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독립운동의 등불을 밝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세브란스인들 60여명
32명 세브란스인 국가보훈처 유공자 포상
세브란스 교수, 학생, 간호사, 직원 등이 하나가 되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독립선언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등 3·1운동의 한 복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세의료원(의료원장 윤도흠)은 최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브란스 독립운동’ 전시회를 원내에서 개최하고 있다.
연세의료원이 조사한 결과 2019년 2월 현재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 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세브란스인들 중에서 의사 출신은 김필순 등 20명, 간호사 출신은 이정숙 등 7명, 교직원은 스코필드 등 5명으로 총 32명으로 나타났다.
이들을 포함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세브란스인 들은 60여명을 상회한다. 3·1운동에는 교수, 학생, 간호사, 직원 등 세브란스의 다양한 직군들이 참여하였는데,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윤도흠 연세의료원장은 “세브란스는 ‘3·1운동과 독립운동’의 근원이자, 핵심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에서 의료인의 신분을 십분 발휘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과 정보를 제공하면서 실제적인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중심지이자 독립운동에 기여한 세브란스인 들을 기억하고 참 된 삶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우리 선배들의 삶을 세브란스 곳곳에 마련된 전시물과 기록물을 통해 살펴보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학생 독립운동
1919년 2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이하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은 세브란스병원의 제약주임인 이갑성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모였다. 서울 시내 각 전문학교 대표자들의 모임에 세의전 학생이 합류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세브란스의전 학생 중에는 이용설(1919년 졸)과 김문진(1921년 졸)이 중심이 되어 학생청년회(YMCA), 서북학생친목회, 교남학생친목회 등 학생단 조직을 배경으로 한 3·1운동을 주도했다.
세브란스의전 학생 독립운동의 중요한 연결고리는 ‘경성부 화천정(和泉町, 현 중구 순화동) 126번지’이다. 이곳은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세의전 학생 6명이 하숙집이다. 이곳에 하숙하던 김문진, 배동석(1918년 입학), 김성국(1921년 졸), 김봉렬(1922년 졸), 김찬두(1922년 졸), 이굉상(1922년 졸) 모두 서울과 마산, 함안 등지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이번 책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도 있다. 세브란스의 독립운동이 세브란스의학생 배동석의 하숙집 ‘경성부 화천정 126번지(현 서울시 순화동)’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을 새롭게 밝혀졌다. 배동석은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전부터 배일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 인물이다. 당시 학생조직인 교남학생친목회 회장으로 3·1만세시위 가담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는데, 이는 배동석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세력의 배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화천정 126번지에는 배동석을 포함하여 김문진, 김봉렬, 김성국, 김찬두, 이굉상 등 6명의 세브란스 학생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같은 하숙집에서 3·1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민족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의 열기를 공유했다. 이들은 모두 3·1만세시위에 가담하였고, 모두가 옥고를 치렀다.
또 그는 “3ㆍ1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학생들의 역할이었다. 시위 준비와 확산과정에서 학생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경성부 화천정 126번지 오한영의 방’ 하숙생들인 배동석, 이굉상, 김문진, 김성국, 김봉렬, 김찬두 등은 주로 기독교 신자들로, 선교 초기에 복음이 전해져 세워진 교회의 출신들이다. 이들의 계보를 이어 경남에 3ㆍ1운동이 전파됐다”라고 강조했다.
이 외에 군산에 독립선언문을 전달하기도 한 김병수(1921년 졸)이외에도, 박주풍(1919년 졸), 서영완(1918년 입학), 최동(1921년 졸), 송춘근(1923년 졸), 안상철(1929년 졸)이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이굉상(1922년 졸)은 마산에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각각 징역 6개월에서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독립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병수, 배동석, 송춘근, 안상철 등은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직원 독립운동
세브란스병원 직원으로 3·1운동에 참여한 인물로는 이갑성, 정태영, 이일선을 꼽을 수 있다.
