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한국전쟁 73주년과 망우역사문화공원과 김영랑 시인

정종배 2023. 6. 25. 10:50

6·25 한국전쟁 73주년과 망우역사문화공원과 김영랑 시인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중
6·25 한국전쟁과 관련 있는 유명인사는 다음과 같다

6·25 한국전쟁 기간 중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분은
김동명 강소천 김이석 이중섭 차근호 이영학 등이다.
북한군 종군작가 즉 선무반 함세덕 극작가이다.

일제 강점기 남과 북 정권에 까칠한 「내 마음은」·「파초」 등 민족시인 초허 김동명
2010년 고향인 강릉 사천 경주 김씨 수은공파 사천 문중 납골당에 안치됐다.

백석 시인 제자로 전시 국어 편집으로 <유관순 노래>·<스승의 은혜>·<태극기>·<금강산>·<코끼리 아저씨>·<꼬마 눈사람> 등 베이붐세대들이 국민학교 다니며 제일 많이 배워 부른 동요 작시 아동문학가 소천 강용율, 후손들이 올 음력 오월 이장을 계획하고 있기에 설득하여 5년 연장을 하였다.

남과 북의 정권을 살아본 소설가 김이석, 부인인 박순녀 소설가 사후에 남편인 김이석 곁에 묻히고 싶지만 현재의 법으론 어떤 경우든 묘지를 쓸 수 없다. 서울시 조례가 바뀌어 시인 김영랑과 그 외 몇 분을 다시 모실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김수영은 김이석 소설가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월남 후 14년 동안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 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차근호·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 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이중섭·차근호는 ‘3·8따라지’라며 은연중에 반공이란 이데올로기의 잘못된 만행이 뛰어난 예술가의 혼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한다.

친일 반공 월북 인민군 선무반 사실주의 극작가 함세덕, 동생의 후손들 즉 조카들의 연좌제 트라우마 속에서 비석을 세우는 날 장조카가 전사의 '전'자를 지운 뒤 지극정성으로 가족묘지를 잘 관리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때 릿쿄대학 재학생으로 미군정하 강원도 지사 며칠만에 그만두고 코리아 헤럴드 초대 사장으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인 월파 김상용, 전시 수도 부산 승리각에서 김활란 박사 생일잔치 초대받아 게장을 먹고 처방 잘못하며 식중독으로 운명했다. 김활란은 수복 후 망우리공동묘지 동남쪽 김상용 시인의 유택을 마련하여 주었다.

망우리묘지 / 고은

망우리 공동묘지는 / 서울의 저승 / 1950년 9월 30일 / 그곳조차 / 싸움터였다 // 6천개의 무덤들은 엎드려 있고 / 유엔군과 / 인민군은 / 무덤 사이 / 총탄 빗발치다가 / 서로 달겨들어 / 총검으로 찔렀다 // 전사자의 시체가 / 무덤 사이 /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 흑인병사 / 백인병사의 시체 / 인민군의 시체 / 벌초하지 않은 풀 깔고 나뒹굴었다 // 사투 1시간 15분 / 쌍방 시체 37구 / 이상 // 망우리 공동묘지는 다시 묘지로 돌아갔다
- 고은 『만인보』 16권 민음사

관동대진 대한인 대학살로 귀국하여 남도 정서를 바탕으로 시문학파 독립운동가 시인 영랑 김윤식 1990년 용인천주교 묘지로 이장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재이장하기를 후손들은 바라고 있다.
강진군에서 후손들의 바람을 전폭적으로 다 들어주겠다며 생가 안으로 유택을 마련하려 애쓰고 있다.

그동안 김영랑 시인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를 후손들의 말씀을 중심으로 전하면 다음과 같다

영랑 시인의 죽음에 대한 ‘서울 수복 기쁨에 거리를 걷다 파편에....’ 이렇게 알려졌지만, 실제는 ‘돈암동 지인의 반지하에서 식구들과 숨어 있다, 밖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젊은 새댁을 안으로 들이고, 시인이 밖으로 나와 잠시 쉬는 사이 폭격의 파편으로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초장지가 회현동, 장충동 등이 아니고 이태원 가까운 한남동이었다.
그리고 여순항쟁 문인조사반으로 다녀와 발표한 시 두 편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영랑의 셋째 아들 김현철 기자의 노력으로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왜곡된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오월 김현철 기자와 부인과 딸 그리고 영랑의 막내 따님 등과
하루를 강진읍에 다녀오며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그중에 ‘여순항쟁 유가족’들이 김현철 기자에게 ‘전두환의 손자도 사과를 하는데 민족시인 김영랑의 아들이며 강직한 기자 출신인 김현철 기자가 여수에서 강연하기 전 사과를 먼저 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김현철 기자께 몇 가지 참고할만한 점을 알려드렸다.
6월 말까지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시집 원고를 정리하기에
메일을 보지 않았다
오늘 아침 미국에 사시는 김현철 기자 카톡으로 ‘이메일 보세요’하여 열었다.

그동안 있었던 과정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간 집안 다 무고하시오?

그동안 고민해 오던 여순 항쟁 관련 사과문 작성이 아래와 같이 잘 풀려 다행입니다.
희생자 유족회 연합회장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니 참고하세요.
이걸로 그 문제는 다 해결된 것 같습니다. 다 정선생 덕분이오.

존경하는 이규종 여순희생자 유족회 연합회장님 굽어 살피시압.

