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신민회 이태건 독립운동가
신민회 평북 지회 활동 105인 사건 3.1혁명 독립운동가 월파(月波) 이태건(李泰建, 1885~1958) 64주기
월파 이태건은 평북 선천군 선천면 창동에서 1885년 11월 1일 태어나 1958년 5월 13일 서울에서 서거했다. 이태건은 1907년 4월 양기탁(1871~1938, 대통령장) 안창호(1878~1938, 대한민국장) 이회영(1867~1932, 독립장)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는 윤치호(1866~1945)를 회장으로, 그 밑에 부회장·평의원·총영·도반장 등의 조직을 설치하고 활발하게 회원을 모집하여 실제 활동 인원은 300~800명으로 추정된다. 일본측 주장은 12만명에 달하였다. 안중근(1879~1910, 대한민국장)의 이등 방문 격살, 이재명(1887~1910, 대통령장)의 이완용 습격사건은 신민회원에게 충동을 주었었는데 마침내 일한합병이 되자 사내총독 암살을 기획하게 되었다. 1910년 5월 30일 육군대신 사내정의는 통감을 겸임하고 조선에 도착, 동년 8월 29일 일한합병이 되자 조선총독이 되었다.
일제가 신민회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을 저지하고 신민회를 해체 시킬 목적으로, 1910년 12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1879~1927, 애족장) 사건이 발생하자 일경은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이란 것을 조작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9월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전국에서 일제히 검거하고 105인을 기소한다. 이 105인 사건에 이태건도 구속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언도 받았다. 공소심에서 1913년 3월 20일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실질적으로 2년의 옥고를 치렀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이태건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안명근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안명근은 부자들에게 군자금을 요청했지만 '민병찬', '민영설'은 남의 일인 듯 모른 척했습니다. 이에 안명근은 화가 나서 권총으로 위협하며 훈계를 했었는데, 그들은 일본 헌병대에 밀고해서 안명근을 지명수배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안명근은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조선총독이 참석할 것을 알고 데라우치 암살사건을 준비했지만 붙잡혔고 이것이 105인 사건의 원인이다.
선천군지에는 더 깊이 밝혀놓고 있다. 1911.12.28.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신의주)에 참석차 가든 데라우찌 총독을 선천 역에서 윤산온 (매큔 선교사) 신성학교 교장과 만나 악수할 시, 신민회가 중심이 되어 암살하려 하였다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날조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80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참혹한 고문으로 날조된 억지 조서를 꾸며 일심에서 105인이 유죄판결을 내렸다. 선천에서도 약 10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일심에서 18명이 실형 선고를 받았다.(선천군지, 1997)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당시 천주교 주교였던 '뮈텔'이 고해성사를 통해 알게 된 암살 계획을 일제에게 밀고했다고도 나옵니다. 그가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명동성당 부지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데라우치 암살사건과 105인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비밀단체인 신민회 해체입니다.
신민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정치형태로 삼았습니다. 비밀조직이었지만 활동의 대부분은 합법적이었고, 교육과 양성평등 등의 계몽사상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사건과 105인 사건 때문에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가 해체되었지만, 이들은 간도 독립세력과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태건은 1923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선천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강연을 하였다.
평북선천군기독교청년회 급 신성학생청년회의 주최로 지난 5월 1일 호후 3시에 남녀학생과 어린이 7백여명이 기독교청년회관에 회집하야 각각 선전지를 가지고 해회총무 계병호 씨 인도하에 시내를 순회하며 대대적 선전을 행하였고 야간에는 회관에서 어린이를 위하야 강연회를 개하고 연사 이태건 최영선 안태영 3씨가 어린이에 대하여 강연이 유한 바 당야는 어린이와 방청자 만장의 대성황을 정하얏더라(선천)(동아일보, 1923.5.10.)
이태건이 선천에서 활동하며 망우리공원과 관련된 인물은 박동완, 김봉성, 이영찬, 이영학 등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6년 2월 4일 선천 기독교청년회에서 야학과 농촌사업, 문맹 퇴치 등 교육과 농촌 계몽 그리고 신 회관건축설계에 대한 보고가 있었는데 임원에 사교부장 이태건 회우부장 김봉성 회관건축위원에 이영학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26년 7월 17일 관서기자단 제1회 정기총회에서 50여명의 기자단에서 10명의 위원을 뽑았는데 이영찬과 이태건도 함께 명단에 있다. 1927년 5월 30일 신간회 선천지회 설립이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양전백 씨 사회로 개회하고 경성본부로부터 특파된 박동완 씨의 본회주의 강령설명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4년 10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255에 이장 안장됐다.
2021년 4월 25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공원 전수조사 4일 차 이태건 독립지사의 이장지를 찾았다. 위치는 망우산 제1보루 서울 쪽 50m 아래였다. 묘비와 망주석은 그대로 남아있다. 묘비에 새긴 글자가 쉽게 읽을 수 없다. 추정컨대 다른 분의 묘비를 재사용하여서 그렇지 않는지 의심스럽다. 묘비 뒷면 묘갈명을 국한문 혼용이다. 한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 월파 선생 이태건공은 한말의 풍운이 격동하든 서기 1885년 11월에 평북 위원에서 고 이창규 선생의 3남으로 출생하시었다. 선생의 유소년 시절에는 향리에서 한학을 수업하시고 20세에 선천사범학교를 졸업하시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우러지매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야 신명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05인 동지들과 같이 일제에 항쟁하다가 피체하여 3년간 영어의 고난을 겪으시고 출옥 후에도 선생의 백절불굴하는 애국 열성은 의주 청년단장의 3.1운동의 청년 인재를 규합하다가 재차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신의주형무소 옥중 생활을 계속하시었다 그 후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 아래 선천에서 시대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장으로 또는 기독교 언론과 종교 양 방면으로 투쟁을 계속하시었다. 선생은 일제 말 북경으로 피신하셨다가 해방된 조국에 다시 돌아와 대동신문과 서울신문에 집필하시면서 조국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시다가 일제시대의 고문으로 말미암은 유병이 재발하여 서기 1958년 5월 13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었다. 슬하에는 다복한 5남 3녀가 있으며 그들은 국가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활약하고 있다.
독립지사 이태건 이장지는 서울둘레길 2코스 면목동 남촌 응달말 산신제단 터에서 망우산제1보루를 향해 오르다 7부 능선 우측 장준하 선생의 부모 조부모가 잠들어 있는 가족 묘지를 만났다. 장준하 선생 가족 묘지에서 남동쪽 100여 미터 능선 쪽 숲속에 이태건 독립지사 이장지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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