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화단의 귀재 서양화가 아소 이인성

정종배 2022. 11. 4. 10:04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화단의 귀재
천재화가 식민지의 비애를 향토적 색채미로 구현한 서양화가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 1912~1950) 72주기


이인성은 1912년 08월 29일 대구 남성로에서 태어나 1950년 11월 4일 북아현동 자택에서 불의의 권총 오발 사고로 다음날 5일 새벽 생을 마쳤다. 대표작은 〈가을의 어느 날〉·〈경주의 산곡에서〉·〈한정〉·〈카이유〉·〈여름 실내에서〉 등이다.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한 가운데 정치가이자 화가였던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1931년 일본에 건너가 1935년까지 머무르며 도쿄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데생과 그림 수업을 받았다. 조선의 향토적인 미를 구현하여 원시성과 서정성이 강하게 배어나는 작품을 남겨 ‘조선의 고갱’이라고 불린다.

이인성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양친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보통학교 역시 11세가 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3학년 때 담임선생의 권유로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작품전에 출품해 특선을 수상했으며, 6학년 때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주도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개인 부문 특선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으나, 사생대회에서 이인성을 눈여겨본 서양화가 서동진의 배려로 그가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 기숙하며 그림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1929년, 18세 때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그늘〉로 입선했고, 1931년 제10회 선전에서는 수채화 〈세모가경〉으로 특선을 받았다. 이인성의 재능을 높이 산 대구 지역 유지들이 그의 도쿄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

이인성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주었던 대구 지역의 유지들과 선후배, 그리고 경북여자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시라가 주키치의 지원으로 스무살이 되던 해인 1931년 일본으로 유학 갈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의 정착을 도와주었던 오오사마 상회가 있었다. 오오사마 상회는 귀한 미술재료와 전문서적을 취급하던 곳으로 이인성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실을 내어주고, 그가 자신만의 개성 있는 화풍을 심화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배려해주었다.

이인성은 1934년 동경유학시절 패션디자인을 공부하는 신여성이었던 김옥순(‘노란 옷을 입은 여인’ 작품 속 모델)과 사제지간으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하였고, 1935년 귀국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당시 대구 남산병원의 원장이었던 장인 김재명은 병원 3층에 이인성을 위한 화실을 내어주었고 이곳에서 그는 예술을 토대로 새로운 시도를 도모하였다.

당시 이인성은 본인의 이름을 건 양화연구소를 개소하기도 하였고, 남정집의 일부를 개조하여 아르스(ARS) 다방을 운영하는 등 미술계를 넘어 문화계 전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황금기를 누렸다. 더불어 '사랑하는 고향'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여준 첫째 딸 애향을 얻기도 하였으며, 사랑과 행복, 그리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를 보낸 공간이다. 이 화실에서는 <온일>(1930년대 중반), <침실의 소녀>(1930년대 후반), <정원>(1930년대 후반), <사과나무>(1942) 등의 명작이 그려졌다.

남산병원의 화실은 1936년부터 '이인성 양화연구소'라는 이름을 걸고 국내에서 최초로 서양화를 교육하는 공간으로 운영되었다. 이인성은 이러한 후원으로 1931년 미술용품을 만들던 킹 크레용 회사에 취직하여 그곳 화실에서 공부했으며, 이듬해 도쿄의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935년까지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도쿄와 대구를 오가며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1932년, 선전에서 〈카이유〉로 특선을, 그해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서 〈여름 어느 날〉로 입선을 차지했다. 그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의 천재 소년 이인성 군’이라고 소개되는 등 한국과 일본에서 젊은 천재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1944년 마지막 선전이 개최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일본 문부성 미술전람회와 제전, 광풍회전 등에서도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며 ‘조선 화단의 귀재’라고 불렸다.

