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이영찬 이영학 두 형제

정종배 2022. 5. 5. 13:15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이영찬 이영학 두 형제의 명과 암

일제강점기 기업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이영찬(李泳贊, 1896~1959) 63주기

형 이영찬은 친일인명사전 등재되고, 동생 이영학(1904~1955)은 신민회 및 수양동우회 관련 아버지 이창석(1860~1941)과 2대 독립운동 집안으로 두 분은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두 형제가 망우리공원 형은 구리시 딸기원 마을을 지나 왕숙천으로 동생은 중랑구 면목천으로 물길이 나뉘어, 형은 산 중턱 동생은 산 능선에 묻혀 있다.

이영찬의 일본식 이름은 안천영찬(安川泳贊)이었다. 1896년 7월 16일 평북 선천군의 대지주 이창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12월에 이영찬의 아버지인 이창석 장로는 평북 선천에 창신양로원을 설립하였다. 이 양로원은 한때, 선천북교회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창석 장로의 거액의 희사로 재단법인으로 발전하였다.

기독교인에 의한 민간 양로원으로는 고아사업으로 이름이 높은 해관 오긍선 의사가 1931년 서울 옥천동 고아원 근처에 경성양로원을 설립한 것이다. 오긍선이 고아원 및 양로원 사업에 주력한 것은 그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면서 그곳의 자선기관을 많이 보고 견문을 넓혔기 때문이다. 경성양로원은 그 뒤 이윤영에게 경영권이 넘겨지고 삼각산 비봉산자락 구기동으로 옮겨 청운양로원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35년에는 남감리교 기독교인 이영찬의 동생인 이영학(이창석 장로의 셋째 아들)이 평북 선천에 선천회관을 설립하고 지역사회 향상을 위한 복지 시설과 프로그램도 제공했다.

이영찬은 일제강점기의 기업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선천의 기독교 계열 사립학교인 신성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3월 동아일보 선천지국 총무 겸 기자로 활동했다. 1928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고문에 선임되었다. 조선일보 선천지국장도 겸했다. 1923년 1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4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선천지방부가 설립될 때 감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10월 선천전기주식회사가 창립되어 1933년 12월 신의주전기주식회사에 매도될 때까지 취제역으로 활동했다. 1926년 7월 관서기자대회에서 위원으로 뽑혔다.

고향 선천에서 광산업으로 큰 부를 쌓았다. 선천 송림금은광과 용흥금광의 소유주인 동시에 여러 기업체를 운영하며 1936년 2월 전국 금광업자를 망라해 창립된 조선산금조합 상무이사로 활동했다. 같은 달에 선천상업보습학교 설립을 위해 힘썼다. 1941년 1월 선천 보성여학교 기금 1만원을 기부했다. 인근의 관광 명소인 동림폭포를 유원지로 만드는 사업을 벌이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관광산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43년까지 선천읍회 의원과 선천군농회 의원을 지내는 등 이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37년 5월 관선 평북 도회의원에 임명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전쟁체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1937년 11월 선천애국회 대표로 국방헌금 모금을 주도하여 고사기관총과 애국기 선천호를 일본군에 헌납했다. 1939년 1월 친일잡지 《동양지광》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0년 6월 일본적십자사로부터 유공장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열린 기원 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를 초대받고,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과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로 발탁되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는 시점까지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연수당은 600원에서 1944년 1,200원으로 올랐다. 1945년 5월 조선총독부 경제안정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청이 발표한 <이동사령 제29호>에 따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제1공화국 수립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1950년 5월에 공판까지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외압으로 해체되어 처벌받은 기록은 없다.
나고야 금성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아내 이선화(1915~ ?)와 사이에 이인식(1932~ ?)이 있다. 1959년 5월 5일 부산에서 별세했다. 1963년 10월 26일 부산 신선대에서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했다. 묘지번호는 100291이다. 가족묘지 안에는 아내 이선화의 묘지는 없고 처 강숙채 묘지와 묘비가 서 있다. 비석으로는 가족관계를 밝힐 수는 없다. 1.4 후퇴 때 단신 월남하여 1955년 오류동에서 생을 마감한 후, 도산 안창호 이장 터 뒤에 묻힌 동생 이영학 묘역이 관리가 되지 않는 이유를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실마리가 잡혔다면 억측일까?

동생 이영학 묘지는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2020년 9월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 이태원무연합장분묘 정비하며 유관순 열사와 3.1운동 이화학당 6인 결사대인 김분옥 총경 무덤과 함께 정리하였다. 이영찬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중추원 부문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