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4.19혁명 이기붕 박마리아 가족 집단 자살 62주기
수송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가 쓴 4.19혁명 추모시 「나는 알아요」
아.....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 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놀은/ 오빠와 언니들의 피로 물들었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 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1960년 4월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정부 민주주의 혁명. 4·19 의거라고도 하며,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를 요구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몇 주 전부터 지방도시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에 대해 무지했고, 이러한 정부의 대처에 분노한 학생들은 각 지역에서 모두 합심하여 시위를 벌였다.
피의 화요일로 사망자 186명 부상자 1,500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사임을 발표하게 되었고, 허정의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4·19혁명은 이승만에 대항하는 혁명적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이었다.
특히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의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서대문경무대’라 일컫는 일을 저질렀다.
망우리공원에 박마리아와 관련된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란동산 김활란 박사는 이화여대 총장과 박마리아는 부총장으로 ‘낙랑클럽’, ‘이수회’를 통해 영어에 능통한 이대 숙대 출신 여인들의 로비 통로 미군정과 제1공화국 부정부패의 베개송사를 이끌었다.
모윤숙의 친일 행위는 유명했다. 학병 지원 글을 많이 쓰고 연설을 다녔다, 특히 매일신보 기사글 찾아보면 고정 필진이었다. 당시 모윤숙과 함께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김활란, 노천명 등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여성 친일파들은 광복 이후 일제히 반공을 부르짖으면서 독재 정권의 앞잡이가 되었다.
4.19혁명 기름먹은 섶에 불꽃을 당긴 3.15부정선거 부통령 당선 이기붕, 이화여대 부총장 박마리아,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 이강석 육군 소위,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자로 이화여대 1공화국 독재에 전횡을 일삼아 ‘서대문 경무대’라 부를 정도로, 4월 28일 비극적인 가족 집단 자살로 이어졌다.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에서 15분 정도 영결식 후 망우리 가족묘지에 묻혔다
박마리아는 초허 김동명 시인의 날카로운 시사 비평에도 고향 강릉 출신이라 뒷배가 되어 무사하였다.
조봉암 선생 사형 선고 후 집행을 막아달라는 죽산의 딸 조호정 당시 이화여고 교복 입고 읍소를 외면했다.
미국 유학 시절 원용덕은 연애를, “도산 선생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추담 허연 선생과 맞선을 봤지만 이기붕과 결혼하였다. 추담 허연의 맏딸인 허경숙은 이기붕의 맏딸 이강희와 이화여중 동기였다.
7년간이나 우리나라 씨름계의 왕자였던데다 일본 강도관 5단의 유도 실력까지 겸한 김윤근을 또 연희전문 상과출신으로서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꽤 굳은 기반을 갖고 있었다. 1951년 군예산 부정착복 사건으로 9만명 굶어죽고 얼어죽고 수만명 병에 걸렸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사형 구명을 읍소한 정충경 여사는 박마리아와 평소 아는 사이였기에 남편의 구명을 호소해 볼 양으로 찾아갔더니 박마리아는 “죄가 있으면 벌을 받고 없으면 풀려나겠지요”하는 이 한마디로 말을 끊어버리고는 더 이상 상대를 해주지 않아 무안만 당하고 되돌아 나왔다고 말했다.
대한청년단 단장 시절 돈암장 비서와 서울시 시장인 이기붕을 뺨을 치는 등 두 번에 걸쳐 수모를 준 김윤근의 가족과 측근들은 아직도 김윤근이 그토록 극형을 당한 데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작용과 함께 이기붕의 개인감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사람의 한과 집념은 무서운 것이었다. 망우리 김윤근의 묘소는 그곳 이기붕 일가족의 묘역 바로 윗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김윤근 측근은 “죽어서라도 한번 내려다보며 호통을 쳐주라고 부러 그 자리에 이장했다”고 전했다.
이기붕 박마리아 가족묘지는 이강석 애인으로 망우리를 자주 찾았던 장성 출신 딸로 시집가는 대신 묘지 이장비와 관리비를 대 고양시 소재 사설공원묘지로 이장했다.
3.1만세운동도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김활란, 이정애, 김봉성, 유상규, 채동선, 김영랑, 허연, 유관순, 김분옥, 이영학 등이다.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해방 선언의 천도교소년단 색동회 회원들이 광주학생운동과 브나로드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4.19혁명과 6.3항쟁, 5.18광주민중항쟁까지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소파의 그 혁명정신이 이어졌다.
.19혁명 경기고 졸업 서울 법대 신입생 박동훈, 경기고 2학년 수학 천재 『4월에 핀 꽃』의 이종량, 열사 중 신문 기사가 이어지고 초등학생 데모를 불러일으킨 수송초등학교 6학년 전한승, 어머니께 남긴 메모가 유서가 되어버린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경기고 고완수, 덕성여중 최신자 등 외 더 많은 열사들이 망우리에 묻혔다. 1963년 9월 30일 현재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박동훈 열사의 비문만 망우리에 남아 있다.
1962년 4월 4.19혁명 두 돌을 맞아 희생자 186명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1963년 9월 30일 전한승 군은 4.19혁명유공자로 국립4.19민주묘지 1묘역 195 배위로 이장했다.
전한승 군 외에도 국민학교 학생 4명이 희생됐다. 임동성(50년 9월 17일생~60년 4.19일 사망) 종암국민학교학생. 시위대열에서 총상사망) 임충수(부) 최복순(모), 안병채(50년 2월 12일생~60년 4.19 사망) 동신국민학교 학생. 신설동국민학교에서 사망, 박동일(50년 7월 13일생~60년 4.19 사망) 부산서면경찰서 앞에서 총상 사망, 정대성(46년 5월 1일생~60년 4.19 사망) 금호국민하교 동대문 경찰서 앞 시위도중 사망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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