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건축가 일송 박길룡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다진 조선 건축가
일송(一松) 박길룡(朴吉龍, 1898~1943) 79주기
1898년 11월 20일 서울 종로구 예지동 278번지 현재 종로 4가의 상가 밀집 지역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부친은 영세한 미곡상 박명옥이다. 집이 어려워 10세가 되어 물장수, 쌀 배달 등으로 학비를 대어 신흥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박길룡이 "그 당시만 해도 사공농상의 관념이 잔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건축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단시되었으나 둘이서 타협 끝에 내가 공업전문 입학원서 2장을 사다가 같이 써낸 것이 건축 공부의 시초가 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김정현, 이기인과 아울러 한국인 최초로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제국대학 전신)에 입학한 박길룡은 재학 내내 급장을 도맡았다.
1919년 3월 15일 제2회로 경성고공을 졸업한다. 1920년 12월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이것은 판임관이라고도 한 하급 관리직이었다. 총독부에 배치된 박길룡은 조선총독부 청사의 신축공사의 실무자로 참여했다. 1920년에서 1932년까지, 기수로 있은 12년 동안 박길룡은 나름 일본인에게 역량을 인정받았다. 특히 설계도면을 빠르고 정확히 그려내는데 놀라움을 샀다. 1927년 일본에 출장을 다녀오고, 1932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승진하였다. 이것은 건축물을 세우는 관에 있어선 최고기술자를 이르는 관명이었다.
그러나 이틀 만에 기사직에서 물러앉아 1932년 7월 7일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설하는데, 주소는 관훈동 197번지였다. 박길룡은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건축가들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1938년 사단법인 조선건축회 이사가 되었고, 1941년 경기도 건축대서사(현 건축사협회)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조선주택영단에 참여하였고,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1943년 조선수리조합회 건축사무 촉탁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최초로 서구식 건축술의 전문교육을 받은 건축가였다.
박길룡의 사무실은 개인의 역량을 바탕으로 건축 활동을 전개했고, 1920년대 말에 성장한 몇 개 기업의 당시 일어났던 한인 상업자본가의 건축 붐에 따라 촉탁을 받았으나 1930년대 들어 전시체제에 돌입되다 보니 일은 제한되었다. 1941년 내선일체를 추진하고 일제에의 멸사봉공을 촉구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중앙조직의 사무국 문화부 위원에 위촉되었다. 문화부 산하 연락계는 학술·교화·예술·출판·생활 부문으로 나눴다. 박길용이 있던 생활 부문에서 그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1943년 견지공평정회의 정총대가 되었다.
박길룡은 1929년 김연수 주택·1930년 조선생명보험사옥·1931년 경성제국대학 본부(총독부와 공동설계, 현 예술인의 집)·1931년 동일은행 남대문지점·1934년 한청빌딩·1935년 화신백화점·1936년 최초 소아과의사인 구영숙소아과의원·1937년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 및 강당·1940년 평양 대동공전 교사(김일성대학 통합)·1943년 혜화전문학교 본관·1943년 이문당 사옥·현재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순종의 장인이자 친일파 윤덕영의 사위인 김덕현의 주택) 등을 설계했다.
박길룡은 건축가로 활동하던 초기부터 과학대중화 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24년에는 경성공전 출신의 김용관을 중심으로 발명학회(후신은 1935년 설립된 과학지식보급회)가 창립되었는데, 박길룡은 발명학회의 창립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33년 6월에 발명학회가 《과학조선》을 창간했을 때 박길룡은 ‘발명학회 이사장’이란 직함으로 창간사를 쓰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과학조선》을 통해 지구의 역사, 우주론, 생활의 과학화 등에 관한 글을 썼다. 박길룡은 《과학조선》에 자신의 건축사무소에 대한 광고도 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발명학회에 기부금도 내놓았다. 특히 1934년에 거국적으로 ‘과학데이’ 행사가 열렸을 때 박길룡은 200원을 기부했는데, 그것은 《과학조선》 잡지 1,000부의 값에 해당했다. 윤치호와 이인이 300원씩을 내었으며, 박길룡은 최대 기부자 3등에 들었다.
