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국채표 기상대장

정종배 2023. 2. 5. 11:28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국채표

세종대왕 이래 최고 기상학자
한국 최초 기상학 이학박사 한국기상학회 창립 초대회장 제2대 기상청장
국채표鞠採表 (1906.10.25.~1967.2.5.) 56주기

오늘 아침 친구 단톡에 대보름에 대한 추억과 대보름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적 마을 숲에 대보름날 아침 일찍 나타나면 누구 먼저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니 더위 내 더위 가래 더위” 하면서 더위를 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쬐간했을 때부터 굼뜨고 어리버리한 난 더위를 팔 적은 없고 언제나 더위만 먹고 말았다. 고향의 앞 신평과 옆 갈구지 송산 신흥동 마을 앞 들판과 산과 언덕에서 독쌈과 쥐불놀이 불깡통 던지기와 사제 총 등을 던지고 돌리고 쏘던 분들은 잘 살고 계실까?

어제는 입춘이었다.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이다. 입춘 시는 오전 5시 51분, 이때 입춘첩인 입춘대길 건양다경 등을 붙어야 효험이 있다고 한다. 역학에서 비로소 오늘부터 계묘년 흑 토끼해가 시작된다. 한과 우수 사이에 있는24절기의 하나. 양력 2월 4일이나 5일 무렵이다. 태양의 황경이 315°이며, 입추로부터 꼭 반년이 되는 날로, 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날이다. 가정에서는 콩을 문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대문기둥·대들보·천장 등에 좋은 글귀 입춘첨을 써 붙인다.
입춘일은 농사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첫 번째 절기이기 때문에 보리 뿌리를 뽑아보고 농사의 흉풍을 가려보는 농사점을 행한다. 또,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한다.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라고 평가받던 국채표 당시 중앙관상대장이었다. 그는 당시《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우리나라 하늘엔 비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좋은 구름이 참 많습니다. 비의 응결핵만 공급해주면 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경제성을 입증하지 못해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탁월한 기상학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대를 앞서간 초인超人 국채표 박사는 한국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한 선구적인 기상학자였다.
1906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난 국채표 박사는 1918년 담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까지 고향에서 한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담양은 창흥의숙昌興義塾 현 창평초등학교를 중심으로 근대교육을 정착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국 박사는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1920년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5년간 공부한 그는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조선 내에서 유일하게 고등 수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929년 3월 12일 오후 2시 연희전문학교 제11회 졸업증서 40명 수여식에서 국채표는 우등생으로 이인흥, 최활 등 3인의 이름과 사각모를 쓴 얼굴 사진이《동아일보》3월 13일,《조선일보》3월 14일 신문에 게재되었다. 1941년 일본 경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졸업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바다의 날과 관련된 인물인 국채표 박사는 1964년 일본 경도제국대학에서 논문「태풍의 운동과 발달의 예보법」으로 한국 최초 기상학 분야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상학자 국채표는 본관은 담양이며, 전남 담양군 출신이다. 국채표 중앙관상대 제2대 대장. 한국의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기반을 마련한 기상학자로, 한국에 맞는 태풍진로 예상법’국鞠의 방법‘을 창안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첫 감염병 임상학자부터 ‘세종1호기’ 개발자까지 '과학 한국' 이들이 있어 지금이 있다…한국을 빛낸‘1호’ 2020년 지정 자연분야 국채표는 태풍 예보‘국의 방법(Kook’s Method)’창안…한국 기상예보 기반을 다지고 한국 기상학과 기상예보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하다. 고도의 기상예보 기술 확보를 위한 중앙관상대의 기상시스템 현대화 한국기상학회와《한국기상학회지》창설로 한국 기상학의 제도화 마련한 공로로 과기정통부, 2020년 과학기술유공자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로 선정되었다.


국채표는 해방 후 교직에서 물러나 국립중앙관상대로 자리를 옮기며 기상학계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이 기관의 대장은 1926년 6월 천문학 관련 논문「항성분광분석」으로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이자 연희전문학교의 스승이었던 이원철(1896~1963)이 맡고 있었고, 그는 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부대장이 된 그는 1947년‘ 고층권 기상연구’의 책임자로서 일제가 5킬로미터 상공까지만 올렸던 기상관측 기구를 23킬로미터 상공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거둔 세계적인 성과이자 미래의 한국 항공기술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소개했다.

