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시인 박인환

정종배 2022. 3. 19. 21:43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시인 박인환 66주기

 

1950년대 전후 모더니즘 시인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댄디보이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정종배(시인)

 

3월 둘째 주 중에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박인환 유택 앞 나무데크 작업을 마쳤다. 유택이 좁아 많은 인원이 답사하며 행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인원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박인환 묘지를 답사할 수 있다. 어제 19일 토요일 오후 국학진흥원 근대기록문화조사원 3반원들의 답사는 꽃샘추위로 봄비와 봄눈이 내려 아쉽게도 취소하였다.

오늘이 시인 박인환의 66주이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걸으시면 삼거리에서 멀지 않은 박인환 시인의 유택을 찾아가 시인의 작품과 삶을 되새겨 보시길 권합니다.

 

“내 사랑아 / 너는 찬 기후에서 / 긴 행로를 시작했다 // 그러므로 폭풍우가 서슴지 않고 / 참혹마저 무섭지 않다 // 2020年 03月 20日 / 64년 전으로 / 보내는 동경과 애정 / 차마 말로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동봉합니다.(속) 박인환 선생님. 박 형. 당신의 시는 여전히 저를 위로하고 살게 합니다.“(겉)
어느 분이 망우리공원 시인 박인환 묘역 앞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이 꽂은 조화 속에 놓고 간 우편엽서 속과 겉에 쓴 글이다.

 

망우리공원을 답사할 때 남녀노소 계절과 시간에 구분 없이 가슴이 설레는 시인이 있다. 시인의 시도 시이지만 시인과 관련된 후일담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답사 중 빠짐없이 참배하는 묘역이다. 망우리공원 사무실에서 삼거리를 통과하여 일방통행 길 100여 미터 지점 좌측에 잘생긴 시인의 얼굴 닮은 미끈한 연보비가 서 있다. 1992년 2월에는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지석영, 문명훤, 장덕수 등 7명의 연보비를 중랑구에서 산책로를 중심으로 조성했으며, 1998년 2월에는 추가로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오긍선 등 8명에 대한 연보비를 추가로 5.2km의 ‘사색의 길’에 세웠다. 중랑구청에서 연보비를 세운 15분 중 14분은 독립지사 및 사회사업가인데, 오로지 문화예술인은 박인환 시인 한 분이다. 연보비 맞은편에 경사가 심한 나무데크를 내려서면 화살나무에 둘러싸인 시인 박인환의 유택을 찾을 수 있다. 20여 년 전부터 옹기종기 비좁았던 주변 묘가 이장하여 지금의 묘역이 되었다.

 

시인 박인환은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자신만의 도시적인 비애와 인생파적인 고뇌를 그려내고 있다. 박인환은 한국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6·25 한국전쟁 이후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박인환 시인을 몇몇 낭만적인 시편을 쓰다 요절한 시인이고, 통속시인 정도로 저평가되고 잘못 알려진 시인이라는 평이 있다.

 

해방 직후 인천항의 비극을 담은 박인환의 시 「인천항」은 1947년 4월 월간지 《신조선》을 통해 발표한 이 작품엔 미군정 깃발 아래 자행된 미군의 횡포와 모리배가 판쳤던 인천항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인환은 힘없는 민족의 아픔이 서린 장소가 인천항이었음을 기억했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세월이 가면」 등 서정적인 시로 유명하지만, 사실 현실 인식이 아주 강했던 시인이다.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대부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고통받고 있는 사실을 분개하는 내용이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박인환은 도시적 서정주의 특색이 드러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영화 평론가로 활동했다.

 

『박인환 평전』을 쓴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사)중랑문화연구소 초청으로 강의하며 "문학이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던 1960~70년대 '참여문학'을 박인환은 1940년대부터 앞장섰다고 보면 된다."며 “「인천항」은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문명과 미개' 등으로 이분화된 서양 중심의 근대성을 타파하려는 그의 현실 인식이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 투쟁하는 인도네시아를 향한 강한 동질감을 노래하며 1948년에 발표한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박인환의 대표작이라고 주장을 펴는 문학평론가도 많아지고 있다.

