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조각가 차근호 62주기,
- 시인 이용상과 구상과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망우리 이중섭 묘비 제막식
망우리에 차근호 묘지가 있다는 것을 시인 이용상의 -주흥반세기 한국근대인물비화 다큐멘터리- 『용금옥시대』(서울신문사, 1993)를 읽으며 알았다. ‘용금옥’은 추탕 집으로 ‘곰보추탕’·‘형제추어탕’ 등 서울식 3대 추탕 집으로 알려졌다. 이용상 시인은 50여년 간 국내외 손님들을 ‘용금옥’에서 만나고 술을 마셨다.
1959년 우리나라 최초 조각연구소를 서울 정동에 '차근호 조각연구소'를 개소한 조각가 차근호는 1925년생으로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1948년 평양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후 미술동맹에 참여하지 않고 숨어 있다 1·4후퇴 때 월남했다. 1952년부터 전남 광주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박제소·탁연하와 함께 광주 상무대 <을지문덕상>(1953)에 공모하여 차근호 안이 채택되자 이들 외에 김찬식·김순득이 함께 참여하여 완성하였다.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과 부조>(1954), 태릉 육군사관학교의 <범무상>(1957), 논산 연무대 <무명용사탑>(1958),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의 <화랑기마상>(1960), <호국상>(1960) 등 거작을 제작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미술가협회전, 현대작가초대전 등에도 출품하였고 1957년 망우리 이중섭의 묘비, 1960년 소설가 이무영 묘비, 망우리 화가 함대정의 묘비 등을 제작하였다.
이중섭 화백을 친형처럼 따랐다. 그는 구상 시인과 이중섭 화백을 청량리 뇌병원에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 마지막 입원시켰다. 또한, 망우리 이중섭 묘지 쓸 때 "중섭이 형을 따라가겠다"고 몸을 던지는 소동이 있었다.
4월혁명 기념탑
과도정부 '4·19혁명 기념탑' 제작 동아일보사 공모전 총 76점 응모 당선작 없는 건립위원회의 이윤형·김영중·최기원이 합작한 작품과 차근호 작품을 9월 6일 가작으로 뽑았다. 두 팀이 합작하든지 단일안을 다시 제출하도록 하였다. 심사위원 김환기·주원·김중업·김재원·최순우·이상범·방택근 등과 응모 작가 명단에 최만린·최기원·김영중 등 쟁쟁한 작가들도 함께 있다. 다른 작가와 합작 권유를 받은 차근호는 단일안을 내지 못하고 심사위원이 특정 학교와 연관된 점이 지적되며 편파 판정에 관한 시비가 일어나자 재공고하였고, 결국 12월 14일 이일영의 안이 1등 차근호 안이 2등으로 선정되었다.
차근호는 조선일보에 유서를 보내고 12월 17일 조각연구소에서 음독 응급처치했지만 19일 35세 생을 마감했다. 심사위원이었던 이병도는 "이일영이 안이 서양의 것을 모방하지 않은 창의적인 것으로 차근호 것과는 200점 이상이나 차가 났다."고 술회하였지만, 박고석은 "패거리와 정치에 의해 좌우되는 남한 화단에 대해서 부조리에 대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고 반박한 바가 있다.
유서에 "행여 4.19탑 설계 및 모형 제작 등에 소요된 빚더미에 절망한 음독으로 오해말라"고 쓰고, 지인에게 갚아야 할 돈과 소소한 술집 외상에 대한 당부가 적혀 있었다.
홍제동 화장터 불구덩이에 차근호를 처넣고 시인 구상은 일초 고은 시인과 둘이서 인사동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쐬주를 밤새 퍼마셨다.
시인 구상은 이용상 시인과 한평생을 친동기간처럼 지냈다. 두 분의 인연은 시인 구상이 6·25 한국전쟁 중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를 주재하고 있을 때 이용상 시인은 정훈장교였다. 그래서 두 분은 접촉이 잦았다. 이용상 시인은 희귀하게도 시를 쓰는 군인이어서 더욱 친숙하였다.
시인 구상의 의형제인 진주에 거주한 파성巴城 설창수 시인이 호를 지어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파성巴城 설창수·운성雲城 구상·하성霞城 이용상 3성으로 일컫는 이용상 시인은 유진오 박사 손아래 처남이다. 그는 1924년 서울 출생으로 고려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20대 초 학병을 끌려가 탈출하여 중국 항일유격대에 활동하다 해방 후 귀국 국방부 보도과장 복무하다 대령으로 제대했다.
