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춘파 서동일

정종배 2022. 4. 27. 06:13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다물단 서동일

부인 묘에 이장하여 본인 묘비가 없는 국민당 재정부장 다물단 애국지사
춘파(春波) 서동일(徐東日, 1893~1965) 57주기

1893년 12월 25일에 경북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23번지에서 태어나, 1965년 4월 26일 서거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으로 호는 춘파이다. 1923년 1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남형우·배천택, 김천택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민당 뒤에 다물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재정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1월 국민당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경북 대구 일대에서 군자금 1,300여원을 모집하여 같은 해 2월경 북경에 전달하고, 1925년 1월에 재차 남형우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4월 무언실행(無言實行)을 행동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했다. 주요 인물로 한진산, 유청우, 서왈보, 김세준, 서동일 등이었다. 영남 출신 청년들 40~50명이 참여했다. 다물단 창립선언문을 단재 신채호가 작성했다. 다물단은 “자연에서 문화로, 의뢰에서 독립으로 가기 위해 스스로 닦고 기르고 자작자급하며, 공존공영의 사회성을 기초로 계급적인 구생활을 변혁시키고, 전세계 약소민족의 해방 운동과 동일한 보조를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물단 조직 결성 후 곧바로 첫 거사가 실행됐다. 단원 황익수와 이호영 등이 의열단원 유우근(유자명) 등과 함께 베이징에 머물던 친일파 밀정 김달하를 척살한다. 서동일은 그해 5월 다물단 선언서와 특파원 신임장을 지니고 세 번째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북도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다가 11월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6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죄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를 계기로 남형우, 배천택, 윤영섭, 윤병래, 윤병일, 최성희, 이종호 등도 함께 붙잡혔다. 그 후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 1927년 10월에 가출옥 하였다.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제주도에 거주제한 조치를 받고 곤궁하게 지내다가(이 내용은 시기가 맞지 않아 보훈처 공훈록 오류 신고를 하였다) 8.15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한민당이 임시정부 외 어떤 단체의 정권 참칭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성명서에 서동일의 이름이 보이는 것 외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965년 4월 26일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동일 독립지사는 서거한 지 약 30년 뒤인 1995년 7월 14일에서야 이장하여 망우리공원 부인 최옥경 여사와 합장(묘지번호 107266)했다. ​묘비 +최옥경(1891~1950). 2017년 묘역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6호로 등록되었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일방통행길 시인 박인환 연보비에서 300미터 걸으면 왼쪽에 서동일 연보비를 읽을 수 있다. 핏방울 모양의 연보비 앞면, 서동일 선생 (1893~1966, 독립운동가) 다물(多勿)이란 옛땅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용감(勇敢), 전진(前進), 쾌단(快斷), 등의 뜻과 함께 불언실행(不言實行)을 의미한다. 「다물단」의 의미

입 다물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나라를 되찾자는 의미의 불언실행 해야 하는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 계층,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을 갈라치기와 혐오와 조롱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세력들이 득세하는 현실에서 다물단의 의미를 되새겨 입 다물고 실천하여야겠다.

묘역은 오재영 연보비 전 오른쪽 오솔길 따라 450m 떨어져 있다. 망우리공원 독립지사 묘역 중 사색의 길에서 출발하여 참배하기 쉽지 않고 연보비에서 유택까지가 미로 찾기보다 어려웠다. 막상 묘역 앞에 서면 당혹스러웠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친일 친미 집안은 적어도 3대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항왜 항미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거지 노릇을 한다는 말이 맞았다. 친일과 항일의 간극을 되새기는 독립지사 서동일 묘지의 상태였다. 본인 이름 묘비명을 갖지 못한 채 부인 품 안에서 27년이 흘렀다. 봉분은 헐벗고 시멘트로 제작한 조그마한 상석과 최옥경 묘비도 짠하게 서 있다. 현재는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이정표와 야자 매트 봉분 및 묘역 등을 세우고 정비하여 찾아가 참배하는데 쉬워졌다.

망우리공원 답사를 서동일 독립운동가 묘역부터 시작하려면 동부제일병원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신원아파트 담장을 지나 오른쪽 망우산 오솔길을 200미터 오르면 우측에 서동일 안내문이 서 있다. 서동일 참배 후 다시 올라 망우산 쪽으로 오르면 오재영 이중섭 묘역을 답사할 수 있다.

우백호 삼형제 바위를 감싸고 서 있는 벚나무는 병이 걸려 혹부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눈을 주기 어렵다. 풍찬노숙 떨어져 지낸 세월을 꼭 붙드는듯 수구막을 굳건하게 지키는 왕버들나무와 은사시나무가 연리지로 위로하며 포효하고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연리지는 세 번이나 단단하게 한 몸을 이뤄 천(天)·지(地)·인(人) 조화인지 쉽게 보지 못하는 보기 드문 풍정이다. 살아생전 못다 한 정을 연리지와 삼형제 바위와 벚나무가 꼭 끌어안고 막아서 철따라 꽃들이 피고 진다.

국무총리의 조화를 바치는 마음과 서울시장 각별한 관심과 중랑구청장 공약의 실현으로 봉분 앞 꽃병에 꽂은 붉은 조화처럼,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과 청소년들의 나라 사랑 활동으로 정체성 확립의 교육장으로 사계절 변함없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