 

해방 전과 후 이념대립과 남북분단의 혼란한 정국과 6·25 한국전쟁 등의 당대 상황에서 적지 않은 173편의 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 박인환 시인은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노래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댄디보이였다. 6·25 한국전쟁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다운 세계 인식을 가지려 노력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황폐한 시대를 새로운 시 형식으로 반영한 그의 시들은 우리에게 미학과 역사성이 결합하는 접점을 확인시켜 준다.

 

1937년 4월 17일 27세로 운명한 시인 이상 본명 김해경을 흠모하여
기일을 착각하고 3월 17일 한국일보에 '죽은 아폴론 ㅡ 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 발표하고
연일 술을 마시고
1956년 3월 20일 저녁 9시 생명수를 달라고 외치고 30세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 박인환

 

시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두 편이 독자들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받아서인지
박인환의 시 세계의 폭과 깊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잊혀져 가고 있다.
시인 김수영의 애정어린 언어는 박인환 시의 향기를 조금도 가볍게 하지 않는다.

 

러시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기 위하여 어린이와 민간인을 무차별 탱크로 뭉개고
미얀마 군부가 민주화를 부르짖는 민중을 총칼로 1년 넘게 짓밟은 처참한 현실이 전개되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과 오버랩되는 봄눈과 봄비와 진눈깨비 내리는 토요일
박인환의 시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소개한다.

 

동양의 오케스트라
가메란의 반주악이 들려온다
오 약소민족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삼백년 동안 너의 자원은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빼앗기고
반면 비참한 희생을 받지 않으면
구라파의 반이나 되는 넓은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메란은 미칠 듯이 울었다

 

오란다의 58배나 되는 면적에
오란다인은 조금도 갖지 않은 슬픔에
밀시(密柹)처럼 지니고
육천칠십삼만인(六千七十三萬人) 중 한 사람도 빛나는 남십자성은
쳐다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수도 바다비아 상업항 스라바야 고원분지의 중심지
반돈의 시민이여
너희들의 습성이 용서하지 않는

 

남을 때리지 못하는 것은 회교서 온 것만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붕괴한 다음
오란다의 식민정책 밑에 모든 힘까지도 빼앗긴 것이다

 

사나이는 일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약한 여자들은 백인 아래 눈물 흘렸다
수많은 혼혈아는 살길을 잃어 애비를 찾았으나
스라바야를 떠나는 상선은
벌써 기적을 울렸다

 

오란다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사원(寺院)을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인처럼 은행도 세우지 않았다
토인(土人)은 저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축할 여유란 도무지 없었다
오란다인은 옛날처럼 도로를 닦고
아시아의 창고에서 임자 없는 사이
보물을 본국으로 끌고만 갔다

 

주거와 의식은 최저도(最抵度)
노예적 지위는 더욱 심하고
옛과 같은 창조적 혈액은 완전히 부패하였으나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생의 광영은 그놈들의 소유만이 아니다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
세워야 할 너희들의 나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성립하였다 그런데
연립 임시 정부란 또 다시 박해다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모략을 부숴라
이제는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쓴다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삼백 년 동안 받아온 눈물겨운 박해의 반응으로
너의 조상이 남겨놓은 저 야자나무의 노래를 부르며
오란다군의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라

 

제국주의의 야만적 체제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
힘 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
자유와 자기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참혹한 옛날이 지나면
피 흘린 자바섬에는
붉은 칸나 꽃이 피리니
죽음의 보람은 남해의 태양처럼
조선에 사는 우리에게도 빛이려니
해류가 부딪치는 모든 육지에선
거룩한 인도네시아 인민의 내일을 축복하리라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고대 문화의 대유적 보로 로도울의 밤
평화를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메란에 맞추어 스림피로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여라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 박인환(1948년)

 