박길룡은 저술활동도 활발하여, 『조선과 건축』에서 김윤기와 쌍벽으로 가장 많은 글을 실었는데, 이들 글에는 구조·의장·고건축·설비 등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1930년부터는 작고하기까지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기고하였고, 《과학조선》에서 편집을 했고, 《도시의 건축》에서도 많은 글을 기고했다. 이외 단행본 『제래식 주거 개선에 대하여』를 내었다. 1941년 4월 14일엔 타블로이드식 월간신문 《건축조선》을 창간했는데, 이는 조선인 건축가에 의한 최초의 건축 잡지였다. 그의 상업건축물에서는 건축의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볼 수 있으며 주거 공간에 관한 관심에서는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건축 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잡았다.
1943년 4월 27일 오전 이화여전에서 강의 중 뇌일혈로 쓰러져 공평동 사무실로 옮겼으나 생을 마감해 망우리공원(묘지번호 109709)에 묻혔다. 2005년 2월 개인묘지로 이장했다. 음악평론가 박용구가 그의 장남이다. 그는 “아버지와 같이 길거리에 나서면 몇 걸음 못가 계속 아는 분을 만나 동행에 짜증이 나곤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박길룡은 사망 직전까지 '조선어 건축용어집'의 발행을 위해 110장 가량의 미완성 원고를 작성해 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길룡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43년 5월에 조선건축회는 《조선과 건축》 특집호를 통해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그의 분신에 다름없는 박길룡건축사무소는 후배인 김세연에 의해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1945년까지 운영되었다.
안타깝게도 박길룡의 대표작인 화신백화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최초의 근대적 건축교육을 받은 한국인 건축가의 작품이지만 역사적 유물로 지정되지 못했던 것이다. 김정동 교수를 비롯한 여러 건축인들은 ‘화신백화점 보존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화신백화점은 1988년에 서울시의 종로도로확장계획에 따라 모두 헐리고 말았다.
성북동 보화각(간송미술관)·경운동 민병옥 가옥·월계동 각심재 등이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한 건축물이다. 1928년~1930년경 유물 수집을 시작하며 간송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유물을 제대로 수장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꾸리고자 1934년 성북동 97번지 일대 1만여평 부지를 한양에 살던 프랑스 무역상 블라상으로부터 매입했다.
간송의 스승 위창 오세창 선생은 선잠단의 북쪽에 있는 이 부지에 북단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북단장은 우리 문화재의 수장, 연구, 공개를 목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간송으로부터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는 당시 한양 사람들의 80%가 방문을 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이다.
모더니즘의 합리성을 갖춘 단정하게 정제되어있는 외관,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 기둥이 없는 전시공간, 태양광이 함께 어우러진 선룸(Sun Room), 한양도성의 성곽을 한눈에 담아내는 옥상정원까지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산을 담은 보화각은 한양도성의 전경까지 품에 안도록 차경의 원리를 적용해 지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최고의 건축가에 의해 최고의 자재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함보다는 견고함을 중시하여 견실하게 지어진 까닭에 1936년에 완공된 지 8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간송의 신념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문화재를 굳건히 지키며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간송의 스승 위창 오세창 선생은 박길룡이 지은 이 우리나라 최초의 모더니즘 건물에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을 담아 ‘보화각’이라 이름 지었다. 보화각은 광복 때까지 간송의 소장품들과 연구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호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풍파를 그대로 겪어내기도 했다. 6.25 당시 혜곡 최순우과 소전 손재형 두 사람의 지혜로 한 점도 북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간송이 본명이 최희순을 아들들과 같은 항렬인 순우로 지어 고마운 정표로 선물했다.
2019년 가을 박길룡 묘지 터를 찾기 위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김영식 작가·김수종 작가·한철수 시인 등 망우리공원 관련 전문가?들과 나섰다. 그러나 두 시간을 추정한 주위를 맴돌아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서울시시설관리공단 망우리공원 사무실에서 1991년 작성한 묘지번호와 위치 등을 궤도식으로 작성한 도면을, 이장한 분들의 묘지를 화이트로 지워버려 정말 아쉬움이 크다. 김영랑·안석영·송진우·임방울·이기붕 등의 묘지 터는 1990년 이전에 이장하였기 때문에 도면에 없었다. 김영랑·나운규·김동명(부인 묘비)·김사국·조종완 등의 묘비는 묘지 터에 묻혀 있다. 함이영·임숙재·강학린·문명훤·김승민·박원희·최백근·서병호·안창호·신명균·이탁 등의 묘비는 남아 있다. 현재 파악하고 있는 유명인사 묘역 중 관리가 아쉬운 분은 계용묵·김병진·김진성·김분옥·서동일·이영학·나우 등이다.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다진 조선 건축가
일송(一松) 박길룡(朴吉龍, 1898~1943) 79주기
1898년 11월 20일 서울 종로구 예지동 278번지 현재 종로 4가의 상가 밀집 지역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부친은 영세한 미곡상 박명옥이다. 집이 어려워 10세가 되어 물장수, 쌀 배달 등으로 학비를 대어 신흥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박길룡이 "그 당시만 해도 사공농상의 관념이 잔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건축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단시되었으나 둘이서 타협 끝에 내가 공업전문 입학원서 2장을 사다가 같이 써낸 것이 건축 공부의 시초가 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김정현, 이기인과 아울러 한국인 최초로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제국대학 전신)에 입학한 박길룡은 재학 내내 급장을 도맡았다.
