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오기선 목사 76주기

정종배 2022. 4. 5. 11:50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동경 한인교회 목사 관동대지진 재해동포위문단을 조직 위문과 구호사업 전개
오기선(吳基善, 1877. 4. 21.∼1946. 4. 5.) 76주기

 

 

오기선은 평남 강서군 함종읍에서 대대로 부유했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7세 때 관비생이 되어 평양으로 유학을 떠나서 구학문과 신학문을 익혔다. 20세에 관비생의 공부를 마치고 고향 함종으로 돌아왔다. 관비생의 공부를 마치면 도 관찰사의 명을 받아 지방의 말단관직으로 부임하게 되지만, 오기선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가 고향을 떠나던 해에 여전도인으로 유명한 전삼덕 부인의 노고로 여학교가 설립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겨우 몇몇 여아에 불과했다. 오기선은 전삼덕 부인의 전도를 받아 함종교회에 출석하며 함종에 남자들을 위한 사립소학교를 설립하고 직접 교장이 되어, 제2세의 교육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만 해도 교역자가 무척 부족했다. 오기선은 당시 감리사였던 선교사 노블(W.A. Noble)의 눈에 들게 되어 1908년에 의해 함종교회 전도사로 정식 파송 받았다. 이듬해인 1909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 입회하였으며 그 해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오기선은 1911년 12월 20일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3년제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때 같이 졸업한 이가 38명이었으며 당시 교장은 하디(Robert A. Hardie, M.D) 박사였다.
오기선은 부지런하고 충성을 다하는 목회자였다. 어디를 가나 한결같았다. 1912년 졸업한 이듬해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해주읍교회로 파송되어 1년간 훌륭하게 부흥시켰다. 1912년 서울 동대문교회로 전임되었으며 그곳에서도 교회를 부흥·발전시켰다.1913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YMCA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YMCA 이사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YMCA조선연합회가 창설될 때 그 연합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도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도쿄YMCA가 조직되고 그 안에 한인연합교회가 설립되어 본국에 목회자 파송을 요청하자 장로교와 감리교는 번갈아 목회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는데 주공삼 목사 뒤를 이어 1914년 오기선 목사가 파송을 받았다. 일본에서 2년간 최승만·백남훈 등과 함께 도쿄YMCA를 지도해 나가다 1916년 귀국하여 평양과 진남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고 1917년 인천지방 감리사가 되어 1920년까지 4년간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박희도·오화영·정춘수와 함께 감리교 지도자와 YMCA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데 참여하였고 특히 천도교와의 연합운동에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 한국 감리교회 대표로 미감리회 4년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노블과 함께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1년 귀국한 후 다시 도쿄한인교회 6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칸토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한국인들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는 참상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도쿄YMCA 총무 최승만과 재해동포위문단을 조직, 본국 교회와 연락을 맺으면서 피살자 가족 위문 및 복구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4년 귀국해서 평양 남산현교회에 부임하였다.

오기선 목사의 관련 3.1운동 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도교 보관금 5천원의 지출 절차를 마치고 익 22일 최린에게 동 금액을 교부하자 최린은 이것을 이인환의 숙소를 찾아가 이인환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앞서 이인환은 그 전야 즉 그달 21일 최린과 만나 남대문 밖 세브란스 병원 구내에 있는 제중원 약방 주임 이갑성의 거처에서 이갑성·이승훈·박희도·오기선·오화영·신홍식·함태영·경기도 수원군 3·1여학교 교사 김세환·안세환·현순·김필순과 만나 철야 협의한 끝에 독립운동을 함에 있어 천도교측과 합동하느냐 않느냐의 문제에 관해 우선 천도교측의 운동방법을 확인한 위에 결정하기로 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이인환·함태영에게 만사 일임키로 했다.

또 파리에서 개최 중인 강화회의의 형세를 탐문하여 보도하는 동시 유럽 각국에 서면을 발송할 편의를 도모키로 하고, 영어를 잘하는 현순 목사를 중국 상해에 파견하기로 했다.(그달 23일 현순은 이 사명을 띠고 경성을 출발, 상해로 향했다). 다음날 이인환은 최린으로부터 금 5천원을 받은 후 함태영과 함께 최린의 집에서 독립운동의 방법에 관해 천도교측의 의향을 확인했던 바 최린의 주장인 즉 그리스도교 측의 계획과 같이 독립청원서 제출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므로 독립선언을 하지 않을 바에야 합동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이인환·함영은 바로 당일, 오기선·박희도·안세환들과 얼려 함태영의 집에 회합고 숙의한 끝에 천도교 주장을 받아들여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의했다. 그 익일 24일, 이인환·함태영이 최린의 집을 찾아가 합동할 것을 통보함으로써 여기에 조선 독립운동에 있어 천도교와 그리스도교의 합동이 성립된 것이다(오기선은 독립선언에 반대하여 당일부로 탈퇴했다).