나라호와 누리호의 대한민국의 우주발사체.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설계, 제작, 발사, 운용 등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발사체 계획과 발사에 성공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국내 기상예보 시스템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전화로 일기예보를 자동으로 받을 수 있는‘자동일기예보기’를 설치하고, 해외 기상도를 실시간으로 전달받는‘기상 팩시밀리’를 구축했다. 1964년 일본 교토대에 제출한「한국 및 한국 부근에 내습할 우려가 있는 태풍의 운동 및 중심시도의 통계적 예보법」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태풍 경로를 예측하는 ‘국의 방법(Kook’s Method)’을 제시해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당시 기상예보에도 쓰였다. 지금의 한국기상학회를 1963년 창립했고, 현재도 발간되는 ‘한국기상학회지’를 1965년 창간했다.

국채표 대장은 한국의 기상예보 시스템을 현대화하고, 한국기상학회의 발족과 한국기상학회지 창간으로 한국기상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적인 기상학자다. 그는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와 교토제국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15년간 재직했다. 교사로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과학 관련 글을 꾸준히 게재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과학정보를 전달했다. 주로 계절과 절기와 관련된 자연변화나 대기 현상, 기상 현상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과학대중화에 앞장섰다.

관상대가 광복 때까지 일본인 직원들만 있던 곳이어서 특히 기상분야전문가의 인력난은 극심했다. 그는 스스로 기상분야의 고급기술을 습득하여 인재 양성을 시작하기로 하고, 세계 기상학을 이끌고 있던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학문에 입문하기 위해 1949년 시카고대학 기상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수료하고,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미군 제6군단에서 강사로 2년간 근무했다. 그 후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미 해군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On the prediction of three-day hurricane motion“이라는 성과를 발표했고 1958년 석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인정받았다. 이 연구는 미연방 기상국에서 인정하는 기상연구의 주요 성과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위스콘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연구(농업기상학 전공)를 이어갔으나 중앙관상대 책임자를 맡기 위해 서둘러 귀국하는 바람에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1961년 귀국하자마자 박정희 정부는 그를 이원철의 후임으로 중앙관상대 대장에 임명했다. 대장이 된 그는 기상예측에 필요한 기자재를 정부에 요청했고, 미국에서 배운 기상학에 바탕으로 새로운 방법을 국내 기상예보 시스템에 적용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전화를 통해 일기예보를 자동응답으로 전달받는 <자동일기예보기> 설치, 고층대기권의 기상 현상을 관측할 <고층기상관측소>설립, 해외 기상도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기상 팩시밀리> 구입 등을 추진하여 한국의 기상시스템 현대화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일본의 교토대학에“한국 및 한국 부근에 내습할 우려가 있는 태풍의 운동 및 중심시도의 통계적 예보법“(1964)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기상학 분야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미국 시카고대학 시절부터 연구해온 내용을 발전시켜 한국에 적용한 것으로 태풍진로 예상법을 제안한 획기적인 논문이었다. 그가 논문에서 제시한‘국鞠의 방법(Kook’s Method)’은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당시 기상예보에도 활용되었다.

그는 1963년 한국기상학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낙후된 한국의 기상학 발전을 위해서는 기상학을 연구하는 학자 간의 교류 및 후진 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로써 그는 중앙관상대의 기술연구원들과 기상학 관련 대학교수들과 함께 한국기상학회를 창설하고 지금은 세계적인 학술지가 된《한국기상학회지》를 1965년 창간하며 한국 기상학의 제도화에 앞장섰다.

국채표 대장은 한국의 현대적 기상예보 기술과 기상학의 제도적 발전을 이끈 과학자였다. 그는 낙후된 한국의 중앙관상대를 첨단시설을 갖춘 현대적 기관으로 재정비하고, 한국기상학회를 창립하여 기상학의 학문적 기틀을 닦았다.그가 기상학계에 남긴 이러한 유산은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기상학 및 기상예보의 초석이 되었다.


