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작곡가 산남 채동선
정지용 시 <고향> 김영랑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작곡가 현악4중주단 민요채록
민족음악가 산남(山南) 채동선(蔡東鮮, 1901~1953.2.2.) 70주기
2023년 2월 2일 오늘은 산남 채동선의 70주기이다. 민족음악가인 산남의 대한민국 최초 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 2월 11일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할 때, 이사장 현제명, 이사 홍난파·김영환·안기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0년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4중주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그가 작곡한 현악4중주 제1번을 포함한 창작곡발표회를 1932년 하세가와(長谷川)공회당에서 가짐으로써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창작발표회를 가진 작곡가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 민요를 귀로 들으며 양악 악보로 채보하였다.
1964년과 1980년에 "채동선가곡집"이 발간됐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고,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혔다 이장한 대한민국 건축의 선구자인 박길룡의 아들인 박용구를 회장으로 1983년 채동선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매년 젊은 음악가에게 <채동선음악상>을 수여하고 있다.
채동선의 아내 이소란 피아니스트는 채동선의 누이 채선엽 소프라노 이대 교수와 친구이다.
민족음악의 선구자 산남 채동선은 바이올린 연주가이며 가곡 <고향>·<향수> 등의 작곡가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독일 슈테른센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연희·이화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으며,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새야새야>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고향>이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2리 2의 21 세망마을에서 만석꾼 부호인 아버지 채중현蔡重鉉과 어머니 성주 배씨 배홍심裵弘深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으로 종교는 기독교(장로교)이다. 채동선은 때로는 등하교를 머슴과 걷거나 업어서 하였다고 소문난 1915년 순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서울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회에 참석해 감동을 받아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1918년 무렵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1년간 배웠다. 3·1운동에 참가한 문제로 경기고보 4년 수료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와세다대학교 문학부를 거쳐 1924년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영문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기 위해 도미했다가 중도 포기하였다.
1924년 10월 20일 전선남녀전문학교 연합음악회 때 출연했고, 1926년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 베를린의 슈테른센음악원에 입학해 리하르트 하르체(Richard Harchet)에게서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Wilhelm Klatte)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29년 귀국해 연희전문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이화여전에서 음악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1929년 귀국독주회를 비롯해 1939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바이올린독주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2월 11일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됐을 때, 이사장 현제명, 이사 홍난파·김영환·안기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0년 최호영(제2 바이올린)·이혜구(비올라)·일본인 첼리스트와 함께 우리나라 채동선실내악단을 만들었다.
1932년 하세가와공회당에서 가곡발표회를 여동생인 채선엽의 독창으로 처음 발표되어 도쿄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10월 이화여전 강당에서 가곡발표회를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4중주단을 결성해 활동했으며, 그가 작곡한 현악4중주 제1번을 포함한 창작곡발표회를 1932년 하세가와공회당에서 가짐으로써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창작발표회를 가진 작곡가가 되었다. 작곡가로서의 음악활동은 1932년 작곡한 현악 4중주 제1번을 시작으로 전개됐다. 1933년 작곡한 대표 가곡 <고향>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이다.
19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932년 <고향>·<내 마음은>·<바다> 등을 작곡했다. 1936년 4월호 『음악평론』에서 홍난파·계정식·홍성유 등과 함께 소개됐다. 1937년에는 그의 첫 작곡집이 발간됐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우리의 민요채집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다. 이 작업은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1939년 6월 8~9일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에서 <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를 발표하였다.
채동선 관련의 여러 기사는 《동광》(1931) 22호, 《삼천리》(1932) 4권 7호, 《신가정》(1934) 2권 8호, 《예술》(1935) 1권 3호, 《동광》(1936) 3호, 《신세기》(1939) 1권 3호 등에 수록되었다.
1945년 8·15해방 후에 다시 작곡에 전념하여, 교성곡 <조국>·<독립축전곡>, 칸타타 <한강> 등과 <선열추모가>·<한글날>·<3·1절>·<개천절>·<무궁화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민요 편곡 및 전통음악 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여 <서울아리랑>을 비롯하여 <진도아리랑>·<도라지타령>·<흥타령> 등 많은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했으며, <별유천지> 등을 채보하였다. 1945년 고려음악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8월 그의 관현악곡 <조선>을 고려교향악단이 초연하였다.
