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소파 방정환 - 어린이의 동무

정종배 2018. 3. 25. 21:02


방정환[方定煥] - 어린이의 동무

정종배(교사, 시인)

 

매년 5월이면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에 어린이가 많아진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손을 잡고 참배하러 가는 인물이 있다. 유택의 봉분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모습이 아니다. 자연석을 어설프게 쌓고 시멘트로 발라 그 위에 대리석 묘비(쑥돌)를 세웠다. 묘비 앞면에 동심여선(童心如仙), 어린이의 동무’, 뒷면에 동무들이새겨져 있다. 참배객들이 묘비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중 가장 간직하고픈 곳이다. 유택은 남동향으로, 한강, 검단산, 남한산성 등이 앞에 있고 시야가 시원스레 트였다. 유택의 주인은 소파 방정환. 어린이날이면 아동문학 관련 단체와 사람들이 이곳에서 행사를 갖는다.

소파 방정환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여 소년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천대받고 학대받던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라는 존칭어를 널리 보급하였다.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 제정에 힘을 썼다. 어린이인권선언을 하는 등 우리가 자랑할 만한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위인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시대인데도 그 억압에 굴하지 않고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일경으로부터 불령선인으로 찍혀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으나, 33세 짧은 생을, 오로지 어린이를 위한 그의 삶은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에도 그 오롯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는 진보주의자요, 실용적인 생활 감각으로 개혁을 꿈꾼 청년이며, 어린이인권운동가, 아동문학가, 어린이교육가, 독립운동가로 근현대사의 선구자다.

소파는 1899119일 서울 종로구 야주개(당주동, 5호선 광화문역 1번 출구 바로 앞 로얄빌딩)에서 어물전과 싸전을 운영하던 상당한 재력가 방경수(方慶洙)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4, 전교생 중 가장 어린나이로 서대문 근처 사립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열 살 때 어린이 토론 연설회인 소년입지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활약했다. 동네 어린이를 모아 환등기를 비쳐 보면서 변사 흉내를 내는 등 구연에 대한 천재적 소질을 이때부터 나타냈다. 이 무렵 가산이 몰락하여 소파가 가난으로 고통스러운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소파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소파의 작품 동화 동요 등에 유난히 눈물이 많은 것도 소년 시절 가난 때문으로 추론도 가능하다. 이 시절 뼈에 사무친 궁핍함은 소파가 한동안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그런 경향의 잡지 개벽을 발간하고 편집하며 작품을 쓰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어둡고 허무주의적인 경향(후기 <백조> 동인)에 빠져드는 것도 이 시절 혹독한 가난과 가족 해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파가 어린이날 제정 소년운동 투신 아동문학가로 활동을 시작한 과정의 비밀을 푸는 분명한 열쇠는 가난이었다.

열다섯 살에 인쇄공장에 연판공으로 다니시던 부친의 권유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며,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여 잡지 靑春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기울어져 가는 조국과 스스로의 장래를 생각하여 담임교사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졸업을 1년 남긴 채 선린상업학교를 2년 만에 중퇴했다.

열일곱 살에 가계를 돕기 위해 총독부 토지 조사국의 사자생(瀉字生)으로 취직하여 류광열씨와 함께 봉놋방(노무자 무임숙소)에서 의기투합하며 조국과 자신들의 앞날을 위해 독서에 열중했다. 류광열은 평생 동지로 소파의 일생을 증언했다. 열여덟 살 무렵부터 천도교당에 나가 청년회 활동에 참여했다. 열아홉 음력 48일 소파의 아버지와 의형제로 3.1혁명 독립선언서의 33인 중의 한 분인 권병덕의 추천으로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 3녀 손용화(당시 17, 동덕여학교 출신)와 결혼했다. 의암은 사위 소파에게 조선의 미래를 걸었다. 1921년 일본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재동 처가에 머물렀다.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 소년운동을 준비했다.

