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명산 김기만 독립운동가
상해임시정부 독립단 단원 및 흥사단 단우 142번
김기만(金基萬, 1892.3.2.~1956.12.27.) 66주기
김기만의 본적은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한학리이다. 흥사단 단우번호 142번이다. 서약일은 1921년 중국 원동위원부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19년 7월 경(7월 26일 기록)에 평안남도 지역에 연통제 특파원으로 파견된 기록이 남아 있다. 1922년 2월 16일 동아일보 기사에 상해 임시정부 독립단 단원으로 국내 잠입 숨겨준 사실이 발각된 용강군 사건에 김기만 단원도 국내에 잠입한 그의 이름도 보인다.
묘비 앞면, 청주김공기만지묘.
묘비 뒷면, 공의 호는 명산(明山)이며, 아버님 이름은 원성(元性), 어머니는 순흥 안씨이다. 두 분의 장남으로 임진년(1892) 3월 2일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풍천 임씨인데, 4남 3녀를 두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우국애족의 마음이 특별히 뛰어났다. 중국 상해에 멀리 유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과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항상 도모하였으며, 이어서 광복이 되자 고국에 돌아와서 애국 국채 채권을 판매하였다. 흥사단 운동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예수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하늘나라에서 어진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 병신년(1956) 12월 27일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영원히 돌아가셨다. 아! 슬프도다. 동생 기영이가 삼가 기록한다. 단기 4290년(1957) 정유년 3월
도산 안창호는 그의 일기(1920년 5월 15일)에서 김기만 군에게 손정도 목사 등을 비롯 목사 3인이 외국 선교사 초대한 비용과 여비에 대해 공채 발행 문제를 협의한 기록을 남겼다.
도산과 아내인 이혜련 여사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도 김기만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31년 제1회 동우회 사진에 도산 안창호, 유상규, 이영학, 김기만, 이광수와 함께 있었다. 사건 명단에도 이름이 보인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을지로 2가에서 출판업과 사무용품 사업을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구익균 옹의 중국 임시정부(1929~1945)와 해방 전후사(1945 ~61)의 생애 국사 편에 김기만도 포함되었다.
LA중앙일보 2019년 8월 15일 미주판 4면에 뉴욕 일원에 생존에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유택이 남아 있고 대한(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며 흥사단 단우이자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 보안책임자였던 독립운동가 나우 본명이 나순응의 둘째 아들인 ‘마지막 광복군’인 나성돈(95)의 회고담에서
그는 “부인 나주석(90)씨와의 만남도 독립운동가 집안이 연결해준 특별한 사연이라고 설명했다. 부인의 부친 김기만씨도 당시 상해에서 안창호 선생과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을 했었고 두 부친의 소개로 만남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평안남도 출신인 김기만씨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다 이웃집의 신고로 체포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도산이 평양 선산에 가지 않고 망우리 유상규 군 옆에 묻히고 싶다하여, 김봉성이 부친을 모시려던 망우리의 묘자리에 도산을 모셨다(오기영의 증언).
도산 안창호 선생 묘지를 중심으로 뒤에는 이영학 그리고 도산이 세운 평남 강서군 최초의 교회인 탄포리교회 초창기 신도인 박남신 여사와 그 둘째 딸인 3.1혁명 전날 밤 유관순 열사 등과 결의한 6인 결사대 일원인 김분옥 여사,
왼쪽에는 형님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과 결혼한 김봉성 독립운동가, 오른쪽에는 상해임시정부 비서였던 유상규 흥사단 단우 및 독립지사 묘역이 자리 잡았다.
이분들 외 단우인 독립지사 조종완, 문명훤, 김봉성 등이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애석하게도 도산 안창호 묘지도 1973년 강남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이장하고 말았다. 2016년 옛 비석을 다시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지 터에 세웠다. 2022년 올해는 허묘를 만들었다.
현재는 나우, 허연, 이영학, 김기만, 유상규 단우와 박남신 김분옥 모녀의 묘지만 남았다.
