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서해 최학송

정종배 2018. 4. 2. 21:55

■ 1901년(1세) - 1월 21일 또는 5월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臨溟)면에서 빈농(한의사)의 외아들로 출생.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고, 호는 경남(耕南). 지방 소관리를 지냄. 모친은 김소라 혹은 김능생으로 알려짐. 아명은 저곡(苧谷)-서울 부근 동리, 본명은 학송. 설봉, 설봉산인, 풍년년이란 호도 사용. 학벌은 소학교는 졸업(중퇴)한 듯, 어려서 한문 공부(부친, 서당)를 많이 함. 혈액형 B형.
■ 1905년(5세) - 한동안 함북 성진시 한천리 254번지 김순기(외숙) 집에서 기거함.
■ 1913년(13세) - 나무 베러 갔다 남의 산을 태워 놓고 죽게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친 일을 함.
■ 1915년(15세) - 성진보통학교 5학년 중퇴. 시장거리에 나가 『청춘』 『학지광』 등의 잡지를 사다 읽고,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상당 기간 읽음. 춘원의 글을 읽고 그를 존경하여 동경에 가 있는 춘원에게 여려 차례 편지를 주고받음.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의 글을 보내 줌.
■ 1917년(17세) - 가출한 부친을 찾아 만주 간도로 감.
■ 1918년(18세) - 3월 3일 『매일신보』에 이광수의 『개척자』에 대한 독후감 <개척자를 독하고 소감대로>가 최초 활자화 됨. 3월 25일 『학지광(學之光)』에 <후정원(後庭園)의 월광(月光)>등 산문시 3편 발표. 춘원의 이광수의 <무정(無情)>을 읽고 감명 받음. 간도로 가 유랑생활 시작. 한때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침. 간도로 가기 전 이혼(결혼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음). 이혼 사유는 애정이 없었고 빈곤한 생활 때문임. 부두노동자, 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로 전전함.
■ 1920년(20세) - 간도에서 재혼했으나 부인이 얼마 후 사망.
■ 1921년(21세) - 7월 22일 세 번째 처(결혼한 때는 알려져 있지 않음)와의 사이에 첫 딸 백금 서간도에서 출생
■ 1922년(22세) - 간도 생활에서 위병이 생긴 듯함. 이후 죽음 때까지 위병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죽음. 가을에 부친이 집을 떠남.
■ 1923년(23세) - 간도(間島)에서 봄에 귀국. 국경 부근의 정거장(회령역)에서 노동자로 생활.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에 서해(曙海)라는 필명으로 시 '자신(自身)'을 발표. 파인 김동환과 서신 연락을 시작함. 생활이 안전되지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 경성, 성진을 떠돌고 웅기에 있던 여동생 집에서 잠시 머물기도 함.
■ 1924년(24세) - 여름에 고향에서 일주일 정도 친구들과 지내면서 쌍포 바다 등에서 소일함. 8월말 춘원 이광수를 찾아 상경. 얼마간 파인 집에 머묾.  10월 춘원의 소개(주지 이학수 춘원 육촌 동생)로 양주에 있는 봉선사에서 3개월간 승려생활. 여기서 <탈출기>를 고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을 공부함. 11월 15일 어머니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 하였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개제하여 발표함. 주지(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 집으로 옴.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백금)을 버리고 출분. 『조선문단(朝鮮文壇』(1924년 9월에 창간 방인근 출자 이광수 주재 발간, 김억 김동인 염상섭 주요한 전영택 박종화 나도향 양주동 등이 주요 집필진)에 단편 <고국(故國)> 추천되어 문단 데뷔.
■ 1925년(25세) - 2월 『조선문단』사 사옥이었던 방인근의 집에서 기숙하며 활발한 창작활동. 『조선문단』에 단편 '십삼원(拾參圓)', '탈출기(脫出記)', '박돌(朴乭)의 죽음' 등 발표. 『개벽(開闢)』에 단편 '큰물 진 뒤'를 발표하여 일약 중견작가가 됨. 각종 잡지에 문사 프로필에 소개되기도 함. 4월 14 딸 백금 병사함. 김기진 권유로 KAPF 가입.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남쪽 지방 여행. 연말에 다시 남쪽 지방 여행.
