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시인 박인환 66주기

정종배 2022. 3. 20. 23:49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목마와 숙녀, 인천항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 66주기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 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목마와 숙녀. 박인환 시선집(1955)

올 3월 두 번째 주에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박인환 유택 앞에 나무데크 작업을 마쳤다. 유택이 좁아 많은 인원이 답사하며 행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박인환 묘지를 답사할 수 있다. 어제 19일 토요일 오후 국학진흥원 같은 반원들의 답사는 봄비와 봄눈이 내려 아쉽게도 취소하였다.
오늘이 시인 박인환의 66주이다. 망우리공원 시인의 유택에서는 66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 유족들과 중랑구청, 중랑문인협회, 영원한 기억 봉사단 등이 참여했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삼거리에서 멀지 않은 박인환 시인의 유택을 찾아가 시인의 작품과 삶을 되새겨 보시길 권합니다.

“내 사랑아 / 너는 찬 기후에서 / 긴 행로를 시작했다 // 그러므로 폭풍우가 서슴지 않고 / 참혹마저 무섭지 않다 // 2020年 03月 20日 / 64년 전으로 / 보내는 동경과 애정 / 차마 말로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동봉합니다.(속) 박인환 선생님. 박 형. 당신의 시는 여전히 저를 위로하고 살게 합니다.“(겉)
어느 분이 망우리공원 시인 박인환 묘역 앞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이 꽂은 조화 속에 놓고 간 우편엽서 속과 겉에 쓴 글이다.

망우리공원을 답사할 때 남녀노소 계절과 시간에 구분 없이 가슴이 설레는 시인이 있다. 시인의 시도 시이지만 시인과 관련된 후일담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답사 중 빠짐없이 참배하는 묘역이다. 망우리공원 사무실에서 삼거리를 통과하여 일방통행 길 100여 미터 지점 좌측에 잘생긴 시인의 얼굴 닮은 미끈한 연보비가 서 있다. 1992년 2월에는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지석영, 문명훤, 장덕수 등 7명의 연보비를 중랑구에서 산책로를 중심으로 조성했으며, 1998년 2월에는 추가로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오긍선 등 8명에 대한 연보비를 추가로 5.2km의 ‘사색의 길’에 세웠다. 중랑구청에서 연보비를 세운 15분 중 14분은 독립지사 및 사회사업가인데, 오로지 문화예술인은 박인환 시인 한 분이다. 연보비 맞은편에 경사가 심한 나무데크를 내려서면 화살나무에 둘러싸인 시인 박인환의 유택을 찾을 수 있다. 20여 년 전부터 옹기종기 비좁았던 주변 묘가 이장하여 지금의 묘역이 되었다.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사후 10년 만에 4편의 산문에서 박인환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김수영은 박인환에게 주홍글씨와도 같은 낙인을 찍었다. 이러한 김수영의 기록들은 박인환을 시종 ‘그처럼 재주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유행의 숭배자가 없다’ 등으로 거칠게 표현했다. 1921년생 김수영이 1926년생 박인환에게는 다섯 살 터울의 형뻘이다. 김수영은 박인환보다 결혼은 2년 늦게, 첫 시집 출간은 4년 늦게 하였다. 시인 김수영과 김현경 여사와의 사랑과 결혼생활 이어 가는 중간역할 박인환 시인은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일을 하였다. 두 시인 살아생전 한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박인환은 『朴寅煥選詩集』(산호장, 1955)을 발간했고, 김수영은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1959)을 뒤따라 냈다. 망우리공원 산 능선 너머 유택을 마련한 1914년생 소설가 김이석과 김수영의 둘도 없는 관계와는 대조를 이룬다.

