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아동문학가 강소천

정종배 2022. 5. 6. 06:06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아동문학가 강소천

어린이 노래 스승의 은혜 유관순 노래, 동요와 동화 아동문학가
강소천(姜小泉, 1915~1963) 59주기

“강소천은 갔지만 동화의 나라 강소천은 어린이와 더불어 영원히 세상에 살아 있으리라” 박목월 시인이 쓴 강소천의 묘비 글이다. 강소천의 유택은 망우리공원 안에 포함되지 않은 사설 개인 묘역이다. 서울에서 망우리고개를 넘다 왼쪽 구리시 교문동 딸기원 마을 들어서기 전 계단을 올라 북서쪽으로 난 오솔길 100m 정도를 오르면 강소천 가족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 베이붐 세대들이 국민학교 시절 부른 동요의 노랫말을 쓴 동요와 동화 작가이다. 태극기, 금강산, 코끼리, 산토끼야, 어린이 노래, 스승의 은혜, 유관순 노래 등을 베이붐 세대들이 국민학교 시절 풍금 반주에 맞춰 부른 동요의 제목이다. 이 동요의 작사가는 강소천으로, 본명은 강용율이다. 소천은 호이다.

6.25한국전쟁 흥남철수 때 월남 이후, 살아생전 『조그만 사진첩』∙『꽃신』∙『진달래와 철쭉』∙『꿈을 찍는 사진관』 등 제9동화집을 냈다. 《월간 어린이 다이제스트》∙《새벗》 등 어린이 잡지를 편찬하며 신문 잡지에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강소천은 1915년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 진주 강씨 통정공파 집성촌에서, 아버지 강석우 어머니 허석운의 2남 4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강봉규는 논밭 5만평 과수원 ‘천명농원’의 부자로, 예수집이라 불리만큼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모태 신앙으로 할아버지가 세운 미둔리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고원공립보통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작문이 돋보인다는 칭찬을 받았다. 여학생반장 ‘순희’를 사랑하여 뒷날 동요와 동화 속에 표현했다.

영생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한글 탄압이 거세 외사촌 누이 허흥순과 간도 용정에 1년여 머물렀다. 그곳에서 은진중학생 윤동주를 만났다. 복학하여 영어교사로 부임한 시인 백석과 문예반 지도교사 초허 김동명 시인의 문학 지도를 받았다. 소천은 백석의 하숙집에 자주 들러 틈틈이 써온 동시를 보여주었다. 스승인 백석은 제자 소천의 대표작 동시 「닭」을 1937년 《소년》 창간호에 발표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1941년 발간한 동시집 『호박꽃 초롱』(박문서관) 서시를 백석 시인으로부터 받았다. 백석 시집 『사슴』과 같은 동시 33편을 수록했다. 33편은 3.1혁명 민족대표 33인을 상징한다.

소천 강용률의 함흥 영생고보 선생님으로 초허 김동명, 백석, 백철 등이 있었다. 특히 백석과는 나이 차이가 세 살 적은 늦깎이 학생이었다. 소천은 1931년 영생고보에 입학했다. 그 때 이미 강소천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시 「봄이 왔다」 등을 발표하여 등단한 소년문사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발간한 이 잡지는 주간으로 윤석중이 맡고 있었다. 손소희, 박목월, 황순원 등과 펜팔로 사귀였다. 특히 손소희와의 펜팔 인연은 간도 만선일보 문화부 책임기자 손소희 부탁으로 그 신문에 동화를 연재했다. 6.25전쟁 부산 피난 시절 다방 ‘금강’에서 만나 자신의 흥남철수 경험을 토로하여 김동리 단편소설 「흥남철수」 모티브를 제공했다.

소천은 8.15광복 후 북한에 남아 고원중과 청진제일고 교사로 근무했다. 6.25전쟁 흥남부두 철수 배편으로 거제에 도착했다. 그때 미군 통역병 채종묵에 의해 기독교인이라 먼저 구조되고, 언 주먹밥 하나로 견디어 위암의 원인이라 고백했다. 혼자 피난 나올 때 원고지 보퉁이만 가슴에 꼭 안고 내려왔다. 부산 영도다리 근처에서 문교부 장관 비서로 근무하는 영생고보 동창 박창해를 우연히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문교부 편수국에 근무하며 평생지기 최태호와 전시 국어 교재를 편찬했다. 육군 정훈부대 772부대 문관으로 대전에서 윤석중과 고유했고, 전역 후 부산 ‘금강’다방에서 김동리 손소희와 소일했다. 박창해의 소개로 《월간 어린이 다이제스트》를 창간하고 주간을 맡았다.

아동문학가 강소천이 6.25한국전쟁 흥남철수 때 피난 내려와 부산 영도다리 근처에서 우연히 만나 곧바로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문교부 편수국에 취직시킨, 당시 문교부장관 비서였던 영생고보 동창인 박창해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 3년 동안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며 한국 최초 국민학교 국어교과서를 제작했다.

전시 국어 교재를 편찬한 강소천 작시의 동요 ‘어린이 노래, 금강산, 스승의 은혜, 유관순 노래, 꼬마 눈사람, 산토끼야, 태극기, 코끼리 아저씨’ 등 많은 노래가 교과서에 게재된 것이 이해되었다.

