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여성운동가 박원희 95주기 및 여인열전

정종배 2023. 1. 5. 12:57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여성운동가 박원희 95주기 및 여인열전

사회주의자 김사국과 여성운동가 박원희 부부 독립운동가
해광(解光) 김사국(金思國, 1895~1926) 박원희(朴元熙, 1898~1928)


박원희 사진

여성권익 향상에 힘쓴 독립운동가 박원희는 1898년 3월 10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나 1928년 1월 15일 서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인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에 참여하였다. 1923년 김사국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를 주도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망라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그는 병을 얻어 30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남편인 김사국은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사국과 여성권익 사회운동의 독립운동가 박원희 외손자인 김영열 선생과 전화로, 외조부모님의 삶과 그 따님인 어머니 김사건 여사의 외조부모님 기개를 닮아 맵고 짠 삶을 극복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김사건 여사의 두 분에 대한 서훈 추서를 위한 노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 분의 초장지는 수철리(금호동)공동묘지였다. 해방 이전 망우리공동묘지 어머니 안국당 묘지 입구 왼쪽 위로 이장했다. 2002년 10월 28일 대전 국립대전현충원(애국지사 2-1012)으로 이장하여 안장됐다. 서훈받기 전 사회주의운동 전력으로 숨죽이는 연좌제 그늘에 수많은 나날을 고뇌와 아픔을 겪었다.

또한, 망우리공원 안국당 묘지 앞에 며느리 박원희 묘비는 서 있고, 아들 김사국 묘비는 그 아내 묘비 앞에 묻히게 된 사연을 알게 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날 포그레인 작업하며 김사국 선생의 묘비는 손상을 입어 땅에 묻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아들과 며느리 나라 사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어머니 안국당 묘지 왼쪽에 세우고 묻었다.

2022년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흙에 덮여 있던 김사국 묘비를 일으켜 세워 사라진 갓머리 부분은 찾지 않고 어머니 안국당 묘지 오른쪽에 세웠다. 작년 이른 겨울 새로 세운 인물 안내판을 아내인 박원희만 세우고 김사국 선생의 안내판은 세우지도 않았다.

김사국 박원희 외조부모님에 대한 ‘학술 논문’을 포함된 어머니 인전 김사건 여사 회혼기념 문집 『노을에 기대어 건져올린 세월』을 우편택배로 보내줬다. 중랑구청에서 후손들의 모임이나 자료 요청이 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씀을 나눴다.

아내 박원희 묘비 앞에 묻혔던 묘비 지금은 어머니 안국당 묘지 오른쪽에 세웠다

서울청년회를 주도한 김사국은 1895년 11월 9일 충남 연산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명 해광이다.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같은 주의자인 아우 김사민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불도와 한학을 공부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생활고로 중퇴하고 1910년 일제에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였다. 1919년 국민대회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인품이 호탕하고 활동적이었으나 나중에 망명 중 폐결핵에 걸려 귀국 끝에 1926년 5월 8일 숨졌다.

1921년 1월에 창립된 이영·김명식·장덕수 등과 서울청년회 결성을 주도했다. 4월부터 조선청년회연합회위원, 조선노동대회의 간부로 활동하다 7월 박원희와 결혼한 뒤 11월 비밀리에 초청받아 도쿄로 건너가 박열·김약수·조봉암 등과 함께 흑도회를 결성했다.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조선고학생동우회에도 참여해 1922년 2월 동우회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도했으나, 자유노동조합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22년 봄 일본에서 귀국하자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그 해 3월에 열린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 관련자인 장덕수·김명식·박이규 등의 제명을 제안하고, 이영 등과 18개 단체로 이루어진 연합회에서의 서울청년회 탈퇴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좌우세력의 불분명한 관계가 명확해지는 하나의 계기였다. 또한, 4월에 열린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 정기대회 때 차금봉과 손잡고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 10월 25일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 개최 등을 지도하였다. 11월에 일어난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우 김사민은 투옥되었고 김사국은 만주로 건너갔다.

김사민은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받는다.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 중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여 간수의 칼을 빼앗아 머리를 찍어 중상을 입혔다. 김사민은 이 일로 모진 고문을 당하여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김사민은 1924년 출옥 후 석왕사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는다. 아마도 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석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숙은 김사국을 언급하면서 김사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 대목이 있다.