시인 박인환은 일제 치하를 거친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인도네시아를 향한 강한 동질감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한 시로 박인환의 시적 대상이 폭넓었다는 것을 드러내 그의 대표시로 평론가들은 말한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분들은 서로들 소통하여 연관되어 있다. 박인환 시인과 ‘후반기’ 동인이며 조봉암의 사위인 영화인 이봉래가 부산 피난시절 김말봉을 추억하며 박인환과의 일화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나는 박인환 등과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다방에 들어가 김말봉 앞에 앉게 되었다. 박인환은 나를 소개한다면서 입을 열었는데,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였지만 ‘말봉씨, 이봉래를 소개하지요’라고 큰 실수를 저질렀다. 김말봉은 ‘인환씨. 말봉씨가 뭡니까…시를 쓴다는 사람이 그게 무슨 말툽니까’ 하고 호통을 쳤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박인환도 추상과 같은 호통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취기는 한꺼번에 가시고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순간 박인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김말봉 선생님,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박인환이가 사과하는 모습, 그것도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사과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박인환은 설령 자기가 실수를 저질러도 절대 사과하는 위인이 아니다. 무슨 궤변을 쓰더라도 자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소피스트였다. 그 궤변가가 그것도 술기가 가득한 상태에서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김말봉의 문학과 사회』(정하은, 종로서적, 1986)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사후 10년 만에 4편의 산문에서 박인환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김수영은 박인환에게 주홍글씨와도 같은 낙인을 찍었다. 이러한 김수영의 기록들은 박인환을 시종 ‘그처럼 재주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유행의 숭배자가 없다’ 등으로 거칠게 표현했다. 1921년생 김수영이 1926년생 박인환에게는 다섯 살 터울의 형뻘이다. 김수영은 박인환보다 결혼은 2년 늦게, 첫 시집 출간은 4년 늦게 하였다. 시인 김수영과 김현경 여사와의 사랑과 결혼생활의 이면에는 박인환 시인의 중간역할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하였다. 두 시인 살아생전 한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박인환은 『朴寅煥選詩集』(산호장, 1955)을 발간했고, 김수영은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1959)을 뒤따라 냈다. 망우리공원 산 능선 너머 유택이 자리한 소설가 김이석(1914~1964)과 김수영의 둘도 없는 관계와는 대조를 이룬다.

 

1953년 화가 이중섭이 가족을 만나려 일본 방문할 때 선원증을 발급받는데 시인 구상의 주선과 시인 박인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시인 박인환의 아내 이정숙의 작은아버지가 전시 내무부와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재직한 이순용(李淳鎔, 1897~1988)이었다.


박인환 시인은 멋진 언어를 사용하는 감각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기개가 높은 의리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6.25 한국전쟁 부산 피난 시절 1952년 김광주가 「나는 너를 싫어한다」라는 단편소설을 써 고관대작 부인의 퇴폐상을 비판했다가 기소당할 처치에 있었을 때 박인환은 연판장을 돌리며 김광주를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나섰다. 그 후 김광주는 ”박인환만큼 패기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은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박인환은 수주 번영로가 환도 후 음주를 삼가고 있을 때 ”술 마시던 사람 술 안마시면 선생일 수가 없으므로 선생 존칭을 빼겠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오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박인환의 본관은 밀양.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 상동리 159번지 출생으로 면직원인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아버지 박광선은 면직원을 그만두고 여러 지방과 도시를 떠돌며 산판사업을 하다 서울에 안주하였다.

 

아버지 뜻에 따라 가족 모두 서울 종로구 원서동 134의 8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박인환은 어머니가 사준 버스표 한 장으로 인제에서 서울의 아버지를 찾아갈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다. 인제초등학교 다니다 성적이 우수하여 1936년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와 1939년 우등상을 받으며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마쳤다.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다가 문학과 그림에 심취하고, 영화관(부민관, 현 서울시의회별관) 출입문제로 1941년 2학년 때 퇴학당했다. 한성중학교 야간부(필자의 모교인 한성고등학교 학적부는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림)를 거쳐 1942년 아버지 친지가 있는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망우리공원 민병덕 설립)로 적을 옮겨 1944년 졸업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권유로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일제 당시 농수산과·이공과·의과 대학생은 징병에서 제외됐다.