1947년 8월 함화진의 뒤를 이어 박헌봉이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음악문화』(1948) 4월에 「민족음악의 수립론」을 발표하였다. 1948년 고려합창단을 조직했으며, 그 외에 고려작곡협회 회장(1947), 서울특별시 문화위원(1947), 문교부 예술위원(1949), 한국음악가협회의 중앙위원(1949), 국립중앙극장 운영위원(1950), 국악원 이사(1950), 예술원 위원(1952)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전시 부산 서울대 상대와 숙명여대에서 독일어 교수로 재직했다.
작품으로 <현악 4중주 제1번 G단조>(1932)·<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1939)·교성곡 <한강>(1947) 등이 있고, 가곡 <고향> 외에 교향곡 <조선만세>와 미발표작 현악 4중주곡·합창곡 등이 있다.
1964년 3월 서울시향 제112회 정기연주회 때 유작 교향곡 <한강>"이 발표됐다. 1983년 KBS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 때 <현악합주를 위한 협주곡 제9번>이 연주됐으며, 3월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에 의한 가곡 <또 하나 다른 태양> 등 8곡이 예음홀에서 발표되었다.
1930년대 당시 한국 악단은 홍난파 현제명 피아노의 박경호 성악가 안기영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채동선은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기보다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어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채동선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한 채 농사꾼으로 변신한다. 일제에 대해 협력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 사람은 농촌을 알아야 한다며 새벽마다 밀짚모자에 고무신을 신고 성북동 집에서 농장이 있는 수유리까지 10여 리를 걸어 다니며 양과 닭을 키우고 튤립 등 고급화초와 관상 묘목을 키우는 등 농사를 짓고 저녁 무렵 귀가했다. 복장도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그 점은 정지용도 비슷했다.
산남은 일본의 착취와 폭력은 지속되는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분했고 안타까워했다. 산남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동료 음악가들과 사이가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이는 친일 행위와 연관성이 있다. 채동선이 일제강점기 시절 다른 음악가들과 다르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홍난파 등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노래 가사 및 노래 작곡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과 달리 끝까지 친일 운동을 거부하였던 채동선은 광복까지 창씨개명과 친일 노래 작곡을 거부하였다. 해방 이후에 그는 이념적 성향으로 인해 다시 한번 동료 음악가들과 마찰이 있었다.
「고향」은 정지용 시인이 1932년 지은 시에 산남이 1933년에 작곡했다. 정지용 월북으로 1950년대 이후 가곡 <고향>의 가사 사용이 금지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부인 이소란 여사가 피난 갈 때 서울 성북동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 등을 1963년에 찾아내면서 작곡가 채동선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소란 여사는 악보를 찾아낸 후 『채동선 가곡집』을 출간하고자 했으나 당시 월북작가로 낙인찍힌 정지용의 시로 된 가사는 쓸 수가 없었다. 1953년에 쓴 박화목 시 「망향」과 채동선과 가깝게 지낸 이은상 시 「그리워」를 같은 곡에 붙여 불렀던 까닭에, 한 곡이 세 개 가곡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에 따라 정지용 문학작품에 대한 규제도 풀리면서, 1980년 출간된 『채동선가곡집』 중 <고향>이 대표작으로 애창되고 있다.
https://youtu.be/5xRP1lKI4Gw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8·15해방 후 한때 경기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2년에는 전시 서울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1953년 2월 2일, 6·25한국전쟁의 종전을 알리는 포성이 한창일 무렵, 채동선은 부산 피난 시절 막노동뿐 아니라 통조림을 팔기도 한 생활고로 병을 얻어 부산으로 피난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영양실조에 급성복막염이 겹쳐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47년 먼저 잠든 아버지 채중현 묘지 아래 묻혔다. 묘지번호 204936이었다.
