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정종배 2022. 11. 6. 08:25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아사카와 다쿠미

2022년 11월 5일 오전에 예정된 중랑역사청소년해설사 양성교육은 취소됐다.
국가애도기간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시민모임 독립 청량리 일대 답사가
김란기 선생의 안내로
오후 1시 청량리역 롯데백화점 옥상에서 시작됐다.
옥상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하여 벽을 세워 전망이 사라졌다.

7층 주차장 동북쪽 가까운 청량리동 회기동 이문동
멀리는 중랑구 노원구
그리고 남양주 천마산 가평 운악산 포천 울음산인 명성산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청량리역 동북쪽 담 너머 관사촌 건물이 지붕을 원색으로 단장하여 눈에 확 들어왔다.
588윤락가에 60층 주상복합 아파트 몇 동이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미주아파트 경성의전 예과 교사동 철거까지 과정에 대한 설명 듣고
경동시장 지나며 갖가지 농산물 구경하고
뒷골목 나물을 뒤치거나 참기름 짜는 옛 번창했던 곳을 지나
1960년대 한옥 골목에서 한참을 공부했다.
맨션아파트 부흥주택단지 영휘원 숭인원 답사가 3시 30분에 끝났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실다가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2000년 이후 또랑시인 삶의 방향을 바꾼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땀과 열정이 서린
'국립산림과학원' 옛 '홍릉수목원'을 답사하기 위해 걸었다.

수림문화재단사옥을 지나며 동교 김희수 설립자 전 중앙대학교 이사장에 대한 인물을 소개했다.
광주시립 및 영암군립 하정웅 명예관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국립산림과학원 옛 홍릉수목원 반송과 명성황후 묘지터 그리고 나무와 꽃 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 천재 식물분류학자 장형두 서울대학 사범대 부교수도 소개하였다.

짜장면으로 저녁 먹고
6호선 이태원역에 내려
참사현장에서 기도하고
남산 소월길을 걸어서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 기도하고
남대문 지나 10.29 참사 희생자 추모 집회 참가하고
시청광장 추모공간 참배하고
광화문을 지나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다가
홍제동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2000년 이후 내 삶의 방향을 바꾼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삶을 소개한다.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 https://jjb3467.tistory.com/m/3555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의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은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서 2남 1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다쿠미는 1907년 고후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조선에 살면서도 한 교회에만 출석하기보다는 여러 교회 즉 욱정교회(감리교, 현 반포동 남산감리교회), 일본기독교단 정동예배당(장로교, 현 성북동 덕수교회), 황금정(약초정)교회(장로교, 돈의동 초동교회), 조합교회(현 남산동 한양교회) 등에 출석해 다양한 설교를 듣고자 하였다.

1914년에서 1931년까지 17년 동안 한국에 살며 한글을 사용하고 한복과 온돌 등 한국식 생활로 주변인들과 어울리며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인류애의 실천과 디아스포라 삶을 살다 식목일 준비로 과로하여 급성 폐렴으로 1931년 4월 2일 40세로 생을 마감했다.


국립산림과학원 뒤뜰에 지금도 멋지게 서 있는 본인이 홍파초등학교에서 옮겨 심은 반송이 바라보인 광장 느티나무 아래에서 치른 4월 4일 장례식 후 이문동 사람들이 엄청난 봄비 속에서도 상여를 서로 메겠다고 하여 몇 개 조로 나눠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혔다. 1942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했다.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 고원과 기사로 홍릉 및 광릉수목원 기틀을 다졌다. 2015년 '한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으로 선정되었다. 망우리공원 유택 중 개인과 단체의 추모객이 끊이지 않는다. 주된 추모객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사람들이다. 원조 한류 팬이라 일컬을 정도로 한국에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였다. 그의 한국생활 17년을 1934년 아베 요시시게가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947년까지 수록했다.

대한민국 인공림 37%를 차지하는 잣나무 씨앗 발아법인 '노천매장법'을 한국인 노동자들의 말을 듣고 힌트를 얻어 온실에서 2년만에 발아하던 것을 노천에서 1년만에 1924년 3월 발아시켜 한반도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사방공사 속성수인 싸리나무 다섯 종류 이름을 지었고, 한반도의 오래된 나무들을 공동으로 답사하고 사진작업을 통해 『조선거수노수명목지』라는 책으로 묶어 천연기념물 지정의 토대를 마련했다.

'폐허' 동인 오상순·염상섭·번영로·남궁벽·김유방·일엽스님 등과 교류하며 정릉천변과 홍릉수목원을 거닐고 청량리 청량사에서 다쿠미 선생과 차를 마시는 피서가 당시 한여름밤 최고의 풍정이었다.

한국의 민예와 도자기를 사랑하여 그림을 그리고 명칭을 써 놓았다. 두 형제는 한국의 도요지 700여곳을 답사 정리하여 도자기업계에서 중시조로 여기고 있다. 이때 전국을 다니며 농악과 탈춤과 굿과 연희 등을 보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의 미를 ‘한의 미’라 했지만 다쿠미 선생은 ‘해학과 멋과 풍류’라고 파악했다.

