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명재 이탁

정종배 2022. 4. 24. 08:39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명재 이탁

청산리대첩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명재(命齋) 이탁(李鐸, 1898.6.2.~1967.4.24.) 55주기

이탁은 1898년 6월 2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137번지에서 충장공 이조윤의 장남으로 태어나 1967년 4월 24일 생을 마감했다. 이명은 이씨종(李氏鍾)이었다. 호는 명재 또는 월양(月洋)이다. 한글학자 이갑(李鉀)의 형이다. 8세 때에 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6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국어학자 장지영 선생의 조선어문법 수업을 들었다. 교재는 김두봉의 『조선말본』(1916년 간행)이었다.

1919년 3.1혁명 후 집안현을 건너가 만주로 망명하여 조맹선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왕청현 대감자에 거주하는 공자교회의 유력자 김승과 협조하여 보황단을 조직하고, 그 취지문을 함북 온성 지방에 배부하여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무산과 간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사관연성소 3개월 간부 훈련을 마친 후 4월 각지에서 응모한 300여 명 훈련을 맡아 지도하는 특무반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청산리독립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어떤 작전 중 본대와 연락 두절 되었던 이탁이 속한 부대가 해산되고 본대가 시베리아로 가버려 복귀를 단념하고 수습 요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9월에는 길림에서 교성대를 편성하게 되자, 대장에 나중소, 부관에 최준형, 중대장 이범석, 그리고 소대장에는 그와 이민화·김훈·남익 등이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2년 무송현 흥업단(윤세복)의 군사교관 초빙받아 전성호와 함께 갔으나 곧 그만두고 1923년에는 길림성 화전현 거주 교포들의 교육기관인 화림의숙에서 1년간 교사를 지냈다.
1924년 9월 돈화현 이흥래의 부탁으로 신민단사 보급 판매 위해 용정에서 불신검문 불온자료 소지로 20일 구류처분 독립군 전력 발각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6년 12월 15일 가출옥하였다.

곧바로 양평으로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국어학 연구에 몰두하다 1928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9년 한글발음 표기방법과 조선문의 맞춤법 등을 연구 발표하였고 1932년 조선어학회원으로 가입하여 철자위원 및 조선어통일제정위원 사정위원 및 이사 등에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 10월 29일은 당시의 한글날이었다. 이날 조선어학회는 한글반포 487돌을 기념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어연구회가 1930년 12월 13일 총회를 열어 대한제국기의 한글 연구를 기초로 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아래 ‘통일안’)을 제정할 것을 결의한 지 3년 만이었다.
통일안 제정을 결의한 조선어연구회는 적극적인 사전 편찬 작업을 위해 1931년 1월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인 ‘조선어학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32년 12월에 통일안의 원안을 발표하였다.
원안 작성에는 권덕규·김윤경·박현식·신명균·이극로·이병기·이윤재·이희승·장지영·정열모·정인섭·최현배 등 12명이 참여하였는데 뒤에 김선기·이갑·이만규·이상춘·이세정·이탁 등 6명이 증원되어 원안을 심의하였다. 원안은 2차례의 수정을 거쳐 이날 최종안이 발표된 것이다.

망우리에 박현식·신명균·이탁 세 분이 묻혔다. 신명균 선생은 2003년 무연고 묘지로 서울시립 용미리묘지에 옮겼는데 실전되었고 이탁은 대전현충원에 1992년 안장되었다. 명재 이탁의 동생인 이갑 선생도 형님과 함께 ‘한글 맞춤법 통일안’ 원안을 심의하였다. 김윤경 선생은 추담 허연 선생과 인왕산 아래 서촌 이웃에 거주하며 교류하였다.

