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월간 수필 잡지 《박문》 편집 겸 발행인, 동요 <오빠 생각>의 ‘오빠’
영주(永柱) 최신복(崔信福, 1906.3.13.~1945.1.12.)
망우역사문화공원 순환로인 사색의 길 일방통행 조봉암과 한용운 묘소를 거쳐서 400m 걸어가면 오른쪽에 자리한 오세창과 문일평 연보비를 지난다. KBS2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2016년 8월 22일부터 10월 18일까지 18부작으로 방영되었다. 그 드라마 속 명은공주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순조의 첫째 공주인 명온공주와 부마인 김현근 묘소 안내 대리석 표지석이 사색의 길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 표지석을 지나서 30m 정도 걸으면 흰색 페인트로 3Km 지점이라고 사색의 길 위에 써 있다. 그 바로 왼쪽에 소파 방정환 묘소 안내 표지석이 서 있다. 소파 방정환 묘소 오르는 계단 왼쪽에 최신복의 가족 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명온공주와 김현근 표지석부터 방정환 묘소 오르는 입구까지가 최신복 가족묘지 축대이다.
최신복 묘비 앞면에는 '泳柱 忠州 崔信福 延安 車元順 之墓', 그 아래에는 최신복이 지은 동시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누구가 부는지 꺾지를 말아요 / 마디가 구슬픈 호드기오니 / 호드기 소리를 들을 적마다 / 내 엄마 생각에 더 섧습니다” ‘-최신복작-’
묘비 뒷면에는 '崔信福 선생은 1906년 京畿道 水原에서 나시어 華城少年會를 조직하여 少年運動에 힘쓰시고 1929년에는 開闢社에서 小波 方定煥 선생을 도와 잡지 <어린이> <學生> <소년> 등의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여러 잡지에 어린이를 위한 많은 글을 쓰시어 아동문학에 기여하시다.'라고 최신복의 생애와 주요활동 내용을 새겼다. 그의 묘지번호는 203704이다.
아동문학가 최신복은 수원에서 상당한 토지 소유자로 큰 과수원 농사를 지은 아버지 최경우와 어머니 마정심 사이의 1남 5녀 중 장남으로 1906년 3월 13일 태어나 1945년 1월 12일 폐결핵으로 선종했다. 딸 다섯(최신애·최중생·최순애·최영애·최경애) 중 귀가 아파 진학을 못한 셋째딸 순애를 제외하고는 당시 진명·배화여고 등 서울에 유학시킬 정도로 열리고 깨인 인생관으로 자녀들에게 신식교육을 가르친 아버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특히 방정환 선생을 존경하여 자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잡지 《어린이》를 자식들에게 구독시켜 아들 최신복과 딸 최순애와 최영애가 잡지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는 등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최신복이 방정환 선생과 교류하며 어린이 운동을 하는데 적극 지원했다. 노후에는 친손녀인 최은숙 최혜숙 등도 교회의 유치원에 직접 등하교시킬 정도로 교육에 힘을 쏟았다. 어머니 마정심은 조실부모하고 외국 선교사 집에서 성장하였다. 평생 독실한 신자로 살면서 남편과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심고 영향을 주었다. 최신복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집안 식구 모두 소파 방정환을 열렬히 지지하고 정신을 따랐다. 최신복의 본관은 충주, 영주는 그의 필명이다. 최신복은 1918년에 입학한 배재고를 1922년 졸업 후 일본 니혼대학 유학 중에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참상을 경험하고 귀국하여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교사와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올해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다. 한일 관련 단체들이 활발하게 행사를 치르고 영상 작업을 통해 진상 규명과 사과를 요구할 예정이나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일 것이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 혼란에서 우리 민족이 무고하게 제노사이드 당한 참상을 경험하고 한국인들은 대부분 귀국했다. 일본의 경찰과 군인 및 자경단의 제노사이드로 인해, 한국인들의 분노를 수습하기 위해 관동대지진 이후 2년 동안 유학생과 한국인을 전면 일본 입국을 통제하였다. 특히 자경단의 주축은 동학혁명 당시 군인으로 조선에 들어와 동학군은 독립군이 되기 때문에 무조건 없애야 된다며 학살한 퇴역군인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니 무고한 조선인을 거침없이 죽였다. 당시 동경 유학생 400여 명은 대부분 희생당하지 않았다. 하층민인 노동자들은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조선인 희생자는 임시정부가 간행하는 독립신문 집계 6661명이다. 그러나 많게는 2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일본 작가들은 이 제노사이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 학살에 항의하고 피해자 조선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작가는 한 명도 없었다. 가령 국가에 대한 사랑보다 개성의 실현을 지향한 ‘백화파白樺派’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백화파’작가들 중에서 사회적 관심이 가장 많아서 톨스토이를 존경하고 대지주인 조상이 물려준 토지의 소유권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한 아리시마 다케오(有島 武郞, 1878~1923)도 조선인 학살사건에는 침묵했다. 이 인도주의자도 그 정도로 조선인을 낮잡아 봤다. 따라서 그들 일본작가는 조선인 학살자들의 공범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 사건과 관련하여 조금도 죄의식이 없었다. 일본인 중 일부 뜻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지금도 변함없이 관심 밖의 일이다.
