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김봉성 독립운동가

정종배 2022. 12. 18. 19:44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독립운동가 김봉성 77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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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단우들 관련 내용입니다.
글이 길어 자료 차원으로 읽어주시길 빕니다.
(000)은 흥사단 단우 번호입니다.


김봉성은 1901년 3월 3일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 1945년 12월 18일 연탄가스 사고로 어린 딸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 선천읍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봉성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사위였다. 도산의 형님 안치호의 사위로, 그의 아내 안맥결(207)은 해방 후 경찰관으로 서울시 제3대 여자경찰서장을 지냈다.

김봉성은 오산학교 초대 이사장을 지낸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남강 이승훈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펼칠 때 신성학교 4년에 다니고 있던 김봉성은 신성학교 스승인 교사 홍성익과 김지웅에게 학생들도 동참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김지웅의 지시에 따라 동급생인 장일현·고병간·박찬빈 등과 도쿄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신성학교 학생들과 예수교 보성여학교 학생들은 함께 평북 선천읍 천남동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선천 군민 1천여 명은 선천읍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벌이자 경찰과 선천수비대는 총을 발포하자 십수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김봉성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쥬오(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 남캘리포니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30년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인 1934년 안창호의 조카 안맥결과 결혼하고, 두 사람은 안창호가 설립한 점진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38년 2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병보석으로 가석방되고 치료 도중 그해 3월 10일 별세하자 김봉성은 평소 "죽으면 유상규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도산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망우산 유상규 묘소 옆 아버지가 들어갈 묫자리에 안창호 선생의 유택을 마련하였다.(오기영(1099), ‘도산 선생의 최후’)

망우역사문화공원 도산 안창호(4, 대한민국장, 1962, 임시정부) 선생 유택 주변에는 흥사단 단우인
유상규(116, 애족장, 1990, 중국 방면)·문명훤(154, 애족장, 1990, 국내 항일)·조종완(1049, 애족장, 1990, 국내 항일)·김봉성(예비 단우, 건국포장, 2005, 3·1운동)·김기만(142)·허연(265)·나우(222)·이영학(1095) 등의 유택이 자리 잡았다.
문명훤·조종완·김봉성 묘지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도산의 발치에 묻어 달라'는 허연은 손자인 허용이 11월말 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하였다.
김기만 나우 이영학 등은 흥사단과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자료를 찾고 모아 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할 예정이다.

1965년 안맥결 김만식 도산 유택 참배 김만식은 김분옥 동생으로 누나의 비문을 지었다

이 외에도 아래의 흥사단 단우들은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들과 관련을 맺었다.

조선의 유일무이한 식물분류학자로 1949년 경찰에 의해 고문사 당한 장형두 서울대학 사범대학 부교수의 문제를, 제헌국회에서 정식 의제로 올려 밝힌 신현모(67, 애국장, 1984, 문화운동),
또한, 신현모 독립지사는 한글학자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 수감 되었다. 성북동 길상사를 법정 스님께 시주한 기생 진향 법명 길상화 김영한 여사를 일본 유학을 주선한 관계로, 기생 진향이 신현모 수감을 돌보기 위해 함흥권번에 다시 들어가 활동하다 시인 백석을 만나 길이 전해지는 사랑의 이야기가 태어났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도산 안창호 비문을 지은 춘원 이광수(103),
오한영 비문을 쓴 송아 주요한(104),

한국인 최초 보건학박사로 한국 공중보건학의 선구자이며 도산의 동서로 주치의 역할을 맡았고, 3·1혁명 1919년 3월 6일 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추담 허연의 중국 망명을 주선한 김창세(121, 건국포장, 2001, 임시정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로 일본은 우리나라의 독립지사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안창호선생도 이유필(175, 독립장, 1963, 임시정부)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 유아세례를 받은 송암 서병호 선생의 처 조카인 김마리아(228, 독립장, 1962, 국내 항일),

망우역사문화공원 독립운동 명가이며 사회주의 독립지사 오기만의 동생이며
동아일보 기자로 '동전' '동전생' '무호정인'이라는 필명으로 문명을 떨치다 1949년 6월경 고향인 북으로 간 오기영(1099) 동전 오기영 전집 6권이 2019년 4월 발간됐다.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 열사의 전기 『유관순전』(1953)을 최초로 쓴 늘봄 전영택(251),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를 경험하고 추담 허연 선생을 흥사단에 가입시킨 한승인(260),
끝뫼 김말봉의 사위로 김말봉 작시 가곡 <그네>를 작곡한 현제명(1010),
추담 허연 선생이 설립한 중앙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부모님 묘소가 지금도 남아 있는 피천득(1025),

