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안내문

정종배 2022. 10. 29. 02:11

망우역사문화공원


조선 건국 도읍지인 한양 동쪽의 외사산인 아차산 줄기의 망우산에 자리한 망우리공동묘지는 1930년 전후 서울의 급속한 도시화로 일제가 1933년 망우리 일대를 경성부 부립공동묘지로 정하였다. 그 이면에는 망우리 건원릉 즉 조선 왕조의 맥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간교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알려졌다.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서울을 경기도 경성부로, 양주군 망우리면을 망우리로 격하시켰다. 서울 인근 19개 공동묘지 대부분을, 1960년대 초 미아리공동묘지를 끝으로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1973년 폐장될 때 망우리공동묘지에는 4만 8천여 기의 묘지로 가득 찼다. 현재는 7,000여 기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꿰뚫은 150여 인물들이 잠들어 계시거나 이장하였다. 개화기부터 1970년대 초까지 활동한 분들이다. 대한민국 국가기념일마다 빠짐없이 해당하는 인물이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혔거나 관련을 맺는다.

교과서 수록 인물

「님의 침묵」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근현대사의 거인 만해 한용운,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
동요 <오빠생각>의 오빠 아동문학가 영주 최신복,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월파 김상용,
「실비명」의 소설가 김이석,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용운 오세창 박희도,
3.1만세운동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 열사,
<가을 어느 날>·<해당화>의 화단의 귀재 아소 이인성,
대한민국 근대미술 3대 거장 <황소>와 은박지의 국민화가 대향 이중섭과 <지원의 얼굴> 조각가 권진규,
동아일보 창간사 정치인 설산 장덕수,
진보당 사건으로 사법살인 당한 정치인 죽산 조봉암,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 동아일보 소오 설의식,
간송 전형필의 멘토와 『근역서화징』의 민족의 어른 위차 오세창,
<어린이 노래>·<유관순 노래>·<꼬마 눈사람>·<태극기>·<금강산>·<스승의 은혜> 등의 동요작사 아동문학가 소천 강용율,
「세월이 가면」·「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탈출기」·「홍염」의 소설가 서해 최학송,
「백치 아다다」·「구두」의 소설가 우서 계용묵,
「동승」의 극작가 함세덕,
‘조선심’의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종두법의 송촌 지석영,
『학생식물도보』의 저자 조선 천재 식물분류학자 고문사 당한 장형두 서울대학 사범대 부교수, 세종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 국채표 등이다.

이장하신 분은

흥사단의 도산 안창호,
「파초」·「내마음」의 시인 초허 김동명,
<우리의 소원>을 작사한 석영 안석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문학파 시인 영랑 김윤식
<고향>·<향수>의 작곡가 산남 채동선,
대한독립선언 39인 남파 박찬익,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나용환, 박동완, 이종일, 홍병기,
영화 <아리랑>의 춘파 나운규,
민속학의 선구자 석남 송석하,
4·19혁명의 도화선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
4·19혁명 열사 편지가 유서가 된 한성여중 진영숙 수송국민학교 전한승 서울대 법대 신입생 박동훈,
‘동요 <우리나라 꽃> 작곡가 함이영,
창씨개명 강요하자 자결한 조선어학회 2대 간사장 주산 신명균 독립운동가 등이다.

이곳의 명칭은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리묘지공원’을 거쳐 ‘망우리공원’이라 이르다 현재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부른다. 1991년부터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했다. 전국 지자체 최초 묘지공원을 관리하는 전담 과가 2021년 7월부터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가 개설되어 서울시에서 업무를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안내문