1919년 3월 15일 제2회로 경성고공을 졸업한다. 1920년 12월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이것은 판임관이라고도 한 하급 관리직이었다. 총독부에 배치된 박길룡은 조선총독부 청사의 신축공사의 실무자로 참여했다. 1920년에서 1932년까지, 기수로 있은 12년 동안 박길룡은 나름 일본인에게 역량을 인정받았다. 특히 설계도면을 빠르고 정확히 그려내는데 놀라움을 샀다. 1927년 일본에 출장을 다녀오고, 1932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승진하였다. 이것은 건축물을 세우는 관에 있어선 최고기술자를 이르는 관명이었다.
그러나 이틀 만에 기사직에서 물러앉아 1932년 7월 7일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설하는데, 주소는 관훈동 197번지였다. 박길룡은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건축가들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1938년 사단법인 조선건축회 이사가 되었고, 1941년 경기도 건축대서사(현 건축사협회)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조선주택영단에 참여하였고,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1943년 조선수리조합회 건축사무 촉탁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최초로 서구식 건축술의 전문교육을 받은 건축가였다.
박길룡의 사무실은 개인의 역량을 바탕으로 건축 활동을 전개했고, 1920년대 말에 성장한 몇 개 기업의 당시 일어났던 한인 상업자본가의 건축 붐에 따라 촉탁을 받았으나 1930년대 들어 전시체제에 돌입되다 보니 일은 제한되었다. 1941년 내선일체를 추진하고 일제에의 멸사봉공을 촉구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중앙조직의 사무국 문화부 위원에 위촉되었다. 문화부 산하 연락계는 학술·교화·예술·출판·생활 부문으로 나눴다. 박길용이 있던 생활 부문에서 그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1943년 견지공평정회의 정총대가 되었다.
박길룡은 1929년 김연수 주택·1930년 조선생명보험사옥·1931년 경성제국대학 본부(총독부와 공동설계, 현 예술인의 집)·1931년 동일은행 남대문지점·1934년 한청빌딩·1935년 화신백화점·1936년 최초 소아과의사인 구영숙소아과의원·1937년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 및 강당·1940년 평양 대동공전 교사(김일성대학 통합)·1943년 혜화전문학교 본관·1943년 이문당 사옥·현재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순종의 장인이자 친일파 윤덕영의 사위인 김덕현의 주택) 등을 설계했다.
박길룡은 건축가로 활동하던 초기부터 과학대중화 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24년에는 경성공전 출신의 김용관을 중심으로 발명학회(후신은 1935년 설립된 과학지식보급회)가 창립되었는데, 박길룡은 발명학회의 창립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33년 6월에 발명학회가 《과학조선》을 창간했을 때 박길룡은 ‘발명학회 이사장’이란 직함으로 창간사를 쓰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과학조선》을 통해 지구의 역사, 우주론, 생활의 과학화 등에 관한 글을 썼다. 박길룡은 《과학조선》에 자신의 건축사무소에 대한 광고도 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발명학회에 기부금도 내놓았다. 특히 1934년에 거국적으로 ‘과학데이’ 행사가 열렸을 때 박길룡은 200원을 기부했는데, 그것은 《과학조선》 잡지 1,000부의 값에 해당했다. 윤치호와 이인이 300원씩을 내었으며, 박길룡은 최대 기부자 3등에 들었다.