(김사국은)서울 사람으로, 정상적인 학교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한문을 많이 알았어요. 동생이 사민이었는데 그 역시 항일운동을 하다가 왜놈의 감옥에서 하도 심하게 고생해서 미쳤지요. 그래서 미친 사람으로 돌아다니다가 죽었지요. 어머니는 뒷날 중이 되었습니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50쪽)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은 1923년 2월 고려공산동맹 창립을 위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김사국·김영만·이영·임봉순·장채극·김유인·강택진 등 17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였다. 김사국을 대표(책임비서)로 선임하여 블라디보스톡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하였다. 처음 때 공산주의운동 사나운 장수였다.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었다가 1923년 3월 용정에 동양학원, 영고탑에 대동학원을 설립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재차 러시아로 망명하였지만 폐병이 악화, 귀국하여 1924년 5월 통일적 당 건설을 위해 ‘13인회’를 주도하였다.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다. 서울파의 지도자로서 화요회(맑스가 태어난 1818년 5월 5일이 화요일이기에 명명, 홍명희·홍증식·조봉암·윤덕병·김재봉·박일병·조동호·김찬·박헌영·김단야·임원근 등)와 대립했다. 1924년 12월 6일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년 4월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고려공산동맹 대회가 개최되었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등 선두에서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는 파벌투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그때 신문기사 내용: 김재봉·김두전(약수)·유진희·권오설·김상두·진병기·주종건·윤덕병·송봉우·독고전·홍덕유·조봉암·김찬·조동우(호) 등은 재작년 사월 십칠일 오후 한시 경에 시내 황금정 아서원이란 중국요리점에 모여 조선을 일본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조선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야...)이 탄생될 때 김사국의 서울파는 배제되었다. 김사국은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동경을 오가며 조선공산주의운동 일통을 위하여 애썼던 피 끓는 주의자였다.

박원희 김사건 따님인 김사건 여사의 고희기념 문집

1926년 5월 8일 서울청년회 회관에서 폐병으로 사망했다. 김철수는 화요회와 서울파의 40여 단체가 연합하여 사회단체합동연합장례식을 추진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러온 민중은 철저히 차단됐다. 만장이 동대문까지 이어졌다. 1,000여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가운데 수철리(금호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김사국과 박원희 사이에서 태어난 인석(仁石) 김사건(金史建, 1925~2010) 여사의 『인석 김사건 여사 고희기념문집』을 우체국택배로 소중하게 받았다. 김사건 여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조카 김영훈 소설가 본인의 작품집 『익명의 섬에 서다』·『장군님의 말씀』 두 권과 함께 정성담긴 택배로 보내주었다. 김사건 여사의 고희기념문집을 읽고 김사국·박원희 부부 독립운동가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리는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고희문집의 첫 장 ‘나의 인생 나의 시련’ 중 ‘나의 출생’ 내용과 생애 활동을 소개한다.

“나의 아버지 金 思자 國자와 어머니 朴 元원 熙희자의 딸로 서울 종로구 계동 225의 1호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친가가 아닌 외가댁이었다. 그러나 2살에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살 되던 해 12월 13일에 역시 독립운동을 하셨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고아가 된 후, 나는 외조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얼굴도 알지 못하고, 어머니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외할머님이 사랑 속에서 자라났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부모님도 돌아가셨다는 것도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어서였다. 내가 지금 아련하게 떠오르는 첫 기억으로는 어느 겨울날 이종사촌 오빠에게 업혀서 어딘가를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앞에 어머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오빠 등에 업혀 돌아올 때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던 생각이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내가 갔던 곳은 교동에 있는 천도교 강당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1주년 추도식에 참석했던 것이었다. 3살 되던 해 12월 13일에 돌아가셨으니 1년 후인 4살 나던 해 12월 13일이다. 이것이 나의 출생 이력이다.“

이후 김사건 여사는 외할머님의 사랑으로 공부도 잘하면서 씩씩하게 대자유치원 재동보통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육영수 여사와 배화여고 동기였다. 농촌계몽운동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한글 해독을 하게 했다. 새마을운동 및 학교 자모회장 일을 맡으며 청와대 전폭적인 지원으로 받아 학교 앞 다리 건설 및 학교 신관건립과 도서구입 교회봉사 등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 했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집 문제였다. 김사건 여사는 친할머니 안국당 여사가 집에 오는 것이 싫었다. 배화여고 졸업 후 조선총독부 집계계에 취직했다. 정신대 문제로 은행 다니는 김상태 씨와 1944년 결혼하여 종로구 원서동에서 신혼생활하다 1945년 대동아전쟁으로 서울 소개령을 겪으며, 남편의 고향인 청양군에 정착했다. 농촌계몽과 학교 및 교회 봉사활동으로 칭송을 많이 받았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한 장한 어머니와 모범적인 지성인이었다. 부모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 신문을 뒤져가며 발품과 정성을 다하였다. 하나하나 찾아서 기어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는 기틀을 다졌다.