노래집으로 6·25 때 집 안 마당에 묻고간 악보를 찾아내 발간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곡으로 엮어져 있다. 1983년 '채동선기념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진혼곡 〈조선〉·〈조국〉 등이 있다. 그 외 <독립축전곡>·<개천절>·<한글날>·<3·1절> 등을 작곡했다.
그는 순수한 가곡 작곡에 전력하였으나, 민족음악 문화 수립의 기저로서 민요 채보와 한국의 전통 음악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채동선의 작곡하여 발표한 가곡은 12곡이다. 그중 8곡이 정지용 시를 가사로 썼다. <고향>·<압천(鴨川)>·<다른 하늘>·<향수>·<산엣색시 들녘사내>·<또 하나의 다른 태양>·<바다>·<풍랑몽>의 8곡이다. 나머지 네 곡은 <그 창가에>(모윤숙)·<내 마음은>(김동명)·<모란>(김영랑)·<새벽별을 잊고>(김상용)이다.
김상용 김동명 김영랑 시인의 묘지는 망우리공원에 있다가 김동명 김영랑 시인은 이장했다. 올 7월 중랑구청에서 묘지관리권을 서울시에서 옮겨오면 두 시인의 묘지를 재이장하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힘을 쓰고 있다.
채동선의 묘지는 2012년 5월 2일 고향 전남 보성 벌교 채동선기념관 뒤 부용산 산자락으로 이장했다. 아버지 채중현 묘지는 먼저 이장했다. 채동선 묘지를 이장하며 음악평론가 한상우가 짓고, 이은상의 시 「그리워」가 가사로 새겨진 묘비까지 옮겨가 채동선음악당 뒤 부용산 자락에 새로 안장된 묘지 앞에 부인 이소란 여사까지 새겨넣어 세웠다.
현재 망우리공원에 남아 있는 채동선 일가의 묘지 터를 알려주는 직사각형 대리석에 새긴 조그마한 ‘채씨지묘’ 묘지 분양과 평수를 알려주는 안내석만 남아 있다. 망우리공원 문화예술인 묘역을 조성하면서 채동선 작곡 망우리 관련 시인들의 작시 노래공연과 상설 기념관에서 듣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채동선의 출생지인 벌교읍 벌교리 태백산맥 문학거리 끝자락에 생가와 그의 이름을 딴 도로인 채동선로, 2007년 12월 14일 세워진 채동선음악당 등이 있다. 정부는 1995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벌교공원’에는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대표작 <고향>이 친필 악보대로 새겨지고 작품목록이 수록된 기념비가 서있다.
채동선실내악단(단장 김정호)은 2021년 11월 23일 보성군 벌교읍 채동선음악당에서 보성 출신 민족음악가 채동선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민족음악제 <전람회의 그림, 무소르그스키를 만나다>를 성황리에 치렀다.
2019년 10월 28일 채동선이 1931년부터 말년까지 작곡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서울 성북동 옛집이 재개발하기 위하여 전격 철거되어 학계와 지인들이 “좀 더 빨리 보존조치 했어야”하면서 아쉬워하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관여하며, 건물 보존 상황을 살펴본 윤인석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한국 근대 음악사의 소중한 산실이 역사적 가치를 살리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산남의 여동생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며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성악가인 채선엽, 그녀의 남편으로 매제인 최규남은 한국 최초 물리학 분야 전공 이학박사로 서울대학교 교수와 서울대학교 총장 및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동생인 채동규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장을 역임한 약학자이다.
채동선은 비단 문화계를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족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산업개발을 촉진해야 된다는 이념 아래 계간지인 《민족문화》에 「지하자원개발론」이란 논문을 게재하여 일반인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작곡가 윤용하 선생은 채동선과 교분이 두터워 죽기 전까지 채동선 기일 즈음에 맞춰 추모의 글을 신문에 게재하며 채동선 추모사업을 전개하였다.
전남 보성 벌교 여행은 맛과 문학 그리고 역사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여수에 돈 자랑, 순천에서 얼굴 자랑,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떠돈다. 이 말은 일제강점기 담살이 독립운동가 안규홍 의병장의 의로운 주먹에서 의해서 나온 말이다.
