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임방울 국악인

정종배 2022. 5. 10. 05:40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임방울 국악인

한반도를 목소리로 울린 국창
송정(松汀) 임방울(林芳蔚, 1904.4.20.~1961.5.10.) 61주기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 하고/ 제주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제/ 흥양의 해는 보성에 비껴 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에 흘렀다....... .”로 이어지는 단가 ‘호남가’의 첫 대목이다. 남도 소리꾼 명창들도 판소리 부르기 전 목을 풀기 위한 단가로 ‘호남가’를 자주 불렀다. 특히 국창이라 일컫는 임방울 명창이 불러 널리 알려졌다. 임방울 명창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남가는 두 차례 전라감사를 지낸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호남의 54고을 이름을 빌어 ‘호남가’를 지었다고 알려졌다. 판소리의 아버지라 일컫는 고창출신 동리 신재효가 고쳐 지었다는 설도 있다. ‘호남가’는 민초의 노래로 불리다가 경복궁 낙성식(1867) 때 전라도 대표가 나가 불러 장원을 하였다. 그 뒤로 전국적으로 퍼져 한말과 일제강점기 만주나 일본 등을 유랑하는 망국의 한과 고향을 그리는 비원의 노래로 애창되었다. 호남가는 김화선·안숙선·박계향 등 많은 국악인들이 즐겨 불렀다.

‘두루두루 화평하고 부족함이 없는 함평천지’ 고을로 호남가의 첫머리에 나오는 함평군 출신 모임인 ‘함평포럼’에서 제안하여 호남가 노래비 추진위원회(회장 이명재)가 오는 7월 함평나비축제가 열리는 나비엑스포공원에 호남가 노래비를 세우기로 기금을 모았다. 3월부터 한 달 동안 목표는 모금 금액 2천만원 인원은 100명이었다. 현재까지 모금액은 5천만원 인원은 130여명이다. 남은 금액은 향우회 장학재단에 기증키로 하였다.

임방울은 국악인, 판소리 명창,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이다. 본명은 임승근이며 아명은 임종규이고 호는 송정이다. 임방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어릴 적 울지도 않고 방울방울 잘 놀아서 임방울이라 불렸다는 증언과 다른 하나는 임방울이 판소리하는 장면을 당대의 명창이 소리를 듣고 탄복하면서, "너야말로 은방울이다." 라고 칭찬하면서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본관은 나주이며 광주시 광산구 송정1동에서 출생하여 함평군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광산구 도산동에서 자랐다. 임방울의 아버지인 임경학은 소리로 이름을 떨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인근에서 '비가비소리꾼'정도로 인정받아 친지들이 모인 데서 벌어진 소리판에서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임방울이 태어날 무렵, 전남 지역에서 활약하는 판소리 명창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임방울의 어머니와 누나가 무업을 행했다는 증언도 있다.

임방울의 외숙이 당대의 국창 김창환이다. 김창환은 전남 나주 출생의 고종, 순종 때의 명창이다. 그는 서편제 유파로 원각사에서 창극을 연출했으며, 협률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흥보가 중에 는 김창환의 독보적인 경지를 표현해낸 더늠이다. 김창환의 아들인 김봉이, 김봉학도 명창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임방울은 어려서부터 외사촌형인 이들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이 같은 환경이 임방울을 당대 최고 판소리꾼으로 키우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임방울은 서편제의 명창으로 서편제 소리의 최후 보루라고 말하고 있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성량도 풍부하여 막힌 데가 없는 통성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세가 빈곤하여 판소리 공부에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에서 14살부터 박재현에게 판소리 '춘향가'·'흥보가'를 6년간 공부하였고 공창식 문하에서 다시 닦았다. 유성준에게 ·를 사사했다.

전남의 거상인 남국일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얻어 판소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임방울이 큰 뜻을 품고 상경한 것은 25세 1929년 9월이었다. 외숙부 김창환 소개로 무대에 나갔다가 크게 인기를 얻었다.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 명창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관객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이 명창연주회에는 그의 외숙인 김창환 명창을 비롯하여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 등의 특별출연이 있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독특한 더늠에, 강렬한 전라도 사투리로 애절하게 내어서 청중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맛있는 목구성으로 청중을 휘어잡은 명창이다.