5·16 군사 쿠데타 전후 시인 구상 박정희 소장 이용상 공보국장 셋이서 경음鯨飮으로 밤을 새 세상을 바로잡자는 이용상은 공보국 공무원이자 언론인이며 시인이다. 사석에서는 시인 구상은 박정희 대통령을 '박첨지', 이용상 시인은 '지만이 아버지'로 불렀다. 필자는 신입생 76학년도 중앙대 문창과 첫 강의를 한 시인 구상 강의 시간 중간에 박첨지라 일컬었다. 경찰과 정보부 요원이 대학에 상주하는 시대였다
공초 오상순은 시인 구상 수주 변영로는 하성 이용상이 서로 나눠 섬기기로 약속하고 숨을 거둘 때까지 실천했다.
수유리 공초 오상순 묘역
또랑시인도 대학 신입생 때 수유리 빨래골 공초 오상순 묘역 근처 문창과 백일장에 참여했다. 2019년 공초문학상 수상자인 구상문학회 회장 유자효 시인 축하하며 오상순 묘역을 찾았다. 묘지에 대리석 재털이가 있었다. 아마 묘지에 재털이가 자리잡고 있는 묘역은 공초 오상순이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원 회장인 공초선생이 지어준 호 사천 이근배 시인의 뛰어난 기억력과 암송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초와 수주는 담배와 술로 문학성과 예술성보다는 기행으로 더 알려졌다.
두 분이서 청도사건 이후 소 닭보듯 한 전말(Just! Three Times!)을 널리 퍼트린 이가 이용상 시인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내기 골프를 치며 '국을 걸어야지요'할 정도로 호방했다.
이용상 시인 사진
지금은 고인들 ㅡ 황소 은지화의 국민화가 이중섭,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쓸쓸해진다는 내용 없는 아름다운 시인 김종삼, 포대령 이기련, 호소력 있고 진지했던 조각가 차근호 등 모두 눈물나는 이름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랄같은 정신이상자들이고 표박자(漂泊者)들이었다. 명동에서 무교동에서 깡소주에 북어대가리로 헤엄을 치다가도, 술이 부족하면 흘러흘러 표류한 곳이 늘 우리집이었다.(삼선교 개천가 납작집)
그들 중 가장 귀찮고 시끄러운 것은 언제나 이기련 포대령이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다. 그것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 답답한 애니멀(動物)들아!" 하면서 동네가 떠들썩해진다.
가장 조용한 사람은 비련의 자살자. 그는 언제나 자기가 꿈꾸는 차디찬 대리석 조각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말이 적었다. 그 이름은 차근호(車根鎬)로 지금 망우리에 묻혀 있다.
이중섭은 차라리 좁은 우리집 마당에 쓰러져 누운 채 '별 하나 별 둘' 하며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세는 것이고, 불교 경무대원을 자칭하는 동양 중 고은(高銀)과 프랑스 유학에서 막 돌아온 서양 중 처 노랜조 신부(당시 혜화동성당 보좌신부)가 한짝이 된 맘보 차차차 광란은 완전무결한 종교 합작무무였다.
별명 도깨비 김종삼은 '힛힛힛 킥킥킥'하는 괴성을 연발하면서도 언제나 쓸쓸한 얼굴이었다.그 당시 어울려 우리집까지 표류해온 난파선들은 이들뿐만 아니었다. 구상 고은 박인환 전봉건 최창봉 등등 우리집 술값은 언제나 연말결산이었고 단골손님들이 먼길에 와 주는 것만도 감사한 노릇이다. ㅡ(용금옥시대, 그리운 사람들아!)