■ 1926년(26세) - 1월 초 전남 영광 도착.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 4월 8일 문우였던 조운(曺雲)의 누이동생 조분려와 『조선문단』사에서 결혼식 거행(네 번째, 최남선의 대리 정인보 주례, 최남선, 방두환, 강세형 축사, 20여인의 축전, 새로운 결혼식, 결혼 후 한달 동안 여관 생활). 각종 문예지에 '폭군(暴君)', '백금(白琴)', '그믐밤', '무서운 印象' 발표. 명륜동 2가에서 살림. 6월 『조선문단』 통권 17호로 휴간. 『현대평론』 문예란 담당 기자로 당분간 종사.
■ 1927년(27세) - 1월 1일 장남 백(白) 출생. 1월 범 문단 조직을 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 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음. 1월 방인근으로부터 남진우(우당)가 인수한 『조선문단(朝鮮文壇)』사에 다시 입사, 복간됨과 동시에 그 편집 책임을 맡고 추천 위원이 됨. 3월호에 계용묵의 <최서방>을 추천함. 4월부터 다시 실직 상태. 5월 5일 『문예시대』사 주최 문예 강연에서 소설작법을 강연. 서울 기생들의 잡지 『장한』의 편집을 맡기도 함. 『현대평론(現代評論)』 등의 잡지사에 종사. 단편 '홍염(紅焰)', '낙백불우(落魄不遇)', '전아사(錢迓辭)' 등 발표.
■ 1928년(28세) - 8월 26일 개최 예정인 조선프로예술동맹 전국대회에서 조중곤, 이기영과 함께 재무에 피촉됨.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입사. 단편 '갈등(葛藤)', '부부(夫婦)' 등 발표.
■ 1929년(29세) - 2월 둘째 달 출생. 5월 성해, 회월, 일엽, 팔봉, 독견, 승일, 은상, 적구, 석영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문인 좌담회에 참석. 『신생』 문예 추천 작가로 위촉됨. KAPF 탈퇴. 한문 공부를 위해 개인 교수를 받음.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입사, 기자로 근무. 단편 '인정(人情)', '전기(轉機)', '무명초(無名草)', '주인아씨' 등 발표.
■ 1930년(30세) - 이른 봄 최독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이 됨. 두 살 된 둘째 딸 사망. 차남 택 출생. 국악계 명창 이동백, 김소희, 가야금 병창 송만갑 등을 초청하는 등 국악에 관심을 보임. 틈만 나면 장안의 관상가는 물론 심지어 무꾸리에도 남다른 신명과 열을 올리며 찾아 다님. 고영환, 이승만과 함께 체부동 118번지 노국공사가 살던 집을 공동으로 세내어 삶. 매일신보에 장편 '호외시대(號外時代)' 연재 발표.
■ 1931년(31세) - 5월 창작집 『홍염(紅焰)』을 “삼천리”사에서 간행. 8월 제주도 여행. 10년 만에 부친이 찾아와 몇 달간 머무르다 다시 간도로 떠남. 위병 악화로 병원에 입원.
■ 1932년(32세) - 5월 4일 『삼천리』사가 주최한 문인 좌담회에 김동인, 김원주(金元周), 방인근, 이광수, 현진건, 최상덕, 김억, 이익상, 김원주(金源珠)와 함께 초대됨. 위병이 부쩍 심해져 6월 초순 눕게 됨. 6월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 7월 6일 수술을 받기 위해 경성의전 병원으로 옮김. 7일 대수술 뒤 과다 출현. 수술 중 이익상, 죽마고우 최문국, 동료 박상엽 등 3인이 1200그램 피를 수혈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함. 7월 9일 오전 4시 20분 처남 조운, 의사 정민택, 누이동생, 이승만 그 외 간호원 2,3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둠. 당시 가족은 어머니, 부인, 아들 백(白 )과 택이 있었음. 주소는 체부동 118번지. 장례식은 최초의 문인장으로 장지는 미아리 공동 묘지.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김팔봉, 김억, 방인근, 심훈, 박종화 등과 그 외 많은 문인이 운집함. 이처럼 많은 문인이 한곳에 모이기는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 전해짐. 자동차도 4,50대나 몰려 장관을 이룸. 관을 운구차에 옮기는 것을 이익상, 김동환 등 6인이 하고, 관 위에 덮는 영정에는 이병기가 글을 씀. 관을 묻고 그 위 콘크리트한 곳에는 김운정이 서해 ‘최학송지구(曙海崔鶴松之柩)’라고 씀. 7월 23일 오후 4시 서울 백합원에서 이광수, 김동환, 박종화, 주요한, 양건식, 이병기, 방인근 등이 발기하여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 결성. 9월 28일 모친이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회령으로 떠남(1935년 6월 9일 아침 아내 조분려도 세상을 떠남)
1924년 단편소설 <토혈> <고국>으로 등단 1931년 장편소설 <호외시대>로 마감
소설 60편 수필 37편 평론 15편 그 외 몇 편의 시와 잡문을 남김.
1920년대 김동인, 전영택, 현진건, 염상섭, 나도향 등과 동렬에 자리매김. 빈궁문학, 체험문학, 반항(저항)문학, 신경향파(자연생성기의 프로)문학, 보고문학 등이라고 주장.