서편제 중 특히 단계면조에 능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컬럼비아·빅타 레코드 회사의 전속으로 있으면서 '춘향가'·'심청가'등의 전집을 제작하였다. 현재 빅터레코드판 '춘향가' 전집과 오케이판 '흥부가' 전집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쑥대머리'와 '호남가'를 취입한 음반은 당시에 100만 매가 팔렸다고 한다. 판소리 다섯 마당에 모두 정통하나 특히 '춘향가>'중에서 그의 창작으로 전하는 '쑥대머리'와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이 유명하다. 편곡을 비롯하여 작곡에도 재주가 있었으며, '호남가'와 '사별가'를 남겼다. 그 뒤 음반취입과 판소리 공연에만 힘을 쏟았고 창극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판소리 전통을 최후까지 고수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한때 광복 후 1946년에서 이듬해 1947년까지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 특보위원을 지냈고 1960년 국악상을 받았다.

1960년 봄, 부산 공연 때였다. 임방울은 무대에서 자신의 특장이었던 '쑥대머리'를 부르더니, '심청가' 가운데서 ‘심청이 선인들에게 팔려가던 대목’으로 바꾸어 불렀다. 장내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춘향가' 한 대목을 내더니, 다시 '수궁가'로 옮겨와 이것저것 마구 바꾸어 불렀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임방울은 무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면서도 소리를 질러 내어 목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해 가을, 임방울은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김제 공연에 나섰다. 그는 입버릇처럼 소리를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다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길로 서울 초동 집으로 옮겨졌으며, 이듬해 1961년 5월 10일 새벽,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임방울이 58세 되던 해였다.

그의 장례는 한국국악 사상 처음으로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졌다. 임방울의 장례식은 국악인의 장례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다. 그날, 2백여 명의 여류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상두꾼이 되었다. 소복을 한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지날 때 서민들은, 서민의 목소리 국창 임방울을 잃은 슬픔에 잠겼다. 김소희 명창을 포함하여 몇몇 명창들이 앞소리를 맡고 수많은 여류명창들이 떠나는 님의 상여 끝자락을 잡고 뒷소리를 맡으며 흐느꼈다. 시청 앞에서의 노제를 거치고 임방울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한의 소리와 함께 묻혔다. 어린 딸이 관속에 낡은 음반 한 장을 묻어 그 자리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그의 소리는 박귀희·한애순·김용준·신평일·성우향 등이 이어받았다.

한동안 잊혔던 임방울을 다시 되찾아 오는 일이 그가 죽은 뒤 25년쯤 지나면서 차차 생겨났다. 1986년 9월 12일, 광주 광산구 송정공원 안에 '국창임방울선생기념비'가 세워졌다. 1988년 11월 20일 망우리의 묘가 여주 남한강공원묘지에 이장되었다.
1992년 12월에는 광주 문화예술회관에 '국창 임방울선생 흉상'이 세워졌다. 1977년 8월에 송정청년회의소 주최로, '제1회 임방울명창기념 명창경연대회'를 열었으며, 이를 기회로 삼아 1999년에는 '(사)국창 임방울선생기념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2000년 10월 20일 문화의 날을 맞아 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광주광역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임방울대로(광산구 우산동 상무교차로~북구 양산동)의 명칭을 부여했다.
임방울 명창의 외손녀 박성희 소프라노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임방울의 사위들 가운데 한 분은 가수 김완선의 외숙부이며, 김완선의 외조부는 임방울과 사돈간이자 한국무용가 한영숙의 친정 6촌 오빠이다.

또랑시인 장인인 김동명 함평읍 기산영수 관덕정 명사수로 영광 예인 공옥진 영광 함평 무안 세 고을에서 인물은 함평읍 김동영이라며 할이데이비슨 뒷자리에 앉아서 호남가를 불렀다. 관덕정 국궁대회 임방울 소리에 활을 쏘던 장인어른 유택을 남한강공원묘지에 마련하여 두 블럭 사이인 송정 임방울 유택을 찾아 참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