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좌익분자로 몰려 경찰의 고문에 억울하게 죽은 조선 천재 식물분류학자장형두(張亨斗, 1906~1949) 73주기

정종배 2022. 10. 23. 08:51
좌익분자로 몰려 경찰의 고문에 억울하게 죽은 조선 천재 식물분류학자
장형두(張亨斗, 1906~1949) 73주기
 

1949년 10월 26일 제헌국회 제5회 국회임시회의, 조선어학회 관련 독립운동가이며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의 계기와 성북동 대원각(길상사)을 법정스님한테 시주한 법명 길상화 김영한 여사가 진향이란 기생으로

함흥 형무소에 수감된 신현모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고, 김영한 여사 일본 유학을 도왔다는

 

 

흥사단 단우인 신현모 의원이 발의한 '장형두 변사사건 진상보고의 건'의 속기록 일부다.

 

"장형두씨로 말하면 본래 전남 광주 사람으로 조선의 유일무이한 식물학자입니다. 그이로 말하면 식물연구를 한 20년 동안이나 하고 자기 추수 2,000석이나 되는 재산을 다 없애고, 백두산으로부터 태백산, 지리산으로 돌아당기면서 식물을 수집해서 표본을 맨들고 장차 사범대학에 식물표본실을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을 맨들겠다고 그런 포부를 가지고 지금 사범대학 부설중학 조고만 강실(講室)을 하나 빌려 가지구서 거기서 자기 부인과 어린 자제와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을 터입니다."

 

1949년 10월 21일 좌익으로 몰리던 이종 조카에 대한 연루 혐의?로 서울 중부서에 연행되어 인천경찰국으로 이송된 후, 3일만인 23일에 고문치사에 의해, 조선의 유일한 권위자로 천재적인 식물(분류)학자를 어이없이 잃어버렸다.

 

1906년 광주 북쪽 부자 유복자로 누문동 119번지 출생으로서, 12살 때 도쿄원예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일본부립원예학교에서 전학한 이리농림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고등조원학과를 1928년 졸업했다. 1920년경부터 동경제국대학 식물학 강사로서 일본 식물연구의 개척자인 마키노 도미타로오 선생에게 사사하고, 식물 공부에 정진하여, 그가 주최한 "일본전국식물명찾기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영재였다.

 

1923년 9월 15일 관동대지진 피란 동포 11명 도착 기사 명단에 광주군 광주면 동면 장형두(조선일보, 1923.09.18.)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귀국하여 이리농림학교에 전학했다.

 

조선일보 문화부·숭실전문학교·성대 강사·서울중·서울대 사범대 등에도 근무하였다. 1933년 거금 2만원을 들여 10여 년간에 걸쳐 심혈을 받쳐 채집한 7,000여 점의 표본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하여 1년 만에 정리했다.

애제자인 이영노 선생이 1964년 신종으로 명명한 '장억새'의 '장'은 바로 '장형두' 선생님이다. 장억새의 학명은 미스칸투스 캉기(Miscanthus changii Y.N.Lee). 미스칸투스는 억새, 캉기는 장형두, Y.N.Lee는 발견자인 이영노를 뜻한다.

 
1933년 5월 '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하고, 1934년 2월 '경성식물회' 창립하여 조선향토식물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생과 애호가들이 참여했다. 장형두와 박만규는 전라남도에서 초등교원을 하다 1933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일본 문부성 중등박물교원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경성식물회를 주도하고, 3명의 일본인 쓰다, 오오타니, 미야가와 등과 열렬히 활동했다.

 

장형두는 1935년 3월 '정태현, 이덕봉, 박만규, 석주명'과 함께 ‘경성식물회’를 개칭하며 '조선식물학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조선향토식물> 제1호에 2편의 논문 기고 수록했다.

 

’조선식물학연구회‘는 당시 우리나라 생물교원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활동의 폭은 넓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근대 생물학 분야의 초석이 되었던 학회로 해방 이후 ’한국생물학회‘를 거쳐 ’한국식물학회‘와 ’동물학회‘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식물향명집』과 『조선식물명집』 발간 등 향토생물에 연구에 집중하던 이 학회의 정기간행물이 없었다. 장형두는 전국의 수많은 식물표본을 수집하며 이전 일부 우리나라 식물에 대한 '나카이'의 연구결과에 대한 반박을 시도한다.

 

1940년 전라남도교육회 주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전지역의 식물을 조사하여 출간한 『전라남도식물』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연구하였으나 출판 직전에 의견 차이로 탈퇴했다. 장형두 선생은 '일본과 맞짱 뜬 식물학자', "조선 식물상은 조선인 손으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절규하는 민족주의자로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48년 9월 1일 국립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에 임용됐다.

