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송촌 지석영

정종배 2023. 2. 1. 13:03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송촌 지석영

한국에 처음 종두법 도입·실시 근대 의술과 한글 연구와 활용의 선구자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1855∼1935.2.1.) 88주기

흑토끼 해 정월 지나 2월 첫날입니다. 2월이 짧은 이유는 오는 3월 삼짇날 제비가 물고 오는 박 씨를 땅에 심는 봄이 얼른 오라는 조물주의 배려가 아닐까요?
철들라면 아직 먼 또랑시인 긴 글 자료로 읽어 주시길 빕니다.
하시는 일마다 다 이루시길 손모아 절합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서양의학의 선구자인 송촌 지석영 선생의 걸어온 길 중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젠너’ 1879년 최초 ‘종두법’ 실시 1885년 최초 우두 교습서인 ‘우두신설’ 발간,
한국 특허 원년 1882년 지석영 상소 ‘기계발명자에 전매특허권 등 건의,
서양의학 처음 도입 갑오경장 전 전주·대구·공주 등에 ’우두국‘을 두어 종두를 접종하기 시작한 것이 효시이다.
1887년 ’조선판 문민 개혁‘ 11개항 개화 친필 상소,
최초 ‘관립 의학교’ 교장 역임,
최초 한자전(옥편)인 ‘자전석요’ 발간,
부산 법관 1호 역임,
1906년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907년 조선어사전의 맹아인 ‘언문’ 간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세종대왕·이순신·장영실·정약용·지석영·우장춘·공병우 등 한국의 위대한 창조인(발명인) 선정 특허청 명예의 전당 헌액하고, 1993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송촌 지석영 의학상 제정하여 수상하고 있다.


1월 30일 드디어 실내마스크 착용 의무가 부분 해제된 가운데 방역 당국은 2단계 전면 해제 시기를 언급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2월 1일 입장을 밝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감염병은 무엇일까? 중세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 1차 세계대전보다 치명적이었던 ‘스페인 독감’ 하지만, 두 감염병 모두 ‘두창’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오죽했으면 우리 조상들은 ‘마마’라는 극존칭어를 붙이고 ‘배송굿’까지 했을까.

1876년 일본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박영선이 동행하였는데 이때 박영선은 일본에서 시행중인 종두법을 접하게 되었고 서양의학의 우두를 통해 종두법을 소개한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가져와서 제자에게 소개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지석영이다.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 소속의 현대식 병원인 제생의원에서 해군 군의관인 마쓰마에와 도쓰카에게 종두법을 배웠다.
부산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서울로 가는 길에 충주(당시 제원군 덕산면)에 있는 처가에 들러 어린 처남에게 처음 종두법을 실시하였다.

‘마마신’께서 일단 들어오시면(=천연두에 걸리면) 그저 굽신굽신 비위 맞춰서 곱게 나가시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마마신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환자가 있는 집안은 제사도 못 지냈다고 한다. 마마신님께서는 질투가 많아 자기 말고 다른 귀신 들어오는 걸 매우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천연두의 주치료 방법은 무당의 굿이었다.

또랑시인 고향에도 어릴 적 ‘초분’을 쓴 장례식을 딱 한 번 봤다. 집성촌 집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마침 동네 홍역이 돌고 있었다. 어르신들 말씀이 홍역이 돌 때 묘를 쓰면 홍역에 걸린 아이한테 동티가 난다며 동네 앞 일제가 만든 공동묘지 옆에 초분으로 2년 계시다가 이장하여 묘지를 써 모셨다.

지석영이 종두장을 설립하였을 때 전국각지에서 무당들이 몰려와 밥줄 끊긴다고 데모를 하였다.1979년 WHO(세계보건기구)는 천연두 박멸을 선언하였다.

