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미서훈 독립운동가 변성옥 목사
한국교회 토착화를 주장한 감리교 목사로 만주에서 조선기독교회 새 교단을 창립한 독립운동가
변성옥(邊成玉, 1892~1950.3.5.) 72주기
감리교회 목사․신학교 교수․정치가․YMCA 총무이던 변성옥 박사는 1892년 평양 태생, 1913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나왔으며, 도미하여 1926년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변성옥 목사는 1892년 평양 수옥리 303번지에서 태어났다. 광성학교를 거쳐 1909년 숭실학교 6회로 졸업하고 1913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양 남산현 일요학교와 경성 배당학당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그는 1916년에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그 해 12월에 친구의 담보 상륙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한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퍼시픽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일리노이스 주 에반스톤의 노스 웨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20년 7월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21년 8월 11일에 귀국했다. 게재한 사진은 동아일보에 게재된 귀국한 때의 신장 5척 3부의 긴 얼굴에 검은 피부색을 띈 변성옥이다.
1923년 목사 안수를 받은 변성옥은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케이블 선교사가 교장인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사와 교감, 함경북도 길주 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기독교 교육에 투신했다.
이어 미감리회 조선연회의 종교교육부 간사로 시무했다. 1930년 12월에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감리교회를 창립할 때 총회의 통역위원으로 유형기·김성실 등과 간부로 활약했다. 그 뒤 조선감리회 선교연회의 감리교 선교사로 만주 하얼빈으로 파송되었다. 그가 하얼빈 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던 1935년까지 5년이 그의 1차 선교 사역이다.
변성옥의 2차 선교 사역은 1935년 이후 1945년까지 10년간이다. 1935년 1월 조선감리회 북만지방회장 현성원·한동규·우인철·박세평·김병택 등과 함께 조선 감리교 총리원을 탈퇴하여, 그해 12월 장로교회의 몇몇 동지들과 함께 ‘조선기독교회’라는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 효과적인 만주 선교를 목적할 때 교파주의 극복, 외국 선교사로부터의 재정적 자립, 부패한 기성교회로부터 격리, 그리고 장로교, 감리교, 동아기독교, 성결교회, 심지어는 국내의 이용도와 김장호 등 혁신세력을 총망라한 초교파적 연합이 선결 과제로 그가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신경, 길림, 하얼빈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기독교회는 1년 만에 1,500여명의 신도와 10개 지방 교회 설립을 달성했다.
변성옥은 1936년 3월 18일 길림성에 한동규와 현성원 등과 함께 3년제 길림학원을 개교하고 교역자 양성을 꾀하던 중 1937년 2월에 길림성 경도선 강밀봉에다 ‘길림신학교’를 창설하고 그 교장이 되었다. 특히 그는 교역자들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1년 학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그 여름에는 농사를 시키고 겨울에는 집중적인 공부를 시켰으며, 이를 위하여 집단농장을 경영했다. 그 이유는 효과적인 만주지방의 선교를 위해서는 교파주의를 극복하여야 하고 외국선교사들의 선교비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행정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 제1회 한국 기독교 선교대상을 수상한 경북 청도가 고향인 박용묵 목사가 그 신학교 1회 졸업생이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변성옥은 외국선교비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선교정신은 민족독립운동에 연결되어,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1943년 길림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해방될 때까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아야 마땅하다. 보훈처나 중랑구청 기독교 관련 단체에서 발 벗고 나서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헌신한 변성옥 목사를 합당한 예우를 하여야 한다.
시사구락부가 1925년 2월에 조직되었을 때 변성옥이 이창제·이갑성·현신덕·조철호·배 집 등과 함께 전 민중의 도덕적 자각 촉구 및 반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듦으로써 그의 사회 변혁에도 뜻을 두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사회 운동은 8.15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다. 월남한 변성옥은 정계에 투신하여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청년부장과 조선 적십자사 비서장으로 피선되었고, 1946년 미국 군정하에서 민선 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에는 법제사법위원과 민주 의원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5월에 YMCA 무보수 총무로 피선되어 이호빈 목사와 김우현 목사 등과 함께 Y 재건 사업에 착수하던 변성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계에서 떠난 후 YMCA에 온전히 헌신했다. 그는 Y의 협동 총무였던 죠지 A. 피취 선교사와 함께 전국을 순방하면서 지방 Y 재건과 간사양성을 통한 지도력 개발에 주력하였다.
변성옥은 이호빈 목사가 1946년에 세운 초교파적인 중앙신학교(현 강남대)에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는데 만주 길림 신학교의 초교파 교역자 양성의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재건파와 부흥파로 분열되었던 감리교회의 합동운동에 주력하여, 1949년 4월 기독교대한감리회로 통합하는데 기여하였다.
중앙신학교를 거쳐 간 목사 이호빈·변성옥·이호운·이환신·김우현, 함석헌·정일형·안병무·박재훈· 시인 황금찬 등이 이 대학 신학교육을 이끈 교계 지도자들이었다.
청주 YMCA 창립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자 출장을 떠난 변성옥은 1950년 3월 5일에 59세를 일기로 급성췌장염으로 선종하였다. 장례식은 9일 오전 11시에 종로 YMCA 강당에서 양주삼과 정일형 등 사회 유지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치렀다. 장지는 망우리였다. 묘지번호 205301이었다.
이에 핏취 박사는 다음과 같은 애도의 말을 했다. 즉
「나는 이 친구의 죽음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더 가까이 내 곁에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의 정신적인 공적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동지애, 평화 일정하의 2년 간의 옥고생활, 그의 선비다운 고상한 인품, 그의 신앙, 겸손과 온유의 정신은 YMCA 동료들과 전 국민에게 오래오래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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