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도산 안창호 84주기
독립지사 흥사단 결성 대한민국장 수여한 민족의 지도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1.9.~1938.3.10.)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은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로 결정되었다. 2022년 3월 10일 84주기인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야겠다.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에 태어나 1938년 3월 10일 서울에서 서거했다.
일제강점기 애국계몽 활동을 전개하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이다. 이명으로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안광택安廣宅, 치삼 등이 있다. 아버지는 흥국興國이다.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공부를 마친 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7년 신민회를 조직,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했다. 1926년 2월 상하이로 돌아와서 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따라 일경은 프랑스조계 경찰의 협조로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를 실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고서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해 하비로에 있는 이유필(흥사단 단우 번호 176)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동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 하는 일본 검사의 물음에 그는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고 기개가 꺾이지 않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였다. 평남 대보산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관계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중병이 들어 동년 12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3월 10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005년 08월, 2019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도산을 임종한 흥사단 단우는 오기영·이선행·백관수 등이었으며 장례식에 참석한 단우는 오윤선이었다. 조카사위인 김봉성이 아버지를 모시려던 망우리의 묫자리에 도산을 모셨다(오기영의 증언). 도산이 고향 평양 선산에 가지 않고 망우리에 묻힌 이유가 있었다.
임시정부 도산의 수행비서와 같은 독립지사 태허 유상규 경성의전 강사가 1936년 환자를 치료하다 단독에 감염돼 운명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은 마침 대전에서 출옥하여 국내에 머물던 도산이 주관했다. 태허의 장례식에 불법집회로 의심할 만큼 많은 친지와 동지들이 모였다. 그의 은사 오사와 마사루 교수도 ‘슬픔에 떨리는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했다.
도산이 병원에서, 죽으면 고향 평양 선산에 가기보다는 “망우리에 상규군 옆에 묻히겠다”고 하였다. 60세를 일기로 봄바람이 아직도 찬 3월 10일에 경성제대병원 병실에서 도산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도산은 운명하기 며칠 전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그러면 엇더케 할래요.” “달리 선산 가튼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무더 주오.” “ … ” “공동묘지에다가…” “유상규군이 눕어잇는 그겻 공동묘지에다가 무더주오.” 백씨와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유상규란 경성의전 청년 교수로 상해 당시부터 도산의 가장 사랑하든 애제자인데, 그만 연전에 서울서 작고하였다. 그날 장례식은 춘원이 주재하였다.’(1938. 5.1. ‘삼천리’ 제10권 제5호. ‘도산의 임종, 서울 공동묘지에 묻어달라는 일언(一言)이 세상에 끼친 유언’ 중에서)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보내, 만일의 소요사태를 막는다는 이유로 망우리 묘소 장지의 출입을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동전 오기영(흥사단 단우번호 574)의 도산 선생의 최후 –1947년 5월 15일, 《동광(東光)》, 41호(속간 본)를 소개한다.
“사흘째 되는 날, 전후에 경찰 자동차 경계 속에 모자 끈을 턱에 내린 경관들이 가로수 수효만큼 나열된 중에서 대학병원을 떠나서 망우리로 향하였다. 연도에는 역시 가로수처럼 경관이 늘어서고 망우리 쪽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사람은 허락되었으나 시내에서 이 방향으로 나가는 통행을 금지했다. 망우리 묘지에는 옆구리에 권총을 찬 경관과 헌병 30여 명의 경계 속에서 오후 3시 선생은 지하에 들었다. 비석을 세우지 못한다는 명령과 함께 묘지에 심으려던 무궁화는 압수되고 그 대신 사쿠라를 가져왔기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1973년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그의 구 묘소가 있던 묘지 터는 아들처럼 여긴 비서 유상규 묘소 북동쪽에 원형 보존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별세한 아내 이혜련(흥사단 단우번호 317)의 유골과 함께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인터체인지(2002년)와 우체국(2004년)이 세워졌다. 2012년 1월에는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센터 내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이 이루어진 선각자이다.
도산 안창호 묘지 터는 이인성 화백의 유택을 참배하고 망우산 제3보루 쪽으로 걷다 오른쪽 10미터 이영학 독립지사 묘역을 지나 10여 미터 지나 소나무 그늘이 좋은 왼쪽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묘비가 서 있다. 묘비는 둘이다. 하나는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하며 묘지 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島山安昌浩先生墓趾(도산 안창호선생 묘지)’라는 작은 비석이다.
또 하나는 ‘島山安昌浩先生之墓(도산 안창호선생지묘)’ 의 큰 비석이다. 큰 비석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으로 1973년 이장하며 옮겨져, 2005년 새 묘비가 설치되면서 도산기념관 지하에 보관되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옛 묘비가 43년 만에 원래 자리인 망우리공원으로 재이전하여 2016년 3월 1일 제막식을 거행했다. 춘원 이광수(흥사단 단우번호 161)가 비문을 짓고 비석의 앞면은 소전 손재형이 쓰고 뒷면과 옆면은 원곡 김기승(흥사단 단우번호 1026)이 썼다.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작가의 발품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도산공원 안에 보관돼 있던 옛 묘비를 망우리공원 도산 안창호 선생 묘지 터로 옮겼다.