 

1949년 학생용 식물도감 『학생 조선식물도보』(수문관 판, 조선생물교육회 사정)를 발간하여 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비록 종이 질이 떨어지지만 많은 식물의 그림은 나카이의 '조선삼림식물편'의 그것에 못지않다. 그래서인지 초판이후 1년 동안 제4판까지 인쇄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도감이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과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참고가 되기를 서문에서 밝혔다.

 

'식물'을 '묻사리'로 '고산식물'을 '높산묻사리'로 ’동물‘은 ’옮사리‘로 하는 등 철저하게 한글로 표기했다. ’묻사리‘는 '땅에 묻혀서 사는 생물'이라는, '옮사리'는 ’움직여 옮겨가며 사는 생물‘이라는 뜻이다.

 

또 아가풀, 애기똥풀, 괴불주머니, 긴잎별꽃, 큰별꽃, 놋젖가락나물, 들바람꽃, 그늘바람꽃, 매발톱꽃, 꿩의바람꽃, 바람꽃, 꿩의다리, 눈빛승마(升麻·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풀), 좀사위질빵(낙엽 활엽 덩굴나무), 한해살이풀인 넓은잎애기고추나물, 가는마디꽃, 애기마름, 그리고 두해살이풀인 달맞이꽃 등이 장형두와 당시 식물학자들이 고안해낸 우리말 식물 이름들이다.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당시 한글학자 최현배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형두의 둘째 아들 장득성(1936년생)은 서울대 독문과,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나왔으며 대한통운 국제영업부장, 교통부 해외과장, 롯데관광 대표이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2021년 6월 경기도 수원의 한 실버타운에서 그를 만나 ‘조선 유일무이 식물학자’였던 선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증언을 소개한다.

 

그 많은 재산을 까칠하고 고집스레 식물학자로 답사와 연구로 써버렸다. 식구들에겐 오히려 답사 나가는 시간이 집 안 분위기가 따뜻하고 행복했다. 집에 들어오면 채집한 풀꽃을 정리하고 표본을 만들면서 식구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이 오롯이 식물연구에 집중했다.

 

“어머니의 친정 손위 언니가 국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어요. 그 집 큰아들이 만주에서 운전을 배웠는데 귀국해 염전에 취직을 했어요. 그가 트럭을 몰고 다니다가 무슨 밀수에 걸렸어요. 무얼 밀수했는지는 몰라요. 하여튼 잡혀 들어가니까 무슨 ‘백’을 좀 써야 되는데, 그때는 ‘백’ 없으면 못 사는 시대였거든요. 이모부가 서울대 교수니까 끌어넣은 거예요.

 

아니, 끌어넣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이모부가 서울대 장아무개 교수’라고 하니까, 경찰이 아버지를 억지로 엮어서 이북하고 무슨 내통을 한 것처럼 만든 거예요. 당시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사건이 있었잖아요. 걸면 다 걸리던 때였어요.

 

나중 혐의는 온데간데없고, 사망 원인이 고문치사냐 병사(病死)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어요. 이건 뭐 초등학생한테 물어봐도 고문치사지….”

 

세 번째 식물도감 출간을 위한 원고 3차 교정지를 품에 안고 억울한 죽음으로 눈을 감지 못했다. 그 원고를 친구가 책 서문에 ’장형두 선생 고맙다‘는 한 마디하고 본인 이름으로 발간했다. 장득성 선생은 그 내용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 문교부 편수국장, 고려대 교수를 지낸 박만규(朴萬奎·1906~1977년) 선생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었다.
“1949년 11월에 발간된 그 책은 100% 아버지가 쓴 게 맞아요. 출판사로부터 인세를 몇 차례 받은 적도 있어요. 대단한 돈은 아니었지만 대학 등록금에 보탰죠.”

 

식물연구 답사로 재산이 사라지고 돈이 떨어지자, 담양 객사리 부자 처가에서 해준 결혼 예물 금반지 금목걸이까지 팔아 답사비를 마련할 정도였다.

 

장지는 망우리공동묘지였다. 묘지는 2019년 서거 70년만에 단장했다. 묘지번호 201271이다.

 

2020년 광주MBC 8.15특집다큐 ’장형두와 우리 묻사리’가 방영되었다. 둘째 아들 장득성씨와 손을 잡고 조선 천재 식물학자 장형두의 피맺힌 신원을 풀어드려야겠다.

 

장형두의 장녀(張惠卿·1932~)는 이화고녀를 나와 1950년대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이용민(李庸民·1916~1982년) 감독의 영화 〈산유화〉(1957)에 출연했으며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