- 1933년 : 7월 8일 오후 8시부터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堅志洞)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소기(小忌) 추도식을 거행
- 1934년 : 6월 12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아리의 묘서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회 개최.
- 1945년 : 19세기 말에서 1945년까지 북한문학사에서는 김소월, 나도향, 이상화, 조명희, 송영, 이기영, 강경애 등 동일한 비중으로 서해 최학송을 주목하였다. 북한 소설사 라도향-최서해-조명희-리기영-강경애-리북명-윤세중-천세봉 등의 순서로 서술될 정도로 막중하게 취급함.
- 1952년 : 민중서관판 『한국문학전집』 제12권에 계용묵, 이상, 김유정 작품과 함께 소설 7편 수록
- 1955년 : 『최서해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 1956년 : 안함광 『최서해론』(조선작가동맹출판사) 남북한 통털어 최초의 단행본 본격적인 평론서.
- 1958년 : 9월 25일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됨(전국문화단체총연한회 회장 시인 이산 김광섭 이장추진위원장, 염상섭, 김송, 이헌구 등).
- 1966년 : 1월 21일 북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서해 탄생 65주기 기념회 개최. 박웅걸 문화상. 조영출 문예총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 공훈 배우 유경애가 <박돌의 죽음>, 배우 김기욱이 <혈흔> 낭독 작가 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영화가 서해 생애와 문학에 대해 보고.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의 민족주의 작가 도외시, 임화, 이태준, 김남천 등을 왜곡하여 선전하는 상황에서, 서해만이라도 남북 양측에서 함께 연구하여, 통일문학사를 위해서는 다행이라 함. 이념(이데올로기)-프로레타리아문학, 신경향파문학, 비판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등의 논의가 압도적.
- 1974년 : 박태순이 <작가지망>(문학사상1974.10)에서 서해를 주인공으로 작품화.
- 2003년 : 12월 4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산 57-1번지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묘지 발견(곽근 동국대 교수)
- 2004년 : 7월 31일 오후 4시 묘지 입구 도로변에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움
- 2015년 : 7월 31일 오후 3시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회장 남화창) 주최 서해최학송 83주기 추도식을 개최
(시인 정종배 묘지 발견, 봉분 및 묘역 단장을 사비로 3회에 걸쳐 함. 학생들과 동아리활동으로 묘지관리 및 문학작품 소개 및 감상 논술대회 등을 열고 있음. 최학송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기념사업회 산파역. 제자 중심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최학송통일문학상 제정을 추진하고 있음.)

「紅焰」과 「脫出記」

  “나의 소설에 홍염이란 것이 있다. 그 소설을 쓴 동기는 나의 장모되는 분이 홍염에 나오는 달니소라는 북간도의 궁벽한 산골에서 돌아가셨다. 장모되는 분은 슬하에 딸 하나밖에 두지 못하셨는데 필연 만리타국에 가서 돌아가실 때 자식조차 보지 못한 설움으로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사위라는 사내에게 기쁜 마음으로 맡기었다 할지라도 딸을 보지 못하는 정감에 이르러는 남에게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질 것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딸이나 사위를 죽을 때에 조차 만나 보지 못하게 되는 그 눈물겨운 원인이 어디 있느냐. 모두 다 貧困 때문이었다. 빈곤 때문에 그 분은 間島에 가셨고 빈곤 때문에 家出女息을 만나지도 못하였고 빈곤 때문에 窮死하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어떤 典型을 발견하였다. 즉 궁사하시는 장모를 통하여 一時代的 조선 사람들의 전형을 바라보았다.
 나의 소설가로서의 상상은 이에 비약할 토대를 얻었다. 만일 장모가 딸을 사위에게 出嫁시키지 않고 돈 때문에 도박이나 중국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하자. 그러면 이 사실은 어떠한 결망르 가져오고 말 것인가. 여기에서 도끼를 들고 살인 즉 복수의 길에까지 미칠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소설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니 事實 3 空想 7이라 할 것이다. 그 때는 수물 두 살 이었으니 7,8년 전이니만치 나의 상상은 조금도 괴로움이 없이 그에까지 미쳤다.

