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아사카와 다쿠미 관동대지진 관련 일기

정종배 2023. 4. 13. 13:18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관동대지진 관련 일기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온 일본인은 관서지방 출신으로 대부분 한 몫 잡으러 왔다고 말해진다.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는 달랐다. 일본 관동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출신이다.
다쿠미 선생이 태어난 고향은 고구려 유민들이 말을 기르며 살았던 곳으로 자신의 몸 속에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 있다며 믿었다고 전해진다.
형님 노리타카는 하이쿠 80여 수를 남겼다. 그 시에서도 고구려 후예라 노래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한국의 미를 한의 미 비애미라 일컫은 야나기 무네요시 친구인 형 노리다카는 조각을 전공하고 1913년 남대문소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했다. '조선도자기의 신'으로 불릴만큼 도자기에 조예가 깊다. 해방 후 미군정이 조선총독부 지하 수장고에 도자기 정리를 부탁하여 일년 늦게 일본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조선 백자 특히 분청사기는 이 두 형제가 연구하고 집필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알려졌다.
두 형제는 전국 도요지 700여 곳을 답사하고 정리하여 도자기 관련된 분들은 이 두 분을 중시조로 여길 정도다.
전국을 돌면서 연희 굿 풍물 풍속 등을 살펴본 두 형제는 한국의 미를 멋 흥취 풍류 가락이라 말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농업학교 졸업 후 1914년 형인 노리타카에 이어 한국에 왔다. 지금의 추계예술대학 교정인 의령원이 우리나라 최초 수목원인 임업시험소이다. 다쿠미는 임업시험소 고원으로 취직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말단 관리지만 1922년 지금의 청량리 국립산림과학원(홍릉수목원) 임업시험장 이전을 주도했다. 임업시험장 뜰에 홍파초등학교에서 30년 된 반송을 옮겨 심었다.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나무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은 이 반송 앞에 서서 다짐을 하는 성지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소나무이고 장소이다.

다쿠미는 수목 관련 잣나무(조선오엽송) 씨앗 틔우는 법을 조선인 노동자의 말을 듣고 온실에서 2년 걸린 과정을 노천에서 일년만에 어린 묘목을 얻어 길렀다. 현재 우리나라 인공림의 37%가 잣나무이다. 대한민국 산림녹화 작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두 형제는 조선민족미술관(지금의 용산의 중앙박물관 전신)을 경복궁 자경당에 개설했다. 그 당시 민족이란 말을 다쿠미 선생이 고집하였다고 알려졌다.

다쿠미 선생은 1920년대 문화계의 주요 인물로 한여름밤 피서법으로 제기역에 내려 달빛 아래 정릉천을 걸어 수목원을 한 바퀴 돌고 청량사에서 다쿠미와 차 한 잔 마시며 차담을 나누는 시간이 최고 멋진 풍정이라 알려졌다.

다쿠미는 폐허 동인과 세교했다. 오상순 민태원 변영로 염상섭 황석우 김억 남궁벽 등이다. 임종국 선생이 1965년 발표한 친일의 글 한 편도 남기지 않은 오상순 황석우 변영로 시인과 각별했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민예 관련 일을 하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수집한 한국의 주요 유물을 일본 민예관 1/10을 차지할 정도로 귀한 민화 도자기 항아리 민속품 등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두 형제는 3,000여 점을 그대로 남겨뒀다.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고 알려져 특별전을 열 것을 일찍부터 요구하고 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저서는 '조선의 소반'과 유저로 '조선도자명고' 등이 있다.

2000년 4월 첫 토요일 오후 망우리 다쿠미 선생의 유택을 답사한 후 또랑시인 지남차로 자리잡은 선생이다

일기 내용은 다쿠미 선생은 식민지 관료지만 한국인의 입장을 이해하며
칸트가  말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였다고 알려졌다.

사후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15년 동안 수록하여 디아스포라 삶을 기리고 추모하였다.

9월 10일 밤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그러나 왠지 차분한 밤이었다.

7월 23일부터 35일간의 홋카이도, 도호쿠 지방에서부터 고향까지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여행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전라북도에 이미 약속된 임업 강습회의 강연을 하러 가고, 9월 2일 전주에서 도쿄 대지진의 뉴스를 보고 놀라서 그날 밤 야간열차로 경성에 돌아왔다. 도쿄에 관해서는 편지도 교통도 단절되었기 때문에 누님댁의 소식도 아직까지 알 수가 없다.
여행 때부터 오늘까지 일기를 쓸 기분이 아니었지만, 오늘 밤은 왠지 차분한 기분이어서 무엇인가 쓰고 싶다.

