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4월 21일 과학의 날과 4월 22일 지구의 날
종두법 지석영, 세브란스의전 3대 교장 국회부의장 이영준, 화신백화점 보화각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 국채표, 조선 유일무이 천재 식물분류학자 장형두, 운명할 때 26개 직함 명함 콩박사 김호직, 대한중석 초대 사장 안봉익 등
2022년 4월 21일은 55회 과학의 날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 대중적 확산을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이지만 비공휴일이다.
4월 22일은 52주년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제정한 세계 기념일이다. 대한민국은 ‘기후변화주간’으로 지구의 날을 기념하고 전국지구 소등행사를 포함하여 다양한 참여 방법과 이벤트로 제14회 기후변화주간을 치른다.
내 개인적으로 ‘대중교통 이용하기, 산보하며 쓰레기 줍는 플로깅하기, 일회용품 쓰지 않기, 비닐봉지 대신 용기내챌린지’ 등을 실천하여 뜻깊게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자와 과학 아카이브』(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2001)는 "100인의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자"를 정리했다.
망우리공원 인물만 소개한다. 선구자: (의약학) 지석영(종두법), 교육자: (의약학) 오긍선(세브란스 의전 초대 한국인 교장), 산업가: (이공학) 박길룡(화신백화점 설계자. 2012이장), 정책가: (의약학) 이영준(세브란스의전 3대 교장, 국회부의장), (농수산학) 김호직(콩박사, 문교부 차관) 등이다.
대한중석 초대사장 안봉익은 (매경/서울공대, 2006) 선정되었다.
우리나라 기상학 최초 이학박사를 취득한 국채표 제2대 중앙관상대장 및 한국기상학회 초대회장은 한국 기상학 기틀을 확립한 공로로 2017년 첫 과학기술유공자 32인을 지정한 이후 올해 지정된 9명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69명의 과학기술인이 과학기술유공자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가 찰스 다윈의 기일을 기념하여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제정하여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과학의 대중화를 통해 민족의 역량을 제고하고자 한 바 있다.
김용관 박길룡 이인 등이 설립한 발명학회는 1933년 6월 학회 기관지로 월간 종합과학잡지 《과학조선》을 창간했다. 발명학회와 과학지식보급회의 주도자였던 건축가 박길룡은 망우리에 묻혔다 이장했다.
현행 과학의 날은 1968년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과학기술처 발족일인 4월 21일로 지정되었다
『과학조선』의 편집진과 필진에는 당시 과학운동을 주도했던 기술자, 발명가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저명한 문인, 종교인, 정치가를 망라했다. 발명학회와 과학지식보급회의 주도자였던 김용관, 박길룡을 비롯해서 안동혁, 윤주복과 같은 과학기술자, 심승택과 같은 발명가, 현상윤, 김동성, 이인, 김창제, 이춘호와 같은 사회 명사가 기사를 썼다.
필진의 다양성을 반영하듯, 기사의 내용도 발명과 특허에 관한 전문적 기사를 비롯해서, 화보, 과학상식, 생활과학, 공상과학소설과 같이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대중적 기사들, 민족의 근대화에 과학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려는 계몽적 기사 등 다양한 내용을 포괄했다. 1939년 속간 이후에는 당시의 군국주의적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일제의 정책에 편승하는 내용, 일본어로 된 기사들도 많이 실렸다.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중 과학의 날과 관련된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0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고, 1913년천연당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을 병설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고아원 양로원 최초 설립자 연세대학 의과대학 기틀 다진 피부의학 분야 선구자 해관(海觀) 오긍선(吳兢善, 1878~1963)
해관의 장남 오한영(1898~1952)이 세브란스 교수와 병원장을 역임했다. 6.25 한국전쟁 때 국립경창병원장을 거쳐 제2대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다 과로로 55세로 아버지보다 먼저 별세
오한영의 장남 오중근은 국립마산결핵병원장을, 차남 오장근은 국립철도병원장과 국립서울병원장을 지냈다. 3대에 걸쳐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3대에 걸쳐 의사로서 공직을 역임하고 퇴직 후에도 개업하지 않았다.
해관은 “의료가 축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개업의가 한 사람 늘면 그만큼 조선에 가난한 사람이 더 생긴다”며 “서양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청년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항차 우리나라 청년교육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개업을 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이다”라고 한때 개업의 뜻을 비친 장남 오한영 박사를 크게 나무라 하였다.