“전 중앙관상대장 국채표박사(64·서울시 성북구 성북동38)가 5일 상오 9시 우석대학부속병원에서 별세했다. 이날 국박사는 친지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뇌진탕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 가료 중이었다. 국박사는 연전 수물과를 나와 일본 동도제대 수학과에서 수학하고 다시 미국「시카코」대학에서 기상학을 연구한 후 귀국, 5·16직후부터 67년 7월까지 6년 동안 관상대장으로 일했었다. 영결식은 8일 상오10시, 종로5가 연동교회, 장지는 망우리 가족묘지. 유족으로 부인과 3남이 있다.” -출처《중앙일보》1969.02.06.

단비의 비문, “고 국채표 박사 영전에 드림 한 떨기 설매꽃처럼 청하하고 높은 님의 자취 이곳에 남기시니 님 가신 곳 더욱 빛나오리다” 1969년 3월 25일 문학박사 이병도 글 문하생 씀

중랑구 마을지킴이 선두주자 김완숙 선생이 이끄는 ‘중랑을 걸어요’ 일행과 찾은 국평정지 터와 이기붕 가족묘지 터를 확인하고 답사팀은 내려가고 다시 혼자 눈여겨본 묘지를 찾았다. 국채표 씨 묘비인데 중앙고보 은사인 이병도 국사학자 글을 문하생이 썼다.국 채표 가족묘지였다. 부모님 유택은 옛 모습 그대로 잘 관리되고 있다. 국채표 묘지도 이장하지 않았다. 평장으로 묻힌 듯 봉분을 찾을 수 없다. 1992년 제5회‘자랑스런 중앙인’으로 선정되었다.

4대 음악인 가족인 함이영의 따님인 함천혜와 국채표 둘째 아들은 서울 음대 작곡가 동창으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 국채표 후손들은 거의 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 있다. 후손 중 둘째 아들 국정련의 둘째 딸인 국미영이 미국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 대학 할아버지와 같은 기상학 분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낙이망우 망우리공원 과학 및 의학의 선구자는 종두법의 지석영, 피부과 의사 1호 해관 오긍선과 동경제대 의학박사 행농 이영준 세브란스 제2,3대 교장, 황해도 신막읍 화타 김찬두 세브란스 의전 독립운동가, 국민보건의 선구자 경성의전 태허 유상규 독립운동가, 콩박사 영양학자 김호직, 조선의 유일무이하고 일본과 맞장뜬 장형두 식물분류학자 등이 잠들어 있다. 서구식 간호사 1호인 이정애 이화여대 간호학과 초대 과장은 이장했다.

2022년 10월 국채표 박사의 둘째 아들인 국정련 선생 부부가 고국에 들어왔다. 서울고등학교 졸업 60주년 동기들 모임이 주된 여행이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비석을 남기고 이장한 함이영 음악가의 큰딸인 함천혜 바이올니스트와 소통을 하고 있어 국정련 박사 귀국 소식을 들었다. 국정련 선생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여 뵙게 됐다.

국선생은 가족사 이야기를 소탈하게 말씀했다. 음악에서 물리로 방향을 바꿨을 때 좋아하시던 아버지와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버지 유택을 LA에 모신 어머니 곁에 이장하겠다는 말씀이었다. 특히 큰형님의 연세가 많아 죽기 전에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계시는 걸 봐야겠다는 명령을 받고 왔다고 단호하게 말씀했다.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 대한 설명과 구청장의 의지 그리고 지금까지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대한 변화 관리 등을 말씀드려 일단 5년 연장을 하였다. 그리고 류경기 구청장과 차 한 잔 나누며 중랑구청 천문대 설립에 ‘국채표’ 선생의 이름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에 유족대표로 동의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가족에 대한 자료를 보내주어 국채표 선생의 가족사를 정리하였다.

