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아사카와 다쿠미 1923년 9월 11일 일기

정종배 2023. 4. 25. 10:18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1923년 9월 11일

일본인들이 100년 전 역사로 인해서 무조건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를 못하겠다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을 듣고

100년 전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살다 한국의 흙이 되어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힌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의 1923년 9월 11일 일기를 소개한다.

비록 식민지 임업시험장 말단 관료지만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한 디아스포라 삶을 살다간 내용이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화구상인 아버지는 아들이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만큼 살아가라는 뜻으로
아들 이름을 후지모토 다쿠미라 지었다.
아들과 1970년 망우리를 찾아 참배한 뒤
아들 후지모토 다쿠미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한국의 농촌과 도시의 변해가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필림 수 십만점을 고궁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코로라 시절 일본 각지 한국문화관에 성신교류50년 사진전을 펼쳤다.
한국에서도 초청 사진전을 펼쳐지리라 기대한다.

동강 하정웅 광주시립미술관 및 영암군립미술관 명예관장은 20대 때 재일한국인으로 취직을 못하고 방황하며 북송선까지 타려다 스트레스로 눈이 보이지 않자 우에노역에서 기차를 잡아타고 다쿠미의 고향 기요사토(청리)에 내렸다. 글에서 읽은 다쿠미 선생의 고향으로 식민지 관료였지만 한국의 입장을 인정하여 어느 누구도 고향 사람들은 다쿠미를 확인하여 주지 않았다. 그곳에서 미국 성공회 선교사 폴 러쉬를 만나 대화한 후 심기일전하여
도쿄올림픽 전자제품 대박에 힘입어 돈을 벌었다.
하고싶었던 미술을 재일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였다.
전뢰황 화가부터 이우환 화가까지 만여점을 수집하여 화가의 고향인 부산 포항 전주 대전 등을 중심으로 기증하였다

2006년부터 하정웅 켈렉터는 다쿠미 고향에 청리은하숙을 개최하였다. 토요일에서 시작하여 일요일을 거쳐 월요일까지 2박 3일 일정이었다. 10회부터 다쿠미의 고향 호쿠토시 의회에서 물적 인적 지원이 되었다.

2015년 2017년까지 한국에서도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를 운영하였다. 2000년 다쿠미 유택을 찾은 뒤부터 또랑시인 지남차인 다쿠미 선생과 중앙대학교 이사장을역임하고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한 동교 김희수 선생 그리고 폴 러쉬 등 기리고 추모하는 학교의 숙장대행을 또랑시인이 맡았다.

9월 11일
어젯밤부터 계속 내리는 비는 오늘도 하루종일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장장실에서 불러서 가 보니, 장장이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이번 도쿄의 재해에 관해서 어떤 조선인이 취한 태도는 동정의 여지가 절대로 없다. 결코 사소한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 조선인들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질책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본부에서 각국 고등관을 모아서 국장이 직접 훈시한 이야기라고 한다.

천재를 빙자해서 방화, 살인, 강도, 강간을 서슴지 않게 한다는 이 무서운 일은 인간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행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소수의 악당 때문에 조선인 전체가 궁지에 빠질 것을 생각하면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주의자나 불량배들은 일본에도 많이 있다. 이번이 악행도 조선인만의 소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름하에 일괄해서 논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찬성할 수 없다. 일본인은 대체로 배타적인 점에 있어서는 조선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선인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없다. 일본 시골에서는 아기가 울면 “언제까지 울고 있으면 조선인이 온다.”라고 겁주는 말조차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조선인에 대해서 저속하고 기분 나쁘고 잔인한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 있는 조선인을 보면, 일본의 자연과도, 인정과도, 조화되진 못하고,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된 것은 양쪽에 결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인이 일본에 가서 토목공사장이 막벌이 일꾼 무리에 들어간다. 거의 정다운 말 한마디 들지 못하고, 혹사당하고, 멸시당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사람은 항상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더 야성을 발휘할 뿐이다. 조선에 있었을 때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을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된다.
거기서 조선인은 바보다, 악당이다라는 정평이 나게 되는 것이다.

고슈(甲州, 지금의 야마나시 현)에서는 농업화나 현청이 장려해서 조선의 소를 농경에 쓰기 위해서 들여왔다. 처음에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서 전했더니, 아주 평판이 좋았다. 사용해 보아도 과연 성적이 좋았다. 조선의 소는 얌전하고, 힘도 세고, 변변치 않은 사료에도 잘 견딘다. 점점 더 평판도 좋아졌지만, 얼마 인 되어서 악화되어 성질과 행동이 거칠고 난폭해져서 다루기가 어려워졌다고, 최근에는 평판이 땅에 떨어져서 조선의 소를 구입한 자는 손해를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 일에 관해서도 조선에 있어서의 소의 사육, 일을 시키면서 다루는 정신적 의향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가족처럼 인간과 같은 지붕 아래에서 키워지고, 넓은 논밭에서 유유히 일했던 소가 갑자기 성미가 급한 일본인에 의해서 매를 맞고 혹사당하면, 비뚤어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도 소에게는 조심할 여지가 없다. 다루는 입장에 있는 인간에게는 자성의 여유가 주어져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도 많은 점에서 강자인 일본인이 조금 삼간다면 수습은 빨라질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세한 측이 취해야만 하는 태도이다.
이번 사건에 의해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더욱더 사이가 멀어질 뿐이다. 게다가 가까스로 자라기 시작한 조선인의 새싹을 꺾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에 무엇이 주의 뜻에 맞는 가장 올바른 길인지 계시받기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 싶다.
조선인에 대해서 ‘도대체 요즘 정부가 약간 응석을 받아주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야말로 원래대로 엄격하게 단속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인은 이번 사건으로 세계의 동정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 번 다시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탄압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조금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는.’라는 의견이 많은 것 같지만, 이러한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