반면 한국 작가들은 재일한국인들을 직접적으로 업신여기는 차별을 당한 그 민족적 사건에 대하여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관동대지진’을 체험한 작가와 비체험 작가로 구분될 수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지식인들은 대부분 민족적 참상을 일제 검열로 인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나마 'B생'이란 필명으로 발표된 「추도가」(개벽, 1924.2)·파인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 「승천하는 청춘」(신문학사, 1925.12)·이기영의 소설 「고난을 뚫고」(동아일보, 1928)·유진오의 소설 「귀향」(별곤건, 1930) 등에서 실제 목격한 도쿄 현장 참혹한 상황을 다루었다. 당시 일제 감시와 탄압 때문에, 이를테면 관동대지진 문학으로 꼽을 만한 작품 수효가 많지 않다. 그래도 다수를 점한 것이 시 갈래이다. 이상화 「독백」·‘흰달’이라는 필명의 김소월 「車와 船」은 대화체 발화법을 채택함으로써 그 파멸적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적인 경지를 보였다. 이기영은 이후 대하소설 「두만강」에서 관동대지진을 소환하여 '동경대진재'라는 제목을 달아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증언하고 있다. 박경리의 「토지」·조정래의 「아리랑」에서도 관동대지진 관련 내용과 인물이 등장한다.
일본 유학 중에 그 대지진을 만나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귀국한 유학생 중 시인들이 많았다. 김소월·이상화·양주동·김영랑·박용철·이장희·이육사·유엽·유치환 등이었다. 김소월의 시 「초혼」(『진달래꽃』, 1925)은 세속적인 남녀 관계와 우리 민족의 전통 장례 절차인 고복 의식을 설정하여 일제의 검열을 피하며 용의주도하게 민족의식을 표출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 당하는 경험을 한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소월은 관동대지진 이후 1924~25년 사이에 「밭고랑 위에서」·「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을 대일 땅이 있었다면」·「나무리벌 노래」·「옷과 밥과 자유」 등 이전과 다른 식민지로 일제에 지배를 당하는 민족의식을 노래했다. 이상화는 1923년 9월 《백조》에 시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다.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겪고 귀국하여 시 세계가 극적으로 변화하여 1925년 11월 수필 「방백」을 발표하고, 1926년에 발표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도 반체제적 저항시로 유명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그 시인이 ‘관동대지진’의 체험자인 것을 모르고 있다. 이상화는 ‘관동대지진’ 때 절감한 민족적 울분을 그 시에 드러낸 것이다. 이후에도 「진재의 추억」·「도쿄에서」·「통곡」 등을 발표했다.