그 다음 「그믐밤」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남들은 나의 체험일 것 같이 보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全然 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고담 비슷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몽롱하게 기억하였다가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실상 내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것은 오로지 조선문단에 났던 「脫出記」였다. 탈출기는 내가 불우한 환경을 한탄하고 있다가 한 번 뛰기로 결심했다. 그 때의 심정을 一毫假借없이 그려 놓은 것이니 이 한 편은 나의 과거를 사랑하느니 만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나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사실이 있는 것을 붙잡아 가지고 추리고 붙이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자유로 상상의 날개를 날려가면서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리고 또 비교적 잘 되는 것이 나오는 줄 안다. 사실을 근거로 하면 사실 그 물건이 주는 압력과 질곡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붓이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실로 괴롭다. 또 사실 그대로라 하여도 사진사 모양으로 있는 그대로 記述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관을 통하여 그 사실에 크라이막스도 붙이고 인물도 矯正을 하여야 할 터이므로 도리어 노력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공상을 위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事實 3 空想 7분 주의로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한때 기자 생활을 했으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에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최 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며 진실하게 표현하여 ‘빈궁문학’이라는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貧窮) 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기의 신경향 문학에는 김기진ㆍ박영희 등을 중심으로 한 관념 문학과 최서해를 중심으로 한 체험문학이 있었다. 체험문학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세계를 작품에 옮기는 것으로서 최서해는 자신의 방랑 생활과 온갖 직업의 체험을 귀중한 바탕으로 해서 1920년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난의 아픔을 실감 있게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자전적(自傳的) 사소설(私小說)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현대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문장은 간결체로서 세밀한 묘사는 없이 서술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의 체험문학이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어야 했으나, 그의 문학은 예술성이 풍부하지는 못했고 일종의 소재 문학으로 소재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신흥하던 그때에는 빈궁한 생활의 체험 자체로서도 평가받는 때였으므로 최서해의 문학은 주목받았다.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고 소름끼치는 암담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시】<자신>(1923)

【소설】<고국>(1924) <기아와 살육>(1925) *<탈출기>(1925.조선문단) <박돌(朴乭)의 죽음>(1925), <큰물 진 뒤>(1925) <폭군(暴君)>(1926) <의사(醫師)>(1926) (소살(笑殺)>(1926) *<홍염(紅焰)>(1927) <낙백불우(落魄不遇)>(1927)

【작품집】<혈흔>(1926), <홍염>(1932)

<문학세계-가난한 백성의 증언> - 김우종

  최학송의 호는 서해(曙海), 아명은 저곡(苧谷)이다. 함북 성진에서 1901년에 태어나서 31세의 젊은 나이(1932년)에 요절할 때까지 그는 가난을 면치 못했었다. 성진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부친의 가출로 유년 시절을 모친과 함께 궁핍하게 보내다가 1917년에 간도로 이주하여 그의 가난의 고통은 더욱 극한적인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해가 세상을 떠난 지 3주년이 되던 1935년 7월에 박상엽은 그의 소년 시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누님이 하나 있었는데 출가한 뒤 죽었다는 것이다. 날 때부터 서해는 축복된 가정에 태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견묘(犬猫)의 사이와 같은 아버지의 미움과 어머니의 사랑 밑에서 자랐으니 어릴 때부터 음울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의 단편 소설 <박돌의 죽음>을 읽으면 돈밖에 모르고 인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한의가 나온다. 서해의 아버지도 한방의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해가 몰인정한 이 한의의 심리를 폭로하기 위하여 <박돌의 죽음>을 쓴 동기는 이 소년 시절에 받았던 그의 아버지의 인상에 다소 원인되지 않았을는지…(중략)…하여간 서해는 간도에서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생을 한 모양이다.--어떤 때는 상투잡이가 되어 나뭇바리 장수도 하여 보고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뙤놈한테 붙들리어 죽을 고비도 넘겨 보고, 두부 장수도 하여 보고, 노동판에서 십장 노릇도 하여 보고, ××단에 따라다니노라고 총을 메고 눈 쌓인 얼음 벌판도 헤매이다가 총에 맞아 죽은 동지의 시체를 혼자서 얼음 벌판에서 밤을 세워 가며 지켜보기 등등--이러한 실례를 보더라도 서해는 한 개의 '소설적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조선문학’ 제4권 제4호 ‘서해의 극적 생활’에서)