신정국문과 같은 국어 개혁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국문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정약용이 편찬한 아학편에 영어를 추가했다.공을 인정받은 지석영은 188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정사품 벼슬)까지 올랐다. 그러나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국가의 각 분야 실정을 지적하다 조정의 미움을 받아 5년간 전라도 강진 신지도(현재 완도)로 유배됐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우두법 보급에 힘썼을 뿐 아니라, 지적인 도약을 이루어냈다. 1891년 서양의학에 의거한 위생학서이자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을 한글로 간행한 것이다.지석영은 1898년 의학교 설립을 청원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가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의학교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지석영은 1899년 3월 28일부터 일제가 의학교를 대한의원으로 통폐합한 1907년 3월 15일까지 8년 동안 교장으로서 의학교를 이끌며, 36명의 근대식 의사를 배출했다.의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글 보급에 보다 힘을 기울였다. 1908년 2월에는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09년에는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여 한자의 해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
1914년 지금의 종로구 재동에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진료소를 차려 보영산保嬰散, 영효산靈效散 등 선생의 비방인 소아약을 만들며 80년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의 종손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치의를 맡았던 지홍창 박사(1981년 작고) 포함하여 5대 의사 집안으로 보건보국保健報國을 실천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재조명받은 ‘진령군’ 관련해서 그 운명에 쐐기를 꽂는 상소문을 올렸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야 한다는 등 살면서 가장 격렬한 수위의 단어들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립의학교(일제 강점기 때는 경성의전, 해방 이후 서울대 의대) 초대 교장이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외 활동이 거의 없이 진료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논란이 불거진 상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3년 전인 1906년에는 민영환의 추도사를 읽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읽고 불과 15일 뒤에는 이재명 의사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2021년 7월 전국 최초로 기초자치단체 시군구에서 공원관리 담담 과인 망우리공원과(초대과장 신은실)를 개설한, 류경기 중랑구청장이 2021년 1월 4일 오전 7시 30분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계신 송촌 지석영 선생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2021년 신축년 새해를 시작했다. 류경기 구청장 참배는 종두법을 국내에 보급해 천연두 퇴치를 위해 헌신한 지석영 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코로나19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행보였다.

서울 중랑구 상봉역 뒤 한신아파트 땅은 1954년에 설립된 ‘한독약품’ 공장이었다. 그곳에 1964년 회사 창립 10주년을 맞아 설립된 ‘한독 의약박물관’이 있었다. 1993년 ‘과거와 현재의 가교 특수 미술·박물관을 찾아서 의술과 약학 발자취 한자리에’가 전시되었다. 보물급 서적 약재 등 7천여 점이 전시되었다.
전시된 유물 중에 지석영이 국문연구위원으로 임명된 이듬해인 1909년 간행한 ‘언문’은 일종의 낱말사전으로 가로로 인쇄한 국내 최초의 책자이다. 지석영이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와 1879년 처음 우두를 놓았을 때 사용했던 우두 기구와 사진 등을 전시했다.
중랑구에서는 강남구 역삼동에 소재한 ‘한독 의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석영 유품 400여 점을 박물관 측과 협의하여 ‘중랑망우공간’에 지석영 특별전을 기획하여 전시되길 빌어본다.

송촌 지석영은 조선 후기 문신이고 개화사상가이며 한글학자이다. 본관은 충주,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태원太原이다. 한의사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우부승지, 중추원 2등 의관 등을 지냈다. 송촌은 두창·마마·손님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에 관심을 갖고 처음으로 조선에 전파했다. 천연두는 사망률이 높을 뿐 아니라 생명을 구하더라도 곰보가 되는 경우가 많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후에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한글과 한국어에도 관심을 가져 초기 국문연구의 초석을 닦았고 우리말 문법 체계를 수립하는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편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저술로 『우두신설』·『자선석요』·『석자여의보록』 등의 책을 썼다. 대종교인이다.

지석영은 1885년(철종 6) 5월 15일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여 1935년 2월 1일 서울 낙원동 17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여 사회장으로 유덕을 추모했다. 1939년 12월 29일 망우리공원 망우산 주능선 동쪽 끝에 남동향으로 유택(묘지번호, 202541)을 마련했다. 송촌거사 지석영의 묘비는 1962년 8월 12일 세웠다. 한문으로 새긴 비문을 지은 이은 백낙운이고 글씨를 쓴 이는 윤희화이다.

지석영 가족묘지 묘역에는 잣나무와 노간주나무가 한 그루씩 잘 자라고 있다. 묘역 주변 잣나무, 노간주나무, 측백나무 등을 심는 이유는 해충이 나무 향기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게 심었다.
꽃샘추위가 오락가락 할 때 가족묘지 앞 산살구나무 한 그루가 망우역사문화공원 봄을 불러오는 여리꾼으로 향기를 멀리 터트리고 있습니다.