1937년에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선전의 추천 작가가 되었다. 짧은 그의 인생에서 20대의 젊은 날들이 예술가로서의 전성기였다. 그의 대표작 〈가을의 어느 날〉·〈경주의 산곡에서〉· 〈한정〉 등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42년, 이인성은 아내와 사별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는 1940년대에 주변 인물이나 정물을 많이 그렸다. 이 시기 작품에서 그는 기존의 강렬한 색상 대신 담담한 색채로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주력했는데, 1944년 작품인 〈해당화〉에는 인물들의 애환이 잘 묻어나 있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는 개인적인 아픔에 더해 시대 상황에 따른 고민과 성찰의 결과로 여겨진다. 그런 한편 1940년대 중후반에는 작품 활동보다 후진을 양성하고 화단의 중진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5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이듬해에는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설립 추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950년 11월 4일, 술을 몇 잔 먹고 돌아온 집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음 날인 11월 5일 새벽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당시는 한국전쟁 와중이라 경찰의 검문이 강화되었던 때였다. 북아현동 입구 굴레방다리 파출소 초짜 경찰이, 학부모와 빈대떡집에서 술을 한잔하고 있는데 검문을 한다며 어찌나 빡빡하게 굴던지 야단을 좀 쳤던 이인성을 검문하고 파출소에 돌아가 그림 그리는 화가라는 것을 알았다. 곧바로 집으로 찾아와 시비가 붙은 와중에 어이없는 총기 오발 사고가 일어나 다음날 새벽에 운명했다. 이인성 화백의 사망일을 대부분 자료에는 4일이라 기록되었는데 이인성 화백의 아들인 이채원 화가의 증언으로 5일로 바로잡아 행사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후 이인성은 화단에서 잊힌 화가가 되었다. 1954년, 회고전이 한 차례 열렸으나 가난을 극복한 천재 화가, 요절한 천재 화가라는 인생 역정에 더욱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설가 최인호는 북아현동 필자의 모교 한성고 정문 앞 복수탕 2층 월세 15만원 신혼방에서 「별들의 고향」을 쓰기 시작하여, 역사소설까지 쓴 인기작가로서, 이인성의 예술성과 죽음을 다룬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소설을 써 천재작가의 예술혼을 달래주었다.

필자는 2016년 10월 대학 은사인 구상 선생기념사업회 운영위원으로 대구 옛 골목 투어에 참가했다. 이인성 화가의 대구 활동과 이중섭 화백과 구상 시인과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이인성 화백의 아들인 이채원 화가와 교유를 하고 있다.

제7회 전국학교예술교육페스티발(2017.10.18.~19. 서울올림픽공원)에서 개최된 상봉중·신현고 연합동아리(지도교사: 상봉중 이순미, 신현고 정종배) 망우리공원 인문예술 체험활동 ‘중랑구로 오세요~ 망우리에 오세요~’에 이채원 화가도 격려차 방문하여 귀한 자료와 선물을 주면서 격려하고 고마워하였다.

필자는 2018년 학기 중 매주 목요일 오전 수업이 없어 망우리공원을 답사하는 가운데, 4월 5일 목요일 식목일에 이인성 화백 합동추모제와 이인성 유작 환수위원회 발족식에 참가하여 자작시 한 편을 낭송했다.

망우리공원 인물 유족들 중 누구나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특별하게 자료를 준비하고 전시 및 기념 달력 엽서 등 직접 관리하고 우편 발송까지 도맡아 일을 하고 있다. 이인성 화백에 대해 강의 및 묘지 답사를 무료로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선물을 주기까지 하고 있다. 2012년 이인성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중학교 동기인 배우 안성기와 함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국민배우 안성기와 함께 떠나는 그림 여행’ 행사를 치렀다. 2022년 이인성 화가 탄생 110주년 기념 전시회를 마련하기 위해 준비와 홍보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 중 21점이 대구미술관에 기증됐다. 기증작을 그린 화가들의 고향인 대구를 배려해 선정된 작품들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화가 이인성의 대표작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과 이쾌대·서동진·서진달·변종하의 작품들, 그리고 한국 추상화의 거장 유영국의 수작이 포함돼 있다. 구체적으로 김종영 1점, 문학진 2점, 변종하 2점, 서동진 1점, 서진달 2점, 유영국 5점, 이인성 7점, 이쾌대 1점 등 8인의 작품 21점이다.
이인성 화백의 그림 7점은 <노란 옷을 입은 여인>, <풍경>, <흰장미가 있는 정물>, <석고상이 있는 풍경>, <정물>, <여인의 초상>, <인물, 남자 누드> 등이다.

묘지는 도산 안창호 선생 묘지 터에서 구리둘레길 위로 올라서 구리시 방향으로 왼쪽 향산 이영학 독립운동가 묘역을 지나 50미터 정도에 자리 잡고 있다. 망우리공원 묘역 상석은 그림 그리는 빠렛트 형상이고, 오른쪽에 사설 묘비와 왼쪽에는 화가의 대표작인 <해당화>의 ‘해당화’ 한 그루를 아들인 이채원 화가가 심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국호 국장이 돌멩이로 둘러싸 보호하고 안내문을 세웠다. 2020년부터 해당화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흰장미가 있는 정물

여인의 초상

풍경

이인성 화가

노란 옷을 입은 여인
이인성 화백의 유택과 해당화
이인성 화백 합동 추모제 20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