3명은 모두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각자 3·1운동의 최전선에서 희생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인 이갑성은 3·1운동 조직과정부터 관여하였고, 각 종교계의 합동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회의 장소를 제공하였고, 나뉘어져 있던 종교계와 학생세력의 독립운동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세브란스의전 학생 인맥을 활용하여 각 지역,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독립선언서와 3·1운동 계획을 전달하였다. 세브란스병원 회계직 사무원이었던 정태영은 1919년 3월 2일 밤 11시 종로 보신각의 종을 난타하여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을 크게 알렸다.
이 사건은 3·1운동의 시작을 국내외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세브란스병원 샤록스(Alfred M. Sharrocks) 이사는 이 사건을 국내외 선교사에게 알렸다. 세브란스병원 사진사였던 이일선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소식을 알리고자 신문을 발간, 배포하여 독립운동을 널리 알렸다.
세브란스병원 엑스선실에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 배포하였고, 이외에도 '반도목탁(半島木鐸)', '국민신보(國民新報)'등을 발간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아갔다. 이들은 징역 7월에서 2년 6개월을 구형받았고, 모두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간호사 독립운동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5일 남대문정거장 앞에서 이어졌다. 시위에 따른 부상자의 발생으로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서 교육을 받던 견습생들은 곧바로 시위현장으로 달려 나가 부상자들을 돌 볼 수 있었다. 1917년 세브란스의전 부속 간호부양성소에 입학한 정종명 이외에도, 세브란스병원 현직 간호부 11명이 붕대를 휴대하고 군중 속에 섞여 있다가 체포당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정숙, 노순경, 박덕혜, 이도신, 김효순, 박옥신, 윤진수, 이성완, 이아주, 장윤희, 채계복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와 독립자금 모금 등의 역할을 지속했다. 1919년 12월 2일에는 4명의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박덕혜, 노순경, 이도신, 김효순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태극기와 붉은 글씨로 쓴 ‘조선독립만세’의 깃발을 들고 만세를 외쳤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간호부 중 7명, 김효순, 노순경, 이도신, 이성완, 이정숙, 정종명, 탁명숙은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교수 독립운동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자, 의료선교사로서 각지의 선교사들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던 샤록스(Alfred M. Sharrocks)와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는 3·1운동을 국내외로 확산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샤록스는 세브란스병원 직원 정태영의 보신각종 난타사건을 접하고 한국내의 독립운동을 알리고 이를 외국인들에게 알려줄 것을 당부하는 영문 인쇄물을 제작하였다. 그는 곧 국내의 주요 선교사들, 평양의 모펫(Samuel A. Moffet), 선천의 맥큔(George S. McCune), 대구의 어도만(Walter C. Erdman), 함흥의 영(Luther L. Young)과 전주, 춘천의 선교사 등에게 배포하여 각지의 선교사들을 통해 이 소식이 널리 퍼져나가도록 조치했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스코필드는 영일동맹으로 식민지 당국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그의 신분을 활용하여 사진과 글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기록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이 펼쳐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해외에 알렸다. 또한 그는 같은 해 4월, 수원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의 현장을 촬영하고, ‘제암리, 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본 제국주의 통치의 잔학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 외에도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 중지와 수감된 조선인의 감옥 내 처우 개선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8년 독립장 서훈을 받았다.
△기타 지역의 독립운동
세브란스 출신의 학생들은 3·1운동 당시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가담하며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3·1운동 이전과 1920년대에 세브란스에 진학한 인물 중에도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이 다수 있다. 송영록(1927년 졸), 김병수(1921년 졸), 양재순(1925년 졸), 이주섭(1930년 졸), 배동석(1918년 입학) 등이 그들이다.