대종교의 창시자 홍암 나철, 독립신문 서재필, 민족음악의 선구자 산남 채동선, <부용산>의 박기동, 태백산맥의 조정래, 현부자 현준호, 시인 송기원 문정희 박라연 고운기 박노해 송경동 임성용 소설가 정찬주 민중가요 문진오 등이다.
https://youtu.be/5xRP1lKI4Gw
오는 10월 3일이면 4356주년 개천절이다. - '세상을 이롭게 대한을 새롭게'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10월 3일. 서기전 2333년(戊辰年),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개천절은 ‘개천開天’의 본래의 뜻을 엄밀히 따질 때 단군조선의 건국일을 뜻한다기보다, 이 보다 124년을 소급하여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환웅桓雄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날인 상원 갑자년(上元甲子年: 서기전 2457년) 음력 10월 3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
개천절이 경축일로 제정된 것은 1909년 중창된 나철의 대종교에 의해서이다. 이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음력으로 10월 3일을 민족의 기념일로 제정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단군 연호를 채택하여 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제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이나, 여러 단군숭봉단체는 전통에 따라 주체가 되어 마니산의 제천단, 태백산의 단군전,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의 백악전 등에서 경건한 제천의식을 음력 10월 3일에 의식을 행하고 있다.
개천절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던 대종교 창시자 홍암 나철(1863~1916) 선생에 의해 경절로 성대하게 기념되기 시작했다.
정부 수립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매년 개천절 경축식에 참석했으나 김영삼 정부 때부터 대통령이 행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2011년부터는 대통령 경축사가 사라졌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인물 중에 문일평, 지석영, 박찬익, 나운규, 채동선, 신명균 등이 단군교(대종교,大倧敎)신자였다.
초기 대종교의 신자는 그 당시 유력인사나 애국지사가 많았다.
대종교의 중광 시조인 홍암 나철은 고종 황제 당시에 장원급제를 한 인물로 황제의 총애를 받은 유력한 인사였습니다. 그 밖에 오기호, 강우, 이기, 유근 또한 그 당시 세력 있는 명망가의 자제들이었다.
헤이그 밀사의 이상설, 언론인 장지연, 양기탁, 유근, 아리랑의 나운규 등이 당시 명망 높은 대종교인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 39인 중 30여명이 대종교인이고 이었다.
학계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대종교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39명의 서명자를 당시 대종교의 교구에 따라 구체적으로 분류해 30명을 대종교 관계자라고 밝혔다.
신운용 강사는 “김교헌은 1917년 교의회를 열어 교구를 동일도본사.동이도본사.서일도본사.서이도본사.북도본사.남도본사로 재정립하였다”며 “대한독립선언서에 참여한 대종교 주축 세력은 동일도 본사.동이도본사.서일도본사.서이도본사 소속 대종교인”이라고 말했다.
동만지역과 함경도를 포함하는 ‘동일도본사’(11명)에는 김규식(우사 김규식이 아님), 김좌진, 김동삼, 박성태, 박찬익, 손일미, 여준, 조소앙, 조성환, 한흥, 황상규, 노령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와 동북만 일대의 ‘동이도본사’(4명)에는 신채호, 이범윤, 김학만, 문창범, 남만일대와 평안도 일대의 ‘서일도본사’(11명)에는 윤세복(대종교 3세 교주), 이광, 이시영, 이탁, 허혁, 유동열, 이상룡, 이세영, 임방, 이종탁, 최병학, ‘서이도본사’(3명) 박은식, 이동녕, 신규식(신정)을 꼽았다. 김교헌을 포함하면 30명에 달하는 셈이다.
그 외에 ‘기독교와 천주교, 간도와 미주지역’(8명) 서명자로 김약연, 이대위, 이봉우, 박용만, 안정근, 안창호, 이승만, 정재관을 ‘사회주의 만주.연해주 지역’(1명) 서명자로 이동휘를 분류했다.
신성은 신규식, 조욱은 조성환, 김이주는 김약연의 별칭이다. 허적은 왕산 허위의 아우 허겸이고, 한진은 대종교인들이 상해에서 조직한 동제사의 회원이며, 신익희의 청년시절 별명이 임방 또는 임호방이었다. 조용은은 조소앙의 본명이며, 안창호, 안정근, 이승만은 기독교 및 천주교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여 동생 안정근 선생이 함께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안창호 박찬익 두 분이 39인에, 별산 나우 선생도 비밀 서약 6인 중에 한 분이다.