1.
시인 박인환(1926-1956)
강원 인제 출생. 경기중 평양의전에서 공부했다. 광복 후 낙원동 입구에 연 서점 마리서사를 통해 문인들과 교유하며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했고 6·25전쟁 때는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절망적인 전쟁 체험을 시로 승화시킨 대표작 「목마와 숙녀」는 한 잔의 술을 마시되 눈을 뜨고 절망을 직시하자는 삶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노래했지만 정작 그는 단 한 권의 시집 『선시집』(1955)을 남기고 다음 해 봄날 목마를 타고 하늘로 떠나갔다. 그해 추석날 세워진 비석의 글은 노래로도 유명한 「세월이 가면」의 한 구절로 소설가 송지영이 썼다. 비문처럼 그의 말은 지금도 우리 가슴에 남아 있다.
2.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1904-1948)
석남 송석하(宋錫夏)는 1904년 경상남도 울주군에 태어났다. 1923년 관동대지진 참상을 목격하고 경제학에서 민속학으로 전환했다. 1932년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하고 전통 민속의 발굴과 보존, 그리고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자 했던 우리나라 민속학의 선구자이다. 이후 1946년 국립민족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을 개관하여 초대관장을 지냈다. 1948년 45세의 나이로 타계하여 망우리에 모셔졌으며, 1996년 충청남도 태안으로 이장되었다. 같은 해(1996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3.
화가 대향 이중섭(1916-1956)
평남 평원 출생. 오산학교 졸업 후에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문화학원 재학 중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여 각광을 받았다.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하여 1940년 협회상, 1943년 태양상을 수상했다. 6·25 때 부산과 제주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 후일을 기약하며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1955년 개인전을 개최하여 화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실패하여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다 1956년 40세에 타계했다. 대표작으로 「흰소」, 「황소」 등이 있으며 독창적인 은지화 3점은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향은 독일민요 소나무를 즐겨 부르고 김광균의 시 '설야'를  즐겨 낭송했다. 유택에 소나무는 절친인 시인 구상이 심었다.
4.
소설가 서해 최학송(1901-1932)
함북 성진 출신. 극심한 가난으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북간도에서 방랑 생활도 했다. 1924년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에 제1호 신인추천 작가로 등단했고 「탈출기」(1925), 「홍염」(1927) 등 실제로 겪은 고난의 체험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썼는데 당시 문인들의 소설과는 차별화되는 빈궁문학으로 독보적인 것이었다. 중외일보 기자와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지냈으나 여전한 가난 속에서 31세로 요절했다. 최초의 문인장으로 미아리에 안장되었으나 묘를 돌볼 유족이 없는 상태에서 1958년 동료 문인들에 의해 망우리로 이장되었다. 2010년 정종배 시인이 북에 있는 후손을 대신하여 묘지관리인으로 등록되어 추모제를 치르고 있다.
5.
소설가 우서 계용묵(1904-1961)
평북 선천 출생. 1920년부터 소년 잡지에 시를 발표했고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 「상환」으로 등단한 후,
「백치 아다다」, 「최서방」, 「인두지주」, 「별을 헨다」 등 주로 서민의 삶에 주목한 작품을 남겼고 특히 1935년 발표한 「백치 아다다」는 영화로 만들어져 문예 작품의 영화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38년 조선일보사 출판부 기자를 지냈고 1945년 정비석과 함께 잡지 《대조》를 창간, 1948년 김억과 출판사 ‘수선사’를 창립했다. 6·25 제주도 피난 시절 제주 동백다방에서 문화계와 교류했다. 비석은 현대문학사가 세웠다.
6.
애국지사 계산 김승민(1872-1931)
함남 함주 출생. 1906년 항일의병과 내통했다는 소위 밀칙사건에 관련되어 2년간 복역하고 1909년 헤이그특사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6개월간 복역한 뒤 만주로 망명했다. 1920년 만주 왕청현에서 홍두식 등과 광복단을 조직했고 1922년 7월까지 국내와 만주 일대에서 무력항쟁을 전개했다. 1925년 대동회 회장으로 활약하던 중 피체되어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4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7.
애국지사 남파 박찬익(1884-1949)
경기 파주 출생.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독립선언서 39인에 이름을 올렸다. 1940년 임시정부 법무부장으로 조완구와 함께 김구 주석의 좌우 측근으로 활동했고 광복 후에도 중국에 남아 주화대표단장으로 활약하다 병을 얻어 1948년 귀국 요양하다 별세했다. 효창공원에 모시고자 했으나 고인은 ‘무성입토’를 원해 이곳에 들어왔다. 1993년 국립묘지로 이장, 비석 두 개가 남았다. 큰 비석의 글은 시인 조지훈이 짓고 서예가 최중길이 썼다. “깊이 감추고 팔지 않음이여 지사의 뜻이로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8.
야구선수 송운 이영민(1905-1954)
경북 예천 출생. 배재고 연희전문에서 수학했다. 축구, 농구, 육상, 야구 등 다양한 종목에서 이름을 날린 체육인으로 한때 육상 400m 한국 신기록 보유자였다. 1928년 동대문운동장 한국인 1호 홈런을 날려 ‘호무랑왕’으로 불렸다. 1931년 《동광》이 선정한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에서 최다 득표를 얻었다. 해방 후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 1954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과 아시아야구연맹 한국 대표를 맡았다. 대한야구협회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부터 고교야구 종합타율 1위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하고 있다.
9.
가수 차중락(1942-1968)
서울 신당동 출생. 경복중고를 다니며 육상선수로 활약했고 한양대 연영과에 들어와서는 보디빌딩을 하여 1961년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했다. 1963년 밴드 키보이스에 합류하여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솔로로 전향한 후, 첫사랑 애인을 미국으로 떠나보낸 그의 감성이 녹아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1966)이 큰 인기를 얻어 1967년 TBC 방송가요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전국을 도는 바쁜 일정 속에서 돌연 공연 무대에서 쓰러져 11월 10일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되었다.
10.
국회의원 현포 이병홍(1891-1955)
경남 산청 출생. 한학을 공부하고 오성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바지 대님 속에 감추고 진주로 내려와 진주 3·1운동을 돕고 고향 산청군의 시위를 주도했다.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 제1조사부장으로 일하고 제2대(1950) 및 3대(1954) 민의원(국회의원)으로 일하다 과로로 별세했다. 아호 현포는 중국 곤륜산에 있다는 신선의 동산을 뜻하여 고인의 한시 취미가 엿보인다. 비문은 해공 신익희가 썼다.





