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경기여중고 교장 15년 은석초 설립자 장덕수 부인 난석 박은혜

정종배 2022. 10. 31. 05:46

경기여중고 교장 15년 은석초 설립자 장덕수 부인 난석(蘭石) 박은혜(朴恩惠, 1904~1963) 59주기

박은혜는 1904년 평남 평원에서 목사인 박예헌의 장녀로 태어났다. 《동아일보》 부사장 겸 초대 주필을 역임한 장덕수의 부인이다. 목사나 장로의 딸들이 입학했던 것이 관례였던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후쿠오카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주 두부크대학 석사과정을 이수한 후 뉴욕의 비빌리컬신학교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유학 중인 1932년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장덕수의 청혼을 거절한 김활란의 소개로 장덕수를 만나 종교 활동을 펼치다가 1933년 같이 귀국하여 한때 아동잡지인 《아이생활》을 편찬하였다. 박은혜는 그 용모로 하나 체격으로 하나 미스코리아 경연대회도 나가면 미스코리아가 될 만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여성이었다고 김동길 박사는 말하였다.

1934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부임하여 종교학을 강의하였으며, 1937년 10월에 장덕수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딸 둘, 아들 둘을 두었다. 광복 후 고황경의 뒤를 이어 경기여자중학교 교장에 부임하여 1960년까지 15년간 교육에 열중하였다. 그가 교장으로 있으면서 어린학생들에게 심어준 정신은 하나이다.

“경기여고 학생들은 뒤에서 보아도 경기여고 학생인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너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그 시절에 경기여고에 다녀 오늘 80이 넘은 졸업생들은 그 시절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한다. 이어령 교수의 부인이며 평창동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도 박은혜 교장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되새겼다. 경기여중고 교장을 사임하고 사립국민학교인 은석초등학교(동국대학교부설초등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7년 12월에는 서울 제기동의 자택 청설장에서 부군이 정치적인 피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러한 실의를 딛고 여성교육에 열정을 바쳐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받았다. 김활란은 박은혜를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이 되게 하여 뒤를 이어주기를 바랐지만, 난석은 완강히 거절하고 1963년 회갑도 지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제자 중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옥길을 가까이 두면서 ‘이화 우먼’으로서 우리나라 여성해방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저서로는 각종 연설문과 작품 등을 모은 자서전적인 『난석소품』이 있다.

설산과 난석의 묘역은 아차산성 토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아차산성 보루와 보루를 연결하는 토성으로 대부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데 이 부부의 묘역은 토성과 연결되어 있다.설산과 난석 부부의 묘역은 넓고 묘비와 상석은 크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면 6.25한국전쟁 망우리전투의 상흔이 남아 있다. 문인석과 망주석에 총탄으로 떨어져 나간 곳이 드러나 있다.

2018년 페이스북 친구인 안영정 작가가 설산 묘역 문인석 얼굴이 반쯤 나간 사진을 올려 모 국회의원 얼굴로 빗대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설산의 일제강점기 반민족적 행위를 알고서 훼손했다면 민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고 하여야 하는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친일 행위와 그에 추종하는 이들의 뿌리를 찾아보면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는 죽을 때까지 찾아 그 뿌리를 뽑아 다시는 민족을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청산을 하지 못한 역사를 이어가야만 하는지? 지금의 어용학자들의 식민사관 언제나 발붙이지 못할까? 걱정스럽다.

장덕수 박윤혜 부부의 묘비는 김활란 박사가 짓고 원곡 김기승 글씨를 새겼다. 사색의 길 화장실을 지나 삼거리에서 오르막길 500여 미터 오르면 오른쪽 길섶에 설산 장덕수 연보비를 볼 수 있다. 연보비 전 오솔길을 올라 오른쪽에 두 분의 유택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