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조각가 권진규
대한민국 사실주의 조각을 한 단계 끌어올린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한국 근대미술 3대 거장
권진규(權鎭圭, 1922.4.7.~1973.5.4.) 49주기
2009년 개교 80주년을 맞아 무사시노 미술대학은 본교 출신 중 권진규를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가’로 선정했다. 그해 10월 ‘권진규 회고전’을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무사시노 미술대학 미술자료박물관에서 열었다. 권진규의 작품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미술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초기 작품엔 석조가 많았고 그 이후엔 주로 점토를 구운 테라코타와 삼베에 옻칠을 바른 건칠로 환조 및 부조 작업을 하였다.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조각가 권진규는 1922년 4월 7일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권진규의 아버지 권정주는 와세다 대학 상과 출신이다. 권정주는 3층으로 된 서양식 건물의 양품점 「송도옥」을 운영했으며, 부동산과 건축업으로 황금정 지역을 재발견하는 등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어머니 조춘도 유복한 참봉가 출신으로 재능이 많은 현모양처로 2남 4녀 자녀 중 권진규는 차남이다.
권진규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흙을 만지기 좋아하였고 손재주가 뛰어났다. 장난꾸러기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1930년 4월, 함흥제1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1934년, 습성 늑막염으로 휴학한다. 고모부가 경영하는 노정의원에 장기 입원한다. 1937년 3월, 보통학교 6년 과정을 졸업한다. 함흥공립중학교의 수험에 응시하나 낙방한다. 가벼운 연성형 말더듬이증이 있어 이를 신경 쓰느라 길게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더듬이증이 치료된 후로는 이러한 증상도 없어졌고, 성격도 침착해졌다. 이즈음 아버지가 사 준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즐겼다.
1937년 함흥제1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기 좋은 춘천에서 병약한 몸을 요양하면서 1938년 춘천공립중학교를 입학하여 3학년 제3학기에는 총대표, 4학년 제2학기에는 급장, 5학년에는 기숙사 대표를 맡았다. 「책임감이 강하며 계속 노력함」이라고 평가받으며 통솔력도 인정받았으며, 1943년에 우등생으로 졸업식에서 도지사상과 우등상을 받았다.
춘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형 진원과 함께 일본에 갔다. 1943년 4월 미술연구소에 들어갔지만 곧바로 비행기 부품공장 히다치 다치가와 철공소(日立鐵工所)로 징용되었다. 1944년 가을 도망쳐 고향 과수원에 숨어 1년을 지냈다. 1946년 월남하여 서울 성북동에 머물며 이쾌대(1913~1965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김서봉·김숙진·임직순·김창열·심죽자 등과 함께 미술 공부를 하였다. 이때 이쾌대에게서 들은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1897~1981)의 이야기가 무사시노미술학교 진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1947년 김복진(1901~1940)의 유작인 속리산 법주사 대불 제작에 윤효중(1917~1967)이 이어받아 권진규도 조수로 6개월 참여한다. 1948년 야마가타현 사카타시의 대학부속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형 진원이 악성 폐렴을 간병하기 위해 밀항했다.
다음 해 형은 병사했지만 권진규는 일본에 머물러 1949년 동경 무사시노미술학교(武藏野美術學校) 조각조소과 입학하여 앙트완 부르델(Bourdell, E. 1861~1929)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사 문하에서 조각을 공부하여 1953년 졸업했다. 1953년 일본의 37회 이과전에서 석조 2점으로 최고상인 특대를 수상하여 그의 재능은 보여주었다. 무사시노미술학교를 재학 중 6.25 전쟁 시기라 집에서 보내던 학비도 끊겼다. 밤에는 마네킹 만드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1951년 이 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던 1년 후배 오기노 도모(荻野トモ, 1931~2014)에게 모델을 의뢰해 만나서 1953년부터 동거했다. 1955년 테라코타 작업을 시작하였다. 도모 여사도 남편을 도와서 아르바이트 미싱, 재봉, 봉제 등의 일을 했다. 권진규는 영화사의 부품 제작 일을 하면서 작업을 1957년까지 지속했다. 마네킹 공장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1959년 귀국할 때까지 하였다. 이때가 가난은 했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보낸 6년간이 권진규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9월 8일 오전 11시,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9번지에서 아버지 권정주가 급사했다.
1959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통지를 받자 권진규는 귀국을 결심한다. 형과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나 어머니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아직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도모와 함께 귀국하는 것은 곤란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생활이 안정되면 도모를 부르겠다고 하며 8월 6일에 네리마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한다. 9월, 하네다 공항에서 홀로 형 진원의 유골을 가지고 귀국한다. 1960년 4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비상근 강사로서 죽을 때까지 근무한다. 1961년 영화사 관계의 일로 알게 된 전화교환원과 재혼했으나 곧 이혼한다. 1963년, 덕성여자대학 의상과와 생활미술과에 조교수로 취임한다.