또한, 모양은 좋지 않으나 햇빛을 받으면 반짝인다. 돌멩이라고 하기엔 커다랗고 바위라고 하기엔 더 그런 크기로 지석영 묘지 앞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묘 주변에 바위가 있으면 일단 머리 좋은 후손이 태어나, 혈 자리면 좋은 일에 풍수 여러 조건에 맞지 않으면 사기꾼 등 나쁜 쪽에 일을 저지른다고 알려졌다. 바위는 강발강패强發强敗로 힘을 발휘할 때는 엄청나지만 힘을 다할 때는 후손이 급작스레 횡액을 당한다고 알려졌다. 묘 주변 바위는 우리나라 유명 정치인과 재벌 등 그 분야 최고 인물들의 선조 묘 중 발복한 묘지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이문호 교수의 『풍수』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교수는 약 8개월에 걸쳐 전국에 있는 후손이 번창한 집안, 높은 벼슬을 지낸 조상을 둔 가문부터 국내 재벌 기업의 창업자와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조상 묘소를 찾아다니며 지질조사 장비를 이용해 땅속 상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후손이 번창했거나 큰 부를 일군 인물의 조상, 특히 증조부모 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관을 묻는 지점 아래가 구덩이 형태로 움푹 꺼진 암석층이 있고, 그 구덩이는 풍화가 잘된 고운 흙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망우리공원에 몇몇 유명한 후손들의 조상 묘역에 가보면 혈 자리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문호 교수가 배출한 18명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2만여 묘지 통계를 낸, 용龍 – 혈穴– 수水 – 사砂 - 향向 순서대로 짚어보면 아! 그럴 수 있겠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묘역이 10여 곳 있다. 영의정 1명, 국무총리 3명, 의과대학 설립 및 대학병원 운영, 준재벌, 장·차관 등이다.

서울 종로구 중인 집안 관훈동에서 한의사였던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석영의 증손자를 포함 5대 의사 집안이다. 송촌의 장남인 춘우거사 지성주는 경성의전 내과 전공의로 1927〜8년 《동아일보》에 독자를 위한 의학 관련 기사를 실을 정도로 명의였다. 대통령 주치의가 공식적으로 임명된 것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다. 지홍창 의사는 낙원동 56번지 교동초등학교 앞 ‘지홍창 내과’라는 간판이 붙은 아담한 2층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초대 주치의는 정촌 손창환 제3대 보건사회부장관으로 망우본동 극락사 앞 능선에 유택이 있다 이장했다. 국내 1호 주치의는 송촌의 장손 지홍창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6·25한국전쟁 중 군의관일 때 김종필 씨와 인연으로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였다. 현손 지무영은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송파구에서 ‘지내과’를 개업하고 있다. 2017년 필자와 페친인 (재)정선의료재단 군립병원 최창순 원장이 연락하여 망우리공원 답사를 안내한 가톨릭의대 정형외과 출신 의사들이 지무영 원장과 그 집안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송촌은 개화 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의 밑에서 유길준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의 서양의학 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E. 제너(Jenner, E.)가 발견한 우두접종법(천연두 예방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우두법은 이미 실학자였던 천연두의 처방을 적은 책 『마과회통』의 저자인 정약용과 박제가에 의해 연구되기는 했지만 의학적으로 의미 있는 우두법을 실행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지석영은 우두법에 대한 이론뿐 아니라 실제 시술법을 배워서 이를 시행하고, 우두법을 소개하는 책을 저술하여 널리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1876년(고종 13) 김기수가 수신사로 일본에 가면서 수행원인 한의사 박영선이 도쿄 순천당의원 오다키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구가가 지은 『종두귀감』을 얻어 귀국하자 이를 전수받았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책이나 이론으로 종두법을 익혀 봤자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 거류민의 치료를 위해 일본인 병원인 제생의원이 개업해 있었다. 그해 10월 부산으로 내려가 제생의원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관인 도즈카로부터 종두법을 배웠다. 12월 하순 두묘(천연두 예방용 백신)와 종두침(천연두 예방 접종용 침)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처가인 충주 덕산면에 들러 먼저 두 살 된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하여 성공하자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했다. 이것이 조선 사람들에게 최초의 종두 실시였다. 선각자의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전형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진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서도 부산에서 얻어 온 종두를 실시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술하기 위해서는 두묘의 제조법을 배워야 했다. 1880년 5월, 지석영은 김홍집이 3차로 일본 수신사로 가게 되자 그 수행원으로 따라가 두묘의 제조법을 완전히 배워 왔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 이를 시술하면서 서양 의술의 기초를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그도 개화파의 일원이라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가 차려 놓은 종두장이 구식 군인들에 의해 불타고 말았다. 이때 그는 재빨리 피신했다가 상황이 안정되자 다시 상경해 우두 보급에 나섰다. 그의 선배인 박영교가 전라도 어사로 가면서 지석영을 불러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는 이어 공주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했다.