鞠埰表 국채표
10/25/1906 – 2/5/1969
日制時代
中央高等學校 卒業
延禧專門學校 數物科 卒業
京都帝國大學 數物科 卒業
梨花女子高等學校 敎師
解防後
國立中央觀象臺 副臺長
University of Chicago, 氣候學 碩士學位 1949-1958
University of Wisconsin – Madison, Lecturer and Researcher 1958-1961
京都大學 博士學位 1964
國立中央觀象臺 臺長 1961-1967


첫째 아들 국광련鞠光鍊
4/14/1937 –
서울高等學校 卒業 1956
延世大學校 化工科1956-1960
University of Oregon – Eugene, Oregon, 1968, Master of Architecture (MArch)
C. F. Murphy Co. Chicago, Illinois, Architect 1968-1971
Erdman Company, Madison Wisconsin, Chief Architect 1971-1984
Kwang Cook & Associates, Anaheim, California, Owner and Chief Architect 1984-2009

둘째 아들 국정련鞠廷鍊
9/5/1943 –
서울高等學校 卒業 1962
서울 市立交響樂團 오보에次席奏者 1961-1963
서울 大學校音樂大學 作曲科 1962-1966
C.W. Post College, Long Island University, Greenvale, NY, Physics BS 1970
Lehigh University, Bethlehem, PA, Physics MS1972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Cleveland, OH, Physics 1972-1973
IIT Research Institute, Chicago, IL, Fire and Safety Researcher 1973-1976
OEA, Inc, Denver, CO, Combustion and Internal Ballistic Analyst 1976-1978
U.S. Navy, Advanced Weapon Systems Researcher/Program Manager 1978-2003
Boeing Company, Ballistic Missile Defense Systems Analyst 2003-2007
Korean Concert Society (http://www.koreanconcertsociety.org), Washington, DC, Board/President 1985-Current

셋째 아들 국백련鞠百鍊
7/10/1948 –
普成高等學校 卒業 1966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at Carbondale, Photography BS 1975

국채표 손녀로 국정련의 둘째 딸 국미영鞠美英, Mea Cook
1/25/1977 –
Thomas Jefferson High School for Science and Technology, Annandale, VA 1995
Princeton University. Princeton, NJ, 1999 BS Ocean Science
MIT/Woods Hole Oceanographic Institution, 2006 PhD Paleo-Climatology
Williams College, Williamstown, MA, 2008 Professor Earth-Science

국채표 여동생 국정효鞠貞孝
10/13/1915 – 5/4/2008
梨花女子高等普通學校 卒業
梨花女子專門學校 文科 卒業
京城帝國大學 法文學部 文學科 卒業
서울 大學校 文理科大學 英語英文學科 敎授
서울 大學校 商科大學 英語英文學科 敎授

국채표 남동생 국채호鞠埰鎬
19??-1999
景福高等學校 卒業
東京帝國大學 藥學科 卒業 1946
서울 大學校 藥學博士 1965
서울 大學校 藥學大 敎授/學長
망우역사문화공원 가족묘지 뒤, 면목고와 서일대학에 오르는 오솔길 아래 유택을 마련했다.

가족 역사

국채표鞠埰表
전남 담양 출신으로 서울에서 중앙고등학교와 연희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을 가 교토대학을 졸업 귀국했다. 이화고녀에 교편을 잡았을 때 고려대학과 중앙고등학교를 설립하신 김연수 선생께서 가정교사로 초청했다. 자택에서 가까운 성북동에 한옥을 주셔 살게 하셨다고 들었다. 아마 그 집값을 갚을 수 있는 법으로 처리를 하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연수 선생께서는 당신이 설립한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또 교토대학 동문이며 같은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에 제 아버님께 호감을 가지신 것 같았다.
아버님은 담양에 계시는 부모를 서울 성북동 집으로 모셨다. 이로써 큰고모 순효와 작은고모 정효는 성북동 근처로 이주했고, 나이가 어렸던 막내 삼촌 채호는 같은 집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로써 할아버지의 직계가족은 해방 전에 모두 서울에 살게 되었다.
아버님의 큰 남자동생 국채이는 사업을 하던 분인데 1945년 해방되기 며칠 전에 성북동집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해방이 되면서 아버님의 스승이였던 이원철박사가 국립중앙관상대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아버님은 부대장 겸 인천측후소 소장으로 임명됐다. 이원철 박사나 아버님은 모두 기상학을 전문으로 한 분들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기상학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을 때였다
아버님은 이원철 박사 다음을 이어 기상대장을 맡을 인물로 기르려는 의도에서 1949년에 국비로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져서 국비는 끊어지고 미국에서 일도 하고 재미 한인 활동에도 가담하시고 하느라 시카고대학 학위 받는 일이 늦어져서 1958년에야 석사논문을 끝내시고 위스컨신대학에 기후연구팀에 가담하시고 기후에 대한 강의도 하시다가 1961년 한국으로 귀국하셔서 제2대 국립기상대장역을 맡으시게 되었다.
그동안 연구 결과로 동북아시아에 태풍의 경로를 예측하는 방법을 논문으로 써서 아버님의 모교인 교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1964년에 받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 방법이 가장 최신의 방법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상당히 널리 쓰게 되었다고 들었다.

