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고하 송진우

정종배 2022. 12. 30. 06:49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고하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90~1945.12.30.) 77주기

 
글이 길어 필요하신 분은 읽어주십시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중 언론인 관련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사랑해>·<꽃받지 끼고>의 가수 은희의 목소리를 맨 마지막에 들어보십시오


고하 송진우는 189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송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945년 12월 30일 암살당했다.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조선 명종 때의 문신이자 면앙정가의 작자 송순(宋純)의 후손이다. 태어날 때 모친 제주 양씨가 채소밭에서 금빛의 가지를 딴 태몽을 꾸고 아들을 얻었다 하여 이름을 금가지, 아명을 옥윤(玉潤)이라 하였다. 고하라는 아호 역시 스승인 기삼연이 지어주었다. 고비산 밑에서 낳았으니 고비산같이 꿋꿋하게 살라는 뜻이다.

고하 송진우 수형 사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간 동아일보를 이끌었다.

네 살 때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뒤에는 의병장이었던 기삼연에게서 수학하였다. 기삼연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왜병에게 쫓기다가 마침내 송씨 마을로 흘러들어 옴으로 해서 마련되었다. 기삼연은 곧 송씨 문중의 식객이 되었고 그때 만 여섯 살이던 고하를 비롯한 동리 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1904년 15세 때 정읍의 유씨와 혼인하였고, 그러나 딸 한명을 낳았으나 일찍 요절했고, 3.1운동 후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여 남성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이 집안의 정설이다.

1907년 전라북도 변산 내소사 청련암에 들어가 수학하고 백관수를 만났다. 이때 일본 유학을 결의하여 하산하고 위계후를 찾아가 일어를 배웠다. 1907년 다시 창평의 영학숙에 들어가 고광준, 김성수 등을 만나, 이들과 함께 영어 등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영학숙을 그만두었다. 이때 김성수를 알게 되었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1908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와 긴조중학교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경술국치에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하였으며, 이 무렵 유학생 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일을 맡아보았다. 당시 김병로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지광》을 펴냈다. 1915년 이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학감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송진우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이 빈번히 회합을 열고 초기의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11월 이상재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신천지》와 1922년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인 《신생활》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해 12월 26일 잡지 『신생활』 사장 박희도·김명식·신일용·유진희 등, 한국 초유의 사회주의 관계 제1회 공판 개정되었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민태원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이 일제 검찰에 구속·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1945년 12월 30일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상오 한현우 등 6명의 습격으로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1966년 11월 11일 강서구 신정동 43-2번지 지향산 기슭에 이장하였다. 1988년 5월 3일 서울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98 구역에 안장되었다.

고하 송진우 애국지사와 관계 맺은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들과 언론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하 송진우는 인촌 김성수와 동문수학한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정치적 동지로 한민당도 함께 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인촌 집안 이야기를 덧붙여 할 수 있는 인물이 잠들어 있다.

중앙학원 공동 설립인 겸 동아일보 감사역을 역을 맡던 김재수의 무덤이다. 혼유석만 있고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인촌은 큰아버지 김기중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런데 김재수가 김기중의 친아들이다. 김재수는 서자였다.

인촌의 동생인 수당 김연수 삼양사 설립자는 또랑시인 고향인 1933년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 앞 바다인 함평만 390정보(117만평)와 1936년 고창군 해리면 앞바다 320정보(96만평) 간척사업으로 농토를 넓혀 농사를 지었다. 함평군 손불면 삼양사 손불농장이 완공 뒤에 형성된  월천리 영월과 농장마을에서 시작하는 월천방조제 해당화 꽃길에는 5월에서 7월 사이에 6만여 그루의 해당화가 만개한다. 함평 나비축제와 맞물려 꽃구경하면 좋은 명소이다. 월천 방조제에 가까운 곳인 교촌마을 옛 손불남초등학교에 민예학당이라는 현판을 달고 <꽃반지 끼고>·<등대지기>·<사랑해>·<연가>의 가수 은희가 20년 동안 천연염색 작업을 하고 있다.
김연수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재판부의 방면 논리가 흥미롭다. 그 중에 많은 인재 양성 장학사업으로 민족의 동량을 키웠다는 점도 포함됐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서일대학 뒤 오거리쉼터 아래 100여 미터 오른쪽에 담양 국씨 우리나라 최초 기상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국채표 기상학자의 가족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 대한민국 기상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국채표 제2대 기상대장은 고하 송진우와 동향인 전남 담양 출신이다. 국채표는 중앙고보 연희전문 다닐 때 김연수 아이들 과외교사를 하였다. 김연수는 성북동 사랑채를 국채표에게 내주였다. 국채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서울로 올라와 공부를 하였다. 국채표 누이는 서울상대 교수 막내동생은 서울대 약학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그 후손들은 각 분야에 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교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장덕준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 장덕진의 형이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아버지까지 9대 독자였는데, 4형제가 태어났다.
1947년 12월 2일 암살당한 설산 장덕수는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로 창간사를 썼다.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만주의 훈춘 간도 등지에서 우리나라 최초 순직한 기자인 형님 장덕준에 대한 보답과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만난 인촌 김성수에 의해 1923년 부사장이 되었다.
형 장덕준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재령 보강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일찍이 신문물에 눈을 떠 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1920년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 만주의 간도, 훈춘 등에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동생 장덕진은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의 행동대원이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인 카지노를 털다가 사살되었다.