강소천 작시 나운영 작곡인 ‘유관순 노래’는 1952년 청소년의 애국심과 국가관 고취를 위해 문교부 편수국 의뢰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은 유관순이다. 한국의 잔 다르크로 영웅화하는데 ‘유관순의 노래’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 독립운동 및 한 인물에 대한 노래 중 이 노래만큼 널리 부르는 노래는 없다.

강소천 작시 나운영 작곡 ‘유관순 노래’보다 먼저 유관순 열사에 대한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남 담양 판소리 명가 출신 박동실(朴東實, 1897∼1968)이 1930년대에 창작하여 녹음한 판소리 ‘열사가’는 ‘이준열사가’, ‘안중근열사가’, ‘윤봉길열사가’, ‘유관순열사가’ 등 일련의 열사가들로 구성되었다. 1947년 이화여고 교사 김재인(金在寅, 1913~2005) 작시 작곡가 박은용(朴殷用, 1919~1985)이 작곡한 ‘유관순의 노래’가 유관순 열사를 기념하는 최초의 양악곡이다. 그해 11월 아우내 장터에서 열린 ‘유관순과 21열사 행적비 개막식’ 행사 때 이화여중 합창단이 이 노래를 불렀다. 1948년 임학수(林學洙, 1911~1982) 작시 안기영(安基永, 1900~1980)이 작곡한 합창곡 ‘유관순’은 서울국민음악연구회가 만든 '중학음악교본 제3권'에 실렸다.
명창 박동실은 평양음악대학민족성악학부 교원으로 인민배우, 서울대 음악학부 교수이며 작곡가인 박은용은 평양음악연구소 실장, 작사가 임학수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영문학 교수, 작곡가 안기영은 평양음대 교수 등 월북하여 모두 금지곡이 되었다. 1988년 해금 이후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유관순의 노래’와 합창곡 ‘유관순’ 이 두 곡은 필자의 모교 한성고 2년 선배인 서지학자 오영식 전 보성고 교사가 구입한 고문서 뭉치 속에 끼어 있는 악보를 정리하여 2014년 2월 발표하며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다.

유관순 추모는 소설·영화로도 이뤄졌다. 단편 '화수분'으로 유명한 소설가 전영택이 1948년 소설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썼다. 같은 해 이구영이 시나리오를 쓰고 윤봉춘이 감독한 영화 '순국의 처녀 유관순'이 상영됐다. '영화시대'라는 잡지는 개봉에 즈음해 이 영화를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1954년 마흔 살에 최수정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고원공립보통학교 동창인 전택부가 발행하는 《새벗》 주간으로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문학과 교육을 접목하는 다양한 내용을 담아냈다. 1956년 한남동에서 용산구 청파동 2가의 집을 마련하여 이사하고, 이후 10번지 14호 2층집을 사서 개조하여 이사했다.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제정 공포하는데 주도적 역할로, 1922년 소파 방정환 ‘어린이 날’ 제정과 더불어 어린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쾌거로 평가받는다. 1959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며 아동문학 강의를 처음 개설하였다. 1961년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장수 인기 프로그램 ‘재치문답’에 고정 출연했다. 출판사 계몽사 배영사 잡지 『아동문학』(주간 최석기, 편집위원 강소천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 최태호) 등 아동문학 저변 확대에 공헌했다.
그해 봄 춘원의 소설 「사랑」의 모델로 6.25 한국전쟁 중 평양에서 김일성 맹장수술을 집도한 한국의 슈바이처 부산 당시 부산의과대학장인 장기려 박사에게 가톨릭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았다.

1963년 5월 6일 오후 1시 57분 서울대부속병원에서 48세 간암으로 선종했다. 십대 후반 용정에서 만난 이후 함께 많은 일을 한 조지훈 시인의 조사와 30여 년 전 편지로 사귄 친구 박목월 시인이 상가 분위기를 글로 남겼다. 5월 10일(5일장) 이대부속국민학교 합창단이 소천의 동요 20곡을 연이어 불렀다. 자신의 동요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경기도 양주군 교문리 망우리에 가족묘지에 영면했다. 1964년 1주기 추도식 때 동시 「닭」을 새긴 시비 제막식도 묘역에서 열렸다. 1965년 2주기 소천아동문학상이 제정되어 배영사 계몽사를 거쳐 현재 교학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1981년 강소천 문학전집(전15권, 문음사)이 출간되고, 1985년 국민훈장 대통령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소천은 영생고보를 다닐 때 스승에게 더 배우고 싶어 졸업을 미룰 정도로 백석을 존경했다. 백석은 노래하듯 높이고 낮추는 방식으로 시 낭송을 하였다. 소천은 백석의 시 낭송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를 음악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소천은 백석에게 문학과 영어를 배웠다. 백석의 모든 시를 줄줄 외울 만큼 사랑하고 흠모했다. 백석 또한 소천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백석의 지도와 격려로 소천은 시와 소설 동시와 동요 등을 공부하고 짓게 됐다. 소천은 1963년 사망할 때까지 북에 있는 스승을 늘 그리워했다. 남북분단으로 ‘백석’이라는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는 현실을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소천은 자신이 만드는 동요에 백석의 시를 넣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백석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제자로서 소천은 를 노래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