11.
애국지사 명재 이탁(1898-1967)
경기 양평 출생.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1924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8년 오산학교 국어 교사로 부임했다. 1932년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말 사정위원 등을 지냈으며 해방 후부터 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국어학을 가르쳤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고 1992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서울사범대 제자들이 세운 비석이 고인의 일생을 전하고 있다.
12.
영화감독 노필(1927-1966)


서울 화동 출생. <안창남 비행사>(1949)로 영화계에 데뷔하여 39세로 생의 막을 내릴 때까지 17년간 30여 편을 만들었다. 제작까지 참여하고 유작이 된 <밤하늘의 부르스>(1966)로 음악영화의 일인자로 불리며 대외적으로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당시 영화계의 구조적 모순으로 많은 빚더미에 몰려 불운한 자신의 삶을 향해 마지막 을 외쳤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온 노래는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었다적막이 스미는 밤하늘에트럼펫 메아리 퍼지네내 사랑 그대 고이 잠자라저 멀리 떨어진 그대포근히 잠들어라
13.
총독부 산림과장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일본 니가타 출생. 도쿄대 임학과 졸업 후 농상무성 산림국에 들어가 대만, 야마나시현을 거쳐 홋카이도 임정과장으로 재직하던 1909년 대한제국의 농공상부 기사로 초빙되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 초대 산림과장이 되어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를 도입하고 식목일을 제정하는 등 조선의 산림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1918년 영림창장으로 퇴직한 후 사이토임업연구소를 설립하여 산림위탁경영 사업을 벌였다. 경성 일본기독교회의 장로였기에 십자가를 새긴 이 묘는 봉분 없이 비석 밑에 화장된 유골을 묻는 일본식 묘의 형태이다.
14.
정치가 죽산 조봉암(1899-1959)
인천 강화 출생. 청년 시절 3‧1운동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다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했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 주요 리더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중도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고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제2대 및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2위를 차지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고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 31일 사형당하고 이곳에 묻혔으나 비문이 없는 묘비(백비)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마침내 2011년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이상적인 정치인상으로 부활하고 있다. 입구의 연보비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단어를 당신이 하고자 하는 그 무엇으로 바꾸어 읽어보기 바란다.
15.
대한중석 사장 안봉익
(1910-1957)
함북 경성 출생.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 광산과를 졸업하고 고바야시광업에서 일했다. 해방 후 충북 제천에서 월악중석광산을 경영하다가 1952년 대한중석의 초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한때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여 ‘구국의 자원’이 되었던 중석(텅스텐) 산업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한미중석협정의 성공적인 체결을 이끌었다. 고품위 광석을 생산하고자 화학처리공장을 1956년 착공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과로로 순직했다. 2006년 한국공학한림원 등이 발표한 ‘대한민국을 이끈 엔지니어 60명’에 선정되었다.