1936년 8월 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났다.
일장기를 지워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체육부 기자 이길용이었다. 이 기자가 복사한 사진을 들고 먼저 찾아간 사람은 조사부 전속 화가 청전 이상범이었다.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은 곧바로 동판으로 만들어졌고 이길용은 그 동판을 들고 사회부 편집을 맞고 있던 장용서에게 다가가 실어달라고 했다. 동판을 받아 든 장용서가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 임병철이 거들었다.
그는 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김은배 선수가 6위를 했을 때 눈에 거슬리는 일장기를 기술적으로 말소해 신문에 실은 일을 예로 들면서 “그때 총독부에서 별다른 트집없이 넘어갔으니 싣도록 하자”고 부추겼던 것이다. 임병철의 이 말은 장용서를 움직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일장기가 말소된 손 선수의 사진은 그대로 인쇄가 되어 거리로 나갔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36년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그 사건과 관련, 먼저 사진부 백운선, 서영호, 편집자 장용서, 사회부 임병철, 사진과장 신낙균, 조사부 이상범, 체육부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등이 차례로 경찰부에 구속되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유택이 방치된 백담 임병철은 신문에서 사진을 싣자고 한 것은 자신이라 주장했고 장용서는 임병철은 관여한 바 없고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고 주장했다는 동지애의 아름다운 일화 한 토막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장사동(長沙洞)에 사는 설태희 옹 댁에 명사들이 모였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고하 송진우 선생이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고 호언장담하자, 옆에 있던 만해는 "고하가 보았다는 말은 쌓아둔 것을 보았다는 말이겠지. 라고 넌지시 말했다. 이때 한자리에 있던 위당 정인보는 폭소를 터뜨렸다.

소오 설의식


설의식(薛義植, 1901~
1954) 함경남도 단천 출신. 호는 소오(小悟). 오촌 설태희 개신 유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2년『동아일보』 사회부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주일특파원·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1952년 우리나라 최초 한글 번역했다. 충무공 정신을 선양하여 ‘충무광’이라 불렀다.
1929년 주일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단평란을 집필했고, 1931년 잡지 《신동아》를 창간할 때에는 편집국장 대리로 있으면서 제작을 총괄하였다.
그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그 자매지 《신동아》·《신가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사를 떠났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으며 1947년 순간(旬刊) 《새한민보》를 창간하였다.
광복의 기쁨 속에 동아일보는 복간하였다. 복간 직후 진용은 사장에 송진우(제8대) 편집국장에 고재욱이었으나 곧 주필에 고재욱, 편집국장에 임병철, 편집부장에 장용서, 체육부장에 이길용 등이 참여, 동아를 소생케 하는데 큰힘이 되었다.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위창 오세창(1864~1953) 1886년에 갑신정변 와중에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된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속간한 《한성주보(漢城週報)》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위창 오세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기자였다.
1902년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으며, 4년 뒤에 함께 귀국하여 《만세보》를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오세창의 업적은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를 연재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자, 최초의 신문소설이다. 창간 한 달 뒤인 1906년 7월 22일부터 「혈의 누」를 연재하고, 10월 14일부터는 두 번째 작품 「귀의 성」을 연재했다.
또한 1909년에는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간하는 대한민보사 사장으로 활약하였다. 동양화가 이도영에게 만평을 연재하게 하였다. 친일파를 비판하고 세태를 풍자하는 시사만화가 자주 실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만평이었다.
해방 무렵 가장 훌륭한 인쇄 시설과 직원을 가진 신문이 바로 《매일신보》였는데, 자치위원회에서 “총독 정치의 익찬(翼贊) 선전 기관의 졸병 노릇을 통해 범한 죄과”를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600명 사원이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매일신보를 인수하려고 하자, 연희전문학교 교수 하경덕과 언론인 이관구가 중심이 되어 민족 지도자이자 제1세대 언론인 오세창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민족신문》으로 개편하였다. 이미 82세 고령이었던 오세창은 취임사에서 “동지들을 일마당에 내세우기 위한 조치”로 사장직을 수락한다고 밝히고서는 19일 동안 사장으로 재직하였다.
그 기간 동안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인수 재산을 확인하고, 사원 600여 명을 거의 인계받는 등 체제를 잡았다. 그는 체제가 잡히자 명예사장으로 물러났다.