 

서울로 와서 시인 오장환의 낙원동(현재 종로3가 2번지 대로변) ‘남만서점’을 아버지(3만원)와 작은이모(2만원)의 도움 받아 5만원에 인수하여, 작은이모의 포목점 바로 옆에 '마리서사(茉莉書舍)' 서점을 초현실주의자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리모델링하여 문을 열었다. 여기서 마리서사라는 이름을 일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말리(軍艦茉莉)』에서 차용했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을 땄다는 설(김수영 시인, 이정숙 여사 증언)도 있다.

이 책방의 쌓여 있던 책들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양병식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마리서사’에는 마치 외국 서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앙드레 브르통의 책, 폴 엘뤼아르의 시집, 마리 로랑생 시집, 콕토 시집, 일본 고오세이가꾸에서 나온 『현대의 예술과 비평』 총서, 하루야마 유키오가 편찬한 『시와 시론』, 가마쿠라 문고에서 나온 『세계 문화』,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어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매일같이 모여드는 예술가들에게는 전문 책방으로 소문이 났다. 이때 정지용·김광주·김광균·이한직·김수영·김경린·오장환·김기림·이봉구·장만영·양병식·김병욱·조향·이봉래·박영준·배인철·설정식·이시우·이흡·조우식 등의 문인과 화가 길영주·박일영·최재덕 등 해방 후 예술의 꽃을 피운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과 사귀었다.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발생지였다. 김수영 시인이 “인환이가 제일 기분을 낸 때가 그때였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동안에도 나는 그 책가게를 빼놓고는 인환이나 인환의 시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한 것을 보면 박인환의 활발함을 알 수 있다.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송지영 추천 시 「거리」로 등단했다.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서점을 닫으면서 서점 손님으로 만난 진명여고 농구선수(포드) 출신 키 170Cm 한 살 연하 이정숙(李丁淑)과 1948년 4월 덕수궁에서 스물셋에 결혼했다. 장인이 창덕궁 이왕직에서 회계(고종의 재산과 재정운영)를 담당한 처가의 ㄷ자 한옥인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현 교보빌딩 뒤)에서 기거했다. 그 뒤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취직했다. 12월 8일 장남 세형(世馨)(연세대 국문과, 영문과 최인호와 같은 학번, 마광수 교수는 국문과 1년 후배로 교류함)이 출생했다.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1948년에는 김병욱·김경린·김경희·김차영·양병식·임호권 등과 동인지 『신시론』를 발간했다.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임호권 등과 함께 낸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49년 7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됐다. 1950년 김경린·김차영·김규동·이봉래·조향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밤의 미매장(未埋藏)」·「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며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여 주목을 끌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며 9월 25일 딸 세화(世華) 출생하고, 12월 8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갔다. 1951년 부산에서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였다.

 

1952년 존 스타인백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을 번역하여 간행했다. 6월 16일 《주간 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을 발표했다. 1953년 여름 무렵 ‘후반기’동인 해체 결정하고 5월 31일 차남 세곤(世崑) 출생했다. 7월 휴전협정이 타결되자 중순경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박인환은 영화광이다. 그가 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들었다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일보에서 논설을 쓰는 오종식을 중심으로 1954년 김규동·이봉래·이진섭·오종식·허백년·유두연 등과 ‘영화평론가협회’ 발족했다. 그렇다고 무슨 족적을 남긴 건 아니다. 그들은 모여서 영화얘기보다는 술 마시는 일에 더 열성이었다. 그러니 영화는 자연스레 뒷전이 됐다. 그래도 술이 불콰해지면 유두연은 무성영화의 변사를 흉내 내 좌중을 웃겼고 박인환은 감정을 섞어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를 얘기했고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의 감동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김규동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관에서 ‘제3의 사나이’ 열리든 날, 박인환이 갑자기 일어나 “여깁니다. 이것이 영화예요! 백철씨 아십니까!” 라고 소리쳐서 모두들 웃긴 일이 있는데, 뒷전에 있던 백철 선생이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했으니, 모두 기가 막혀서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박인환의 영화평론은 총 59편으로 2년 남짓 동안 매우 놀라운 성과였다.