16.
언론인 소오 설의식(1901-1954)
함남 단천 출생. 3.1운동에 참여하여 중앙학교 퇴학 후 일본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의 인연으로 1922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8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사를 떠났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고 1947년 새한민보를 창간했다. 그의 글 「헐려 짓는 광화문」은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다. 『난중일기』를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하는 등 충무광으로 불리며 이순신 선양에도 힘썼다.



17.
개신유학자 오촌 설태희
(1875-1940)
함남 단천 출생. 1906년 대한자강회 설립에 참여하고 이동휘, 이준 등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조직했다. 갑산군 영흥군의 군수로 지내다 1910년 국권 피탈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유학 연구에 몰두하여 『학림소변』, 『대학신강의』를 저술했다. 조선경제회, 민우회, 조선교육회 등에 참여하고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서 강연 활동에 나서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공헌했다. 왼쪽이 장남 설원식의 묘이고 아래가 차남 설의식과 넷째 설도식의 묘다. 비문의 글은 정인보가 짓고 글씨는 김순동이 썼으며 앞면의 제자는 위창 오세창이 썼다.



18.
애국지사 송암 서병호(1885-1972)
황해 장연 출생. 한국 기독교 최초의 유아 세례자. 경신학교 유일한 1회 졸업생으로 장로교 최초 목사의 한 명인 부친 서경조가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와 안창호의 대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내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22년 대한적십자사를 창설했고 1947년 귀국 후 새문안교회 사무장, 경신학교 이사 등을 거쳐 1960년 경신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고 2008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19.
소설가 김이석(1915-1964)
평양 출생. 평양광성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서 공부했다. 1938년 단편 「부어」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1년 평양 명륜여상 교사를 지내다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하고 종군작가단에서 활동했다. 1953년 이후 《문학예술》 편집위원과 성동고 강사를 지냈다. 단편집 『실비명』으로 1957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1964년 제14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대한일보에 역사장편 『신홍길동전』을 연재하던 중 갑자기 별세하여 평양종로보통학교 1년 후배 이중섭이 있는 망우리로 왔다. 부인은 박순녀 소설가이다
20.
애국지사 박원희(1898-1928)
충남 대전 출생, 경기여고보 졸업 후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 김사국과 결혼했다. 1923년 부부는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항일선전문을 배포했다.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1927년 근우회에 참여하고 동아일보에 논설을 발표하는 등 민족해방과 여성의 사회의식 향상을 위해 헌신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200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02년 남편인 김사국 애국지사와 함께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21.
명온공주(1810-1832)·부마 김현근(1810-1868)
명온공주는 순조의 장녀로 15세에 진사 김한순의 아들 김현근과 혼인했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여 23세에 요절했다. 김현근은 중국 사신, 판의금부사 등을 지내고 고종 5년(1868)에 별세했다. 이 묘는 원래 종암리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앞쪽에 있다가 1936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비석은 고종의 명으로 세워진 것이다. 조선 후기 양식을 보여주는 장명등의 불탄 모습이나 상석 위에 새겨진 영문 이름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후에 벌어진 ‘망우리 전투’의 흔적이다.
22.
변호사 학범 박승빈(1880-1943)
강원도 철원 출생. 1899년 판임관 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관리가 된 후, 1907년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주오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1908년 평양지법 검사를 거쳐 1925~1932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 1918년 민족계몽과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오세창, 최남선 등과 계명구락부를 조직하여 양력 사용, 혼상례 간소화, 한복 개선 등 신생활 문화 전파에 노력했다. 한글 연구에도 힘써 1931년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선어학』을 출간했고 조선축구협회 초대 회장도 지냈다.
23.
의사 행농 이영준(1896-1968)
대구 출생. 개성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1921년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다. 1927년 졸업 후 스승 오긍선의 조교로 임용되었고 세브란스 출신 임상의로는 최초로 동경제국대학에서 1933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피부과 주임교수와 부속병원장을 거쳐 1942년 오긍선에 이어 세브란스 3대 교장이 되었다. 해방 후 한민당 재정부장,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국회의원(4선)과 국회부의장(2회)을 역임했다. 비석의 글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지었고 서예가 정필선이 썼다.
24.
지기 문명훤(1892-1958)
