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소설가 김이석 58주기 망우역사문화공원

정종배 2022. 9. 18. 09:46



소설가 김이석 58주기 망우역사문화공원

소설가 김이석은 1914년 7월 16일 평양 출생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아버지 김치화와 어머니 이득화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평양 종로통에 빌딩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이었다. 김이석은 1927년 평양종로보통학교와 1933년 평양광성고보를 거쳐,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가 1938년 중퇴하였다. 중퇴 사유는 ‘배울 게 없다’고 알려질 정도로 실력파였다. 실제로는 형님의 급서로 평양에서 가업인 사업체를 이어받아 운영할 만큼 이재에도 밝았다. 그 뒤 조선곡산주식회사에 다니다가, 평양 명륜여상 교사로 근무했다.

김 작가는 6·25전쟁 때 가족을 두고 혼자 월남하여 대구에서 생활하였다. 이 무렵 중부전선에서 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였다. 1953년 환도 후 《문학예술》 편집위원과 성동고등학교 강사직을 맡았다. 1957년부터는 집필에만 전념하는 한편, 1958년 방송작가 1호인 소설가 박순녀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그의 문학적 재질은 일찍부터 드러나, 보통학교 때에 동요 「돌배나무」(1925)를 발표하고, 연희전문 재학 당시 단편소설 「환등」(1938)을 발표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8년 단편소설 「부어」가 《동아일보》에 입선되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평양에서 구연묵·김조규·유항림·양운한·이휘창·김성집·김화청·황순원 등과 함께 ‘단층’ 동인을 결성하여 동인지 《단층》을 발간하면서 「감정세포의 전복」(1937) 등을 발표했다. ‘단층’ 동인 모임에 윤동주 시인이 몇 번 참가하였다고 김병기 화백이 증언하였다.

월남 후 1954년에 「실비명」을 발표한 데 이어 「외뿔소」·「달과 더불어」·「소녀 태숙의 이야기」·「광풍속에서」·「뻐꾸기」 등을 발표했는데, 「실비명」은 「동면」(1958)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단편소설 외에 1962년 역사장편소설 「난세비화」를 《한국일보》에 연재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1964년 9월 18일 역사장편물 「신홍길동전」을 쓰던 중 고혈압으로 향년 49세에 별세하였다. 친지 주선으로 9월 21일 망우리공동묘지 호암 문일평 묘지에서 오른쪽 30미터 지점에 유택이 마련되었다. 서거 1주기 때에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에 시암 배길기 초대 서예가협회장의 글씨를 새겼다. 묘지번호는 203693이다.

김이석의 장례식과 묘비 제막식에 박화목·원응서·마해송·이원수·장수철·양명문·김진수·김요섭·김영일·박경종·김수영·김수명·이휘영·백철·안수길·오영진·박영근·이봉구·석영학·조병화·박경종·황염수·최정희·홍윤숙·이근배(과학자) 등 많은 작가와 지인들이 참석하였다. 《조선일보》의 선우휘 편집국장은 사진기자한테 부탁하여 김이석의 장례식과 1주기 때 묘비 제막식의 사진으로 남겼고, 박순녀는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을 손수 손글씨로 쓰고 사진첩을 만들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시인 구상은 당시 폐 수술로 일본에서 투병하고 있다가 귀국 후에 식사를 대접하며 문상을 대신했다고 한다.

김이석은 내성적이고 말수는 적으나 호불호는 분명하였다. 지난해 2021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던 김수영 시인과는 서로 다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잘 어울렸다. 박순녀는 그 당시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나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만난 건 휴전 후 서울에서였다. 김수영은 원응서와 함께 있는 김이석을 보고 “첫눈에, 저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만큼 고독하고 나만큼 울분이 많고 나만큼 땡깡이 심한 치겠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실은 김수영으로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전쟁 피해자였다.

김수영은 월남한 이후 후배 여성작가 박순녀와 재혼한 김이석에게 퉁명스럽게 묻곤 했다. “형은 무엇이 좋아, 여기로 왔소?” 그러면 김이석은 “김사랑 그 자식이 우리가 써내는 글을 샅샅이 다 읽고 점수를 매기는데, 글쎄 내 소설은 밤낮 60점 미만이야. 주제가 어떻다는 둥 주인공의 사상성이 투철하지 못하고 미흡하다는 둥 말이야. 난 단지 아니꼬워서 무작정 남하한 거야.” 라고 말했다.

김이석이 월남할 때 동행한 양명문의 증언에 따르면 “김이석은 꾀가 없어 문학동맹에 충성을 바칠 줄 몰랐고, 원래 글을 빨리 써내는 재주를 못 가졌다. 평론가 안함광에게 불려가 ‘동무는 너무 안일하고 태만하니 앞으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훈시까지 들었다.”고 한다. 역시 함께 월남한 수필가 원응서는 김이석이 딱 한 번 농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소」를 써서 공연하게 됐는데 ‘이데올로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공연 금지되었다고 증언했다. 김이석은 자기식대로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된 북한 체제를 지긋지긋해하며 투덜거렸다.

북한에서 첫 번째 필화 사건은 원산문학가동맹(위원장 박경수)이 8·15해방 1주년 기념시화집으로 발행한 『응향』사건이었다. 『응향』에는 구상·강홍운·서창훈·이종민·노양근 등을 비롯한 여러 시인의 시가 실렸고, 구상의 부탁으로 이중섭이 표지화를 그렸다. 1946년 12월 20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상무위원회에서 이 시집을 퇴폐적·반인민적·반동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평양에서 온 응향사건조사위원단 김이석·김사량·송영·최명익 등 검열원들이 자리한 가운데 1947년 2월 원산의 영화관 ‘원산관’에서 『응향』 성토대회가 열렸다. 구상은 휴식 시간에 급히 짐을 싸 들고 월남해 버렸다. 김이석은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 화백의 전시회 및 돈과 그림에 대한 관리와 생활을 돌봐주었다. 이중섭 화백의 적십자병원 무연고 주검을 첫 번째로 확인한 이가 김이석·김병기·김광균·구상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박순녀는 황염수 화가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김병기 화백은 김이석에 대해 “저항적 성격이 강한 반일 성향의 소유자였다”며, “그는 광성고보 시절 조선인이면서 일본 육사 출신인 교련 교사를 가장 싫어했다. 나는 그와 바둑을 두곤 했는데, 언젠가는 자꾸 물려달라고 요구해 내가 바둑판을 뒤집어엎은 적도 있다. 나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고 했다.

김수영은 이렇게 주장했다. “월남 후 14년 동안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 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차근호·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 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이중섭·차근호는 3·8따라지라며 은연중에 반공이란 이데올로기의 잘못된 만행이 뛰어난 예술가의 혼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