이러는 사이 개화파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27세가 되던 해인 1883년 문과에 급제해 지평 벼슬을 받고 어엿한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뒷날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1885년에는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 『우두신설』을 저술했다. 이것도 김홍집·이도재 같은 개화파의 도움이 컸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그를 지원한 인사들이 조정에서 내몰리고 김옥균·박영효 등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더불어 그의 신변도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연루 사실이 은폐되어 무사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형 백연白蓮 지운영은 명성황후 친정 아버지인 여흥부원군의 비문을 쓴 것이 인연이 되어 민씨의 사주를 받은 자객으로 김옥균을 죽이러 일본에 건너갔다. 그러나 지운영은 그 기밀이 들통이나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사진 기술에만 빠져 있다가 돌아왔다. 그는 고종 황제의 사진을 찍은 것으로 유명하다. 백연의 아들 지성채도 산수화 솜씨가 아버지 못지않은 2대 화백 집안이었다. 지석영은 낙원동에서 가회동 형님 집을 아침마다 인사를 드리러 갈 만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이때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져 있었다. 지석영은 임금에게 간언할 수 있는 장령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조세 등 국정의 잘못에 대해 신랄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크게 비위가 틀린 민씨 세도가들은 그를 갑신정변에 연루시켜 탄핵했다.

박영효가 흉한 음모를 꾸밀 적에 남몰래 간계를 도운 자가 지석영이었고, 박영효가 암행어사가 되었을 적에 모질게 하라고 가르쳐서 백성들에게 독을 끼친 자도 지석영이었다. 흉물스런 저 지석영은 우두기술을 가르친다고 핑계 대고 도당들을 끌어모았다.
- 《고종실록》 24권, 정해 4월조

이때 나라의 정세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 1894년 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고, 6월에는 일본 군대가 경복궁을 에워싸고 김홍집의 친일개화정권을 수립했다. 남달리 그를 아끼던 김홍집은 그에게 형조참의라는 중요직을 내려 그를 기용했다. 그리고 동래로 상륙한 일본군들이 경상도 일대에 배치되어 농민군을 토벌하자 그해 가을, 그는 대구감영의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일본어를 잘 구사하고 또 일본인과 친하기 때문에 일본군들을 인도하게 하려는 책략이었다.

아무튼 그는 대구로 가서 일본군을 인도하며 통역을 맡기도 하고 길을 안내하기도 했다. 하지만 농민군들이 진주·언양·하동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자, 일본군과 함께 이들의 토벌에 나섰다. 그는 개화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때 별다른 거리낌 없이 크게 활약했다. 대구를 근거로 경상남도·충청북도에 출동하여 농민군 탄압에 앞장섰다. 개화파를 반대하는 농민군을 적으로 본 탓인지, 아니면 벼슬자리에 연연해 뛰어든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다만 이런 공으로 그는 1895년 5월 동래부사가 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행정구역을 23개 관찰부로 개편할 때 동래부 관찰사가 되었다. 동래는 일본인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던 것이다. 그를 안타깝게 친일파로 볼 수 있는 직분에 충실한 관료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우두법을 실시하는 집념을 보인 것이 그의 정치적 행각과 다를 뿐이다. 그는 동래부 관찰사로 있은 지 1년도 못 되어 김홍집 개화정권이 밀려나자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는 다시 야인이 된 것이다. 몇 년 동안 다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1897년 정부에서는 양력을 정삭正朔(정월 초하루)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이를 공포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예산 결정의 시기와 설을 양력으로 지내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는 상소를 올려 반대했다. 정삭은 국가의 기본이고, 동방에서는 예전부터 이를 시행해 자연운수에 맞추었기 때문에 양력의 정삭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이야말로 그의 과학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단순히 모든 제도·의식을 서양식으로 따라야 근대화 또는 문명화라고 보는 일반 개화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정부에서 하는 일의 시비를 따져 비판하고 나온 탓인지 그에게 또다시 초도 유배의 조처가 내려졌다. 그는 곧 유배 조처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뒤 관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1899년 그는 의학교 설립을 정부에 건의했고, 의학교가 설립된 후 교장에 취임했다. 이어 서울 훈동에 의학교 부속병원을 설립하게 했다.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그에게 위리안치라는 가혹한 유배령이 내려 강진 신지도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신지도에서 5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예전 흑산도의 물고기를 조사한 정약종이나 글씨를 가르친 이광사처럼 우두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곳에서 보리농사를 짓는 법의 『중맥설』과 『신학신설』을 저술했다. 그는 1892년 신지도에서 풀려나와 다시 서울 교동에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실시했다