안석영 AN Seok-yeong 安夕影(1901~1950)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감독이다. 본명은 석주(碩柱)이다. 안석영은 1901년 4월 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교동보통학교를 다녔고 1920년 휘문고보를 졸업했으며, 도일하여 도쿄에 있는 동경본향양화연구소(東京本鄕洋畵硏究所)에 들어갔으나 신병으로 퇴사하고 1921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모교인 휘문고보의 도화 강사로 재직하였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의 삽화 때문이었다. 안석영은 이 삽화를 맡으면서, 조선 삽화계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이후 다시 도일하여 미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22년 안석영은 이기세, 윤백남, 민대식, 박승빈, 이원섭, 안석영 등이 조직한 예술협회의 창립 공연에 배우로 참여하면서, 조선의 연극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다가 ‘백조’의 동인이 되었고, 김복진과 함께 토월회 공연에 참여하였다. 이후 토월회 탈퇴 회원들과 힘을 합쳐 파스큘라를 조직하였고, 1925년 카프(KAPF)의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카프에서는 주로 미술부에서 활동하였지만, ‘불개미 극단’의 회원이 되어 연극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다시 도쿄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한 뒤, 192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만화 등을 연재했다. 같은 해 연말에는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1935년 《조선일보》사는 잡지 발간을 총괄하는 출판부를 신설했다. 초대 주간은 노산 이은상을 초빙했다. 안석주는 시인 백석·함대훈 등과 함께 《조광》 창간호를 준비하려 출판부로 발령이 났다. 《조광》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석영은 일본 유학 후 미술·영화·문학·연극 등 각 방면에 다재다능한 전방위 예술가였다. 삽화가로는 나도향·이무영·박종화·백철 등의 글에 그림을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 만화로 알려진 <씨동이의 말타기>를 내놓았다. 《개벽》·《백조》·《학생》·《어린이》·《별건곤》 등 유명한 잡지의 표지화도 그렸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만문만화로 이름을 알렸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 풍경을 매우 잘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된 이후 안석영은 한국영화협의회의 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에는 윤봉춘 감독의 〈애국자의 아들〉의 원작을 제공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중앙일보사 고문을 역임했고, 1949년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에서 연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만주일보사 편집위원을 지낸 후, 『문화시보』를 창간하기도 했다. 1950년 2월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망우리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휘문고보 선후배들이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라는 말 뒤 끝에, 영랑이 다음은 나네!라고 답하였다고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김영랑 시인은 6·25전쟁 9·28 서울 수복 당시 돈암동 지인 댁 지하에 숨어 있다 우는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한테 자리를 양보하고 밖에 나와 있는 사이 폭격 파편에 맞아 절명하여 장충단에 묻혔다. 1954년 11월 14일 망우리로 이장하며 석영의 묘비도 그날 세웠다.

끝뫼 김말봉(金末鳳)(1901~1962). 부산 출생. 일신여학교를 3년 수료한 뒤 서울에 와 1918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1927년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그립습니다 서해 최학송 서울 문학의 집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 1901~1932)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빈궁소설을 주로 썼다. 본명은 학송. 일명 서해·설봉(雪峰)·풍년년(豊年年)이었다. 이명은 저곡(苧谷)이었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에 입사하여 이 잡지에 간도 체험을 생생하게 그린 「십삼원 拾參圓」(1925. 2)·「탈출기」(1925. 3)·「살려는 사람들」(1925. 4) 등을 발표했다.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해 1929년까지 활동했으며, 1926년 KAPF 맹원이자 시인인 조운의 누이 조분려와 재혼했다.
편집의 귀재로 《현대평론》·《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주변 동료들이 후원금을 거둬 주면서 가지 말라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격인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무골호인으로 알려져 병상기록이 남아 있다. 이익상이 수필에 자기가 일찍 죽는 이유는 서해에게 헌혈을 많이 하였다고 쓴 헌혈자 명단과 서해의 사망진단서에 도산 안창호가 "망우리의 상규군 옆에 묻히고 싶다"고한 임시정부 도산의 비서였던 경성의전 강사인 태허 유상규가 싸인을 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현실성을 강조한 프로 색채의 작품을 선보이던 우서(雨鵨) 계용묵(桂鎔默,1904~1961)이 1935년에 「백치(白痴) 아다다」를 발표한다. 「백치 아다다」는 이전과 전혀 다른 순수 지향적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작가 계용묵의 전환을 예고한 작품1938년 조선일보사 등에서 일하다. 1943년 신문사를 그만둔 계용묵은 일왕에 대한 불경 혐의로 검거되어 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방송국에 일자리를 얻지만 일본인과 차별 대우를 받자 3일 만에 때려치운다. 1944년 그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고향 선천으로 돌아간다. 계용묵의 본명이라 잘못 알려진 하태용(河泰鏞)은 외가에서 자랄 때 부른 이름이다. 우서는 서자였다.