1936년 부친의 중병으로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우리 민족 고유의 한글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8.15 광복 후 1945년 9월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부임했고, 1961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학생들에게 국어학을 가르쳤다. 또한 「언어상으로 고찰한 선사시대의 환하문화(桓夏文化)의 관계」, 「어학적으로 고찰한 우리 시가의 원론」, 「한국어와 중국어에 공통한 계통적 음운법칙」, 「향가신해독(鄕歌新解讀)」 등 7편의 논문을 모아 회갑기념논문집인 『국어학논고』(1958)를 출판했고, 「언어상으로 고찰한 우리 고대사회상의 편모」, 「국어 어원풀이의 일단」, 「‘·’음가의 새로운 고찰」 등을 발표했다. 1961년 정년 퇴임 후 서울에 거주하다가 1967년 4월 24일에 69세의 나이로 서거하여 4월 27일 망우리에 묻혔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2년 7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 1-389)으로 이장하고 묘비와 상석이 남아 있다.

묘비 앞면, 命齋慶州李鐸先生之墓. 묘비 뒷면, 여기 젊음을 독립군에 불사르고 남은 생을 오로지 교육과 연구에 바치신 지사적 학자가 고이 누워 계시다. 선생은 경기도 양평 용문산의 정기를 받아 한말의 풍운 속에 소년 시절을 보내시고 잃은 나라 되찾으러 온 겨레 일어선 기미의 해 약관의 몸으로 북로군정서의 사관생도가 되사 청산리 전역에 참가 이년여의 옥고를 겪으시고 이후 한글학회, 정주 오산학교, 서울사대에서 국어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몸 바치시다가 뜻하신 바 다 이루지 못하시고 세상을 뜨시었다. 고고하신 생애에 빙탄불용의 엄하심이 있으시고 독창성에 차신 학풍은 후지자운後之子雲을 기약하시던 뜻 길이 받잡고자 오늘 이 주기를 맞이하여 여기 조찰히 몇 자를 새기어 삼가 세우다. 서기 1969년 4월 24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문하생 일동

묘비 옆면, 萬里天涯一擧頭 雲山漠漠路悠悠 一窓寒月家鄕夢 萬葉秋聲異域愁 報國未報平日志 離親德切暮年憂 仰天長訴天無語 獨坐中宵淚暗流. 一九二一年 辛酉 敦化 遺作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쉼터와 이병홍 묘역을 지나 일방통행 삼거리에서 용마산 쪽으로 서울둘레길 제2코스 가운데 가장 힘든 등산로인 용마산과 아차산을 향하여 500여 미터 직진하면 구리시 아치울과 서울시 사가정역의 갈림길 사거리가 나온다.
사가정역을 향해 깔딱고개 쪽으로 몸을 돌리면 우측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할 때 세워 두고 간 명재 이탁의 묘비와 상석이 수풀 속에 어렵게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사라졌으나 묘비와 상석을 통해 독립운동가이자 서울대 교수의 삶을 읽을 수 있다. 그 갈림길이 사람들의 잠시 쉬는 곳이다. 특별한 관심으로 답사한 사람이 아니면 묘역에는 관심이 없다. 명재 이탁 독립운동과 삶의 내력을 안내하는 안내판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망우리공원에는 한글 보급에도 힘써 (1905) 6개조를 상소하고,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는 등 국문 연구에도 공적 있는 지석영 선생이 가족묘지에 유택을 마련했다. 신명균·박현식·이탁 등 세 분은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작성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글이 체계화되고 보급될 수 있도록 노력한 이종일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당시 서울 인구 30만명의 1/3인 10만부를 발행한《어린이》잡지를 통해 한글 보급에 지대한 공헌한 소파 방정환의 묘역은 새롭게 단장했다. 박승빈 변호사는 《정음》을 발행하며 한글 연구의 한 축을 이뤘다. 설태희 설원식 부자는 큰사전 편찬에 후원금을 냈다. 조선의 유일무이 천재 식물분류학자인 장형두 서울대학 사범대학 부교수는 외솔 최현배 선생과 교류하며 식물 이름 짓기를 순우리말로 짓고 부르기를 고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