1965년 6년이 지나도록 엽서 한 장 보내지 않자 도모의 부모가 한국으로 이혼장을 보냈다. 4월 20일 권진규도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일본으로 보냈다. 그 후, 도모는 가사이 세고와 재혼한다. 1965년 서울의 신문회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졌으나 몇몇 뛰어난 감식가를 제외하고는 화랑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1966년 3월,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에 비상근 강사로 1968년까지 조각을 가르친다. 권진규는 제자들을 모델로 제작한 다수의 흉상을 볼 수 있다. 그중에 이 많이 알려졌다. 7월 어머니 조춘이 사망한다.
1968년 2회 개인전을 일본 동경의 니혼바시화랑에서 가졌다. 전시회 성과가 좋았으므로 모교인 무사시노미술학교 비상근 강사직을 협의했고, 화랑에서도 작품 제작을 후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제의를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개인전을 열고 있는 중에, 집안 조카인 화가 권옥연의 주선으로 옛 아내 도모 여사와 만났다. 도모는 권진규를 보자마자 "권상, 바보" 라고 소리쳤다. 1970년 화목한 가족을 희망하며 이화여자대학 영문과출신 여성과 재혼하지만, 곧 헤어진다. 막내여동생 권경숙 가족과 동거가 시작된다. 1971년 4월, 수도여자사범학교(세종대학교)에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게 된다. 1971년 명동화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초대 개인전 형식으로 제3회 개인전이 열렸다. 아틀리에의 벽에 「범인에게는 침을, 바보에게는 존경을, 천재에게는 감사」라고 쓴다. 자기 비판적이기도 하며 미술계 전체를 경멸하는 내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1973년 1월,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이규호 학예관이 고려대학교의 품의를 얻어 작품 2개를 15만원에 구입하였다. 그에게는 세상 살다보니 생긴 별일이었다. 와 이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가 따라갔다. 좋은 일이 이어졌다. 이규호의 소개로 알게된 박혜일(서울대학교 교수, 핵물리학)이 선뜻 7만원을 내놓고 소품 2점을 골라갔다. 1973년 5월 3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미술실 개막식에서 자신의 작품이 좋은 위치에 전시된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박혜일의 휘경동 집에서 안동림(고려대학교 영문과 강사), 김정제(수도여사대 미술과 학생)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5월 4일 오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재방문하여 미술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보았다.
권진규는 1973년 5월 4일 “경숙에게, 향후의 일을 부탁한다. 작지만 이것으로 후처리해 주세요. 화장해 모든 흔적을 지워 주세요” 동생 경숙에 남긴 유서와 “인생은 공(空), 파멸, 오후6시거사”이라는 짧은 문구를 박혜일과 김정제 두 친구에게 남기고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하여 망우리공동묘지 가족묘지에 묻혔다. 1974년에 명동화랑에서 1주기 추모유작전이 열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말〉·〈만남〉··· 등이다. 그 외 속리산 법주사 대불 입상 작업에 참여했다. 1967년 작인 〈지원의 얼굴〉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1959년 권진규가 직접 설계하여 2년여에 걸쳐 서울 동선동 3가 250번지에 지은 가마와 우물을 갖춘 작업실인 ‘권진규 아틀리에’는 독특함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에 등록문화재 134호로 등록되었다. 그 후 2006년 12월에 동생인 권경숙이 (재)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 시민문화유산 제3호가 되었으며, 기증을 통해 확보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운동의 문화유산 보존 좋은 사례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조각가 권진규의 유작 718점이 17년 전부터 떠돈 이력이다. 권진규기념사업회(대표 허경회)가 2004년 미술관 건립을 전제로 하이트에 작품 양도하였으나 2010년 하이트와의 이견으로 작품 돌려받았다. 2015년 다시 권진규미술관을 설립을 전제로 대일광업에 작품 양도하여 2018년 미술관 건립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대일광업(대일생활건강) 상대로 미술품 인도 청구 소송 제기했다. 2020년 8월 유족 승소하여 9월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 계획 발표했다. 11월 초 작품 8점 케이옥션에 출품하였다 11월 25일 경매 당일 출품 철회했다. 권진규의 누이 권경숙과 권진규기념사업회가 2021년 유작 대부분과 일본에서 회수한 권진규의 초기작품들을 모아 2021년 1월 28일 기증한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 근대조각 거장 권진규 상설전시장을 내년 남서울미술관에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권진규기념사업회는 권진규 사이버 미술관http://www.jinkyu.org/cyber_museum/intro.php을 운영하고 있다.