도산 안창호 오한영 그리고 장덕수 박은혜 부부의 비문을 쓴 서예가 김기승(1026),
추담 허연 및 작곡가 함이영 선생과 서촌 효자동에서 세교를 맺은 한글학자 김윤경(1036, 애국장, 1990, 문화운동),

간토대진재 당시 도쿄 한인교회 목사로 목숨건 구조와 후원을 펼친 오기선 목사의 아들로 대한민국 교육을 다지고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고 최초 교육인장으로 장례를 치른 천원 오천석(195),
태허 유상규와 경성의전 1회 입학생으로 현재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1102),

정일형-정대철-정호준 3대째 국회의원 선수를 합하면 14선에 달한다. 정일형 전 외무부장관이 서울 종로·중구에서 내리 8선을, 아들 정대철이 중구에서 5선을 했다. 손자 정호준은 새정치민주연합 초선 의원을 지냈는데 역시 지역구가 중구다.
서울 중구는 이북5도민들의 못자리이다. 평양 함흥 냉면집이 지금도 성업 중이다.
외가 쪽으로는 정호준의 외증조할머니(박현숙)가 2선, 이모부(조순승)가 3선(13~15대)을 했다. 이래저래 합하면 20선에 달한다. 한국 최대의 정치 가문이라 할만한 정일형(1113, 애국장, 1990, 국내 항일),
정일형은 1904년 4월 8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호는 금연(錦淵)이다. 1907년 부친 정기찬이 갑자기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정일형의 어머니 한은총은 몇 년 후 정일형의 동생 정신형을 데리고 김용겸(비구니 선승(禪僧)으로 유명한 김일엽의 아버지)과 재혼했다.

세브란스 의전 2대 교장으로 최초 피부과 의사 고아원(안양의 좋은 집)과 양로원(청운양로원) 등을 설립하여 연세대학 의대에서 <오긍선 학술대회>를 매년 열고 있는 오긍선 가문은 의사가 40여 명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 집안이다. 할아버지 유지를 받든 두 아들이 국립결핵병원 철도병원장을 맡아 개업하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대한민국 제2대 보건부 장관을 역임한 오한영(예비 단원),

1919년 3·1혁명 고종황제 인산날 망우리고개에서 을사오적 등을 척살하기 위한 27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망우리 고개에 매복하였다가 이완용 등 매국노가 순종황제와 함께 있어 실패한 동우 이탁(예비 단우, 독립장, 1963, 임시정부)

도산이 세운 강서군 탄포리 교회 권사인 박남신 유택이 도산 묘지 터 뒤 능선 너머 100미터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박남신 권사는 '인술로 많은 신자들의 목숨을 건졌다'고 묘비에 새겨져 있다. 어머니 유택에서 50미터 아래 묻혀 있는 둘째 딸인 김분옥은 3.1혁명 전날 이화고녀 유관순과 6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2020년 유관순 순국 100주년 기념식 즈음에 이영학 김분옥 두 분의 묘역을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정리하여 아쉬우나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김봉성은 1945년 12월 18일 딸 김자영(8세)과 함께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다. 12월 20일 망우리공동묘지 도산 안창호 선생 묘소 왼쪽 50여 미터에(묘지번호 203550) 묻혔다. 그 앞의 묘가 딸 김자영의 묘(묘지번호 203547)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2016년 3.1절 도산 안창호 묘비 재이전 행사에 유족 대표로 인사말을 한 김봉성과 안맥결의 아들은 4월 27일 묘지 관리 어려움으로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20실 055호로 김봉성 독립지사의 비석만 남기고 안장했다. 먼저 4월 24일 딸 김자영은 화장 후 산골 했다.


안맥결(安麥結, 1901~1976)은 1901년 1월 2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림면에서 평범한 기독교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치호는 도산 안창호의 친형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동생의 권유로 기독교 장로회(탄포리교회)입교하여 평생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맥결이란 이름은 춘궁기에 결실을 맺는 보리에 비유한 것으로 숙부인 안창호가 지어주었다.