평남 맹산 출생.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맹산에서 시위를 주동한 후 1920년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서기를 지내고 미국 유학을 떠나 학업 외로도 동포를 돕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귀국 후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에는 한글 연구에 힘써 수기 프린트판인 『국어의 참두루미』, 『제글 제문화』와 자서전 『간난의 정복자』를 남겼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06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25.
기독교인 이경숙(1924-1953)
경기 개성 출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호수돈여고 시절 스승이던 유달영(서울대 교수)을 만나 평생의 제자가 되었다. 호수돈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개성 교외 시골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스승 유달영이 참여한 한국 MRA(도덕재무장 Moral Re-Armament) 설립에 남편과 함께 참여했다. 비석의 글도 유달영이 짓고 썼는데, 고인의 순수한 신앙과 착한 덕행의 30년 일생이 우리나라 여성에게 영원한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26.
민예연구가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일본 야마나시현 출생. 기독교인. 한국에 1년 먼저 온 형 노리다카를 따라 1914년 건너와 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하며 한국의 산림녹화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민예를 수집하고 연구해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를 출간했고 아사카와 형제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 중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이문동공동묘지에서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여 유언대로 한국의 흙이 되었다. 오른쪽의 항아리(청화백자추초문각호)는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고 일컫는 형 노리다카가 1주기 때 세웠다.
27. 애국지사 도산 안창호(1878-1938) 1878년 11월 9일 평남 강서 출생. 1897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을 통해 근대교육과 실력양성에 힘썼다. 1905년 공립협회 1907년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여 이를 실질적으로 이끈 지도자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건강 악화로 1938년 3월 10일 서거했다. 유언에 따라 망우리에 제자 유상규 옆에 묻혔다가 1973년 강남 도산공원으로 이장하였다.
도산기념관에 사용되지 않고 보관되어 있던 구비석은 2016년 이 자리로 돌아왔고 2022년 가묘(허묘)가 새로 만들어졌다.
28.
애국지사 김봉성(1900-1943)
평남 강서 출생. 도산 안창호의 조카사위. 선천의 신성학교 재학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일본 주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1930년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를 지내고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43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8세의 딸과 함께 사망해 도산 묘의 오른쪽으로 들어왔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받고 2016년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29.
화가 아소 이인성(1912-1950)
대구 출생. ‘귀재’ ‘천재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대표 화가다. 일찍이 수채화를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입선 특선 최고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조선 미술계에 등장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광풍회’ ‘제국미술원’ 등 도쿄 화단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고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와 수채화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며 20대의 나이에 ‘화단의 귀재’라 불렸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창립에 주역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다. 195011월 불의의 총기 오발 사고로 북아현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30.
흥사단 단우 향산 이영학(1904-1955)
평북 선천 출생. 신성학교에서 공부하다 오산학교로 옮겨 졸업했다.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서 수학하고 1924년 돌아와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4년 동아일보 선천지부 기자로 시작하여 지국장까지 지내며 선천 지역의 언론 문화 체육 분야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한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4 후퇴시에 월남하여 부천에서 별세했다.
31.
의사 송촌 지석영(1855-1935)
서울 낙원동 출생. 최초의 서양의학(종두법) 도입자로 우리나라 천연두 종식에 공헌했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대구판관, 동래부사,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1899년 관립의학교(서울의대)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의학 외로 한글과 농학 연구에도 힘을 쏟아 1908년 외국어 학습서인 『아학편』, 1909년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한 『자전석요』, 보리 재배에 관한 기술서 『중맥설』 등을 편찬했다. 8대 역관 5대 의사 집안으로 의사였던 장남 지성주의 묘가 옆에 있다.
32.
삼학병(-1946)
왼쪽부터 학병동맹원 김명근, 박진동, 김성익이다. 학병동맹은 일제강점기에 징집되었던 학병들이 해방 후 돌아와 조직한 사회주의 경향의 단체였다. 1946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반탁전국학생연맹과 학병동맹원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학병동맹본부로 출동한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학병동맹원 3명이 피살되었다. 김성익은 학병동맹 부위원장, 박진동은 경성제대 재학생으로 군무국장이었다. 비석 뒷면에는 ‘조국을 위해 죽다’라고 새겨졌다.