39인 중 이탁 한 사람만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망우리고개에서 1919년 고종황제 인산일에 매국 7적을 척살하려다 실패한 27인 결사대 대장인 동우 이탁, 청산리전투에 참가하고 서울대학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한글을 연구한 명재 이탁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이다.
임시정부의 초대 의정원 29명 중에 무려 21명이 대종교 신자였다.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신규식, 박은식, 박찬익, 조성환, 조완구, 김규식, 박용만, 차리석, 송병조, 신익희, 엄항섭 등이다.
청산리대첩의 북로군정서 독립군도 대부분 대종교 신도들이었다.
조선어학회 간부 주시경, 지석영, 최현배, 이극로, 김두봉, 신명균, 정열모, 이윤재, 한징, 유근, 안확, 백남규, 김영숙, 권덕규, 이병기, 이희승, 이은상 등이다.
독립군 장군 중에 서일, 현천묵, 나중소,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김경천, 신팔균, 양세봉, 이범석, 김규식 등이다.
독립투사 이상룡, 이동휘, 이동열, 김동삼, 권오설 등이다.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등의 민족 사학자 그룹과 대종교 간부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은 김구, 조소앙, 조봉암, 여운형, 안창호 등으로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의 90%이상이 대종교와 관계가 깊게 있었다.
그 외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자면 장도빈, 홍명희, 김약연, 안희제, 윤세복, 김교헌, 안호상, 안희제, 강우규, 신규식, 김규식(우사 김규식 아님), 김승학, 김윤식, 지운영, 이인, 나경석, 신성모, 신팔균, 나운규, 안창남, 손기정, 채동선, 이세정, 강영훈, 황학수, 이흥수, 지성채 역시 대종교 신자였다.
건국내각에는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해 이범석(국무총리)·안호상(문교부장관)·명제세(심계원장)·정인보(감찰위원장)·신성모(국방부장관)씨 등 6명의 대종교인이 참가했다. 또 미군정 시절에는 안재홍 선생도 민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최초 비행학교 노백린,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 서왈보, 민항기는 안창남, 마라톤은 손기정, 최초의 ROTC 박용만, 최초의 서독박사 이극로, 안호상, 초대 심계원장 명제세, 초대 민정장관 안재홍, 초대 국방위원 조성환, 초대 국방장관 신성모, 초대 부통령 이시영, 한글 창시자 주시경 등 대한민국의 기반을 세운 건국훈장 수여자 139명 중 97명이 대종교인이다.
여자 독립군 박차정 장군,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을 싸준 연미당, 지복순 청년 전위대 장교 등이 모두 대종교인이다.
민필호 선생은 예관 신규식 선생의 비서였으며 그 장녀인 민영주 지사는 김준엽 총장과 백년가약을 약속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학병으로 끌러가 탈출한 광복군 출신 김준엽 총장의 어머니 묘소가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자리잡고 있다. 묘비는 서예가 황재국 강원대 명예교수의 글씨를 새겼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 인사 4,776명 가운데 종교계는 202명이다. 대종교는 한 사람도 없다.
상해임시정부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을 주석으로 추대한 김구 선생의 스승 이동녕 대형과 김구 선생 사망 때까지 선생을 보필한 조완구 대형 또한 자랑스런 대종교인이다.
김구 선생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 와서 첫 연설을 합니다. '대종교가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역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배달민족으로써 대종교인이 아닌 자 누가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대종교는 수십만 교인의 피와 땀으로 독립 투쟁을 하였지만
일제강점기 10만 많게는 30만 명에 이르던 대종교 신자들은 온몸을 바쳐 일제에 저항했다. 대부분 연해주와 만주 등지에서 순국하여 목단강, 두만강, 만주벌판 등지에 뿌려졌다.
해방된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리고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게 핍박을 당하며 현재 대종교 신자는 4천여 명 내외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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