1894년에는 갑오개혁으로 내무아문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 뒤 형조참의·우부승지·대구판관·동래부사·동래부관찰사·진주목사·한성부윤 등을 역임하고, 1897년 중추원 2등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까닭에 이듬해 황해도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1899년 의학교(현 서울대 의과대학 모태)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어 교육에 힘쓰는 한편,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규칙을 공포하도록 했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어 대한의원의육부로 개편되자 교장직에서 물러나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시야를 넓혀갔다.
망우리공원에는 지석영 선생 외에 의사로서 세브란스 의전 제2대 교장으로 한국인 최초 교장이며 피부과 의사 1호인 해관 오긍선과 해관의 애제자이며 만학도로 제3대 세브란스 의전 교장이며 제헌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행농 이영준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상규 군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으로 도산의 유택이 망우리에 있었으며 임시정부 도선의 비서와 경성의전 1회 졸업생으로 대중 보건의료에 힘쓴 태허 유상규, 황해도 신막읍 화타로 알려진 김찬두 미서훈 독립운동가 등이 잠들어 있다.

그는 한글에 조예가 깊던 강위의 영향으로 일찍이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국문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으며, 의학교 학생 모집 때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같은 해 〈신정국문〉 6개조를 상소,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1908년 주시경·이능화와 함께 연구위원이 되었으며, 1909년에는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를 간행했다. 이런 공로로 그에게 세 차례에 걸쳐 훈장이 주어졌다. 이때쯤 나라는 거의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을사조약을 맺은 뒤 외교권이 박탈되고 5년 뒤 정식으로 나라는 일제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런 속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독립기지를 옮겼다.

망우리공원에는 국문 연구에도 공적 있는 지석영 외에 조선어학회 제2대 간사장인 주산 신명균 선생과 한영중고 설립자 오봉 박현식, 청산리전투 참전과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인 명재 이탁 등 세 분은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작성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글이 체계화되고 보급될 수 있도록 노력한 옥파 이종일 민족대표 33인 독립운동가, 학범 박승빈 변호사는 《정음》을 발행하며 한글 연구의 한 축을 이뤘다. 오촌 설태희 석천거사 설원식 부자는 큰사전 편찬에 후원금을 냈다. 식물분류학자 장형두는 외솔 최현배 선생과 교류하며 식물 이름을 우리말로 짓기를 고집하며 실천했다. 독립운동가 송진우, 박희도 등도 한글 운동에 참여했다.

실제 한글 보급에 지대한 공헌은 성경 번역과 찬송가 그리고 어린이 운동과 《어린이》 잡지와 동요와 가곡 보급이라 말할 수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방정환, 최신복, 안석주, 함이영, 강소천, 김말봉, 채동선, 김동명, 김상용, 김영랑 등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관련된 30여 분 넘는 목사와 장로 등이다.