김사국과 그의 장례식

망우리공원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 해방공간 좌우이념대립 6.25한국전쟁 남과 북 민족과 국토 분단 그리고 독재정권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6.3항쟁 산업발달 등 자신의 신념과 이념에 따른 민족과 나라를 위한 삶과 사상을 펼치고 살다가 생을 마감한 열열한 지사들이 묻혀있거나 이장하였다.

1공화국 사회비평가로 4·19혁명 이후 『폭정 12년 ㅡ 경무대의 비밀』 5권까지 내려다 몸이 아파 제1권으로 끝내 김석영(두봉).
1공화국 독재자 이기붕은 효령대군 후손이다. 4·19혁명 당시 민중들이 몰려가 이기붕의 사저를 털자 4월인데도 수박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4·19혁명의 기폭제 3·15부정선거 부통령 당선 아내 박마리아 여사의 욕심(담화문에 다 내려놓겠다는 문구를, ~고려에 보겠다로 고쳤다)에 의해 비극적 가족사를 남긴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
오세형 집안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적으로 함남 진남포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기도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으로 형집행정지 되어 출옥한 후 옥고 여독으로 순국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오기만 그의 제수로 독립운동 뒷돈을 찔러주고 오기영의 아내인 대한민국민회지방회 김명복 약사.
사법살인 당한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1부장 2.3대 민의원 독립운동가 이병홍.
4.19혁명의 열사 박동훈과 수송국민학교 6학년 전한승.
4.19혁명의 꽃 경기고 2학년 이종량과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근우회 창립총회 갖고 활약 강연회를 통해 여성의식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는 등 1928년 1월 5일 사망 때까지 4년여간 여성운동 전개한 요절한 조선사회주의 여성운동선구자 박원희.
1919년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조직·참여·체포·투옥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24년 10月 귀국하여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를 역임한 김사국.
좌와 우 이념 대립 사이에 사라진 삼학병.
5.16 군사쿠데타 군부세력에 의해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민족일보》사장 조용수.
5.16군사쿠데타 사형 집행 미복권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최백근.
6.3항쟁 얌전한 성품 부모에게 보낼 편지 “데모엔 취미가 없어 안심하라더니” 이윤식.

망우역사문화공원 여인열전

‘순수 귀신을 버려라’ 두 여인에게 양보하고 전상명을 기어이 남편으로 맞이한 「찔레꽃」의 신문연재 소설가 여장부로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던 박인환에게 사과를 받았고, 중랑구 묵동에 20년 거주한 「울음이 타는 가을강」의 시인 박재삼의 말실수를 기를 죽인, 해방 후 집창촌 여인들의 여권 신장의 <박애원>을 운영하며, 오롯이 글을 써 자식을 기르고, 망우리 묘지 옆에 누운 이종하의 아들인 이현우(김관식 천상병과 3대 기인 시인으로 불리는 시인)까지 받아준 끝뫼 김말봉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50년대 댄디 보이 모더니즘 시인이라 알려졌지만, 해방공간 「인천항」·「 인도네시아 인민들에게 주는 시」 시를 통해 미군정과 제국주의 횡포를 폭로한 폭넓은 시의 세계로 재조명되는 시인 박인환 나이 서른에 요절한 남편의 유품을 남김없이 불에 태운 시인의 진명여고 농구선수이자 마리서사 손님이었던 아내 이정숙 여사

이화여전 최초 한국인 교장 이화여대 초대 총장으로 이화여대 아우라 최고 인물 우월 김활란(아명 김기득) 친일행위자로 유관순 열사 한국의 잔 다르크 만들기 앞섰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대신교회를 지었다.

이화여전 간호학과를 설립하고 우월 김활란의 금란지교 친구이며 조선의 미인으로 안창남 일본 황족의 청혼을 단칼에 거절하여 이제는 결혼할 수가 없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그리고 최초 간호사협회장으로 세계대회 참석하여 영국 황실 초청 한복을 입고 나가 베스트 드레서로 칭송을 받았으나 유방암으로 운명하자 망우리에 천막 교회로 시작하여 지금의 금란교회의 씨앗이 된 서구식 간호사 최초 유학생인 이정애 간호사.

