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1부장 2,3대 민의원 현포(玄圃) 이병홍(李炳洪, 1891~1955) 미서훈 독립운동가 67주기
이병홍은 제2,3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 임기 중 사망했다. 경성 오성학교를 졸업했다. 경남 진주 3.1혁명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참여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1조사부장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경남 산청군 지역구에서 낙선했다.
이병홍은 189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3일에 있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을 계기로 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진주 또한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에 가까운 시위에 3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다. 진양군 내에서 발생한 주요한 만세 시위운동은 정촌면과 미천면을 들 수 있다. 단성면 배양리에 거주하던 이병홍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정촌면 관봉리 강재순에게 서울의 3.1혁명을 목격하고 숨겨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넘겨주고 동지 이종언과 수백장의 선언서를 찍어내어 인근 동지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여 다 같이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등 조국 광복에 힘썼다.
상해임시정부 요인으로도 활약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무소속으로 출마 2·3대 민의원과 반민특위 제1조사부장을 역임했다.
반민법 개정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에 대하여, 1949년 2월 17일자 연합신문의 「대통령 담화는 경악할만한 거라는」 제하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1조사부장 이병홍 명의의 반박 담화를 보면,
“15일부 대통령담화는 그 내용이 너무도 우리들의 상식과 상치되므로 다시금 그 담화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는 사실 대통령이 그런 담화를 발표하였다고 믿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일국의 원수로서 국회에서 결정되고 대통령 자신이 서명 공포한 법을 그 법이 아직 때도 되기 전에 조변석개한다면 그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 하여도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더욱 반민법은 민족의 대의를 세계와 후세 자손에게 밝히는 것이므로 말이 법률이지 우리들은 그 법률을 일종의 민족적 성전으로 생각하고 이 법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옷깃을 바르게 하며 경건하고 엄숙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 감정은 전 민족이 동일하게 가지리라고 믿는다. 그런 법률을 대통령이 만약 개정을 요청하였다면 우리는 참으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흔히 와전이 많은 세상이므로 동 발표가 진상이 아니기를 빈다. 더구나 고문 운운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일국의 원수로서 반민자들의 허위적 낭설을 믿고 부화뇌동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없다.”라는 담화로 반민법의 본래 취지를 퇴색시키려는 이승만 정권의 반민법 개정을 경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헌 국회는 1948년 9월 7일, 전문 3장 32조로 된 을 통과시키고, 9월 22일 정부가 이를 공포하였다.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자 박흥식을 제1호로 체포하며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민특위는 이후 1년 동안에 걸쳐 전국민적 기대 속에 총 682건의 사건을 취급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던 친일파들과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승만은 3권분립에 어긋난다며 반민법의 공포를 거부하기도 했으며, 거듭 담화를 발표하여 반민특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지지를 배경으로 경찰은 반민특위 관련자들에 대한 테러와 암살을 기도했고,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까지 했다. 이후 공소시효 기간을 1년 1개월이나 단축한 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특위활동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이 자리를 메꾸어 반민특위의 활동은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취급한 682건의 사건 중 체형판결이 내려진 것은 12건에 불과했으며, 그 중 5건은 집행유예가 선고되었고, 실형으로 복역한 사람들도 곧이어 발발한 6·25전쟁기간 동안 모두 석방되었다.
망우리공원 관련 인물 중 반민특위 피의자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자는 박희도와 오긍선 두 명이다. 박희도는 3.1혁명 민족대표 33인으로 시중회 회원, 『동양지광』 창간, 국민총력 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으로 활동한 박희도는 1949년 2월 21일 서울 신설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김제선 조사관이 출두명령을 받고 이튿날 출두하였다. 이후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최종결과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해관 오긍선은 교육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경성부회 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한 조사가 착수되자,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해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이병홍은 1955년 10월 17일 새벽 심장마비로 삼청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소에는 해공 신익희가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지번호 205129이다. 묘비 앞면: 民義院議員 玄圃李炳洪之墓. 묘비 뒷면: 檀紀四千二百八十八二十二日 同志一同建立 海公申翼熙書
독립운동가 이병홍 묘역은 용마산 방향과 독락정 정자 쪽으로 갈라서는 사색의 길 삼거리 전 화장실 지나 전파 송신탑 전, 좌측 위에 눈에 띄는 묘비가 있는 이병홍의 묘지다. 묘지의 인물보다 묘비에 써진 글씨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되는 유택이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승학이 김구의 지시로 작성한 친일파 263명 ‘반민특위’ 살생부 초안에 들어간 망우리공원 관련 인물은 시류 따라 기웃거린 기회주이자의 변절 행로 박희도(정치), 근대화 지상주의에 매몰된 재사 황국신민화운동의 기수 설산 장덕수(언론), 친일의 길을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교육), 근대 예술을 빛낸 팔방미인 일제강압으로 내선일체 합리화 영화감독과 작사한 석영 안석주(영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일제말 전쟁 지원 강연 숙명여대 초대 총장 임숙재(교육) 등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간행 친일인명사전 704에 수록된 인물은 박희도(교육), 오긍선(교육), 장덕수(정치인), 김활란(교육), 임숙재(교육), 함세덕(연극), 이광래(연극), 최신복(아동문학), 김상용(교육), 민병덕(교육), 윤상필(군인), 이영찬(중추원), 홍재설(군수, 노해면장) 등이다.
이병홍 묘비 해공 신익희 글씨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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