송영록(1927년 졸)은 서울의 만세 시위에 호응하여 3월 3일 경기도 개성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추진한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김병수(1921년 졸)는 서울에서의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고향인 군산에서 학교 은사인 박연세를 방문하여 이갑성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활약으로 군산에서 전북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충남 공주 출신인 양재순(1925년 졸)은 공주 시내에서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를 불러 체포되었다. 주로 유림이 주도했던 경북 안동의 만세시위에 이주섭이 참가했다. 그는 당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시위에 참가하였고, 형을 받았다.
배동석은 김해, 마산, 함안 등 경남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학생 중에서는 가장 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편 한반도 북쪽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도 세브란스인이 참가했다.
곽권응(1933년 졸)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만세시위조직에 참여하고, 3·1운동에 가담하여 형을 언도 받았다.
평안북도 선천에서는 고병간(1925년 졸)이 만세시위의 준비과정부터 깊이 관여하여 체포당했다. 각 지역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인물 중 대부분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세브란스 졸업생인 주현측, 신창희, 곽병규, 정영준, 김창세, 신현창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주요 직책과 보건의료와 관련된 중책을 맡았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제1회 졸업생인 주현측(1908년 졸)은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 및 국민대표회기성회 위원을 역임하는 한편, 1918년 신현창(1918년 졸)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조계에 삼일의원을 개원하여 임시정부 요원과 상하이 한인의 건강을 담당했고,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김구의 손위 동서인 신창희(1908년 졸)는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활동을 도왔고, 임시정부 군의와 대한적십자회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신현창은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하여 임시정부에 밀파된 인물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면서 세브란스의전 선배인 주현측과 삼일의원, 이후 독자적으로 해춘의원을 개원하여 병원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의료인력 양성을 당면과제로 설명하고, 대한적십자사 산하 적십자간호원양성소를 설치하였는데, 곽병규(1913년 졸), 정영준(1915년 졸), 김창세(1916년 졸) 등 3인이 교수진으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신간회 등 세브란스 출신 '독립유공자'
연세의료원, 김찬두·안사영 등 포함 알려지지 않은 인사 행적 파악
세브란스병원은 16일 한국 정부가 지난 15일 광복절 제74주년을 맞아 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 서영완(1918년 입학, 건국훈장 애족장)과 전홍기(1944년 졸업, 건국훈장 애족장)를 독립운동 유공자로 새롭게 추서했다고 밝혔다. 서영완과 전홍기가 이번에 추서돼 세브란스 출신으로 독립운동 유공자는 35명으로 늘었다.
서영완(徐永琬: 1898-?)은 부산 출생으로 1918년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과 3·5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됐다. 1919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개정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전홍기(全洪基: 1916-?)는 강원도 평강 출생으로 1938년 춘천고보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독립운동을 위한 독서클럽인 상록회를 조직 운영한 것이 발각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일 수 180일),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 유공자는 의사로는 김필순, 주현측, 신창희, 박서양, 이태준, 곽병규, 정영준, 김창세, 신현창, 김병수, 송춘근, 고병간, 윤종석, 송영록, 안상철, 문창모, 곽권응, 전홍기, 남상갑, 김장룡 등 20명이 있다.
의학생으로 배동석(2008년 명예졸업), 서영완(1918년 입학)이 활동했다. 정종명, 이정숙, 이성완, 김효순, 이도신, 노순경, 탁명숙은 간호사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교직원으로는 올리버 에비슨, 프랭크 스코필드, 이갑성, 이일선, 정태영, 스탠리 마틴 등 6명이 유공자로 선정됐다.
포상등급으로는 1등급인 대한민국장에서 5등급인 애족장까지인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으로 나뉜다. 세브란스 출신들은 2등급인 대통령장 1명(이갑성), 3등급인 독립장 3명(에비슨, 스코필드, 마틴), 4등급인 애국장 2명(신현창, 정종명), 5등급인 애족장 17명(고병간, 김병수, 김필순, 남상갑, 배동석, 서영완, 송춘근, 신창희, 윤종석, 이일선, 이성완, 이정숙, 이태준, 전홍기, 정영준, 정태영, 주현측), 6등급인 건국포장 6명(김장룡, 김창세, 문창모, 박서양, 안상철, 탁명숙), 7등급인 대통령표창 6명(곽권응, 곽병규, 김효순, 노순경, 송영록, 이도신)이 관련 포상을 받았다.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를 포함하면 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약 60명이 넘는다.