강릉 출신으로 어릴 적 가난을 거울삼아 인색하기 짝이 없고, 국민방위군 사건 김윤근 사령관 사형만은 면해 달라는 아내의 바람과 진보당 사건 조봉암과 독립운동가 김조이 사이의 딸인 당시 이화여고 교복을 입은 채 아버지 사형 집행을 막아달라는 간청을 거절한, 동향 출신 초허 김동명 시인의 날카로운 정치 비판에도 탈 없이 뒷배를 봐주고 4·19혁명 혼돈 속에 담화문에 그럼에도 ~고려해보겠다 고쳐서 4·19혁명 섶에 불을 지른 이화여대 부총장인 박마리아.

이강석의 애인으로 망우리 가족 묘지를 자주 들렀고, 미국 이민 간 뒤에도 추도식에 참석하며 시집가는 대신 돈을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 망우리에서 고양시 소재 공원묘지로 이장한 장군의 딸

이강석 묘비 뒷면

아내를 셋이나 얻어 친구들이 처복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친구들의 모임에 시비가 붙은 초허 김동명 시인의 아내들

이태원묘지무연합장분묘 28,000여 기에 합장되었다 추정하는 한국의 잔 다르크 3·1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

3·1만세운동 전날 밤 이화여고 같은 반 여섯 명이 결성한 6인 결사대이며 이화여전 가사과를 설립하고, 미군정 하 대한민국 최초(16명) 여자경찰 총경으로 최초 여자경찰국장인 김분옥 여사

도산 선생 형님인 안치호 딸로서 독립운동가 김봉성과 결혼하여 미군정 하 대한민국 최초(16명) 여자 경찰 총경으로 경찰의 본보기로 대한민국 경찰인물로 선정된 안맥결 독립운동가

김분옥 여사의 어머니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평남 강서 탄포리교회 집사로 인술을 베풀어 많은 인명을 구한 박남신 여사

대한민국 미술의 3대 거장으로 국민화가라 부르는 <황소>·<은박지>의 대향 이중섭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이남덕 여사

대한민국 미술의 3대 거장이며 무사시노 대학교 8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가장 성공한 예술로 뽑힌 권진규는 ‘자소상’을 유난히 많이 제작했다. 일본인 부인 가사이 도모의 ‘도모’ 상도 제작하고 조각상의 모델인 제자와 여인들의 이름을 기록한 건칠과 테라코다 조각가 권진규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 빈궁문학의 대가 서해 최학송 얼마나 좋았으면 함평의 모악산(불갑산)의 연실봉을 조선 팔경이라 뻥을 쳐 얻은 네 번째? 아내 전남 영광출신 시조시인 조운의 누이 조분려

우리나라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 1호인 이옥경과 방송기술인 1호 노창성과 그의 둘째 딸 최초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

남예산 과부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숙명여대 임숙재 초대 총장

호수돈 여중 1학년 담임과 제자로 만나 성천 유달영 박사의 지도로 눈 비비고 봐야되게 급 성장한 여성운동가 이경숙

살인적인 스케줄로 요절한 오빠부대 원조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의 가수 차중락의 임종을 지킨 평화봉사단원이었던 미국의 여대생 알렌

평생 동지로 광복인 장준하 김준엽, 최초의 예명의 신카나리아, 홍난파의 <봉선화>를 널리 알린 소프라노 김천애, 4전 5기 권투선수 홍수환 가수 홍수철을 길러낸,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남편 대신 가장으로 자식들을 돌보며 사회인으로 길러낸 최신복, 장형두, 허연, 설정식, 국채표, 함이영 아내이자 자식들의 어머니
들국화의 리드 보컬 가수 전인권의 할머니

두 아들 형님인 이영준은 친일인명사전 동생 이영학은 독립운동가로 나뉜 선천 부자이며 2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이창석과 어머니.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변절한 박희도와 그의 형님과 동생들은 독립운동을 바라본 아버지 박계화와 어머님.