 

박인환을 명동백작 이봉구는 이렇게 추억했다. “초조와 흥분 때문에 인환의 성격은 칼날처럼 푸르렀다. 멋과 기분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었던 인환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두발頭髮의 형까지도 ‘상고머리’로 깎아 태연자약 명동거리를 돌아다니었다. 험프리 보거트를 본 딴 머리라고 기분을 내면서, ‘머리가 길어야 예술가답다는 견해는 이미 낡은 세대의 유물이야. 구역질나서 볼 수가 없어-’ 큰 소리로 남의 머리까지 시비하려 들었다.” 이봉구의 추억담은 계속됐다. “대포 잔을 들다말고 뛰어나와 거리에서 서성거리며 화를 내기가 일쑤였다. 스탠드바에서 봄이면 진 피즈, 가을이면 하이볼, 그리고 조니 워커, 인환은 이런 식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렇지 못하고 그 값싼 대포 술도 마음대로 안 되니 이거 부끄러워 살맛이 없다고 비통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밤낮 그 멋과 기분바람에 술타령을 하나 인환의 술은 풋술이었다.” 그런데 김차영과는 술보다는 문학에 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봉구와는 술과 낭만을 얘기했다면 김차영과의 만남에선 술보다는 신사로서의 이미지즘을 중시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모던보이로서의 박인환은 분명 남다른 개성이 있다. 박인환, 그는 갔지만 그가 드리운 긴 그림자는 세월이 가도 아름다운 소네트로 남아 ‘세월이 가면’으로 불러지고 있다.

 

박인환 시인은 생전에 첫 시집 제목을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로 붙이고자 하였다. 1954년 9월 동문사에시 이 제목으로 시집을 출간한다는 예고 광고까지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55년에 발간된 『朴寅煥選詩集』(산호장)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출판사의 화재로 시중에서 『朴寅煥選詩集』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1955년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화물선 ‘남해호’ 사무장으로 미국 여행했다. 3월 5일 부산항 출발하여 3월 6일 일본 고베항 기항하고 3월 22일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항 도착하였다. 4월 10일 귀국한 후 조선일보(5월 13일, 17일)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하고, 연작시 「아메리카 시초」 등을 발표했다. 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자유문학상’ 수상 실패와 평소 흠모한 시인 이상의 기일이 4월 17일인데 3월 17일로 잘못 알고, 1956년 3월 17일 한국일보에 「죽은 아폴론 – 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를 발표하고 3일 연속 폭음하다 ‘생명수(당시 파는 음료수)를 달라’고 외치며 심장마비로 1956년 3월 20일 저녁 9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했다.

 

오늘은 3월 열이렛날 /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 오후 세시 이십 오분에는 /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 그날 당신은 / 동경 제국대학부속병원에서 /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 운명이여 /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 권태와 인간의 날개 /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 성좌星座를 간직하고 있다 //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 〈람보〉와도 같이 / 당신은 나에게 / 환상과 흥분과 /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 우리 문학에 / 따뜻한 손을 빌려준 / 정신의 황제 // 무한한 수면睡眠 / 반역과 영광 /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 〈이상李箱〉이라고 -「죽은 아폴론 – 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

 

시인장으로 3월 22일 망우리공동묘지에 친구들이 무덤에 카멜 담배와 조니 워커 한 병을 묻어 주었다. 시인의 유품은 사진 몇 장 남기고 죄 불로 사라져 거의 없다. 명동 댄디보이에 대한 아내의 가슴 조인 결과였다. 묘비는 그해 추석날 송지영 글로 문우들이 세웠다. 지금도 사람들이 참배하며 담뱃불을 붙여 단비에 놓고 술 한 잔 올리며, 시인의 영혼을 위로하며 시인의 시를 외우며 술을 마신다. 늦가을 낙엽이 뒹구는 저녁노을 물들 때가 가장 분위기가 살아나는 묘역이다. 묘지번호는 102308이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박인환의 시 「죽은 아폴론 – 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와 1948년에 쓴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가 독재시대 하에서 선동적이라고 해서 제외시켰다.

