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독립운동가 김정규 선생 62주기와 의열단 최초 무장투쟁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102주년 박재혁 의사와 오재영(오택) 독립운동가

정종배 2022. 9. 14. 21:14



9월 14일 망우역사문화공원

독립운동가 김정규 62주기와 의열단 최초 무장투쟁 박재혁 의거 102주년 박재혁 의거의 조력자 오재영

2022년 9월 14일은
독립운동가 송계 김정규 선생 62주이다
송계 김정규 선생은
1920년 3월 20일 훈춘지역 3.1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쉬지 않고 독립운동과
재림교회 신앙을 지켜온 재림교회 5대를 이어온 명가이다

독립운동가 송계 김정규 선생의
2남 6녀 중 큰 아들 중정만 남아, 비닐하우스 집에 기거하여 헤비타드 단체에서 집을 지어줄 예정이다

한국재림교회 독립운동 기념사업회 류제훈 장로님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2021년 8월 15일 묘지터를 찾아내
이틀에 걸쳐 수풀을 제거하고 묘비를 세우며
진달래 꽃나무 한 그루 남기고
맨땅을 평평하고 골랐다

사색의 길에서 김정규 선생 묘지 터에 이르는 200여 미터 길 아닌 길에
나무를 베어내고 낙엽을 쓸어내

독립운동가 송계 김정규 선생 62주기 추모식을
묘비 앞에 태극기를 펼쳐놓고
재림교회 망우동 이문동 목사님 부목사님을 모시고
뜻깊게 1시간 동안 치렀다

또랑시인 정종배 시인의 추모시를
홍성례 시낭송가께서 낭송하였다

중랑구청(구청장 류경기) 망우리공원과(과장 이준호) 추모 배너를 설치하고
김정규 선생도 망우역사문화공원 독립유공자에 포함하여 기리기로 하였다

9월 28일 유관순 순국 102주기 추모식 준비하며 배수로 공사와 사색의 길 정비작업으로 사색의 길 차량운행이 오늘부터 27일까지 전면 통제 되었다

송계 김정규 선생 묘지 터 오르기 전
오른쪽에 준영 오재영 선생 연보비를 망우리공원과 긴급출동반에서 깨끗하게 닦아내 어록이 뚜렷하게 보인다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서장실 고서책을 좋아하는 일본인 서장을 고서책장사로 변장한 박재혁 의사 폭탄을 터트렸다
의열단 최초 무장투쟁 의거였다
올해가 102주년이다

준영 오재영이 폭탄을 숨겼다가 박재혁 의사에게 전해주었다
박재혁 의사 옥중투쟁 사후관리 및 선양사업 등에
오재영 선생이 힘을 썼다

박재혁 의사의 기록은 9할이 죽마고우 오재영 덕분이라 말한다

9월 14일 오늘 하루
김정규 박재혁 오재영
세 분의 독립운동 사적을 통해
나라사랑 길을 걷는 옷깃을 여미며
허리를 곧게 펴 똑바로 걷겠다

박재혁과 오재영(오택)

독립운동가 박재혁 국가보훈처 공훈록이다

부산(釜山) 사람이다.

부산진보통학교(釜山鎭普通學校)와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있었고 왜관(倭館)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崔天澤)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1920년 3월에 귀국하였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년 9월 상순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동월 6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는 14일 오후 2시 30분에 고서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마디 환담을 한 후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져 폭발시키니 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그도 중상을 입은채 붙잡혔다.

그는 모진 악형 끝에 기소되어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다시 상고하여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영(오택)은 박재혁의 삶을 가장 많이 기록한 친구이다. 오택이 없었다면 박재혁의 삶은 9할이 여백이었다. 그의 기록도 박재혁의 죽음 이후 몇 줄로 정리되었다. 그만큼 그의 삶에 박재혁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복심 재판을 청구하여 대구 감옥으로 이감한 것도 오택이 수감 중인 박재혁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오택은 1922년 6월 23일 출옥 후 서울의 불교학원에 입학하였다. 1923년 1월 평양 을밀대에서 김상옥(金相玉) 사건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후 부산에 내려와 주례동으로 이주하였다. 3월 1일 오택은 두 자녀를 데리고 박재혁 의사를 참배하고 사진을 남겼다.

