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연극학자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 초대과장
온재(溫齋) 이광래(李光來, 1908∼1968) 54주기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일방통행 삼거리에서 용마산 쪽으로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산,아차산)를 직진하면 300m 정도에 왼쪽 면목동 남촌마을 산신제터 오른쪽 김병진 독립운동가 묘역 안내문이 서 있다. 이어 200m 더 가면 왼쪽에 독립운동가 경아 서광조 연보비가 나온다. 그곳에 200m 정도 걷다 정면에 포장길 끝나는 곳에 산악 산불사고 신고/119/현 위치/G9/서울시소방본부 산불진화보관함이 있다. 그 보관함 50m 전 왼쪽 길섶 위에 극작가 이광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이광래 묘지 안내판은 없다. 친일인명 사전에 수록된 이유라 미루어 본다. 축대 높이 2m 정도 진달래꽃나무가 묘역 앞에 자라고 있다. 묘지번호 108899이다.
이광래는 경남 마산 출생이다. 본명은 흥근이며 호는 온재이다. 극작가·연출가·연극학자로 활동했다. 그는 사회사업가인 무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산토끼> 동요작가 이일래의 아우이다. 어릴 적 그는 동네에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동 생활을 했다.
1928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1930년 동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3학년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기자생활을 하다 1935년 극예술연구회에 가담하면서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고집과 자신감은 훗날 그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색채를 분명히 하는 연극을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와세다대학 영문과 재학 중 입센과 체홉의 작품을 읽으면서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귀국을 하게 됐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인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 소속되었던 단체는 유치진, 서항석 등이 주도하고 있던 극예술연구회였으며, 일제에 의해 해체된 후에는 동양극장에서 활동하던 이들과 연합하여 중앙무대를 창단하고 연학년, 신재현 등과 함께 공연하며 극작·연출·제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극 경험을 쌓는다. 1940년대에는 황금좌에 관여하면서 1943년 제2회 국민연극경연대회에 출전했다. 조선총독부 정보과는 ‘생산 확충과 징병제도 또는 육해군 지원병제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일본정신을 강조한 예술적 작품’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북해안 흑조」는 사재를 털어 제방을 쌓은 인물의 동상을 하나의 상징으로 내세워 총력전 체제에서 전체주의적 가치를 미화하고 선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회 일어극 2석을 수상했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계열의 단체였던 조선연극동맹에 대항, 옛 중앙무대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민족예술무대(민예)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이후 신극협의회 간사장, 극단 신협 초대 대표 등을 거치면서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중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고, 1958년에는 소극장 운동 단체인 원방각을 설립하여 그에게 처음으로 연극에 대한 동기부여를 했던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다. 극작가, 연출가로서 뿐만 아니라, 연극학자로서 이광래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는데, 일찍이 대학연극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학연극경연대회(1948)를 실시했으며 드라마센터 개관 작업에 참가하고 서라벌예술대학 초대 연극학과 학과장, 동국대 연극학과 등에서 강의를 하며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연극 이론에 대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브레히트에 관해 논하였으며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이론과 실기 양면에서 고르게 활약한 몇 안 되는 예술인이었다.
그가 참여했던 극단의 흐름을 살피자면 극예술연구회(1935)에서 중앙무대(1938), 황금좌(1940), 민족예술무대(1945), 신극협의회(1950), 신협(1950), 극협(1951), 원방각(1958)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광래는 ‘뛰어난 연극 실험가이자 교육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수십 편의 창작 및 각색 희곡과 논문을 쓰고 여러 개의 작품을 연출하는 동안 당대로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이론을 터득했으며 이를 후학들에게 전수했다. 『유고(遺稿) 희곡집』<촌(村) 선생>(현대문학사.1972)이 있다.
망우리공원에는 춘사 나운규 묘지가 있었다. 지금은 ‘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 2-257)’으로 이장했다. 묘비를 묘지 터에 묻었다. 묘비를 발굴하여 춘사의 영화와 삶을 추모하고 기리는 일을 추진해야 한다. 춘사의 아들 나봉한은 이광래의 서라벌예술대학 영화과 제자이다.
춘사 나운규의 막내아들 나봉한은 아버지 뒤를 이어 영화감독이 됐다. 태어난 곳은 서울. 3살 때 춘사가 사망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경기상고와 서라벌예대를 나와 신상옥 감독에게 영화·연출을 배웠다. ‘신 필름’에서 만든 데뷔작은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년). 이 영화로 나 감독은 그해 대종상을 거머쥐었다. 또 민비로 분한 배우 최은희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청산별곡」 「꽃가마」 「화촉신방」 「문정왕후」 「인조반정」 「꼬마신랑3」 같은 사극 영화를 만들었다. 그 시절엔 사극이 많았다. 평론가로부터 ‘사극을 말쑥하고 기름지게 다듬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나운규 아들’이란 숙명을 메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봉한 감독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경기상고 3학년에 재학할 때, 서라벌예술학교(나중 서라벌예술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72년 중앙대와 통합됐다) 교장 윤백남을 찾아갔다.
“영화계라는 큰 테두리에서 후광을 입었다. 나봉한은 서라벌예술학교에서 안종화, 이광래, 유두연 선생 등에게 영화를 배웠다. 모두 춘사 나운규 친구들이다. 신상옥 감독 밑에서 작업한 것이나 동료 감독에 비해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던 점도 춘사의 덕분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봉한은 아버지 나운규 뒤를 잇는다는 생각보다 영화 그 자체를 미치도록 좋아했다.”
“나봉한은 나운규 후광을 이용하거나, 나운규 아들을 내세우고, 나운규 영화와 경쟁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봉한은 그날 윤백남 선생에게 ‘영화를 해도 절대로 가족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 약속대로 정말 성실하게 살았다. 평생 남 신세를 안 지려 했다. 몸이 편찮으셔도 가족에겐 내색하지 않았다. 나봉한은 자식들에게 항상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길게 생각해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후회하지 않는 삶!’, 이게 학창시절, 우리 집 가훈이었습니다.” 나봉한의 아들, 춘사 나운규 장손인 나광열의 고백이다. 묘비 찾은 일로 전화를 주고받고 있다. “과거에 할머니를 통해 받은 할아버지 유품 중에 필름이 있었다는데, 그 필름이 〈아리랑〉인지 여부는 알 수 없어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제게 안 하셨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오랫동안 〈아리랑〉 필름을 찾으려 애를 많이 쓰셨어요. 중국에서 〈아리랑〉을 상영했다는 기록을 보고 중국엘 갔고, 〈아리랑〉 필름 소장자로 알려진 일본인 아베 요시시게(2005년 사망)를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어요. 그러나 필름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순 없었어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건물 낙성식과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식민지 민중의 울분을 사실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변사가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해설하면서 아리랑 노래가 울려 퍼지면 영화관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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