권진규 작품의 이력만큼이나 망우리공원 권진규 묘지(No.201743)를 찾아가기 쉽지 않았다. 지석영 묘지에서 출발하여 구리둘레제1길에 들어서 구리시 쪽으로 100미터 걸으면 소나무 한 그루에 권진규 묘지 가는 길이라고 안내문이 매달려 있었다. 안내문이 중간중간 걸려 있다. 한여름 나무가 우거지면 몇 번을 돌다가 찾아간다. 중랑구청에서 2022년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진입로를 낼 계획이다. 가족묘지로 가운데 부모님 합장묘를 중심으로 우측에 형님 좌측에 권진규 묘지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잘 자라고 있다. 9부 능선 북서향이다.
2022년 3월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가족묘지를 단장하고 사색의 길에서 묘소까지 진입로를 정비하며 야자 매트를 깔고 새로운 답사길을 뚫었다. 답사길을 넓히며 배수로를 중간중간 확보하여 장마와 국지성 폭우를 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권진규 가족묘지를 답사한 분들의 의견은 원형은 보존하고 주변 묘지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쉬워한다. 지난 4월 1일 ‘중랑망우공간’ 준공식 하기 전에 군대 입대하는 제자와 망우리공원 참배하며 권진규기념사업회 허경회 대표와 묘지에서 만나 인사를 나눴다. 4월 9일 오후 2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특별 도슨트 운영-나의 외삼촌, 권진규’를 진행하는 허경회 대표의 해설을 들었다.
중랑망우공간 개관식 기념으로 권진규기념사업회에서 권진규자소상을 기증하여 전시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의 안내문을 바탕으로 전시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시립미술관(관장 백지숙)은 2022년 3월 24일(목)부터 5월 22일(일)까지 총 60일간 서소문본관에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를 개최한다. 2021년 (사)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의 작품 기증(총 141점) 그리고 2022년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전시를 마련하고 유족의 큰 뜻을 기리고자 한다. 전시 제목 ‘노실의 천사’는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 연재 기사 「화가의 수상」⑧에 실린 권진규의 시, 「예술적藝術的 산보_노실爐室의 천사天使를 작업作業하며 읊는 봄, 봄」에서 인용했다. 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이 시에서 ‘노실의 천사’는 가마 또는 가마가 있는 방으로 아틀리에의 천사, 즉 그가 작업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순수한 정신적 실체로 볼 수 있다.
권진규는 흔히 리얼리즘 조각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 영원성이었다. 권진규는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종래에는 이를 무화無化하는 작품, 즉 그의 시구,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에 화장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구현하고자 했다.
- 한국과 일본 조각사에 있어 중요하게 평가되는 권진규 작가 탄생 100주년과 서울시립미술관 작품 대량 기증 기념 전시다.
- 3월부터 5월까지 서울 전시 후 7월부터 10월까지 광주 순회전으로 기획했다.
- 1950년대 주요 작품과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각,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240여 점을 선보이는 최대 규모 전시이다.
- 권진규의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전시를 입산, 수행, 피안으로 구성하였다.
- 작가 아틀리에와 첫 개인전에서 영감을 받은 전시 공간, 창작의 흔적이 담긴 아카이브, 만질 수 있는 드로잉 북, 유족 특별 도슨트 등 작가의 작품세계에 몰입하는 경험 제공하고 있다.
본 전시는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 연재 기사 「화가의 수상」⑧에 실린 권진규의 시 「예술적藝術的 산보_노실爐室의 천사天使를 작업作業하며 읊는 봄, 봄」을 바탕으로, 작가의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하여 시기별로 입산(入山, 1947~1958), 수행(修行, 1959~1968), 피안(彼岸, 1969~1973)으로 전개된다.
입산: 1947년 성북회화연구소 시절부터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수학, 연구생활을 하던 시기로, 일본 최고의 재야단체 공모전인 니카전에서 특대를 수상하면서 미술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결실을 이루었다.
수행: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국해 손수 아틀리에를 짓고 하루를 아침, 오전, 오후, 밤으로 나누어 아침과 밤에는 구상과 드로잉, 오전과 오후에는 작품을 제작하는 등 수행자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반구상의 부조작품과 독자적인 여성 흉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피안: 전통 재료인 건칠을 독자적인 방법으로 이용하여 건칠작품에 매진했으며 1971년 불상, 비구니 등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좌절하면서 작업보다는 불교에 침잠하다가 원하는 일들이 무산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시공간은 권진규의 아틀리에와 1965년 신문회관에서 개최한 1회 개인전 작품 전시 방식에서 영감을 얻어 삼공블록과 벽돌을 이용해 우물과 가마를 형상화하여 마치 관람객이 아틀리에에서 그의 작업세계 전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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