그해 4월 통감부가 의학교육을 일본어로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즉각 의견서를 제출하여 반대했다. 한편 국채보상연합회 부소장, 대한자강회 평의원, 기호흥학회 부회장 등으로 사회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팔괘장 등을 수여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독서로 여생을 보내는 한편, 의학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1915년 전선의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7년에는 동서의학을 절충한 조선병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의료 보급에만 전념했다. 더욱이 그의 형 지운영은 김옥균 암살에 실패하고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은둔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운영은 유·불· 선 등 철학적 삶에 심취해 그림과 글씨, 사진에 몰두하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었다.
이런 영향 탓인지 그도 정치판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의료와 국문 보급에만 열성을 보였다. 아마도 젊을 때 개화사상에 물들고 나라가 잘못 돌아갈 때 격렬한 상소로 맞섰으며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나섰다가 일제에 이용만 당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반성의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현실과 맞부딪쳐 목숨 걸고 싸우기에는 의지가 굳지 못한 지식인의 나약함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나라가 완전히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간 뒤 그는 대한의원 의육부의 학생감 자리를 내놓았다. 그 일을 맡은 지 꼭 10년 만이었다. 일제 당국은 그를 만류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뜻을 지켰다. 그 뒤 조선총독부에서는 그에게 총독정치에 협력하기를 부탁했지만, 그는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3·1혁명 등 민족적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에도 별로 활동하지 않고 구경만 하면서 조용히 초야에 묻혀 은둔의 삶을 누린 것이다. 그러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중인으로서 형조참의와 동래부 관찰사 같은 고관직을 누린 것은 분명히 집안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두 보급이었다. 그의 공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천연두의 병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적어도 우두로 역사인의 한몫을 해낸 것이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삼거리에서 일방통행을 거슬러 1Km 정도 오르면 오른쪽 첫 번째 만나는 연보비가 송촌 지석영이다. 연보비 뒤 오솔길 100여 미터에 자리 잡은 그의 유택은 여느 고관대작의 경우와는 달리 작은 봉분으로 주능선인 구리둘레길 제1코스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봄이면 진달래꽃·제비꽃·살구꽃 흐드러진 가족묘지에 봄볕이 한참을 머물면 상춘객들 지난겨울 이야기 나눈다. 특히 살구나무꽃이 필 때면 망우리공원 분위기를 휘어잡을 정도로 아름답다. 오른쪽 조금 위 역장으로 쓴 묘지는 송촌의 맏이인 춘우거사 지성주 묘이다.

2019년 서울교원문학회 하계 연수가 성북동 일원에서 실시되었다. 필자가 해설사로 안내한 그 가운데, 송촌 지석영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8·15 해방 후 시내로 나가려면 혜화동 쪽으로 가는 언덕을 넘어가거나 걸어서 삼선교까지 간 뒤 역마차나 전차와 같은 교통편을 이용했다. 도보의 지름길은 서울국제고등학교 남동쪽 담장 근처 서울성곽 암문을 이용하여 와룡동 성균관 쪽을 이용하여 시내를 오가는 골목길에 접한 조선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경저京邸 집터 우암구거尤庵舊基를 찾아갔다. 그 곳 암벽에 ‘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늘 네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옛날 “증자 주자가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벽과 같이 서 있겠다.”는 우암의 확고한 신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송동 또는 송자동이라 불렀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민비는 완전히 무당에 기대어 살았다. 임오군란 때 망우리고개를 넘어 장호원에 피신했을 때 입궐할 날을 맞춰 민비 눈에 든 장호원 무녀 박창렬이다. 조선시대 미증유 신령군,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받고 창덕궁에 함께 살던 이 무당을 노론의 거두 우암의 집터에 사당을 짓고 기거했다. 사당 이름은 ‘북묘北廟’다. 진령군은 내연남이라는 말도 있는 수양아들 이유인과 함께 살며 국정을 농단했다. 고종 부부는 진령군이 시키는 대로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봉봉이 쌀 한 섬씩 바치며 국태민안을 빌었다. 밤에 무당이 왕과 왕비에게 한 말은 다음 날 어명으로 내려오곤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외교 순방 길 입만 열면 외교 참사를 빚고 무속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사술에 의존하는 법사나 거사 등에 의존한 이미지 정치와 검찰공화국으로 공정과 법치의 공염불로 국민을 열불나게 하고 있으니,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있지만, 제2의 진령군·최순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되는, 미래가 어찌 될지 암담하지만, 현명한 국민은 이겨내 자괴감이 아닌 자존감이 높아지리라 믿는다.

망우리공원에 유택을 마련한 종두법과 국어연구 등 구한말 선각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전 형조참의 지석영은 1894년 8월에 “요사스런 계집 진령군의 살점을 사람들이 씹어 먹으려 한다.”고 상소했다. 송촌 지석영 선생의 삶에서 가장 과격한 발언을 할 정도로 혼탁했다. 진령군은 갑오경장 때 사형당했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을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죽을 써 개에게 줘버린 무능 뒤에 삼각파도가 겹치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깨닫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