김기만 유택은 망우3동 평산 신씨 신립 장군의 가족묘지와 용마랜드에서 올라와 사색의 길 제3공화국 문공부 장관을 역임한 윤주영 사진작가의 할머니인 목천 마씨 묘역 오르기 200여미터 전 길 왼쪽 100미터 정도에 자리 잡고 있다. 묘지번호 104327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도산 안창호(4, 대한민국장, 1962, 임시정부) 선생 유택 주변에는 흥사단 단우인
유상규(116, 애족장, 1990, 중국 방면)·문명훤(154, 애족장, 1990, 국내 항일)·조종완(1049, 애족장, 1990, 국내 항일)·김봉성(예비 단우, 건국포장, 2005, 3·1운동)·김기만(142)·허연(265)·나우(222)·이영학(1095)·오한영(예비 단우)·이북(예비 단우) 등의 유택이 자리 잡았다.
문명훤·조종완·김봉성 묘지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도산의 발치에 묻어 달라'는 허연은 손자인 허용이 11월말 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하였다.
김기만, 나우, 이영학 등은 흥사단과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자료를 찾고 모아 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아래의 흥사단 단우들은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들과 관련을 맺었다.
조선의 유일무이한 식물분류학자로 1949년 경찰에 의해 트럭 운전하던 이종 조카의 밀수 사건에 빽이라고 이모부인 장형두 당시 서울대학 사범대학 부교수 이름을 대,
서울 중구경찰서에 들어가 인천경찰국에서 고문사 당한 장형두 서울대학 사범대학 부교수의 문제를,
제헌국회 제5회 국회임시회의에서 발의한 '장형두 변사사건 진상보고 건' 정식 의제로 올려 밝힌 신현모(67, 애국장, 1984, 문화운동),
또한, 신현모 독립지사는 한글학자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 수감 되었다. 성북동 길상사를 법정 스님께 시주한 기생 진향 법명 길상화 김영한 여사를 일본 유학을 주선한 관계로, 기생 진향이 신현모의 수감 생활을 돌보기 위한 즉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권번에 다시 들어가 일을 하다 운명적인 시인 백석을 만나 길이 전해지는 사랑의 이야기가 태어났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도산 안창호의 비문을 지은 춘원 이광수(103),
오한영(예비 단우) 비문을 쓴 송아 주요한(104),
김말봉과 김이석의 비문은 쓴 서예가 배길기(예비 단우)
1952년 5월 전시 수도 부산에서 중앙일보를 창간한 이북(예비 단우)
홍난파의 <봉선화>를 널리 알린 소프라노 김천애(예비 단우)
한국인 최초 보건학박사로 한국 공중보건학의 선구자이며 도산의 동서로 주치의 역할을 맡았고, 3·1혁명 1919년 3월 6일 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추담 허연의 중국 망명을 주선한 김창세(121, 건국포장, 2001, 임시정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로 일본은 우리나라의 독립지사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안창호선생도 이유필(175, 독립장, 1963, 임시정부)의 아들과 약속을 지키려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 유아세례를 받은 송암 서병호 선생의 처 조카인 김마리아(228, 독립장, 1962, 국내 항일),
망우역사문화공원 독립운동 명가이며 사회주의 독립지사 오기만의 동생이며
동아일보 기자로 '동전' '동전생' '무호정인'이라는 필명으로 문명을 떨치다 1949년 6월경 고향인 북으로 간 오기영(1099) 동전 오기영 전집 6권이 2019년 4월 발간됐다.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 열사의 전기 『유관순전』(1953)을 최초로 쓴 늘봄 전영택(251),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를 경험하고 추담 허연 선생을 흥사단에 가입시킨 한승인(260),
끝뫼 김말봉의 사위로 김말봉 작시 가곡 <그네>를 작곡한 현제명(1010),
추담 허연 애국지사가 설립한 중앙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부모님 묘소가 지금도 남아 있는 피천득(1025),
도산 안창호 오한영 그리고 장덕수 박은혜 부부의 비문을 쓴 서예가 김기승(1026),
추담 허연 및 작곡가 함이영 선생과 서촌 효자동에서 세교를 맺은 한글학자 김윤경(1036, 애국장, 1990, 문화운동),
간토대진재 당시 도쿄 한인교회 목사로 목숨건 구조와 후원을 펼친 오기선 목사의 아들로 대한민국 교육을 다지고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고 최초 교육인장으로 장례를 치른 천원 오천석(195),
태허 유상규와 경성의전 1회 입학생으로 현재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1102),
정일형-정대철-정호준 3대째 국회의원 선수를 합하면 14선에 달한다. 정일형 전 외무부장관이 서울 종로·중구에서 내리 8선을, 아들 정대철이 중구에서 5선을 했다. 손자 정호준은 새정치민주연합 초선 의원을 지냈는데 역시 지역구가 중구다.