‘관동대지진’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지만, 그 사건과 관련하여 저항적인 작품을 쓴 작가는 염상섭과 이상과 설정식 등이다. 염상섭은 단편소설 「숙박기」(신민, 1928)에서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더 심해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언급했다. 주인공인 젊은 조선인 유학생이 일본 동경에서 하숙집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이유가 그 민족차별에 있었다는 것이다. 무고한 조선인을 대량 학살하고서도 설상가상으로 잔인하게 민족차별을 하는 일본 민족은 과연 문명국가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사건을 가장 신랄하게 항의한 작가는 이상이었다. 그는 수필 「동경」(1936)에서 이렇게 썼다. “에드벌룬이 착륙한 뒤의 은좌 하늘에는 신의 사려에 의하여 별도 반짝이련만, 이미 이 ‘카인의 말예’는 별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밤하늘의 ‘별’은 ‘신’의 배려를 받아야만 뜨는데,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중심지가 ‘동경’이기 때문에 그곳의 밤하늘에는 ‘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은 그 학살자들을 죄 없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손으로 비유했다. 이상에게 ‘동경’은 대학살 도시였다. 설정식의 시 「진혼곡」(『제신의 분노』, 1948) 등이 있다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이는 태평양전쟁의 피해자인 성 노예로서의 한국 여성들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과 그 맥락이 똑같다. 이렇게 볼 때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대량 학살사건은 결코 잊어버리고 싶거나 잊어도 좋은 과거사가 아니라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오늘의 문제이다. 현재까지 일본 정부는 진상을 밝히거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진상 공개를 요청한 적도 없다. 재일한국인들이 제일 겁나는 게 지금도 그와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100년 전과 똑같은 제노사이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는 현실이다.
관동대지진 이후 국내로 들어온 유명 문인과 인물은 김소월·이상화·김동환·이장희·유엽·김영랑·박용철·이육사·양주동·이기영·채만식·한설야·최신복·함석헌·조봉암·송석하·오기선·최승만·유상규·유치진·유치환·유치상·김소운·윤극영·장형두·안창남·변희용·한승인·허남기·박사직 등이다.
김소월은 지진 이후 한 달 동안 연락이 두절 되어 가족들이 죽었다고 포기했다. 시인 구상의 맏형님도 도쿄 유학 중 지진 이후 행방불명 됐다. 윤동주 시인 아버지도 당시 참상을 목격하고 명동촌에 무사하다는 전보를 보내고 급히 귀국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한승인은 지진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피난을 떠났다. 피난길에서 한승인은 이 지진의 여파로 재일조선인 7천여 명이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승인은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을 1923년 9월 7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마침 이 기사를 읽었던 인촌 김성수는 한승인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미국으로 유학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1973년 《기러기》 10월~11호에 “일본 관동대지진 조난기”를 그때 일을 회고하면서 연속 기고하였고 후일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동경이 불탈 때』(대성문화사, 1973)를 출간하였다.
1923년 9월 1일 대진재를 겪고난 뒤 1924년에 경시청(警視廳)에 편입된 요시찰 대상 학생과 졸업생 등 주요 인물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 갑호 최승만·박사직·오기선, 경북 갑호 변희용·박열·이여성, 경남 갑호 박순천, 을호 김약수, 황해 을호 지정신, 평남 갑호 황신덕, 함남 갑호 한위건 등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중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 참상을 직접 경험한 분은 아동문학가 영주 최신복 외에 박물관 분야 선구자 석남 송석하, 사회주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 남도 정서의 시문학파 항일 저항시를 쓴 독립운동가 김영랑, 오사카에서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일본 노동환경을 체험한 뒤 경성의전 강사로 대중 의료보건에 힘쓴 태허 유상규, 조선 유일무이한 식물분류학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로 밀수 관련 검거된 이종 조카로 인해 좌익사범으로 몰려 고문사 당한 장형두 등이다. 당시 동경 한인 교회 목사인 오기선 목사는 목숨 건 구조와 후원 활동을 하였다. 또한 릿쿄대학 유학생이던 월파 김상용 시인은 시조 형식과 죽음과 허무 의식 등을 노래했다.
그리고 소파 방정환은 천도교 대표로 도쿄 참상에 대한 조사요원과 후원금을 전달하였다. 계용묵은 소설 「인두지두」에 동경의 참상을 배경으로 구성했다.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인 춘사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며 함흥 예림회 회원들과 함께하며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그 예림회 회원들이 주로 관동대지진을 피해 국내로 귀국한 유학생들이었다. 친한 인사 원류인 아사카와 다쿠미는 1923년 9월 10일 일기에 조선 민족은 유언비어와 같은 행동을 할 민족성이 아니고 만약 자기가 일본에 있다면 변호사를 대 구조하겠다고 하면서, 다음날 임업시험장 상사에게 불려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를 당했다고 썼다. 청량리 임업시험장 관사에서 아사카와 다쿠미는 오상순·염상섭·번영로 등과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을 위하여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내 야나기 가네코의 음악회 준비를 협의하여 1924년 4월 3일 경성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그 수익금은 1923년 9월 1일의 관동대지진으로 무너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재건을 위해 기부됐다.