192251일 창립 1주년을 맞아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의 날을 선포했다. 6월엔 안데르센 동화, 그림동화, 아라비안나이트 등을 모아서 번안한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다. 워낙 인기가 좋아 10여 판까지 발행했다. 이 무렵부터 여러 잡지에 소파, 목성, 북극성, 물망초, 몽중인, 잔물, 길동무 등 20여 개의 필명으로 다양한 글을 기고했다.

방정환은 33년 살다 갔다. 그 중에 소년· 청년운동을 하고 잡지 창간하여 글을 쓰고 전람회를 여는 등 문화 사회활동은 겨우 10년 조금 넘는다.

우리나라 최초 영화 잡지 녹성창간을 비롯해서 잡지 김원주(일엽스님)와 함께 창간한 신여자, 문예잡지 신청년, 소년잡지 어린이, 종합지 개벽, 여성잡지 신여성, 대중종합지 별건곤, 중학생잡지 학생》 《1 10개 잡지들을 발행한 개벽사의 경영책임을 맡았다. 동요 동화 동화극 번안동화 논문 탐사기 수필 등 800여 편에 이르는 글을 신문 잡지 등에 쓰면 일제 당국이 내용을 문제 삼아 일체의 강연 활동을 금지시킬 때까지 해마다 70여 회 이상 생애 통산 1,000번 이상 동화구연과 순회강연을 했다. 동아일보사를 움직여 비행사 안창남 귀국 비행 쇼를 펼쳐 3.1혁명 실패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소년잡지 어린이를 통해 동요운동을 펼쳤다. 설날반달윤극영, 고드름유지영, 따오기한정동, 오뚜기윤석중, 봄편지서덕출, 통딱딱 통짝짝박목월, 울엄마젖강소천, 오빠생각최순애(11), 고향의 봄이원수(15) 등이 응모(가사)해 뽑혔고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원수와 최순애는 결혼했다. 개벽사에서 소파의 편집을 돕고, 1936년 소파의 망우리공원 유택을 마련할 때 윤석중 마해송과 함께 주도한 최신복의 동생이 최순애와 꼬부랑 할머니최영애이다. 최영주(신복)의 유택도 고향 수원 선산에 있지 않고 소파 묘지 오르는 입구 왼쪽에 자리하고, 부모님 유택도 한 계단 위에 있다. 부모님 성묘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소파를 뵙겠다는 지극한 정성의 발로였다.

소파는 1928년 전 세계 20개국이 참가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망우리공원 유택이 있는 한국화단의 귀재라 일컫는 이인성 화가가 16세 나이로 특선을 하였다. 틈틈이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박희도 민족대표가 교장인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 전신)에서 아동 유희’ ‘동화등을 가르쳤다. 묘비명을 쓴 위창 오세창 선생도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다.

의암과 3.1혁명 민족대표 포섭 문제로 협의하기 위해 처가를 자주 방문하는 만해와 접촉하고 독립을 위해 청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았다. 재동 처가에서 몰래 오일철(오세창 선생 아들)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등사판으로 만들어 비밀리에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일주일 만에 석방됐다. 만해의 고향 홍성에 서울 토박이 소파가 한동안 낙향해서 살며 제2의 고향이라 했다. 만해는 소파의 운명을 디자인했다.

19203신여성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김원주(일엽 스님)의 요청으로 유광렬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여성지 신여자편집 고문으로 참여했다. 일엽 스님은 세 번의 자유연애와 이혼, 그리고 또다시 자유연애를 남녀는 성적으로 평등하게 자유로운 교제를 하고 그런 후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망우리공원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추모식에 김원주와 일본인 사이에 태어난 김태신(일당스님) 화백도 참가했다. 중학생 시절 일엽스님을 보고 싶어 수덕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나혜석 화가가 어머니 대신 젖을 만져보라고 하여, 모정을 그린 어린 마음을 달래주던 수덕여관에서 일화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1931723일 오후 664분 대학병원에서 소파는 지독한 비만으로 피가 돌지 않아 심장이 비대하여 그 때문에 급성 요독으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시력이 급히 떨어지며 호흡곤란으로 별세했다. 아들 운용에게 공부 잘하라문병 온 동료 후배에겐 일 많이 하라고 하였다. 장지는 홍제원 화장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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