서울 중구는 이북5도민들의 못자리이다. 평양 함흥 냉면집이 지금도 성업 중이다.
외가 쪽으로는 정호준의 외증조할머니(박현숙)가 2선, 이모부(조순승)가 3선(13~15대)을 했다. 이래저래 합하면 20선에 달한다. 한국 최대의 정치 가문이라 할만한 정일형(1113, 애국장, 1990, 국내 항일),
정일형은 1904년 4월 8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호는 금연(錦淵)이다. 1907년 부친 정기찬이 갑자기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정일형의 어머니 한은총은 몇 년 후 정일형의 동생 정신형을 데리고 김용겸(비구니 선승(禪僧)으로 유명한 김일엽의 아버지)과 재혼했다.
세브란스 의전 2대 교장으로 최초 피부과 의사 고아원(안양의 좋은 집)과 양로원(청운양로원) 등을 설립하여 연세대학 의대에서 <오긍선 학술대회>를 매년 열고 있는 오긍선 가문은 의사가 40여 명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 집안이다. 할아버지 유지를 받든 두 아들이 국립결핵병원 철도병원장을 맡아 개업하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대한민국 제2대 보건부 장관을 역임한 오한영(예비 단우),
1919년 3·1혁명 고종황제 인산날 망우리고개에서 을사오적 등을 척살하기 위한 27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망우리 고개에 매복하였다가 이완용 등 매국노가 순종황제와 함께 있어 실패한 동우 이탁(예비 단우, 독립장, 1963, 임시정부)
도산이 세운 강서군 탄포리 교회 권사인 박남신 유택이 도산 묘지 터 뒤 능선 너머 100미터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박남신 권사는 '인술로 많은 신자들의 목숨을 건졌다'고 묘비에 새겨져 있다. 어머니 유택에서 50미터 아래 묻혀 있는 둘째 딸인 김분옥은 3.1혁명 전날 이화고녀 유관순과 6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2020년 유관순 순국 100주년 기념식 즈음에 이영학 김분옥 두 분의 묘역을 중랑구청 공원녹지과에서 정리하여 아쉬우나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중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취임한 도산 안창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인 남파 박찬익(1884~1949)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비서로 국민 보건위생 계몽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유상규 경성의전 교수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 보안책임자이며 아들 나성돈과 2대 독립운동가 흥사단 단우인 별산(鱉山) 나우(羅愚, 1885~1960)
3.1혁명 맹산 시위 주도하고 임시정부 내무부 서기 독립운동가 지기(知期) 문명훤(文明煊, 1892~1958)
우리나라 최초 기독교 유아세례 받았던 독립운동가 서병호와 그 아들 서재현(徐載賢, 1906~1999)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2대 독립운동가
상해임시정부 독립단 단원 및 흥사단 단우 142번 김기만(金基萬, 1892~1956)
동아일보 초대 주필로 창간사를 쓴 설산 장덕수
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주치의이며 한국인 최초 보건학 박사 학위 취득한 김창세, 이유필 내무부 비서실장,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서간도 한인사회롤 통합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총영을 설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동우 이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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