재일한국인 다큐 제작 오충공 감독은 1983년 조선인 입장에서 관동대지진의 참상을 고발하는 <감춰진 손톱자국>, 1986년 일본인 입장에서 관동대지진 참상을 얘기하는 <불하된 조선인>, 2023년 100년인 관동대지진을 유족들의 입장에서 잊혀진 현실을 말하는 <1923년 제노사이드 93-93년간의 침묵>을 8년 동안 제작하고 있다. 2023년 9월 1일 100년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 즈음에 상영할 예정으로 막바지 작업 중이다.
이기붕·염상섭·엄항섭 등과 보성소학교(교장 최린) 6학년 같은 반이었고 전시 제주도 지사와 인하대학 제2대 학장을 역임한 극웅(極熊) 최승만(1897~1983)의 유고 저서인 『나의 회고록』(인하대학교 출판부, 1985)에서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 당시 동경 YMCA 총무로서 동경 연합교회 오기선 목사와 천도교 책임자인 박사직 등과 목숨 건 구조와 후원 그리고 관동대지진에 대한 과정과 참상을 비교적 자세히 밝혔다. 최승만 총무가 1934년 귀국 전까지 매년 9월 1일이 되면 유학생과 더불어 추도식을 치렀다. 대한민국에서 1923년 이후 잠시 추도식을 개최했다가 조선총독부가 엄금하여 그만두고 말았다.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이후에 누구도 관심을 가지 않고 있다 1982년 59년 만에야 추도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1982년 9월 1일 강석천(82) 옹은 관동대지진 59년을 맞아 서울 종로2가 YMCA 강당에서 열린 그 당시 희생된 한인위령제추모 강연회에 연사로 나왔다가 졸도 사망하였다.
1985년 극작가 김의겸과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 등이 주선하여 일본 지바현 나라시노 수용소 가까운 관음사의 주지 스님이 부지를 내주어 보화종루 위령의 종 즉 추모 제각을 세웠다. 지금까지 일본에 한국인들이 관동대지진 관련하여 세운 유일한 추모 시설이다.
“국문학계 김소월·이육사 詩 해설 문제 많다”고 주장한 고영자 평론집 『바로잡는 국문학』(탱자 刊, 2004)에서 김소월의 시 「초혼」은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들의 넋을 보고 그들의 혼을 불러내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당시 소월은 일본에 체류해 2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고, 서둘러 귀국한 후 「초혼」을 창작했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도 관동대지진 참상을 목격한 민족애의 표출이다고 주장했다.
지상에 발표된 유상규의 글과 후손이 보관 중이던 미발표 원고 일부를 묶은 도산 안창호의 길을 간 외과의사 『태허 유상규』(유옹섭·유송민·유영삼, 2011.8. 더북수)가 출간되었다. 1926년 5월 《동광》 창간호부터 1926년 12월 8호까지 7회에 걸쳐 연재한 「방랑의 일편」은 ‘특이한 결심을 하고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 오사카로 노동 생활을 체험하던 작자의 회상기’라는 글이다. 이 연재물은 유상규가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겪은 일과 관동대지진에 대해 적은 수기 형식의 글로, 당시 일본에 건너간 조선 노동자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 2017)의 주인공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부부 독립운동가로 관동대지진 참상을 고발하고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2017년 8월 30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희생자 유족회 발족식과 기자회견이 부산항 제4부두 ‘수미르공원’과 ‘강제동원역사관’에서 오충공 감독이 주도하여 처음으로 열렸다. 또한, 2018년 10월 진관사 국행수륙재를 치르며 주지 계호 스님과 총무스님 법해 스님의 관심과 배려로 오충공 감독에게서 필자가 넘겨받은 새로 이름이 밝혀진 일본 동경 군마현 후지오카(藤岡)경찰서에서 제노사이드 조선인 희생자 18분의 위패를 모셨다.