33.
조각가 권진규(1922-1973)
함남 함흥 출생.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1953년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던 해 일본 이과전에 석조 <기사>를 출품, 특대의 상을 수상했다. 1959년 귀국 후 성북구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손수 설계해 짓고 1973년 떠나는 날까지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프랑스 근대 조각 거장 브루델과 그의 일본인 제자 시미즈로 형성된 예맥을 이었으되 자기만의 ‘자기류’를 추구, 석고-브론즈-목각-석조-테라코타-건칠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한국적 리얼리즘 조형 세계를 구축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소상을 만든 예술가로 대표작은 <>, <지원의 얼굴>, <십자가 위 그리스도>, <불상> 이다.

34.
소설가 끝뫼 김말봉(1901-1962)
부산 출생. 정신여학교를 거쳐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9년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망명녀」가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소설 「밀림」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1937년 「찔레꽃」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일제말에는 필봉을 꺾고 지내다가 해방 후에는 공창폐지 등의 사회활동에도 나서는 한편, 여성 인권문제 등의 사회성을 띤 작품도 발표했다. 1957년 여성 최초로 예술원 회원 및 기독교회 장로가 되었다.
35.
영양학자 김호직(1905-1959)
평북 벽동 출생.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농대)를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생물학과를 1930년 졸업하고 이화여전과 숙명여전에서 생물학 및 영양학을 가르쳤다. 1946년 국립수원농사시험장을 거쳐 1948년 정부 대표로 FAO 총회에 참석했으며 1951729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의 침례를 받았다. 1951년 「콩 단백의 영양학적 연구」 논문으로 코넬대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콩 박사’로 불렸다. 유네스코 한국집행위원, 서울시 문화위원, 한국생물과학협회 부회장, 한국영양협회장, 한글학회 이사장,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초대 학장, 문교부 차관 등을 역임하며 사회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36.
소천 강용률 강소천(1915-1963)
함남 고원 출생. 1930년 《아이생활》에 동시 「버드나무 열매」를 발표했고 1941년 동시집 󰡔호박꽃초롱󰡕을 냈다. 1939년 동아일보에 동화 「돌멩이」 발표 이후 「꿈을 찍는 사진관」 등 많은 동화를 발표했다. <스승의 은혜>, <유관순의 노래>, <어린이 노래>, <태극기>, <코끼리>, <산토끼야> 등의 노랫말을 지었다. 어린이 잡지 《새벗》의 편집 책임을 맡아 오래 일했으며 1957년 ‘어린이헌장’ 제정에 앞장섰다. 1965년부터 소천아동문학상 운영, 1985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2006년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강소천문고 개관 등으로 기념되고 있다. 비석 앞면에는 대표작 「닭」이, 뒷면에는 시인 박목월의 추모사가 새겨져 있다.
37.
노고산천골취장비
1938년 서울 서쪽 노고산(서강대 뒤)에 있던 공동묘지가 택지 개발로 없어지면서 무연고 분묘를 망우리로 옮기고 세운 비석이다. 세로로 새겨진 글자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는 당대 최고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아래에 붙은 비면의 글은 노고산장택지경영주식회사 전무인 송달섭이 짓고 서예가 김흡이 썼다.



태허 유상규 호암 문일평 김분옥 소파 방정환 만해 한용운 김사국 박동훈 함이영 이옥경 은석 박은혜 오봉 박현식 정촌 손창환 주산 신명균 백담 임병철 강학린 김기만 김명신 임용하 송계 김정규 별산 나우 변성옥 조종완 추담 허연 국채표 장형두 등

인물들의 이름 앞에 호를 넣어 주는 것을 고려해 보십시오. 옛 분들의 정서 고향 사상 등을 엿볼 수 있어서

노래 영화 제목은 < > 시 소설 희곡 등 작품은 「 」 작품집은 『 』 월간지 잡지 등은 《 》


이장 되었다 는 이장하였다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국채표 장형두 등 과학자 특히 국채표 선생은 이장할 예정이라 과장님께 여쭤 안내판을 세웠으면 합니다

그리고 도로에 걸린 현수막을 제작하는 것도 둘째 아들 미국 들어가기 전 구청 방문할 때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늘 건강 최우선으로 즐거운 나날이시길 빕니다

제가 교정 본 것은 제 기준이기에 얽매이지 마시고 교정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정종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