1953년 화가 이중섭이 가족을 만나려 일본 방문할 때 선원증을 발급받는데 시인 구상의 주선과 시인 박인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시인 박인환의 아내 이정숙의 작은아버지가 전시 내무부와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재직한 이순용(李淳鎔, 1897~1988)이었다.
박인환 시인은 멋진 언어를 사용하는 감각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기개가 높은 의리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6.25 한국전쟁 부산 피난 시절 1952년 김광주가 「나는 너를 싫어한다」라는 단편소설을 써 고관대작 부인의 퇴폐상을 비판했다가 기소당할 처치에 있었을 때 박인환은 연판장을 돌리며 김광주를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나섰다. 그 후 김광주는 ”박인환만큼 패기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은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박인환은 수주 번영로가 환도 후 음주를 삼가고 있을 때 ”술 마시던 사람 술 안마시면 선생일 수가 없으므로 선생 존칭을 빼겠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오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박인환의 본관은 밀양.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 상동리 159번지 출생으로 면직원인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아버지 박광선은 면직원을 그만두고 여러 지방과 도시를 떠돌며 산판사업을 하다 서울에 안주하였다. 아버지 뜻에 따라 가족 모두 서울 종로구 원서동 134의 8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박인환은 어머니가 사준 버스표 한 장으로 인제에서 서울의 아버지를 찾아갈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다. 인제초등학교 다니다 성적이 우수하여 1936년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와 1939년 우등상을 받으며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마쳤다.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다가 문학과 그림에 심취하고, 영화관(부민관, 현 서울시의회별관) 출입문제로 1941년 2학년 때 퇴학당했다. 한성중학교 야간부(필자의 모교인 한성고등학교 학적부는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림)를 거쳐 1942년 아버지 친지가 있는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망우리공원 민병덕 설립)로 적을 옮겨 1944년 졸업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권유로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일제 당시 농수산과·이공과·의과 대학생은 징병에서 제외됐다.

서울로 와서 시인 오장환의 낙원동(현재 종로3가 2번지 대로변) ‘남만서점’을 아버지(3만원)와 작은이모(2만원)의 도움 받아 5만원에 인수하여, 작은이모의 포목점 바로 옆에 '마리서사(茉莉書舍)' 서점을 초현실주의자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리모델링하여 문을 열었다. 여기서 마리서사라는 이름을 일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말리(軍艦茉莉)』에서 차용했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을 땄다는 설(김수영 시인, 이정숙 여사 증언)도 있다.

이 책방의 서적들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양병식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마리서사’에는 마치 외국 서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앙드레 브르통의 책, 폴 엘뤼아르의 시집, 마리 로랑생 시집, 콕토 시집, 일본 고오세이가꾸에서 나온 『현대의 예술과 비평』 총서, 하루야마 유키오가 편찬한 『시와 시론』, 가마쿠라 문고에서 나온 『세계 문화』,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어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매일같이 모여드는 예술가들에게는 전문 책방으로 소문이 났다. 이때 정지용·김광주·김광균·이한직·김수영·김경린·오장환·김기림·이봉구·장만영·양병식·김병욱·조향·이봉래·박영준·배인철·설정식·이시우·이흡·조우식 등의 문인과 화가 길영주·박일영·최재덕 등 해방 후 예술의 꽃을 피운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과 사귀었다.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발생지였다. 김수영 시인이 “인환이가 제일 기분을 낸 때가 그때였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동안에도 나는 그 책가게를 빼놓고는 인환이나 인환의 시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한 것을 보면 박인환의 활발함을 알 수 있다.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송지영 추천 시 「거리」로 등단했다.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서점을 닫으면서 서점 손님으로 만난 진명여고 농구선수(포드) 출신 키 170Cm 한 살 연하 이정숙(李丁淑)과 1948년 4월 덕수궁에서 스물셋에 결혼했다. 장인이 창덕궁 이왕직에서 회계(고종의 재산과 재정운영)를 담당한 처가의 ㄷ자 한옥인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현 교보빌딩 뒤)에서 기거했다. 그 뒤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취직했다. 12월 8일 장남 세형(世馨)(연세대 국문과, 영문과 최인호와 같은 학번, 마광수 교수는 국문과 1년 후배로 교류함)이 출생했다.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1948년에는 김병욱·김경린·김경희·김차영·양병식·임호권 등과 동인지 『신시론』를 발간했다.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임호권 등과 함께 낸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49년 7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됐다. 1950년 김경린·김차영·김규동·이봉래·조향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밤의 미매장(未埋藏)」·「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며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여 주목을 끌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며 9월 25일 딸 세화(世華) 출생하고, 12월 8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갔다. 1951년 부산에서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였다.