2019년 4월 21일 KBS <역사저널 그날> 218회에서 다룬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서 자료로 제공된 관동대지진 제노사이드를 다룬 오충공 감독이 제작한 영상을 보고 제작진들이 녹화하면서 울음을 터트려 잠시 중단되었다는 후문이다.
2022년 작 Apple TV+ 드라마 파친코에서는 7화에서 관동대지진과 함께 묘사가 되는데, 집에 숨어든 조선인을 발견해 그 집과 함께 불을 질러버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2022년 5월 도봉문화원에서 개최한 ‘관동대지진 한국인학살 100년 맞이’ 세미나 후 발족한 ‘관동 조선인 학살 100년 일본 현지 위령의 종루 보수 및 추모문화제 추친위원회’가 결성되었다. 2022년 11월 14일 일본 지바현 ‘관음사 보화종루’ 보수작업 후원 성금 모금에 준비 모임으로 관음사에서 한국 모금단체와 일본 현지 후원단체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였다.
오충공 감독은 세계 유일 최초로 관동대지진 관련 다큐를 제작하여 국내외 언론과 영화 관계자 및 뜻 있는 분들의 관심과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각종 영화제에 초청·상영과 수상을 하였다. 2023년 3월 10일 명동성당 내 꼬스트홀에서 시상하는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자로 2022년 12월 세밑에 오충공 감독이 결정되었다.
최영주는 고향 수원에서 <화성소년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어린이 문화운동·천도교청년동맹·신간회 등에 참여하였다. 아버지와 이미 소통이 있었던 소파와 인연을 맺었다. 해마다 소파를 초대하여 동화구연회를 열었다. “동화회에서 소파의 얘기를 들은 순사도 울었다”는 일화도 1931년 8월호 《어린이》 잡지에 「순검과 소파」라는 제목으로 최신복이 밝혔다.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로 일하던 최신복은 편집의 귀재로 인정받아 소파의 부름을 받고 1927년 1월 ‘개벽사’에 들어가 잡지 《어린이》·《학생》·《소년》 등 편집기자로 활동하며 세계 명작 동화를 번역 연재하는 등 소파 방정환을 도왔다. 동화 「석류나무」·「조선 제일 큰 강」 등 어린이를 위한 글을 많이 썼다. 최신복 인생에서 큰 인연인 소파 방정환·윤석중 등과 '색동회'의 동인으로 활동을 펼쳐나갔다. 방정환 선생을 돕기 위해 너무 전력을 다해 활동을 한 결과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1931년 방정환 선생 사망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개벽사’를 퇴사하고 잡지 편집에서 잠시 물러났다. 정순철과 함께 경성보육학교 육성을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어린이》 잡지 발간 10주년 회고에서 최신복은 소파를 그리며 이렇게 썼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무척 가슴을 괴롭게까지 하며 생각키우는 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탄생시킨 산파였고 길러준 어머니였고 또 ‘어린이’ 대장이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생각입니다. 한 몸의 괴로움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직 뜨거운 열성과 끈기를 가지고 반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어린이’의 성장에 힘을 써주시었습니다.”
소파의 유골은 5년 동안 홍제원 화장장 납골당에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최신복은 윤석중·정순철·마해송·이정호 등과 뜻을 모아 1936년 5월 ‘소파방정환기념비건립모금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월간 《중앙》에 모금 광고를 내고 여러 사람들의 뜻을 모아 망우리공동묘지에 소파의 묘지를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위창 오세창이 묘비 앞면에 ‘童心如仙’ ‘어린이의 벗’ ‘小波 方定煥’, 묘비 뒷면에 ‘동무들이’라고 한글로 새겼다.
1938년 5월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스카우트 되어 잡지 《여성》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38년 10월 1일 창간된 《박문博文》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 월간지로 경성 ‘박문서관’에서 발행했다. 편집 겸 발행인 최신복으로 국판(A5) 32면~50면 내외로 발간되었다. 1941년 1월 1일 통권 23호로 종간되기까지 당시 유명 문인을 비롯하여 학자·의사·화가·음악가·종교인 등이 대거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최신복은 그 외에도 《중앙》·《신시대》·《여성》 등의 잡지에서 편집 업무를 담당했다. 1940년 10여 년간의 서울 하숙 생활을 접고 서울 필운동(현재 사직공원 부근)으로 가족 모두 이사를 하였다.