5대 의사 집안, 한국에 처음 종두법 도입 실시, 근대 의술과 한글 연구와 활용 선구자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1855∼1935)
조선총독부 기사 농상공부 산림과장 영림창장, 포플러 아까시나무 도입 식목일 제정 사이토 오토사쿠(齊藤音作, 1866~1936)
개화기 선각자 설태희(1875~1940) 장남 설원식의 딸 순봉(薛順鳳)은 서울대 영문과 출신의 영문학자이며, 그녀의 남편은 김우창(金禹昌) 고려대 명예교수다. 설순봉·김우창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자녀 모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장녀 김 마가레뜨 윤미는 뉴욕주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남 김준형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생물학과장이자 컴퓨터공학과 겸임교수다. 차남 김민형 교수는 세계적 수학자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영국 워릭대학 수학과 및 수학 대중교육 석좌교수다. 2012년 호암과학상을 받았다. 차녀 김윤형은 케임브리지대학 수학박사로, 지금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3남 시인 설정식의 둘째 아들 설희순은 서울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전무로 초창기 삼성전자 기술 발전에 공헌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인 남파 박찬익(1884~1949) 독립운동가는
1908년 상공학교의 후신인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 염직과에 입학하였다. 공업 연구와 발전에 선두 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학생들과 함께 공업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신규식(申圭植), 김택영(金澤榮), 양기탁(梁起鐸) 등 유지 인사들이 이들의 취지에 공감하고 찬성원이 되어 후원해 주었다. 이때부터 신규식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공업계』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활동하였고 1910년 졸업하였다.
상해임시정부 보안책임자이며 아들 나성돈과 2대 독립운동가 별산(鱉山) 나우(羅愚, 1885~1960) 미서훈
나우의 둘째 아들 나성돈 독립운동가는 1924년 7월 4일 상해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 나우는 임시정부 보안책임자였다. 나성돈은 20대에 부친에 이어 중국의 농촌인 ‘푸앙’에서 1945년 광복 직전까지 제3지대 특수부대 일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의 해방을 위해 미국정부와 전략을 짜며 현 중앙정보부(CIA)의 원형인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y Service)에서 파견된 직원에게 무전통신을 전수받기도 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가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조선 총독부 산림과 고원 및 기사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
경제학자 교육자이며 “도산 선생 발치에 묻어달라” 유언한 추담 허연(1896~1949) 선생 3남 허달은 서울대학교 화학공업과 졸업하고 SK그룹사 부사장 / SK Academy 교수(기업문화, 수펙스추구, 리더십), 세계적 에너지/화학 컨설턴트 Nexant(ChemSystems)한국대표, 한국화인케미칼, M&H Laboratories, Ace Bioech, CEO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제3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및 병원장, 국회부의장 행농(杏儂) 이영준(李榮俊, 1896~1968)
한국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과 최초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 부부 노창성(盧昌成, 1896~1955) 이옥경(李玉慶, 1901~1982) 둘째 딸 노명자 대한민국 1호 패션디자인 노라노이다.
경성의전 제1회 입학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비서 경성의전 졸업후 경성의전 교수로 국민 보건위생 계몽에 헌신 독립운동가 태허(太虛) 유상규(劉相奎, 1897~1936)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다진 조선 건축가 일송(一松) 박길룡(朴吉龍, 1898~1943)
박길룡은 1931년 경성제국대학 본부(총독부하 공동설계)·1931년 동일은행남대문지점·1934년 한청빌딩·1935년 화신백화점·1937년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 및 강당·1940년 평양 대동공전 교사·1943년 혜화전문학교 본관·1943년 이문당 사옥·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등을 설계했다.
박길룡은 저술활동도 활발하여, 『조선과 건축』에서 김윤기와 쌍벽으로 가장 많은 글을 실었는데, 이들 글에는 구조·의장·고건축·설비 등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1930년부터는 작고하기까지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기고하였고, 《과학조선》에서 편집을 했고, 《도시의 건축》에서도 많은 글을 기고했다. 이외 단행본 『제래식 주거 개선에 대하여』를 내었다. 1941년 4월 14일엔 타블로이드식 월간신문 《건축조선》을 창간했는데, 이는 조선인 건축가에 의한 최초의 건축 잡지였다. 그의 상업건축물에서는 건축의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볼 수 있으며 주거 공간에 관한 관심에서는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건축 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잡았다.