박길룡은 저술활동도 활발하여, 『조선과 건축』에서 김윤기와 쌍벽으로 가장 많은 글을 실었는데, 이들 글에는 구조·의장·고건축·설비 등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1930년부터는 작고하기까지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기고하였고, 《과학조선》에서 편집을 했고, 《도시의 건축》에서도 많은 글을 기고했다. 이외 단행본 『제래식 주거 개선에 대하여』를 내었다. 1941년 4월 14일엔 타블로이드식 월간신문 《건축조선》을 창간했는데, 이는 조선인 건축가에 의한 최초의 건축 잡지였다. 그의 상업건축물에서는 건축의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볼 수 있으며 주거 공간에 관한 관심에서는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건축 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잡았다.
1943년 4월 27일 오전 이화여전에서 강의 중 뇌일혈로 쓰러져 공평동 사무실로 옮겼으나 생을 마감해 망우리공원(묘지번호 109709)에 묻혔다. 2005년 2월 개인묘지로 이장했다. 음악평론가 박용구가 그의 장남이다. 그는 “아버지와 같이 길거리에 나서면 몇 걸음 못가 계속 아는 분을 만나 동행에 짜증이 나곤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박길룡은 사망 직전까지 '조선어 건축용어집'의 발행을 위해 110장 가량의 미완성 원고를 작성해 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길룡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43년 5월에 조선건축회는 《조선과 건축》 특집호를 통해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그의 분신에 다름없는 박길룡건축사무소는 후배인 김세연에 의해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1945년까지 운영되었다.
안타깝게도 박길룡의 대표작인 화신백화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최초의 근대적 건축교육을 받은 한국인 건축가의 작품이지만 역사적 유물로 지정되지 못했던 것이다. 김정동 교수를 비롯한 여러 건축인들은 ‘화신백화점 보존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화신백화점은 1988년에 서울시의 종로도로확장계획에 따라 모두 헐리고 말았다.
성북동 보화각(간송미술관)·경운동 민병옥 가옥·월계동 각심재 등이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한 건축물이다. 1928년~1930년경 유물 수집을 시작하며 간송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유물을 제대로 수장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꾸리고자 1934년 성북동 97번지 일대 1만여평 부지를 한양에 살던 프랑스 무역상 블라상으로부터 매입했다.
간송의 스승 위창 오세창 선생은 선잠단의 북쪽에 있는 이 부지에 북단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북단장은 우리 문화재의 수장, 연구, 공개를 목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간송으로부터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는 당시 한양 사람들의 80%가 방문을 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이다.
모더니즘의 합리성을 갖춘 단정하게 정제되어있는 외관,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 기둥이 없는 전시공간, 태양광이 함께 어우러진 선룸(Sun Room), 한양도성의 성곽을 한눈에 담아내는 옥상정원까지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산을 담은 보화각은 한양도성의 전경까지 품에 안도록 차경의 원리를 적용해 지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최고의 건축가에 의해 최고의 자재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함보다는 견고함을 중시하여 견실하게 지어진 까닭에 1936년에 완공된 지 8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간송의 신념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문화재를 굳건히 지키며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간송의 스승 위창 오세창 선생은 박길룡이 지은 이 우리나라 최초의 모더니즘 건물에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을 담아 ‘보화각’이라 이름 지었다. 보화각은 광복 때까지 간송의 소장품들과 연구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호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풍파를 그대로 겪어내기도 했다. 6.25 당시 혜곡 최순우과 소전 손재형 두 사람의 지혜로 한 점도 북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간송이 본명이 최희순을 아들들과 같은 항렬인 순우로 지어 고마운 정표로 선물했다.
2019년 가을 박길룡 묘지 터를 찾기 위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국장·김영식 작가·김수종 작가·한철수 시인 등 망우리공원 관련 전문가?들과 나섰다. 그러나 두 시간을 추정한 주위를 맴돌아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서울시시설관리공단 망우리공원 사무실에서 1991년 작성한 묘지번호와 위치 등을 궤도식으로 작성한 도면을, 이장한 분들의 묘지를 화이트로 지워버려 정말 아쉬움이 크다. 김영랑·안석영·송진우·임방울·이기붕 등의 묘지 터는 1990년 이전에 이장하였기 때문에 도면에 없었다. 김영랑·나운규·김동명(부인 묘비)·김사국·조종완 등의 묘비는 묘지 터에 묻혀 있다. 함이영·임숙재·강학린·문명훤·김승민·박원희·최백근·서병호·안창호·신명균·이탁 등의 묘비는 남아 있다. 현재 파악하고 있는 유명인사 묘역 중 관리가 아쉬운 분은 계용묵·김병진·김진성·김분옥·서동일·이영학·나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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