마사토시 군의 편지에 의하면 “도쿄 대지진의 참해는 실제 재해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지진 때문이 아니라 불량조선인의 방화에 의한 화재 때문이라고 전해져서 도쿄 그 근교에 사는 일본인들이 격양해서 조선인만 보면 다 죽여버린다는 기세여서 선량한 조선인까지 대부분 목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고 쓰여져 있었다. 그 일은 어제 이마무라 씨에게도 들었다. 이마무라 씨는 경무국장과 친한 사이이기도 하고, 정보위원이기도 해서 아직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말했다.
조선인 중에서 누군가는 무분별하게 석유관을 들고 방화하고 돌아다녔다는 것, 피난하는 부녀자를 욕보였다는 것, 일본인의 격양이 극도로 달해서 조선인아리고 하면 그 인간이 범인인지 아니지를 판별할 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때려 죽인다는 것, 일본인 중에서도 조선인과 용모가 닮은 자는 오해받아 살해된 자도 있다는 것, 도쿄 근교의 청년단들은 지금도 불량 조선인이 역습한다고 소문을 퍼트려서 준비하고 대처하고 있는 자들도 많다고 한다. 이상의 일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불안하고 씁쓸한 일이다.

아무리 조선인이 일본에 반감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갑작스러운 재해를 틈타서 방화를 하다니 너무 잔인하다. 조선인 중에서 어리석은 자를 선동해서 그렇게 시킨 못된 일본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화재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사상사들은 실제의 10분의 1 이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생각하면, 방화한 놈들의 죄는 가볍지 않다. 시민의 경악도 무리가 아니다. 군중이 흥분했을 때여서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조선인을 보면 살려두지 않는다는 것도 난폭한 일이다. 도대체 일본인과 조선인이 융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의 시골 신문에는 조선인 전체가 마치 불량배인 것처럼 쓰여져 있다. 조선인의 신문에서도 또한 이와 같은 재해를 인류의 사건으로서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다소 소홀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따로따로가 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슬픈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악마는 두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믿는다. 조선인만이 이번의 뜻밖의 천변의 기회를 이용해서 방화하려고 계획을 했던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일본인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모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인이 막벌이 일꾼들을 앞잡이로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나쁜 습관이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조선인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얀 옷만 입고 있으면 모두 똑같은 조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인 중에서 유식자들도 조선옷을 입고 일본인 동네를 걸으면 무시무시한 모욕을 당한다고 한다. 우리집의 김 군들도 어제 미술관의 짐 정리를 도와 주다가 미술관의 수위 마누라에게 모욕을 당해 분개하고 있다. 시시한 일로 시작된 것 같은데 결과는 커졌다. 사실은 이렇다. 김 군이 일을 마치고 손을 씻기 위해 수돗가에 갔다. 거기서 수위 마누라가 있어서 가능한 공손하게 인사하고 세숫대야를 빌려달고 부탁했다. 그 여자는 확실하게 거절하지도 않았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두서너 말만 거만한 태도로 응답했지만, 그 후에는 입을 다문 채였고, 그 태도가 너무나 꼴보기 싫었다고 했다.
김 군은 일본어도 잘 한다. 김 군이 실례되는 말을 할 염려도 없는데, 일본 여성에게 가끔씩 모욕을 당한다고 한다. 대체 여자들이랄 생각이 얕다. 마음이 좁고 깨끗하지도 않으면서 노골적으로 그것을 나타낸다. 우리 어머니도 조선인에 대한 생각에는 좋지 않은 점이 많다. 그리고 일본인끼리라면 내색하지 않을 정도의 일이라도 금방 나타낸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의 생각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도 그러한데, 하물며 다른 일본 여자들은 더 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성의 혼마치 근처의 상인들은 더 심하다. 나도 조선옷을 입었을 때에는 때때로 모욕을 당해서, 불쾌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이러한 일은 사소한 일 같지만, 등한시 할 수 없는 일이다. 평상시의 증오를 유사시에 잊을 수 있는 인간은 적을 것이다. 인류라든지, 신이라든지 하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증오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평상시에 인간을 대상으로해서 증오를 느끼고 있는 자도, 때로는 신이라든지, 인류라든지 하는 큰 문제 앞에 머리를 굴려서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그 어느 쪽도 이러한 점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들은 이러한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한다.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신 앞에서도 증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민족 모두 은총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도쿄에 있는 조선인들 대다수가 곤란에 처한 일본인과 그 집이 타버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는.
그렇게 조선인이 나쁜 놈이라고 믿고 있는 일본인도 근성이 아주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저주 받은 인간들이다. 나는 그들 앞에 조선인의 변호를 하기 위해서 가고 싶다고 절실히 느낀다.
이번 도쿄의 참해 대부분을 조선인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고 역사에 남긴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일이다. 일본인에게도, 조선인에게도,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다.
그러한 사실이 존재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조선인이 그렇게 어리석은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다.

이러한 사변에 대해서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교회의 태도이다. 얼마 안 되는 기부금을 모으고, 일본과 연락을 취하는 통신에만 몰두하고 있다. 돈은 관청에서도 그 외의 단체에서도 모은다. 통신정보는 요즘 관청이 훨씬 자세하고 신속하고 요령 있게 처리한다. 교회에는 다른 사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와 같은 천변이 알리고 있는 신의 소리를 듣는 일과 일본과 조선, 두 민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관청이나 다른 세속적인 단체의 흉내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정신적으로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등대가 되어야만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궁의 장대함도 아무 흔적 없이 없앨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일본은 대 도쿄를 내세우고, 군비를 뽐내고,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자랑하는 것을 삼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 공통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영원한 세상에서 사는 길인 것을 교회는 세상에 역설해야만 한다.

9월 11일 일기는 다음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