4.19기념탑은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며 기념탑 건립 주체도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친일 전력의 조각가 김경승 작업으로 마무리되어, 현재 수유리 현충원 '사월혁명기념탑'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과 부조, 연무대 무명용사탑, 육군 상무대 을지문덕상, 육사 화랑상과 범무상, 망우리 화가 함대정 묘비 이무영 묘비 등 작품과 서라벌예술대학에서 조각을 가르쳤다. 1959년 우리나라 최초 조각 연구소를 서울 정동에 '차근호 조각 연구소'를 개소하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시인 구상이 박첨지라 부르는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공초 오상순 차근호 이기련 등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시인 구상 사진
1949년 육군 정보국에 근무하던 시절 구상은 정보국장이던 이용문 장군의 소개로 박정희를 만나 의기투합해 자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곤 했다. 서울로 향하는 “귀로, 대구서 만난 장군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박정희는 구상이 피정의 여운으로 화제를 쇄락(灑落)으로 몰고 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어 연발하며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라는 일본 전국시대의 대결전을 노래한 한시의 한 구절을 되풀이해 불렀다.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북새판이었다. 1960년 그해 겨울과 이듬해 봄에 친아우 같았던 삼십 대 초반의 조각가 차근호가 음독자살하고, 1952년 신문사로 찾아와 구상의 시를 활활 외던,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친했던 포병 대령 이기련이 행려 사망자 묘지에서 거적에 싸인 시체로 발견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승만 독재 시절 그와 감옥 생활을 함께한 아나키스트 우한룡의 죽음도 이어졌다.
구상은 불안도, 권태도, 구토도, 소외도 아닌, 온몸에 옴이 오른 것 같은 정신의 미칠 듯한 가려움을 느꼈다. “나는 이 소양증을/ 잠시라도 잊으려고/ 음란에 빠져들었다.// 범접하고 난 후의 그 허망감!/ 바로 그것만이 약이었다”. 구상은 1961년 “5·16의 아침을 어느 무희 집에서 맞았다/ 그녀는 아침 화장을 하면서 방송을 들으며/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요? 선생님 신상에 행여나 해가 없을까요?’/ 하고 연거푸 물었다.”
구상이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와 마주 앉은 것은 5월 19일 저녁, 지금 칼(KAL) 빌딩이 서 있는 자리에 있던 국제호텔에서였다. 마당에는 기관총을 실은 장갑차가 있었다. 서로 잠자코 술잔만 비우다가 마침내 박정희가 말을 꺼냈고 구상이 답을 했다.
“미국엘 좀 안 가 주시렵니까?” /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 “하다못해 양식당의 매너도 모르는걸요!” /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 주셔야지!” /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구상은 남은 생애 시에 몰두해 살 것을 다짐하고 연작시 ‘밭 일기’ 100편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모든 체험을 시에 담되 현실적 정치적 역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존재의 차원, 영원의 차원에서 바라보려 했다”고 평가한 성찬경 시인의 말대로 구상은 문학과 인간, 시와 삶이 하나로 융합된 시를 쓴다.
구상은 1962년 봄, 궁리 끝에 당시 가톨릭에서 경영하던 ‘경향신문’의 동경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나 1965년까지 일한다. 대수술을 감행하지 않고는 치유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고질병 폐결핵을 치료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구상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았던 박정희와 작별하며 나눈 대화를 구상은 자전시에다 이렇게 남겼다.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 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亡種)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일본으로 간 구상은 동경의 한 서점가에서 “현대 최고의 철학자”란 표제에 끌려서 사 든 책을 밤새워 읽으며 가톨릭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과 만난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역사에 대한 거듭된 절망으로 허무의 수렁에 빠져 있던 구상에게 “삶의 새로운 긍정의 문을 열어 주었으며, 인간은 홀로서이지만 또한 더불어서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겸손에 이어져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또한 내세를 오늘로부터 살아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구상 스스로 표현한 대로 그야말로 “은혜의 책”이었다.
1963년 6월 3일, 구상이 “현대 한국이 낳은 기인이요, 대덕이요, 동방의 현자”라 일컬었던 공초 오상순 시인의 장례식이 문단장으로 거행되었다. 구상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시인 공초는 “자유가 나를 구속했었다”는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공초의 임종에 맞춘 듯 일시적으로 일본에서 귀국한 구상은 공초의 성대한 범시민장에 참여하고 돌아간다.
박정희 의장 미국 방문 후 귀국하는 김포공항에서 공초 오상순 빈소인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직행하여 수유리 3,000평을 제시했다. 시인 구상은 100평만 받았다.
차근호 조각가의 망우리에 들어오고 나가고 흔적이 없다.
동원중 뒤 함대정 묘비도 도로를 내면서 행방을 모른다.
망우리에 이중섭 묘비와 전설같은 이야기만 남았다.
사진 중 묘비 제막 후 김이석 차근호 나오는 사진은 김이석 작가 아내인 박순녀 소설가 손 글씨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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