동생보다 1년 먼저 1913년 조선에 온 '조선도자기의 신'이라 일컫는 형님 노리다카는 해방 후 미군정 부탁으로 옛 중앙청 지하 수장고에 도자기를 정리하고 1년 늦게 귀국했다. 두 형제는 당시 한몫 잡으려고 조선에 오는 일본인과 달리 1913년 형은 조각을 전공하여 남대문소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다쿠미 선생은 『조선의 소반』과 유저로 『조선도자명고』를 남겼다. 두 권을 사물놀이 산파역인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번역 한 권으로 묶어 학고재 출판사에서 발간했다. 심우성 선생은 ‘넋전춤’을 춰 영혼을 위로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백자 분청사기 가치와 분석은 두 형제가 주춧돌을 놓았다.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할 때 민족이란 말을 끝까지 고집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참혹한 한국인이 당한 제노사이드 만행을 일기 속에 절대로 한국인 민족성은 유언비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만약 동경에 있다면 변호사를 대 구하고 싶다고 적었다. 지금도 일본 보수 쪽에서는 식민지 관료로서 배반하였다고 배척당하고 있다. 2011년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을 편집할 때 원고 청탁 응하고는 끝내 보내지 않는 다쿠미 선생 연구 박사학위 수여자는 강사 자리를 유지하려니 이해하여 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학생들의 글 20편을 수록하였다.

입학사정관제가 시행될 무렵이었다. 학부모들이 귀신처럼 찾아와 자료만 달라며 수강 신청하여 4개 반을 운영하였다. 그중에 조호철 군은 2018 제23회 평창 동계올림픽에 군 장교로 참여하여 성화 봉송 행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학부모께서 경기도 화성에 일회용 용기제품을 생산하는 (주)서광알미늄(대표이사 황혜진)을 경영하며, 망우리공원 행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명저인 『조선의 소반』에서 한국의 온돌과 구조에서 조형성과 예술성과 실용성 등에서 동양 3국에서 최고의 민예품이라 상찬하고 특히 만든 이가 아닌 쓰는 이에 의해 쓰면 쓸수록 완성되어 빛이 나는 뛰어난 한국인의 미의식을 드러냈다. 이 책 서문에 조선의 해방을 암시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수집한 민예와 도자기 3,500여 점을 그대로 두고 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재일한국인으로 관동대지진 다큐 오충공 감독은 망우리공원을 두 번 답사 촬영했다. 세 번째 영화 <1923 제노사이드, 93년의 침묵>을 제작 중이다. 망우리공원 인물 중 관동대지진 당시 동경에서 목격한 이는 조봉암·송석하·김영랑·유상규·최신복·오기선·장형두 등이고 방정환은 진상 조사반 활동 및 후원금 전달을 하였다. 나운규는 목격한 유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제작하며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계용묵은 소설 「인두지주」에서 관동대지진을 언급하였다.

광주시립 및 영암군립미술관 하정웅 명예관장은 사비로 2006년부터 다쿠미의 고향에서 기요사토 긴자쥬크(청리은하숙)를 개최하였다. 11회째부터 다쿠미의 고향 호쿠토시에서 인적 물적 지원을 하기 시작하여 올해 20회째 이어가고 있다.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 기념사진(국립산림과학원 아사카와 다쿠미가 심은 반송을 배경으로, 2015.10.17)

한국에서도 다쿠미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를 (재)수림문화재단 주최로 2015년 10월 설립하였다. 필자는 망우리공원 아사카와 다쿠미 추모식에 망우리공원 유명인사 탐구 및 답사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며 하명예관장과 인연을 맺어 숙장대행을 맡았다. 일본 청리은하숙에 학생들과 2016·17년 6월 두 번에 걸쳐 참가하였다.

일요일 오후에는 도쿄로 돌아오는 차량이 많아 고속도로 정체가 심하다. 수림문화재단 신경호 상임이사 인솔로 하네다공항을 향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체와 정체가 반복됐다. 신 상임이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기사가 갓길 운행을 승낙했다. 신 상임이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탄 차량이 갓길로 들어서면 곧바로 우리 차량 뒤로 죽 줄을 설 것이다. 우리가 탄 차량이 갓길로 빠지자 정말 거짓말처럼 뒷 차량들이 갓길로 줄을 이었다. 일본 속담 ‘빨간 신호등이라도 다 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는 말을 증명하듯 군중심리 집단주의 일본 문화의 특징을 두 눈으로 현장감 있게 보았다.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藤本 巧)의 아버지는 화구상으로, 아들이 다쿠미 선생만큼 인류애와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다쿠미라 지었다. 작가는 20대부터 한국에 50여 차례 들어와 고대 한일 교류 관련 유적과 자료 및 1970년대 농촌, 5일장, 인사동 거리와 인물 등을 작업하여 고궁박물관에 전부 기증하였다. 2020년부터 ‘한일성신교류50년전’을 일본과 한국에서 전시하고 있다. 2001년 아사카와 형제관이 건립됐다. 2012년 다쿠미 일생을 담은 영화 '백자의 사람'이 상영됐다.

필자는 2003년 4월 다쿠미 유택에서 이재남 선생님(현 서울다솜관광고등학교 교감)과 망우리공원 답사하며, 재일한국인 3세 르포작가의 다쿠미 선생 묘지 답사를 안내하고 있는 아사카와다쿠미현창회 조재명(趙在明, 1934~2008) 회장을 만났다. 그 뒤로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 활동을 하였다. 망우리공원동아리활동 중 다쿠미 선생 관련을 자소서에 쓴 신현고 최락천군은 2018학년도 서울대학 산림과학부에 합격했다. 올해는 특히 '아사카와 다쿠미 탄생 130주년 및 서거 90주년'의 해로, 지난 4월 2일 망우리공원에서 추모식 행사를 치렀다.

2011년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영화 백자의 사람 포스터 아사카와 다쿠미 사진

아사카와 다쿠미 85주기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수목원) 퇴직자 모임에서 세운 단비

아사카와 다쿠미 유택

2016년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아사카와 다쿠미 고향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관

2015년 10월 17일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 국립산림과학원 뒷뜰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이 심은 130년 된 반송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