1943년 4월 27일 공평동 사무실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해 망우리공원(묘지번호 109709)에 묻혔다. 2005년 2월 개인묘지로 이장했다. 음악평론가 박용구가 그의 장남이다.
성북동 보화각(간송미술관)·경운동 민병옥 가옥·월계동 각심재 등이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한 건축물이다.
김활란 박사가 금란교회 설립의 금란지교, 대한민국 최초의 간호사 해외 유학생으로 간호사 1호 이정애(李貞愛, 1901~1954)
간토대지진 참상을 보고 경제학에서 민속학으로 공부를 달리한 대한민국 민속학의 태두 최초 영상민속학 자료를 남긴 석남 송석하(1904~1948)
콩박사 한국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첫 침례 신자 선종할 때 26개 직종 명함 김호직(金浩稙, 1905~1959)
1949년 2월 정부 파견 제1호 유학생으로 도미, 1950년 2월 코넬(Cornell) 대학에서 영양학석사(M.N.S.) 학위를 이어 1951년 귀국 9월 동 대학원에서 논문 『콩단백의 영양학적 연구』에 의해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부산 수산대 학장에 취임, 1953년 2월 국민 영양 계몽·개선·농사교육 보급에 공헌하여 대통령상을 받고, 그해 3월 연희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5년 3월 교육부 차관에 취임, 1956년 11월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UNESCO) 제9차 총회에 정부 대표로 참석하고, 서울대 대학원 생화학 강사·학술원 회원·유네스코 한국 집행 위원·서울시 문화 위원·한국 생물 과학 협회 부회장·한국 영양 협회장·도의 생활 연구회장·창신육영회 이사장·한글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선종 당시 명함에 26개 직함이 기록되어 있었다.
간토대지진 참상을 목격한 조선 유일무이 천재 식물분류학자 좌익분자로 몰려 경찰의 고문에 억울하게 죽어 해원 해야 하는 장형두(張亨斗, 1906~1949)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 한국 최초 기상학 이학박사 한국기상학회 창립 초대회장 제2대 중앙관상대장 국채표(鞠採表, 1906~1967) 후손 중 둘째 아들 국정련의 둘째 딸인 국미여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 대학 할아버지와 같은 기상학 분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제3대 보건사회부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의사이자 행정가 정촌(靜村) 손창환(孫昌煥, 1909~1966)
대한중석 초대 사장 안봉익(安鳳益, 1910~1957)
대한중석 초대 사장 안봉익의 이력을 새긴 묘비의 한자를 한글로 풀이하여 소개한다.
단기 4243년(1910) 12월 27일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 승암리 327번에 출생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학교 공대 전신) 광산과를 필하여 이래 광업계에 투신 지하자원 개발에 필력한지 20십여 년으로 해방 후 4279년(1946) 9월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 이사 4285년(1952) 2월 동회사 사장으로 피임하여 한국중석광업의 지위를 세계적으로 유명케 하였으나 4290년(1957) 8월 9일 순직함 그의 유족에 영규 마옥순 여사 영식 택준 용준 및 영애 율자 요자 광혜 영혜가 유함 상공부직할 대한중석과업주식회사 상무 취체역 단기 4290년 8월 15일 건립
대한중석 회사 소개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도, 당시 대한민국 유일의 외화벌이 국영기업이자, 회사의 수출액이 국가 전체 수출액의 약 60%까지 차지한 거대 기업이었던 대한중석의 역사는 1916년 4월, 강원도 영월의 상동 광산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어느 기업체보다도 큰 자금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계 최대의 단일광구였던 상동 광산과 달성 광산을 주축으로 전 세계 중석 시장의 8%, 자유진영 공급량의 10~20%까지 담당하고 있었기에 대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0년대에 뉴욕과 런던, 그리고 동경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영업을 확대시켰다.
1968년 4월, 대한민국 정부의 합작투자로(정부 75%, 대한중석 25%) 포항종합제철을 설립하였다.
2021년 5월 문재인 대통령 방미길 경제인으로 동행하여, 22일 오전(현지시간) 워싱턴 한 호텔에서 열린 '한미 백신 기업 파트너십 행사'에서 스탠리 어크 노바백스 CEO가 안재용 SK바이오사이언스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안재용 대표는 안봉익의 손자이다.
《개벽》《어린이》《청춘》《신청년》《박문》 등 잡지 편집 및 발행에 힘쓴 소파 방정환 및 영주 최신복
연극과 영화 관련 나운규, 안석영, 노필, 함세덕, 이광래, 박인환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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