또한, 소파의 10주기를 기하여 1940년 5월 1일에는 ‘박문서관’에서 마해송과 함께 편집한 『소파전집』을 500부 한정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최신복은 소파 방정환 기념사업과 소파의 유지를 잇는 일로 분주하게 보내다 젊은 나이에 과로와 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유언은 '존경하는 선배 소파의 밑에 묻어 달라'는 것. 소파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최신복은 열렬한 소파 숭배자였던 자신의 부친이 1937년 타계하자 소파를 더 자주 찾아보고 싶다며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부친의 묘소(묘지 번호, 203741)를 소파 묘역 우측 아래쪽에, 1942년에는 모친(묘지 번호, 203755)을 다시 그 옆에 모셨다. 또 자신의 갓난아기가 죽었을 때도 그 옆에 묻었다. 1945년 1월 12일 폐결핵으로 38세로 세상 떠난 자기 자신도 유언에 따라 망우리에 묻혔다. 그래서 최영주 집안 3대는 소파를 죽어서도 받들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가 죽은 후 11년 뒤 부인 차원순(1907~1956)도 그의 옆자리로 안장했다. 영주 최신복은 아동문학가, 동요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문학작품이 재조명받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상당수의 작품이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부인 차원순이 6·25 피난길에 작고한 최신복의 각종 원고 및 자료, 사진 등이 들어있는 보따리 짐을 분실하여 전해지는 작품이 적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작품이 적기 때문이다.
최신복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점점 정상적 활동이 어려웠으나 1941년 1월 ‘박문서관’ 노형석 사장 노형욱 부사장이 잡지 《박문》의 간행을 빌미로 강요하여 《신시대》 주간을 맡았으나 불과 한두 달 만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활동을 중단하고 필운동 집에서 몸져누워 요양을 시작하여 그 기간이 길어졌다. 가세가 기울어 필운동의 작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하여 요양하다 결국 1945년 1월 12일 사망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다.
동요 <오빠 생각>의 최순애와 〈꼬부랑 할머니〉의 최영애는 최신복의 여동생으로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음악과 문학을 충분히 즐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가정 문화가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어린이》 1925년 4월호에 <꼬부랑 할머니>가 10살 때인 입선작으로 뽑힌 최영애는 배화여고와 이화여대 성악가 출신으로 음악 교사를 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막내딸인 최경애는 별명이 꼬마인데 배화여고 시절 높이뛰기 선수로 일본에서 열린 시합에도 출전하였다.
소파 방정환이 1923년 펴낸 《어린이》 잡지에 마산에 살던 16살 소년 이원수(1911~1981)는 이 잡지 1926년 4월호에 〈고향의 봄〉을 투고하여 입선했다. 이 동시가 그의 첫 작품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동요다. 훗날 홍난파 선생이 곡을 붙여 널리 알려졌다. <고향의 봄> 노래비는 수원시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팔달산 중턱에 세워졌다. 그 동요 속 ‘꽃대궐’은 망우역사문화공원 13도창의군탑을 제작한 김영중 조각가의 창원시 소답동 근대문화유산 200호로 지정된 고택이라고 이원수가 밝혔다. 창원시에서는 ‘이원수문학관’을 운영하고 고택 앞길을 ‘이원수길’이라 부른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혀있는 극작가 이광래의 형이자 동요 <산토끼>를 작사 작곡하였으며 이원수의 은사셨던 이일래(1903~1979) 선생이 이원수가 《어린이》 잡지에 응모할 때 이일래 선생이 제목을 <고향>으로 고쳤다가 나중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로잡았다. 또 홍난파 선생이 작곡하기 전에 이일래 선생이 먼저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게재하여 마산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인기가 많았다. 노랫말 중 ‘아기 진달래’라는 표현은 원래 ‘아기 진달래’라는 표현을 이원수가 안 썼는데 동요 심사를 하면서 마해송 선생이 그렇게 고쳤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한 해 전인 1925년 《어린이》 11월호에 최순애(1914~1998)의 〈오빠 생각〉이 입선됐다. 최순애가 이 <오빠 생각>을 짓기는 오빠인 최신복이 일본 유학과 관동대지진 참상을 목격하고 국내로 귀국한 뒤 어머니가 강력하게 일본 재유학을 막았고, 일경의 감시를 피해서 서울에 주로 머문 시절이었다고 알려졌다. 1929년 홍난파가 작곡하였으나 나중에 1930년 박태준이 곡을 붙여 유명해졌다. 이원수는 〈오빠 생각〉이란 동시가 마음에 들었다.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핑계로 최순애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내 답장이 왔다. 7~8년 동안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혼인할 뜻을 키웠다.