2000년 박인환의 고향인 강원도 인제군청과 인제군에서 활동하는 ‘내린문학회’ 및 시전문지 『시현실』공동주관으로 ‘박인환문학상’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2012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에 박인환문학관을 개관하였다.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 귀퉁이 술집 ‘경상도집’에 송지영, 이진섭, 박인환 등 몇몇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백치 아다다>의 가수 나애심도 함께였다. 취기가 한껏 돌자 노래를 청했는데 나애심은 마땅한 것이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박인환이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고, 완성된 시를 넘겨받은 언론인이자 극작가였던 이진섭이 단숨에 악보를 그려냈단다. 나애심이 악보를 보고 노래를 흥얼거렸고 한 시간쯤 뒤 테너 임만섭이 합석한 뒤 정식으로 노래를 부르니 그걸 듣고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술집으로 몰려들어 왔다고 한다. 나애심은 를 부른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다. 막걸리 집은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박인환 작시 노래 <세월이 가면>은 뒤에, 1970년대 가수이자 시인인 박인희가 방송 진행하며, 시 「목마와 숙녀」 낭송과 함께 널리 불리고 있다. 2016년 3월 25일 필자는 박인희 가수 귀국 환영 펜 모임에 함께 하여, 필자의 제5 시집 『봄동』을 전달했다. 시집 간지에 싸인을 거꾸로 하여 드리며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 후원 중랑문화재단 주최 망우리프로젝트 음악낭독극 망우열전 1탄 소파 방정환 <만년샤스>에 이어, 망우열전 2탄 시인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 2021년 6월 25일 오후 7시 상봉 메가박스 5관에서 펼쳐졌다.


초청받은 박시인의 큰아들 박세형씨가 극이 끝나고 <세월이 가면> 시와 노래를 완성하고 부른 장소가 최불암 어머니 이명숙 '은성' 막걸리집이 아니라 '경상도집 '이었고, 1956년 1월 중 아버지 박인환 시인과 이진섭 두 분이 8절지 도화지에 시와 음표가 아라비아 숫자로 악보가 깨끗하게 그려진 <세월이 가면> 집에 가져온 것을 보았으며, 아버지 시인 박인환은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 없는 자상하고 멋진 가장이었다고 증언했다.

 

필자가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흥얼거리는 노래는 박인환 시인의 시 박인희 노래 「세월이 가면」이다. 망우리공원 박인환 시인의 유택에 시 「목마와 숙녀」 노래 〈세월이 가면〉을 1970년대 라디오방송을 진행하며 박인환 시인과 시를 널리 알린, 이해인(본명, 이명숙) 수녀님과 풍문여중 문예반 활동을 함께 한 시집 2권을 발행한 시인 박인희(본명, 박춘호) 목소리로 연속해서 들을 수 있는 방송시설이 되어 있다. 가을날 저녁노을 검붉게 배어들 때 박인환 시인의 유택을 찾아가 버튼을 눌러 시와 노래에 젖어보길 빕니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박인환 연보비

망우리공원 박인환 유택 묘비(단비)

묘비 뒷면 송지영 짓고 쓰다

                                                     김수영과 박인환

1955년 미국을 다년 온 뒤 수운회관에서 박인환 이진섭 유두연 박태진

 

                                     마리서사 서점 앞 임호권 박인환

                                       박인환 이정숙 결혼식 덕수궁 1948년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세월이 가면」

 

'창조문예' 망우리공원 문인열전(4) 2021년 11월호(제298호)에 수록한 내용이 주이며, 사진은 묘지 관련 사진은 직접 찍었고, 나머지는 인터넷에서 캡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