저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1974년부터 현재까지 49년 간 거주중인 고 김영랑 시인 유족 대표 김현철(만 87세)이라 합니다. 이 회장님께 멀리서나마 인사드리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궁금하실 듯해 간단히 저를 소개해 드리면, 저는 1963년 이래 언론에 몸담고 있습니다.
제가 국내에 있었더라면 좀 더 일찍 이회장님을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 유족들을 직접 찾아뵙고 위로의 인사를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당시, 선친 영랑 시인의 글, 특히 시 ‘절망’의 구절 중 ‘반란을 일으킨 무리’라는 뜻의 ‘叛徒’라는 단어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가슴을 쥐어뜯는 울분과 억울함으로 기가 막힌 세월을 살아오신 희생자 유가족 여러분께 어떻게 진심어린 사과를 드려야 할까를 최근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여순민중항쟁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발표한 영랑 시 ‘절망’에는, 9번째 줄 ‘軍兵’의 자리에 ‘반도’라는 단어를 원저자 몰래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고 놀라는 한편, 영랑 유가족으로서 이제 희생자 여러분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음을 느낍니다.

동아일보 1948년 11월 16일 자에 처음 나간 영랑 시 ‘절망’의 경우, ‘군병’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정부 측은 이듬해인 1949년에 이 두 번째 나오는 ‘군병’ 대신, ‘반도’ 두 글자를 자기네 마음대로 삽입,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당시, 정부의 목적은 여순항쟁을 ‘반란사건’으로 간주, 이를 이용해 반공사상을 국민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부도덕적인 장난을 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봐도 당시 이승만 정부의 이런 장난은 원저자에 대한 결례가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9순을 앞 둔 현재까지 그런 예는 처음 발견, 놀라고 있습니다.

이 시가 맨 처음 발표된 동아일보 보도 내용과 그 후 발간된 여러 국문학 교수님들, 김학동, 이숭원, 오하근, 허윤회 등 모든 학자들의 영랑 시 관련 저서들 중 ‘절망’ 시 어디에도 ‘반도’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음은 ‘반도’가 아닌 ‘군병’이 옳았음을 입증합니다.

결론적으로, 영랑 시인은 두 편의 여순항쟁 관련 시 어디에도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 유족들이 분노해야 할 단어나 구절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군인들만을 대상으로 쓴 시였습니다. 정부 측은 그게 불만이었기에 교활하게 ‘군병’ 대신 ‘반도’를 슬쩍 삽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알 수 없는 희생자 유족 여러분들께서는 그 긴 세월을 ‘반도’라는 단어 때문에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한 누명 속에서 세상을 바로 못 보고 불안한 삶을 살아오셨으며 원저자인 영랑 시인을 원망들 하셨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게다가, 당시 진압군 장교의 일방적인 설명에만 의존해서 ‘여순’ 현지를 단 이틀간 돌아보고 귀경하신바, 희생자 유족들 측과는 대면조차 할 기회조차 못 잡았다는 사실 또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문인조사단 중에는 시시비비를 올바로 가려야 할 기자들도 두 분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 당시는 미군 측이 조종하는 이승만 정부 때로, 기자들조차 오늘날의 ‘기레기’들처럼 처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문인조사단이 현지에 도착한 때는 이미 진압이 끝난 지 1주일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양민들의 시신은 이미 다 장례를 치른 뒤였다는 뜻이죠. 이런 상황에서 조사단의 정상적인 취재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현지 지리에 어두운 문인들은 현장을 안내하는 진압군 장교의 안내대로 움직였고 그의 설명에만 의존했다면 어찌 억울한 피해자 유족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여순민중항쟁의 단초는 4.3 제주민중항쟁이 아닙니까. 미군 측의 지시를 받은 이승만 정부는 이에 굴종, 무고한 양민들까지 ‘빨갱이’로 몰아 학살할 것을 명령했으나 현지 주둔 제9연대의 힘으로는 진압이 어렵자 다시 여수 14연대를 파견, 제주 양민들을 토벌하라고 명령, 이에 14연대 장병들은 “무고한 국민에게 총질을 못하겠다”라며 이 명령에 반발한 결과였습니다.

여순 항쟁 때, 다수의 양민들은 평소 불편한 관계였던 자의 손가락질로 바로 현장에서 총살당하는 ‘무법천지’를 목격, 너무 불안해서 군인들과 함께 살길을 찾아 지이산으로 도피, ‘관제 빨갱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랑 시인의 시 두 편에 표현된 ‘왜놈들의 압제에 곧 이어진 또 다른 우리민족끼리의 동족상잔(民族相殘)’의 슬픔을 통곡하며 쓴 시 구절과 단어들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이 회장님, 희생자 유족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가슴 아플 뿐입니다. 다만, 제가 간절히 바라기는, 이 회장님께서 앞으로 희생자 유족 여러분께 영랑 시 ‘절망’에 나오는 ‘반도’라는 단어는 원저자 자신도 모르게 당시 정부가 조작한 결과라는 사실만 이해시켜 주신다면 영랑 시인이 받았던 억울한 누명도 머지않아 벗겨질 것입니다. 이 점 이 회장님을 믿고 이 자리를 빌려 미리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 귀국하게 되면 이 회장님을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댁내 여러분과 이 회장님 그리고 희생자 유족 여러분의 건안하심을 기원합니다.

2023년 6월 23일

다음 글은 내가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이니 참고하시오.

연세 많으신 어르신께서 직접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민족의 큰 사랑을 받아오신 영랑선생님 이시기에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용기내시여 소식전해 주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전국 유족회원님들에게 잘 전달하겠습니다 전국유족총연합회장 이 규종연세 많으신 어르신께서 직접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민족의 큰 사랑을 받아오신 영랑선생님이시기에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용기내시여 소식전해 주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전국 유족회원님들에게 잘 전달하겠습니다.

전국유족총연합회장
이 규종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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