3ㆍ1운동 참여를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 윤치호도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4일 일기에서 이상재, 김필수, 오기선(1877-1946, 감리교 목사)이 그날 아침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1923년 9월 1일에 칸토(關東)대진재가 일어나자 학생 단체의 기관지는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동경에 있던 한인 유학생은 1919년 4백 48명, 1920년 9백 88명, 1921년 1천 5백 16명, 1922년 1천 9백 50명으로 증가되었다가 1923년 9월 1일 칸토대진재가 일어나자 1923년 연말 학생수는 5백31명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 이유로, 칸토대진재 당시 한국인에 대하여 잔인무도한 학살이 자행됨으로 말미암아 유학생 수가 일시 줄어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유학생이거나 일본에 거주하며 참상을 목격한 이는 다음과 같다.

김소월 김동환 이상화 이육사 한설야 염상섭 이기영 채만식 박용철 양주동 함석헌 안창남 임영신 박열(박준식) 가네코 후미코 김소운 허남기 한승인 유치진 유치환 유치상(3형제) 윤세주 최승만 변희용 윤극영 박춘금 김영랑 유상규 송석하 조봉암 최신복 장형두 등이고
시인 구상 맏형은 행방불명, 윤동주 아버지는 무사하다는 전보를 보냈다.
의열단원 50명이 동경에 잠입해 있었지만 일제 경찰과 군인 그리고 자경단의 제노사이드에 휘말려 살해당해 조직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의열단은 조선인의 죽음을 그냥 볼 수 없었고 상해에서 활동하던 김지섭이 나섰다. 일본은 당시 조선인을 죽인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일본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김소월의 「초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영랑의 「독을 차고」, 이육사의 「광야」·「절정」 등의 저항시 뿌리에는 관동대지진 참상을 목격한 민족애가 표출되었다고 주장하며, 전남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였던 고영자 평론가는 2004년 평론집 『바로잡는 국문학』을 탱자출판사에서 간행했다.

망우리공원에 김영랑 저항시, 유상규 보건위생, 송석하 민속학, 조봉암 독립운동, 최신복 아동문학, 장형두는 식물분류학 등은 유학생, 오기선 당시 동경 목사로 목숨건 구조 및 구호할동으로, 방정환 조사반원 및 후원금 전달, 나운규 영화, 계용묵은 소설로.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등은 관동대지진 직간접 관련을 맺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공헌했습니다.

이천원을 오기선 목사와 본사 특파원에
동경지방 리재조선인구제회에서는 기부금을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모집하여 리재동포를 원만히 구제코자 하였으나 당국이 허락지 아니함으로 동정금 이외에는 모집할 수 없었으므로 최초에 목적한 바와 같이 원만히 되지 못하였으나 그 동안에 수합된 동정금이 이천원은 본사 특파원 리상협 씨와 동경기독교연합회 목사 오기선 씨에게 구제사무를 위탁하고 구제회는 해산하였다는대 다시 나머지 사무를 처리할 필요가 있음으로 삼십일일까지 유성준 리옥 한위건 삼씨가 유임하고 앞으로 들어오는 동정금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위탁하였다하여 총수업 삼천이백팔십원오십전 중 이백원은 부산에 상륙한 동포의 구제비로 지출하고 이천원은 동경으로 보내었고 륙십삼원 구십오전은 경성에 온 이재동포의 구제비와 잡비로 지출하고 잔금 일천이십사원오십오전은 잔무처리위원에게 보관하였다더라(동아일보 1923.9.23.)

1923년 9월 1일 대진재를 겪고난 뒤 1924년에 경시청(警視廳)에 편입된 요시찰 대상학생 및 졸업생 주요 인물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 갑호 최승만, 박사직, 오기선. 경북 갑호 변희용, 박열, 이여성. 경남 갑호 박순천, 을호 김약수. 황해 을호 지정신. 평남 갑호 황신덕. 함남 갑호 한위건 등이다.

그리고 1928년부터 은퇴하기 전해인 1934년까지 평양지방 감리사로 활발한 활약을 하였다. 1926년부터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통합되던 시기까지 남북감리연합방침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실질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925년 남감리회 총회는 미감리회와의 합동을 부결시켰으나 한국 감리교회 대표들은 조선 남·북감리교회라도 단독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두 교회에서 정식으로 연구위원을 선임하기로 하였다. 1926년 6월에 열린 미감리회 제19회 조선연회에서 "남·북감리연합방침연구위원"으로 김찬흥·오기선·노블(W.A. Noble)· 김종우·모리스(C.D. Moris) 등 5명을, 같은 해 9월에 열린 남감리회 제7회 조선연회에서도 "남북감리연합기성위원"으로 신공숙·양주삼·정춘수·저다인(J.L. Gerdine)·갬블(F.K. Gamble) 등 5명을 각각 선출하여 두 교회 합동으로 연구케 했다.