한편, 연세대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의사학과는 2018년 상반기 독립운동 인물 12명(서영완, 안사영, 고병간, 김봉렬, 김찬두, 나성호, 박성호, 박주풍, 송영록, 이병천, 정종명, 최명학)을 국가보훈처에 포상 신청했다. 2019년 상반기에는 전홍기, 이원재 등을 추가 신청했다. 이 중에서 고병간, 송영록, 정종명 3명이 2018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이번에 서영완, 전홍기 2명이 2019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가 추서됐다.
정부가 광복 제74주년을 맞아 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 서영완·전홍기 등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추서한 가운데, 연세의료원 내부에서는 이들 외에도 독립운동에 관여한 학생 등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의과장을 맡거나 신간회 활동에 관여한 인물 등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추이가 주목된다.
18일 연세의료원에 따르면 의료원 내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관여한 세브란스 출신 인사로 김찬두·안사영·이원재등을 꼽았다.
지난 1922년 세브란스의원을 졸업한 김찬두[왼쪽 첫 번째]는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경 종로 1정목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들과 합류해 우미관 앞까지 행진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같은 해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넘겨져, 다음달 6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일수 90일 산입) 선고를 받고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인 5월 9일 서울 시내 학생과 전국 지방출신 재경학생 800여명이 ▲조선 학생 친목과 단결 ▲조선 물산 장려 ▲지방분열 타파 등을 내세우고 ‘조선학생대회’를 조직했을 때 부회장으로 당선됐다.
1917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안사영[왼쪽 두 번째]은 1919년 4월 조직된 한족회에 가담했고,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의과장을 맡았다.
이후 산하 신제의원(新濟病院)의 원장을 역임했다. 안사영은 1920년께 일본 경찰에 검거돼 안동영사관에 넘겨졌는데, 당시에는 일본 경찰에 의해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해 서간도의 독립운동이 한 차례 큰 타격을 입었다.
1914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이원재[왼쪽 세 번째]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노백린(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의 사위이자 원산 3·1운동을 주도한 아버지 이가순(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가 상당했다. 그 역시 1920년대 후반에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된 항일단체인 ‘신간회’ 강릉지회 회장으로 선출돼 1929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의사학과 관계자는 “신흥무관학교, 조선독립신문 발간 등 이외에도 아직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다"며 "이분들이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세브란스 독립운동사 연세대학교의과대학의사학과
역사공간
2019년 2월 21일
3·1혁명 세브란스의전 재학생들의 참여
서울에서 일어났던 시위에 당시 세브란스의전에 재학 중이었던 학생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체포되어 신문 과정이나 재감 기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전에 재학 중이면서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물은 이용설, 김문진, 박주풍, 배동석, 서영완, 최동, 김성국, 김병수, 김봉렬, 김찬두, 이굉상 등 10여 명이다. 이들의 당시 학년과 나이, 출신지와 주소지, 그리고 판결에서 받은 형량 등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우선 세브란스의전 재학생으로 3·1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학년과 나이는 비교적 다양하다.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중에서도 무려 6명이 동숙생이었다. 또한 김문진,이용설과 같이 3·1운동 준비 과정 중 세브란스의전의 대표로 참여하면서 부각되었던 인물들은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재빠르게 피신하여 직집적인 처벌은 피했던 것으로 보이며, 배동석 김병수 서영완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학생들은 집행유예나 무죄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집행유예나 무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판결이 나기 전에 구금되어 있던 기간이 최소 90일 이상으로 집행유예나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3개월 이상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세브란스의전 재학생
