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조직폭력배로 이승만 정부 시기 정치깡패 도운(都運) 합당(闔堂) 이정재(李丁載, 1917~1961) 61주기
한국의 조직폭력배로 이승만 정부 시기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렸다. 단성사 저격 사건 및 야당 정치인들을 향한 정치테러 등을 지시한 실질적인 배후이기도 하다.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 광주 이씨 집성촌 출신으로 힘이 굉장히 셌다. 마을에서 씨름대회를 개최하면 그날 상품으로 걸린 황소는 전부 다 이정재의 몫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신흥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처가살이로 동대문에서 광목 장사를 했으나 얼마 후 깡패와 시비가 붙자 그 깡패를 씨름 기술로 들어 메친 걸 계기로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 세계에 입문했다. 당시에 보기 힘든 고등보통학교까지 졸업한 엘리트로 김두한의 추천을 받아 경찰관이 되었다. 고향의 후배인 곽영주를 수도경찰학교에 입교시켜 경찰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이후 대한청년단 종로구 동부 단장직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대문 시장의 이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김두한의 정계 진출로 말미암아 종로의 조직이 사실상 정리된 이후, 시장점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열승과 차석환을 포섭하여 '가족회'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6.25 전쟁 이후로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 3000평을 '광장주식회사'로부터 매입하여 점포를 짓고 상인들을 입주시키는 한편으로 상인들을 모두 '가족회'의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이처럼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킨 이정재는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 행위 및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금품을 뜯는 폐단을 없애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해주면서 한 번도 상인들의 원망을 산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망을 사지 않는 한편으로 실은 절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는데, '광장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것을 비롯하여 시장의 전기, 전화, 관리세에 자가발전을 구실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에 불과하던 관영요금을 2000에서 2500환까지 거출하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을 부과하는 등의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러한 내막을 잘 모르는 상인들에게서 이정재의 평판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즉 학력이 전무한 일반 조직폭력배들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돈을 뜯었다면 이정재는 학식이 있는 인물답게 돌아서 돈을 뜯어온 것이다.
이러한 이정재의 세력은 날로 거대해지면서 경마장에까지 미쳤는데, 그가 체포되기 직전 시장의 규모는 종로 4가에서 6가까지 이르는 7만평 규모에 2900여 점포를 아우르며 이정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인의 수는 무려 1만 2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뿐만 아니라 당시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총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거대한 이권을 쥐게 된 이정재는 동대문 광장 입구에 1억환(현 시가 50~100억원)에 달하는 3층 건물을 짓고 옥상에 도장을 설치하여 부하들을 육성했다.
이 무렵 시라소니가 이정재에게 돈을 몇 차례 빌리고 살길이 막막한 전직 북파공작원 KLO 대원들에게 점포를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50만환(현 시가 5천만원 전후)에 달하는 돈을 요구하고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도 점포를 배당해줄 것을 요구하자, 동대문파 간부들은 분노한다. 특히 자존심이 상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둔기, 손도끼 등의 흉기로 난자한 '시라소니 린치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화룡의 명동파와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또한, 고향 후배인 곽영주가 경찰이 되고 싶다고 하자, 이정재는 경찰에게 엄청난 뇌물을 건네주고 곽영주를 경사로 임관시켰다. 이후 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띄어서 이승만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고, 이정재의 위세는 자유당 이기붕의 위세와 권력을 업고 심지어 정계까지 월권을 행사하기도 하고 야당 인사들에 대한 집회 방해, 이기붕의 자유당 의장 취임 공작 등등 수많은 정치테러를 벌였다. 이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곽영주의 별명이 부부통령. 이후 곽영주가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경무대경찰서장이 되자 바로 이정재를 이승만에게 알현시켰고 이정재를 이승만의 양아들로 만들어줬다.
이때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야당 인사 및 기타 조직의 방해자들로 지목된 이른바 제3세력의 동시다발적 암살 기도를 획책하기도 하였음이 혁명재판 당시 밝혀졌는데, 당시 암살대상이 되었던 인물로는 김태선, 이순용,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김상돈, 백두진, 문봉제, 김기홍, 조희창, 이화룡 등 40여명 가량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당시 이정재의 참모총장 격이었던 김동진이 경찰에게서 밀고함으로 무마되었다고 하는데, 이 보복으로 김동진은 단성사에서 영화 '형제는 용감하였다'를 감상하고 나오던 도중 조직원 이석재에게 저격을 받고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 야인시대 등 드라마에서도 주요 사건으로 언급되는 '단성사 저격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검찰의 수사 도중 자유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서 이정재는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나게 됐다.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계 진출까지 꿈꾸고 있었는데, 고향인 이천에서 민의원 출마를 계획했다. 이정재는 오래전부터 이천을 기반으로 정계 진출을 꿈꾸었는지 부하들에게 "길 가다가 이천 사람이 곤란을 겪고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줘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내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이기붕이 수도권이면서 만만한 지역구를 물색하던 도중 하필 이천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런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반강제적으로 빼앗겼다. 이때 이기붕과의 마찰로 말미암아 이정재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이후 직함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 채 권력을 잃은 이정재는 자택에서 칩거하게 됐고, 이 틈을 타서 처세의 달인 임화수가 실질적인 동대문파의 1인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와중에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 일어나고, 군사정부의 조직폭력배 척결사업 대상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 등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겼다. 결국 1961년 5월 21일, 혁명재판부에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제7조1항(단체적 폭력행위)외 11개 범죄행위로 기소되어 범죄단체 수괴로 인정, 사형 판결을 받는다.
판결 이후 공수특전단 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를 쓴 플래카드와 다른 깡패들과 함께 백주의 시내 한복판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1961년 10월 19 오후 3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세. 이날 형무소장 면회라는 명목으로 감방에서 나와서 이동 중에 교도관들이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이정재는 처음엔 흠칫했지만 바로 체념하면서 "오늘부터는 대접이 바뀌는구만?"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형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10월 21일 유족들에게 인도된 이정재의 주검은 곧바로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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