1952년 존 스타인백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을 번역하여 간행했다. 6월 16일 《주간 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을 발표했다. 1953년 여름 무렵 ‘후반기’동인 해체 결정하고 5월 31일 차남 세곤(世崑) 출생했다. 7월 휴전협정이 타결되자 중순경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박인환은 영화광이다. 그가 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들었다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일보에서 논설을 쓰는 오종식을 중심으로 1954년 김규동·이봉래·이진섭·오종식·허백년·유두연 등과 ‘영화평론가협회’ 발족했다. 그렇다고 무슨 족적을 남긴 건 아니다. 그들은 모여서 영화얘기보다는 술 마시는 일에 더 열성이었다. 그러니 영화는 자연스레 뒷전이 됐다. 그래도 술이 불콰해지면 유두연은 무성영화의 변사를 흉내 내 좌중을 웃겼고 박인환은 감정을 섞어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를 얘기했고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의 감동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김규동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관에서 ‘제3의 사나이’ 열리든 날, 박인환이 갑자기 일어나 “여깁니다. 이것이 영화예요! 백철씨 아십니까!” 라고 소리쳐서 모두들 웃긴 일이 있는데, 뒷전에 있던 백철 선생이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했으니, 모두 기가 막혀서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박인환의 영화평론은 총 59편으로 2년 남짓 동안 매우 놀라운 성과였다.

박인환을 명동백작 이봉구는 이렇게 추억했다. “초조와 흥분 때문에 인환의 성격은 칼날처럼 푸르렀다. 멋과 기분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었던 인환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두발頭髮의 형까지도 ‘상고머리’로 깎아 태연자약 명동거리를 돌아다니었다. 험프리 보거트를 본 딴 머리라고 기분을 내면서, ‘머리가 길어야 예술가답다는 견해는 이미 낡은 세대의 유물이야. 구역질나서 볼 수가 없어-’ 큰 소리로 남의 머리까지 시비하려 들었다.” 이봉구의 추억담은 계속됐다. “대포 잔을 들다말고 뛰어나와 거리에서 서성거리며 화를 내기가 일쑤였다. 스탠드바에서 봄이면 진 피즈, 가을이면 하이볼, 그리고 조니 워커, 인환은 이런 식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렇지 못하고 그 값싼 대포 술도 마음대로 안 되니 이거 부끄러워 살맛이 없다고 비통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밤낮 그 멋과 기분바람에 술타령을 하나 인환의 술은 풋술이었다.” 그런데 김차영과는 술보다는 문학에 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봉구와는 술과 낭만을 얘기했다면 김차영과의 만남에선 술보다는 신사로서의 이미지즘을 중시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모던보이로서의 박인환은 분명 남다른 개성이 있다. 박인환, 그는 갔지만 그가 드리운 긴 그림자는 세월이 가도 아름다운 소네트로 남아 ‘세월이 가면’으로 불러지고 있다.

박인환 시인은 생전에 첫 시집 제목을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로 붙이고자 하였다. 1954년 9월 동문사에시 이 제목으로 시집을 출간한다는 예고 광고까지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55년에 발간된 『朴寅煥選詩集』(산호장)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출판사의 화재로 시중에서 『朴寅煥選詩集』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1955년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화물선 ‘남해호’ 사무장으로 미국 여행했다. 3월 5일 부산항 출발하여 3월 6일 일본 고베항 기항하고 3월 22일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항 도착하였다. 4월 10일 귀국한 후 조선일보(5월 13일, 17일)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하고, 연작시 「아메리카 시초」 등을 발표했다. 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박인환 평전』을 쓴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사)중랑문화연구소 초청으로 강의하며 "문학이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던 1960~70년대 '참여문학'을 박인환은 1940년대부터 앞장섰다고 보면 된다."며 “「인천항」은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문명과 미개' 등으로 이분화된 서양 중심의 근대성을 타파하려는 그의 현실 인식이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인천항 전문을 소개한다.

사진잡지에서 본 홍콩[香港]야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
상해부두를 슬퍼했다.

서울에서 삼십 킬로를 떨어진 곳에
모든 해안선과 공통되어 있는
인천항이 있다.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을
여실히 표현한 인천 항구에는
상관(商館)도 없고
영사관도 없다

따뜻한 황해의 바람이
생활의 도움이 되고저
냅킨 같은 만내(灣內)로 뛰어들었다.

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들 때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인천항구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은주(銀酒)와 아편과 호콩이 밀선(密船)에 실려오고
태평양을 건너 무역풍을 탄 칠면조가
인천항으로 나침(羅針)을 돌렸다.

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
중국서 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같이
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
황혼의 부두를 방황했다.

웬 사람이 이같이 많이 걸어다니는 것이냐
항부(航夫)들인가
아니 담배를 사려고 군복과 담요와 또는 캔디를 사려고
그렇지만 식료품만은 칠면조와 함께 배급을 한다.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宿舍)와
주둔소의 네온싸인은 붉고
짠 그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온 작크가 날리는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간다

조선의 해항(海港) 인천이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없이 닮아간다

-‘신조선’, 1947.4.1.

사진은 권재호 선생님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