중국 석가장 전투에 일본군 통역병으로 전사한 장해윤, 아들의 전사통지서도 받지 못한 안국동 어머니

삼학병 학병동맹 군사부장으로 남해군수 아들이자 LG가 설립자의 맏사위 박진동의 아내

동요작사 강소천 어린의 영원한 벗은 1954년 최수정(1919~1988) 여사에게 늦장가 들어 복된 내조를 받다 소천 사후 생명보험 판매원 최우수상을 연3년 차지했다 2녀 1남 잘 길렀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김영랑은 16세 꼬마 신랑으로 어린 신부를 잃고
강진과 해남 경계 선영 맨 아래 예쁜 묘를 쓰고
2년 뒤 집에 하숙하는 보통학교 여교사와 열애하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관동대지진으로 돌아와 서울을 오르내리며 친구 최승일의 여동생
숙명여중 최승희를 보고 반해 결혼하려 애를 쓰다 두 집안 반대하여
강진 생가 뒤안 동백나무 가지에 목을 매다는 자살 소동을.......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 출신 김귀연 선생님과 결혼하여 7남 3녀 두었다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1904~1948) 민속학자
관동대지진 유학 중 충격으로 상과대에서 방향은 틀어 민속학의 태두
경남 언양 만석꾼 집안 아내는 전북 정읍 만석꾼 집안 결혼
삼성그룹과 대상그룹의 혼사의 모델
부부 묘역은 태안군 근흥면 서풍농원에 이장했다

독립운동가 다물단의 서동일은 부인 최옥경 여사의 유택에 이장하여 묘비에 이름을 새겨져 있지 않다 우측 능선 삼형제 바위와 계곡의 은사시나무와 왕버들나무의 연리지가 세 번이 굳게 만나 독립운동 뒤끝의 안타까운 현실을 위로하고 있는 듯 싶어 참배하며 눈여겨 되새긴다

이영민(李榮敏, 1905~1954) 체육인 야구인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부동의 1위 7살 때 이혼으로 상처받아 아버지를 증오하여 삐뚤어진 셋째 아들 불량배 친구들 불러들여 귀중 물건 훔치려 필운동 자택에 들어와 다투다 권총 오발로 만능 스포츠맨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만해(萬海) 한용운(한용운(韓龍雲, 1897~1944)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출가 전 결혼 아들 보국 친일에 월북 노년 병 간호 유(兪)여사 묘지 오른쪽에 함께 했다.

소파(小派)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어린이 어린이동무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선생의 셋째 딸 용화와 결혼 33살 땅딸보 단 음식 좋아해 당뇨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 연인 줄리아 S 신준려 망우리공원 소파 쑥돌 묘비 맴돌았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1947), 난석(蘭石) 박은혜(朴恩惠, 1904~1963) 난석 박은혜는 설산 장덕수의 두 번째 아내이고 경기여중고의 교장이었다 박은혜는 그 용모와 체격은 미스코리아 경연대회도 나가면 진이 될 만한 얼굴과 몸매를 지닌 여성이었다
콜롬비아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김활란은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덕수를 박은혜에게 소개하였다. 장덕수의 청혼을 거절한 뒤였다.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 1912~1950) 화가 1998년 2월 《월간미술》 미술평론가들의 투표
‘근대유화베스트10’ 선정에 <경주의 산곡에서>와 <가을 어느 날> 각각 공동 1위와 7위를 차지하고
대향 이중섭의 <흰 소>가 단독 2위였다
대구 유지들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 중 만난 대구 의사 집안의 딸 김옥순과 결혼하고
병으로 죽자 음주벽 서울로 올라와 두 번 더 결혼하여
통행금지 시비로 북아현동 자택에서 초짜순경 권총 오발로 천재의 예술혼을 접었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 입업시험소 고원 및 기사 민예연구가
1916년 2월 미쓰에[みつえ]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으나 부인 미쓰에는 1921년 9월 폐렴에 걸려 사망하였다. 1923년 10월 사쿠[咲]와 재혼하여 이듬해 딸을 낳았으나 바로 죽었다.
1931년 2월부터 3월까지 식목 행사 준비를 앞두고 조선 각지를 돌며 양묘에 관한 강연 때문에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렴에 걸려 죽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경성에서 살던 아내와 딸은 대한민국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산과 문화를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언대로 한국에 묻혔다. 그래서 아사카와 다쿠미의 이름 앞에는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다. 또한 아사카와 다쿠미는 저서인 『조선의 소반』 서문에서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기보다 지니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는 충고를 하였다. 2023년 관동대지진 100년이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기에 조선인은 유언비어와 같은 행동을 할 민족성이 아니고 자기가 동경에 있다면 변호사를 대 구조하겠다며 다음 날은 홍릉수목원 상사한테 불러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남과 북의 체재를 경험한 「실비명」의 소설가, 작가로 데뷔 전 3년 동안 공부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였는 아내 박순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