 신한청년당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즈음 첫 번째 아내 김정자金貞子가 사망하였다.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구성된 임정 내각에서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 12월 14일 김구 국무령 체제가 수립되었고, 12월 16일 법무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23일 헌법개정기안위원에 임명되었다. 1927년 8월 19일에는 군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임정은 상하이 백래니몽 마랑로 보경리 4호(현 상하이 노만구 마당로 306농 4호)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건물은 본인의 명의로 1926년 3월 임대한 것으로 이후 1932년 5월 임정이 항저우로 이전할 때까지 6년 동안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990년 2월 상하이시 노만구 문물보호단위 제174호로 지정되었고, 1993년 4월 13일 현지에 원형대로 복원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전람관’이라 명명되었다. 그리고 2001년 12월 주변을 매입하여 전시관을 확장, 재개관하였다.

1927년 3월 21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후 광주도립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던 수성최씨 혜순惠淳과 재혼하였다. 그녀는 마랑로의 임정 청사 부근에 혜생의원을 개원하고 의원 2층에 살림집을 마련하였다. 1928년 첫째 딸 미경이 태어났다.

1929년 11월 ‘김영탁金永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귀화 당시 만 43세였는데 귀화증에는 39세, 주소는 백래니몽 마랑로, 직업은 상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사촌형 김영복金永福의 첫째 아들 김석金晳이 첫째 아들로, 김석의 동생 김덕근金德根이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1월 8일 군무장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4월 김구, 이동녕, 조소앙, 조완구와 함께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 및 동삼성 한교韓僑 문제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박창세, 이웅李雄=李俊織, 왕웅王雄=金弘壽 등과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군인회간장』을 발표하는 등 무장항일투쟁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 듯하다.

10월 31일에는 상하이 대한교민단 부속 의경대의 심판으로 임명되었다. 11월에는 중국인과의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중국항일대동맹을 조직하고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 서천방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가 일어난 후 일제는 현상금을 걸고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김구와 함께 신한청년당 당원이었으며 중국국적을 가진 상해교통대학 체육교사인 신국권의 주선으로 미국인 피치S. A. Fitch, 중국명 費吾生와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김구를 포함해 4명이 피치의 집으로 이주하여 20여 일을 은신하였다. 일제의 추적이 심해지자 임정은 항저우로 이전하였다.

항저우에서 처음 사용한 임정 청사는 청태 제2여사, 현 인화로 22호였는데 이곳 32호실에 머물렀다. 현재 청태 제2여사 자리에는 군영반점이 있는데 항저우시 인민정부상업국 소속 음식복무공사에 속한 국영여관 겸 음식점이다. 5월 15~16일 개최된 제1회 국무위원회의에서 군무부장에서 재무부장으로 직무가 바뀌었다.

항저우로 청사를 이전한 임시정부는 일명 ‘항주사건’에 휘말렸다. 임시정부로 유입된 독립자금의 문제와 조카지만 아들로 입양된 김석이 『시사신보)』 1932년 5월 21일자에 ‘안창호가 진정한 혁명자가 아니라’라는 내용의 기사를 투고한 데 따른 구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송병조, 이유계, 김철, 조소앙계, 김구계로 분리되었다. 1932년 11월 28일 아내 최혜순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장 앞으로 사직원서를 제출하였는데 당일 반환되었다.

1932년 11월 30일 오후 8시 반경 상하이 프랑스조계 감유애로 여의리 2호 중국인 황전영의 집에서 일제경찰들에게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감금당하였다. 변호사 채효백이, 김석과 함께 1929년 10월 중국에 귀화하여 받은 연자 67호 국적증명서를 상하이의 프랑스영사관에 가져다주었다.

프랑스영사관은 프랑스조계에 들어와 이들을 체포한 것은 불법이라며 일본영사관에 강경 항의하였고, 곧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동신교 대호반점 666호에 잠시 거처하면서 료廖씨로 성을 고쳐 불렀다.

1933년 3월 6일 제2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사면청원이 가결되고, 신임 전라도의원으로 결정되었다. 7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의원자격심사위원으로 신도의원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10월에는 2년 임기의 제12기 국무위원제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1월 2일 제2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문일민, 윤기섭과 함께 전형위원(신도의원 심사)에 당선되었다. 또한 윤기섭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월에는 송병조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대표로 난징에서 개최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회의 및 한국혁명 각 단체 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4월 2일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선임되었다.

1934년 4월 하순 급성폐렴에 걸려 5월 4일 항저우 신민로 광자병원 동루하두등 1호실에 입원하였다. 6월 20일 갑자기 병이 악화하여 6월 29일 오후 6시 48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7월 2일 오전 5시 병원에서 출관하여 서호가 악비묘 뒤 묘지에서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토장하고 9시에 마무리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묘소는 위치조차도 찾을 수 없다. 사망한 후 최혜순은 상하이에서 3년을 더 머무르다 여덟 살, 여섯 살이던 두 딸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숭모비·생가복원·독립운동 기념관·독립운동 역사관 등은 함평 출신으로 호남을 대표하는 김철 선생의 애국정신을 재조명하고 일강의 업적을 기리고 나라사랑 얼을 이어받아 함평의 문화와 역사적 자부심을 북돋우는 교육과 문화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975년 8월 영산 김씨 문중과 함평 유림들과 동지들이 구재로서 ‘일강김철선생숭모비’를 건립하였다. 1999년부터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김철기념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 준공하였다. 2002년 8월 15일에는 ‘일강 김철선생 상’이 건립되었다. 1985년 김철수가 집필하고 함평문화원에서 발간한 『함평의 얼』 3권으로, 김철의 일생을 이야기 형태로 기록한 전기가 『독립투사 김철』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2006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일강 김철 초혼장인 묘지 오른쪽에 단심송이 서 있다. 단심송은 일강 김철의 첫째 부인인 김해 김씨가 목을 메 순절한 소나무이다.

김철 기념관 안에 안중근 의사 동상도 세웠다.

이외에 함평의 나라사랑 얼이 숨쉬는 곳은

계유정란 고명대신 우의정 또랑시인 진주정가 충장공파 파시조 충장공 정분과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마지막 전투대장 선무일등공신 15대조 성재 정감 장군을 기리는 학교면 마산리 표산사 충신각,

정유왜란 때 왜적을 맞아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과 이덕일 의병장의 충의의 얼을 제향하기 위해 1731년(영조 7년)에 창건한 대동면 향교리의 월산사,

석천 김중수 선생의 한문서당으로 문하생 김기택 등 16명 4.8만세운동 거사를 모의하였던 월야면 월계리 낙영제,

문장3.1만세운동을 기리는 해보면 금덕리 문장3.1운동만세기념공원,

월야면 예동마을 출신으로 휘문중학교 수학 중 일강 김철 선생을 만나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내고 백범 김구 선생 애국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하기 위해 일시 귀국 전 재산을 저당하고 일금 45,000원을 임시정부 운영자금으로 헌납하며(21세), 중국본부 한인 청년동맹에 가입, 상해총회에서 상해지부위원장 선출, 항일격문 상해 시내에 살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중 다시 독립자금으로 모금하기 위해 귀국 중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복역 출옥 후 42세 순국한 얼을 기리는 월야면 예덕리 독립운동가 석정 안후덕安厚德 생가,

항일 의병장으로서 왜군과 격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국민들의 울분을 달래주는 등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은 남일 심수택 장군의 얼을 기리는 월야면 계림리 남일 심수택 의병장 기념관,

1898년 경 백범 김구 선생이 은거한 함평읍 이재혁 가옥,

기산영수 함평공원 척화비와 김태원죽봉의사충혼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