1924년 시대일보 부산지국을 경영하면서 상애회와 보천교 타도 운동을 하였다. 상애회는 일제 지배층의 조선인 노동자 예속 압박정책의 철저한 주구로서 노동자를 학대한 폭력·착1925년에는 조선일보 부산지국을 경영하였고 낙동강 수해를 구제하고 11월에는 라디오로 경남북을 순회하였다. 1926년 소작 개선 동정개선 계몽운동을, 1927년 신간회 부산지회가 창립되자 선전부·조사연구부·서무부의 부원과 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8년 조선일보 지국 경영 및 신간회 상무에 취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9년부터 부산 대창동에 일본으로 가려는 노동 동포를 위하여 대중 숙박소를 설치하고 여비 없는 자에게 주식을 대접했다. 1931년 서울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1932년 중앙일보 광주지국장과 목포지국장을 지낸 듯하다. 1941년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당했다.

1945년 9월 초 해방을 맞이하자 다양한 정당들이 출현하여 이를 통합하기 위한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하여고,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이듬해 2월 11일 종간호를 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 양도하였다.

중경 임정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1946년 12월 27일 다시 국내에서 속간하였다. 창간호에는 김구와 이시영, 조소앙의 창간 축하 친필을 게재하고 창간사에서 "독립을 방해하는 일체의 반동과 싸울 것이며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지의 입과 귀가 되겠다."라고 하였다.

1946년 2월 부산으로 내려와 3월 1일 박재혁 의사 추모회를 개최하고 김원봉을 제주로 하여 행사를 하고 '박재혁의사지묘' 목비를 세웠다. 1946년 경상북도회 모임인 영우회를 조직하고 조사부장이 되고, 재단법인 고계학원(현 장충고)의 이사가 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였다. 1948년 부산지역 최진택, 유유진과 함께 정공단 경내에 박재혁 비를 세우는 등 친구이자 동지인 박재혁의 항일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1948년 8월 22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48년 8월 30일 51세로 서거하여, 1949년 8월 10일 망우리에 묻혔다. 묘역(묘지번호 103570)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7호이다.

오재영 연보비 앞면,
오재영 선생(1897~1948, 독립운동가)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제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 선언」 중에서

오재영(오택), 김영주, 최천택, 박재혁은 범일동 정공단 죽마고우 의형제와 부산공립상업학교 학우로 1913년 구세단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하였다.

이러한 구세단의 활동으로 일찌감치 일제의 요시찰 대상 인물이 되었다. 1924년 오택, 김영주, 최천택 등과 함께 시대일보 기자로 부산기자단을 결성하였다. 1929년 부산신간지회 임원으로 최천택은 지회장으로 오택은 간사로 선임됐다.

의열단 최초 무장투쟁 의거를 일으킨 인물들이 낳고 자란 부산시 동구청에서 생가 주변 거리를 ‘박재혁거리’로 명명하고 의열운동의 교육현장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진행 중이다.

3.1혁명 서울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1921년 상해 임정과 연관하여 통도사 스님 출신인 박민오와 제2독립 만세운동을 하려다가 검거되어 복역한 오재영 유택은 망우약천 약수터 체육시설 왼쪽 아래에 있다.

약수터에 중랑구 주민이 꾸준히 찾아들고, 봄이면 꽃샘추위에도 개나리꽃이 만발하여 독립운동가의 맵고 짠 삶을 환하게 피어 낸다.

남동쪽 15시 방향 50여 미터 지점에 화가 이중섭 유택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로 항일결사 무장투쟁의 기치를 내건 의열단이 암살할 사람으로 못 박은 칠가살(七可殺)을 소개한다.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 수뇌·대만총독·매국적·친일파 거두·적의 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이다. 다음은 부숴버릴 곳이다.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 주요기관 등이다.

오택(오재영)의 장녀 오명자(1915~1998)가 10대에 상해로 가서 특파원 기자로 활동 중인 박거영과 연애 결혼을 하였다. 오택의 사위이자 오명자의 남편인 박거영(1916~1995)은 중국 상해국민대학을 졸업하고, 『삼천리』, 『대동아』 상해 특파원을 지내는 등 언론계에 투신하고 기자이자 시인으로 『대한일보(大韓日報)』를 발행하였다. 오명자는 임시정부 아나운서와 번역 사무 일을 하였는데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문서들을 번역하여 각종 정보를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고 한다. 임정의 라디오 방송은 1940년대 중국 충칭에서 하였다.

당시 오명자는 상해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상해에서 살았는데 그때 안중근의 며느리 정옥려와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의 속의 여자가 안중근의 며느리인지는 확인이 더 필요하다. 정옥녀는 상해 호강(滬江)대학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