1935년 어느 날 이원수는 최순애가 사는 수원으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끊었지만 어이없게도 만나기로 한 그날 일제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이원수가 함안금융조합 본점 서기로 ‘함안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됐다는 소식이 최순애 집에 전해지자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이원수를 처음 만나는 날 최순애는 숄을 두르고 윗옷에 꽃을 달았다. 서로 금방 알아보기 위한 표시였다. 그런데 이원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원수는 1935년 4월부터 1936년 1월까지 10개월의 수감생활(집행유예 5년)을 치르고 난 뒤에야 최순애를 만나볼 수 있었다.
이원수와 최순애의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최신복은 이원수라는 문학 소년의 재주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집안의 반대를 설득했다. 1936년 여동생인 최순애와 결혼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원래 최순애는 <오빠 생각>에서 처음엔 ‘비단 구두’ 대신 ‘비단 댕기’로 썼다. 오빠인 최신복이 나중 ‘비단 구두’로 고쳤다고 알려졌다. 1970년 답십리에서 이사 온 남현동 예술인 마을에 담장 사이 이웃에 사는 시인 서정주가 동요의 첫 구절을 따 붙여준 애칭 ‘뜸부기 집’·‘뜸부기 할머니’가 그대로 최순애의 별명으로 불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원수도 등재되어 있다.
최신복은 수원의 이름 있는 집안 출신으로 숙명여교를 졸업한 차원순과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다. 5남매 중 넷째인 장남 최인화는 배재고와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말년에 대전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다 작고했다. 장손은 대전에서 회사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큰딸인 최은숙(96)은 서울에서 덕성여고를 다니며 외국인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로, 1945년 1월 아버지 최신복이 사망하자마자 1962년 남매 중 마지막 결혼하기까지 미국계 회사에 근무하며 동생들의 학비와 결혼까지 책임을 맡았다. 첫째 사위는 무역업을 하였다. 그 아래 사위 셋은 해군사관학교 동문으로 군 생활을 하였다. 막내 사위는 포니1 신화로 현대자동차 대표 이사를 역임했다. 큰딸 최은숙은 아들인 이승호와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무역업을 하던 이승호는 어머니를 돌보며 외할아버지인 최신복 아동문학가의 가족 묘지를 돌보고 있다.
최신복 가족 묘역은 산딸기와 잡목 등 수풀이 우거져 안타까운 모습이다. 한철수 시인이 벌초를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중랑구청 ‘영원한 기억 봉사단’과 망우리공원과 긴급출동반에서 묘역 전체를 관리하여 그나마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2020년 방정환 묘역을 단장하며 색동회와 어린이 단체 회원들의 추억이 서린 소품이 사라졌다. 오로지 최신복 묘비 앞에 누군가에 의해 옮겨놓은 유리관 안 백합꽃 조화만 남았다. 아사카와 다쿠미와 대향 이중섭 묘역을 정비하며 사연 있는 나무들도 한 그루 남지 않았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을 거닐며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곳에 묻혔거나 관련 맺은 방정환·안석영·안병원·김말봉·함이영·최신복·최영애·최순애·강소천 등이 작사 작곡한 동요와 한용운·김동명·김상용·김영랑·박인환 등의 시를 외우고 작곡가 금수현·채동선의 가곡만 흥얼거리며 답사하여도 사색의 길 한 바퀴를 돌고도 남는다.
최신복 최신애 최경우 묘 앞에서 뒤편은 방정환 선생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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