국정련鞠廷鍊
둘째아들 국정련이 아버님의 뒤를 이어 과학/공과 계통의 일을 하게되었다. 허나, 중고등학교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고 3때 서울음대와 한양음대가 주최하는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오보에연주로 모두 일등을 차지하게 됐고 1961년, 졸업하기 3달 전부터 서울 시립교향악단에 차석 오보에 주자로 정단원으로 임명되었다. 또 1962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작곡과 입학하여 음대를 다니면서 시향의 오보에 주자로 또 그 외 여러 가지 음악 연주활동을 1966년까지 계속했다.
1967년에 미국 여러 음악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그중에서 가장 조건이 좋았던 C.W. Post College of Long Island University에서 전 학비와 기숙사비까지 면제받는 조건으로 입학하였다. 서울음대 학점을 인정받지 못하여 학부 과정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때 물리학에 관심이 생겨 전공을 음악에서 물리로 바꾸기로 했다. 허나 장학금의 전제는 내가 음악을 그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물리로 전과하는데 조건이 붙었다. 나의 모든 과목의 성적이 B+(3.5/4.0)이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조건을 받아들여 3년 만에 학사과정을 3.75 평균 성적으로 Cum Laude로 졸업을 하고 1970년 손정님孫正任 첼로 연주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Lehigh University에 유체역학 석사과정에 들어 갔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에서 음악음향악 연구를 1년간 계속하였다.
1974년부터 개인회사와 미국 정부의 신무기 개발연구 팀에 들어가 재래식무기 개발에 약 13년간 종사하고 레이저무기 개발사업에 약 15년간 종사하고 퇴직을 했다.
1985년에 Korean Concert Society라는 단체에 들어가 예술감독 및 회장으로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는 한국과 한국전쟁에 군대를 보낸 나라들의 젊고 30세 이하 재능이 특출난 연주자를 뽑아 워싱턴에 있는 Kennedy Center에서 워싱턴 데뷰 독주회를 열어주는 일을 주로 하는데 경비와 출연료를 모금해서 충당하고 있다. 현재까지 37년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음악을 시작해서 결실을 못본 것에 한이 맺혀서 젊은 음악도들을 도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의지에 하는 일이다.

국미영鞠美英 – Dr./Professor Mea Cook
국미영은 국채표박사의 손녀이고 국정련의 둘째딸이다. 국미영이 선택한 전공 분야가 국채표 박사의 뒤를 잇는듯하여 여기에 올린다.
국미영이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과학고등학교 때 특히 성적이 좋았고 첼로도 잘하여 항상 실내악을 친구들을 모아 자주 연주회를 열었다.
Princeton대학에 들어가서도 계속 좋은 성적을 따고 대학 교향악단에서 첼로 수석을 4년 동안 했다..
MIT와 Woods Hole Oceanographic Institute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도 1년에 한 번씩은 실내악 연주회를 가졌다. 박사과정은 고고기후학을 했는데 2-3백만년 전의 기후를 공부하는 것인데, 그 당시에 육지는 현재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북태평양에 몇 달씩 가서 바다 밑 흙을 채취해 이를 바탕으로 옛날 기후를 알아내는 공부였다. 이로 하여 몆 백만년 전부터 오늘까지의 기후를 연구하여 앞으로 어떤 기후가 지구에 올지를 예측하는 것이다.
2008년부터 Williams College에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지구의 환경을 가르치고 지구의 기후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Berkshire Symphony Orchestra에 첼로 주자로도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