망우리공원 묘역에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이 많다. 특히 북쪽에 고향을 둔 인물들의 묘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한반도 기독교 유입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읽을 수 있다. 평양이 한국 기독교의 못자리였다. 3.1혁명에 참가한 독립지사나 유명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기독교인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동문학가 동요 작사가 소천 강용율, 가수 강수지의 증조부인 독립지사 목사 강학린, 흥사단 단우 독립지사 김기만, 3.1운동 전날 유관순과 이화여고 6인 결사대 김분옥 그의 어머니 박남신 권사, 도산 안창호와 조카사위 독립운동가 김봉성, 제7안식일 교인 독립지사 허연과 김정규, 신출귀몰 김일성 보천보 전투 모델 완주 독립 명가 독립지사 김춘배, 한국인 최초 모르몬교인 콩박사 김호직, 이화여대 초석 우월 김활란, 임정요인 독립지사 문명훤, 4.19혁명 불을 지른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변절한 목사 박희도, 조선국민회 결성의 주역 독립지사 경아 서광조, 최초 유아세례 독립지사 송암 서병호, 일본인 사이토 오토사쿠와 아사카와 다쿠미, 관동대지진 후원과 구원한 목사 오기만, 성천 유달영의 제자 이경숙, 선천의 2대 기업가 이영찬 그의 동생 독립운동가 이영학, 장준하 아버지 목사 장석인, 교회에 신자로 사회의 눈을 뜨게 한 독립지사 죽산 조봉암, 3대 의사 집안 세브란스 의전 제2대 교장 해관 오긍선과 그 아들 오한영, 동아일보 초대 주필 설산 장덕수와 그 부인 교육자 난석 박은혜, 대중소설 「찔레꽃」 소설가 김말봉, 조선기독교회 교단 설립 목사 독립운가 변성옥, 영신학교 교목 함흥 장날 3월 3일 만세운동 주도 목사 김중석, 초기 교회 전도사 주룰루와 독립운동가 김명신 모자 등이다.
도산 안창호 묘지를 중심으로 흥사단 단우들과 탄포리교회 신자들의 묘지가 자리 잡았다.
도산 안창호(흥사단 단우번호 4) 선생 묘지를 중심으로 뒤에는 이영학(흥사단 단우번호 1095) 그리고 도산이 세운 평남 강서군 최초의 교회인 탄포리교회 초창기 신도인 박남신 여사와 그 둘째 딸인 3.1운동 전날 밤 유관순 열사 등과 결의한 6인 결사대 일원인 김분옥 여사, 왼쪽에는 형님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흥사단 단우번호 207)과 결혼한 김봉성(흥사단 예비단우) 독립운동가, 오른쪽에는 상해임시정부 비서였던 유상규(흥사단 단우번호 116) 흥사단 단우 및 독립지사 묘역이 자리 잡았다. 이분들 외 단우인 독립지사 허연(흥사단 단우번호 265) 조종완(흥사단 단우번호 1049) 문명훤(흥사단 단우번호 562) 등이 망우리공원에서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애석하게도 도산과 김봉성 묘지도 이장하고 말았다. 현재는 나우, 허연, 이영학, 김기만, 유상규 단우와 박남신 김분옥 모녀의 묘지만 남았다. 김기만 유택은 평산 신씨 가족묘지에서 사색의 길 오르기 100여미터 전 오솔길 왼쪽 100미터 정도에 자리 잡고 있다. 묘지번호 104327이다. 허연은 “도산의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여 현재 도산의 이장지에서 동남쪽 5백 미터 사색의 길 아래에 묻혀 있다.
흥사단의 교육시스템이 잘 되어 도산 안창호 어록 쓰기 및 스티커 붙이기 등을 실시하고 있다. 필자는 학생들과 동아리 활동하면서 중랑구청 후원을 받아 2018년부터 구청 행사에 참가했다. 2019년 네 번째 구청 주최 행사에 참가한, 11월 9일 중랑교육혁신박람회에 “걱정없는동네상봉중신현고연합동아리”도 망우리공원 인물들의 저서 및 평전 작품집 등을 수집하여 전시 및 학생들의 어록 쓰기를 실시했다. 망우리공원 인물들의 저서·작품집·평전·자료집 등 300여 권을 전시하고 질문지와 주요 어록 문장 등을 찾고, 쓰고, 붙이며 선인들의 정신과 사상을 청소년들에게 심어줬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단연 흥사단의 도산 안창호 선생 어록 쓰기였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학생들에게 폭발적이었다. 흥사단 서울지부에서 보내준 한 박스 스티커가 부족할 정도였다. 중랑갑 서영교 국회의원은 우리 행사장에 들려 도산 선생의 어록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중랑구청 류경기 구청장도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고 나는 믿소!“ 힘을 줘 반듯하게 쓰고 봉사자 단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안창호 선생의 명언
1. 힘
여러분은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그러므로 인격 훈련과 단결 훈련 이 두 가지를 청년 제군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바이다.
2. 독립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3. 정의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4. 유언
“목인(일본 천황)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5. 기타
애기애타(나를 사랑하듯이 타인을 사랑하라), 무실 역행 충의 용감
기러기 리더(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주인의식
약욕개조사회 선자개조아궁(사회를 바꾸려면 나부터 개조하라)
인재가 없다고 탓하지 말고 내가 인재가 되려고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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