1920년대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오기선 목사 주례의 결혼식 기사가 종종 실렸다. 그중에 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 1876~1930) 결혼식에 오기선 목사가 주례를 섰다.
18세 묘령신부와 50세의 노신랑 옛날 미국인 스티븐슨 살해 미수한 평양 장인환이가 근일에 화촉 성전 사회봉사로 고아원
20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스티븐슨를 살해 미수한 사실로 그곳에서 15년 동안 철창생활을 하다가 20년 되는 지난 4월 19일에 자기의 본적지인 평양부외 선교리에 돌아온 장인환(50)은 지난날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며 얼마 남지 아니한 장래를 사회봉사에 바치고자 하여 토지를 팔아 그 돈으로 평안북도 선천에 고아원을 경영하기로 하고 목하 모든 준비를 착착 진행 중인 바 이하 소문이 부근 각지에 전차되어 일종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평양숭인여학교 금년도 졸업생 윤치복(18) 양이 그에게 결혼을 청하였으므로 장씨는 이를 쾌락하여 불원간 화촉의 성전을 거행할 터이라 한다. 윤양은 결혼 후 남편을 도와 고아원 경영에 힘을 쓸터라더라(매일신보 1927.6.1.)
노신랑 소신부 장인환씨 결혼
수개월 전에 미국에서 귀국한 장인환 씨와 평양정의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윤치복 양과의 결혼식이 10일 하오 3시에 부내 남산현 예배당에서 오기선 목사의 주례 하에 거향하였다더라(동아일보 1927.6.11.)
1934년 남산현교회에서 근속 10년 표창을 받았는데 당시 파송제로 한 교회에서 10여 년을 목회했다는 것에 대해서 남산현교회에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며 오기선 목사를 축하해 주었으며, 〈감리회보〉에서도 "오기선 목사 근속 10주년 기념식"이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하오 1시에 평양 남산현교회당에서 오기선 목사 남산현교회 근속 1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었다. 감리교회가 조선에 선교되여 오십년을 경과한 오날에 매년 파송제를 갖인 제도밑에서 같은 교회에 같은 목사로 십년을 계속하여 파송을 받고 꾸준히 충성을 다하시여 성역에 근무하심은 (오기선 목사)씨가 조선감리교회의 최초의 신기록을 지였다 하여 일반교우는 물론 사회유지 제씨의 열광적 환영으로 기념 축가식을 성대히 개회하고……." 근속표창을 받고 난 이듬해 이윤영 목사를 후계자로 세우고 일선 목회에서 은퇴하였다.
1935년부터 서부연회 자치 사업부 총무로 활동하였고, 1937년에는 총리원 전도국 사업 담당으로 만주지역에 있는 교회의 실상과 망우리공원에 묻힌 미서훈 독립운동가 변성옥 목사가 주도하여 감리교회를 떠나 독립된 교회로 새롭게 창립된 "조선기독교회"를 조사하기 위해 6월 16일 경성역을 출발해서 7월 13일까지 약 한 달간 교육부 총무 류형기 목사와 함께 만주지역을 여행하기도 하는 등 전도사업에 매진하다 1939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 황해도 백천에 있다가 해방이 되자 월남하여 북아현동 아들의 집에 머물던 중 1946년 4월 5일 선종하였다. 장지는 망우리 공동묘지였다. 동아일보 기사는 4월 17일 선종하고 19일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한다고 실렸다. 망우리공원 전산자료에는 기록이 되지 않았다. 유명 인사 중 묘적부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오목사의 맏이는 천원 오천석(1901~1987)으로 문교부장관, 멕시코 대사, 이화여대교수 등을 역임했다. 흥사단 단우(195번)로 미국 유학 시절 한승인 단우(260번) 망우리공원에 잠든 추담 허연(265번) 선생 등과 교유하였다. 1934년 허연의 결혼식에 홍난파(266번)와 참석하여 신랑 옆과 뒤에 베스트프랜드 사진을 남겼다. 1987년 “나는 내 조국의 민주교육을 위하여 살고 일하다 가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작고하였으며, 그의 장례는 한국초유의 교육인장으로 거행되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한국에 ‘노란 리본 이야기’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여,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오천석이 지은 줄 알았다는 후문이 전한다.

오기선 목사의 묘지는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가족묘지 납골당으로 이장했다.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 선교국에서는 오기선 목사를 독립운동가로 추서하고 귀한 유훈과 사적을 잘 기록 보존하며 전파할 계획이다.

오기선 목사 선종 기사(동아일보, 1946.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