이름 김찬두(金瓚斗), 학년 및 나이 세브란스의전 1학년 22세, 출신지 평양, 주소지 경성 화천정 126번 오한영 집, 판결내용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미결 90일)
세브란스 독립운동가 목록
이름 김찬두(金瓚斗), 생몰년도 1897~?, 세브란스와 관계 세브란스의전(1922)
김찬두(金瓚斗)
본적 / 주소 평남 대동군
생몰년도 1897~1948
1897년 11월 11생으로, 본적지는 평남 대동군이다.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경 종로 1정목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들과 합류하며 우미관 앞까지 행진했다가 체포되었다. 출판법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넘겨져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일수 90일) 선고를 받고 바로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5월 9일 조선학생대회 조직 시 김성국과 함께 참가했다가 부회장으로 당선되었으며, 여름방학에 조선학생대회 하기 순회강연에서 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정기총회에서는 사교부장으로 당선되었다. 1922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같은 해 10월 의사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황해도 서흥군 신막역 앞에 순천의원을 개업했다. 1926년 11월 16일 송익주 목사의 주례하에 평안북도 창성군 대유동 공립보통학교 교사 윤인덕과 결혼했다.
이후 신막 서흥 지역의 각종 교육·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지역 명망가로 이름을 날렸다. 1923년 5월부터 민립대학서흥지방부설립 집행위원, 1926년 12월 9일 신막청년회창립총회에서 임시의장, 1929년 신막청년회 회장을 맡았다. 1926년 5월에는 청년 10여 명과 함께 조기早起운동을 시작했는데, 2개월이 지나지 않아 200여 명의 청소년이 합류했다. 1930년 교풍회창립총회 임원, 초탄교가설기성회 조직에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1931년 신막공립보통학교 교장이 입학료로 1원을 징수하기로 결정하자 학무위원회 후원회 회장으로서 입학료 취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신막축구단 창립에도 단장으로 활동했고 각종 이재자에 대한 의연금 모집에도 참여했다.
1918년 신막의 우지 최영창 외 몇 명이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설립한 덕성학원이 여러 사정으로 폐쇄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1923년 그가 단독으로 인계하여 10년간 경영했다. 1931년 6월에는 최저 12세부터 최고 40세에 이르는 미취학 문맹인을 위한 야학부를 설립했으나, 1933년 12월에 총독부 측에서 덕성학원의 폐쇄를 결정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
김찬두는 서흥 지경의 검시관으로 활동했다. 의사로서도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는데, 1932년 순천병원 개업 10주년을 맞이해서는 개업일 전후로 약 1개월간 치료비 3할을 할인해주었다. 1934년 1935년 두 해 연속으로 7월 1일부터 9월 말까지 극빈자를 무료로 치료하기도 했다. 병원 운영 중 위기의 순간도 있었는데, 1936년 9월 18일 병원에 강도가 들어 금품을 강요하며 김찬두 부부를 칼로 찔러 기절시킨 후 현금 4,000원을 들고 도망쳤다. 다행히 범인은 곧 잡혔으며 부부의 상처도 크지 않았는지 이후 1940년까지도 순천의원을 경영했다.
1948년 2월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묘지번호 109885이다.
감동적인 휴먼스토리 ‘쌍천 이영춘 박사’의 형제애
평양고보를 졸업한 영대 영기 형제는 교원 발령을 받는다. 참한 여교사와 결혼하여 황해도 신막에 살던 이영기 선생은 경북 대구 수창학교 재직 중 습성근막염에 걸린 쌍천으로 집으로 오라 하여 김찬두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한다. 이때 쌍천은 꿈은 ‘스승의 길’에서 ‘인술의 길’로 바뀌어 1925년 세브란스 의전에 들어가 의사가 된다. 당시 쌍천 학적부에는 김찬두 의사와 학비를 대준 넷째 형 이영기 선생이 보증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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