서해와 우서는 살아생전 라이벌이었다. 우서는 이미 등단하였지만 문단의 위치를 매조지하려고 <조선문단>에 춘원의 추천을 받기 위해 시도했다. 그런데 자기와 동급인 서해가 추천서를 썼다. 그것도 작품이 어설픈데 인심 쓰듯 추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우서는 두고두고 되새겼다. 그러나 서해가 일찍 죽고 남은 가족들이 북으로 간 뒤 서해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는 우서가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신시론’과 ‘후반기’ 등 1950년대 문단의 모더니스트 그룹을 이끌며 도시풍의 시를 쓰고 숱한 에피소드를 뿌린 ‘댄디 보이’ 박인환(朴寅煥, 1926~1956). 그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문화 비평가이며 영화 감독이기도 한 장 콕토를 선망하며 학창 시절을 보낸다.
6·25 직후 미처 피난하지 못하는 바람에 지하 생활을 하며 혼쭐이 난 박인환은 9·28수복 뒤 경향신문에 들어가 신문사 소속 종군 기자로 활동하던 중 1951년 1·4후퇴를 맞게 되자 누구보다도 피난을 서두른다. 그는 피난지에서 경향신문의 종군 기자로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김경린· 이봉래 · 조향 · 김차영 등을 모아 ‘후반기’ 동인을 결성한다.

 

서일대학교 뒷편 국채표 가족묘지를 지나 오거리 쉼터에서 사색의 길 화장실 쪽으로 오르다 300여 미터 지점 오른쪽에 이북(본명 이경득, 1913~1952)과 동생 이성득 그리고 그 두 형제 위에 어머니 묘지로 가족묘지이다. 묘역은 널직하고 앞이 특 트였다. 비문을 읽어다보면 두 형제가 형은 40세, 동생은 소양강에서 수영하다 익사했다 나이는 30세로 요절했다. 1952년 5월 전시수도 부산에서 창간한 중앙일보의 설립자 형제들이다. 중앙일보는 1953년 5월에 제1회 여성 경염競艶 대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가 대한민국 최초 미인선발대회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 길 일방통행 중랑구 쪽 화장실 못 미쳐 이문호 교수의 풍수에 대한 해석에 딱 들어 맞는 지형에 언론인 백윤진(1925.1.4.~19682.10.)과 유명(1929.9.25.~  ) 부부 묘지를 만났다.  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스치듯 살다간 젊은 기자와 / 반세기를 그리워하던 / 그의 아내, 여기눕다. // 오래전, / 칼보다 날카로운 펜으로 / 시대를 가르는 울림과 / 어려운 이들의 아픔을 전하며 / 어찌 살아야 진정 사람다운 지를 / 일 깨웠던 젊은기자... // 그리하여 / 그늘이 없던 그이 시간 모두를 / 따뜻함으로 / 가득 / 채웠지만 / 그런 자신의 삶은 / 참으로 아쉽도록 짧았습니다. // 이제 반백의 시간을 건너 / 훌쩍 늙어버린 아들, 딸들이 / 기억마저 아스라한 / 아버지의 단상과 / 홀로 반세기를 이겨낸 / 어머니의 심정을 / 어찌해도, 제대로 형언치 못할 / 미사여구가 못내 쑥스러워 / 그냥 이렇게 / 몇 자 적고 맙니다.

 

지루하고 긴 글 읽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호랑이해 세밑 마무리 잘 하시어

토끼해인 새해에도 좋은 일 이어가시길 빕니다

 

세월은 갔지만, 가수 은희 목소리와 2009년 함평 생활을 

 

https://youtu.be/bFX45PcXGH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