3·1혁명을 겪고 난 이듬해인 1920년 초, 안맥결·권기옥을 비롯한 제11회 숭의여학교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결백회를 조직했다. 결백단·일편단심회·절제회라고도 불린다. 송죽회의 민족의식과 항일활동을 계승한 단체로 정직과 검소·국산품 애용·금주·금연운동을 표방하며 지방순회강연에도 나섰다. 결백회 내에서도 특히 이영배·안맥결·배인수·손옥련·허경신 등은 ‘특별기도단’을 결성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를 은밀히 지원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맥결 부부가 체포되었다.

1945년 12월 남편이 죽은 후 서울에서 2남 1녀를 키우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워 두 아들을 평남 강서군의 친정집에 맡겼다.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가로막혀 이산가족이 되었다. 1951년 1.4후퇴 때 고향집에서 여동생 안성결이 두 아들을 데려고 서울로 내려와 다시 합칠 수 있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청 경무부는 여자경찰관제도를 설치하고 여자경찰관 간부 지원자 모집 공고를 내고 우익단체의 추천을 받았다. 이때 안맥결을 비롯한 독립촉성부인회 등 우익단체 여성지도자들이 많이 지원하였다. 6월에 간부급 여자경찰관으로 임용된 사람은 독립촉성부인단장 양한나·안맥결·고황경·김용제·김현숙·김분옥 등 16명이었다.
이들은 국립경찰학교에서 간부 훈련을 받은 후 그해 7월 경무부 공안국 안에 신설된 여자경찰과(초대과장 고황경)에 배치되어 여자경찰관의 지도와 여자에 대한 범죄예방과 풍기 선도를 담당하였다. 망우리공원 3.1혁명 전날 유관순 열사와 결성한 이화여고 6인결사대 김분옥(여자경찰국 초대국장)여사도 이때 경찰로 임용되었다.

1952년에는 총경으로 승진하고 3대 서울여자경찰서장에 임명되어 2년간 근무했다. 당시 여자경찰서는 부녀자, 노인, 소녀의 보호, 풍속 업무 등을 담당했다. 1954년 치안국 보안과 여경계장으로 복무했으며, 1957년 경찰전문학교 교수로 발령받아 후배 경찰들에서 한글과 영어를 가르쳤다.
1961년 7월 사직하여 15년간의 경찰생활을 마감했다. 사직 때의 뒷이야기가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로부터 정권에 합류하기를 권유받았으나, 안맥결은 민주주의를 짓밟은 군사정권에 협력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안맥결은 경찰 재직 시 청탁 명목으로 뇌물을 가져오면 돌려보냈고, 직원들에게 항상 청렴과 봉사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성실한 근무 자세와 봉사정신으로 인해 1954년 무공포장(여자경찰서장)과 1960년 근정포장(경찰전문학교 교수)를 받았다. 1976년 1월 14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안맥결 지사에 대한 서훈 신청은 유족과 흥사단을 중심으로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나, 서훈 요건과 자료 미비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여러 차례 반려되었다. 그러던 중 경찰청은 산하에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단을 두고 올바른 경찰정신의 뿌리찾기 사업을 벌였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2018년 10월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경찰관 5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국가보훈처에 요청했는데, 그중에 안맥결 독립지사가 포함되었다.
마침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안맥결 지사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타계 4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때 함께 신청한 김분옥 여사는 서훈을 받지 못하고 경찰청에서 선정하는 경찰인물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김분옥 여사는 이화여자대학 가정과를 개설한 분으로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김활란 여사와 더불어 친일활동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안맥결 지사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대로 “애국자를 길러내는” 삶을 살았다.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했으며 해방 후 청렴하고 성실한 삶으로 후배 경찰의 표상이 되었다.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강직한 경찰관으로서 살아온 안 지사의 웅혼한 삶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망우리 풍수 이야기

망우산은 한북정맥 수락지맥이다. 수락산 덕릉고개 불암산 새우재 검암산 망우리고개 아차산으로 이어졌다. 예전에는 아차산이라 불렀다. 중랑구청 뒤 봉수대는 아차산 봉수대이다. 지금은 봉화산, 봉황산,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 등으로 각각 나눠 부른다.

망우산 주능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구리시 서쪽은 중랑구로 나뉘는 경계선이다. 동쪽은 바위도 드물고 산자락도 완만하고 널직하며 전망도 시원스레 트였다. 260여 개의 분양한 가족묘지도 대부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은 바위가 많고 경사도 심하고 답답하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명당은 동쪽이 많을 듯 싶다. 망우리 산일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동쪽보다 서쪽의 묘지 이장 작업할 때가 일명 황골이라 부르는 망자의 뼈 상태가 좋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