  이 같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서해야말로 한국적인 생활의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성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증언할 수 있는 작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창조파', '폐허파', '백조파'들은 이런 생활을 대개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문학적 소재를 도시의 생활 주변이나 간접적인 체험에서만 얻었는데 반하여 서해의 빈궁은 직접적 체험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삶의 현장에 대한 산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의 문학이 그 이전의 예술 지상파들의 문학을 능가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것 때문이다. 즉, 기존의 문학과 달리 유독 가난한 삶을 묘사했다는 데서가 아니라 그만큼 절실한 문제성의 토대 위에서 몸으로 부딪친 아픔을 실증하면서 작가로 출발했다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해가 이 같은 작품으로 문단에 나타난 것은 1924년이었다. 1917년에 간도로 이주했다가 1923년에 귀국하고, 홍수로 모든 가산을 잃어버린 후 가족을 버리고 상경하여 다음 해 [조선문단]에 <고국>이 추천되어 작가로 출발한 것이다. 이 무렵에 그는 춘원에 소개로 양주 봉선사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그의 말에 의하면 '중놈들이 아니꼬와서 메다 꽂고' 나온 후 [조선문단]의 편집 심부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침식을 얻고, 여기서 원고를 써서 여기에 발표하고 추천 작가가 되었다. 이때는 방인근이 [조선문단] 10여 호 발간에 이미 파산의 궁경에 직면했던 때이니만큼 서해의 생활이 여전히 가난의 연속이었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고국> <탈출기> <기아와 살육> 등을 발표하는 사이에 때마침 일어나기 시작한 프로 문학의 물결 속에서 가난을 대변했다는 것만으로 대번에 인기 작가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뼈저린 가난을 조금쯤은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단에서의 교우관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여자와의 성적 관계도 때때로 절제를 잃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위문협착증이 생겨 대수술을 받고 문단에 나선 지 10년도 못 된 1932년에 사망했다. 서해가 죽은 지 2주년이 되자 문단에서는 당시의 미아리 공동 묘지의 그의 무덤에 묘비를 세워 주고 고인을 추모했다.

  서해는 나무장수, 두부 장수, 물장수, 머슴살이 등으로 인생의 저변을 핥아 나갔다. 저변에 침전된 쓰디쓴 독소만을 핥으면서 젊은 가슴을 태웠기 때문에 그에겐 생존의 의미에 대한 절실하고 준엄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공포ㆍ분노ㆍ절망ㆍ굴욕ㆍ체념-이처럼 인생의 저변의 독소만이 그가 알고 있는  체험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는 이 저변을 박차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밝은 태양을 향해 목마르게 손을 뻗치는 향일성(向日性), 끊임없이 압력을 박차고 위로 솟구치려는 저항의 습성-이것이 그의 생리요, 사상이요, 문학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은 절망과 공포와 분오 등으로 충만된 빈궁의 문학이요 그 가난의 비애 속에서 해방되려는 저항의 문학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설의 기법으로는 뛰어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이론적 밑받침과 그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해 나갈 기본적 역량을 소유하려면 좀더 일찍부터 습작의 과정이 있었어야만 했다.

  서해의 작품들은 대개가 가난한 삶에서 소재를 구한 것이다. <고국> <탈출기> <그믐달> <아내의 자는 얼굴> <기아와 살육> <박돌의 죽음> <살려는 사람들> <큰물 진 뒤> <이역원혼> <전아사> <가난한 아내> <홍염> 등 대부분의 작품이 가난한 살의 고통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의 표현에 있어서 그가 공통적으로 지녔던 감정적 경향은 그 가난의 원인이 사회나 인간에 대한 반항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상적인 비판에 의한 어떤 투쟁도 의식도 아니고 일종의 본능적인 반항으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단 이 같은 반항은 사회 과학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비판적 반항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반항의 양상이 계급 관계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왜냐면 그의 가난과 그 고통 앞에는 항상 그보다 잘 사는 계층이 있었으며 거기서 경제적 대립 관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반항 의식은 사회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한 착취자로서의 유산 계급에 대한 사상적 도전이 아니라  다만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주는 자에 대한 즉물적 본능적 반항으로서의 계급의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믐달>(1925년「신민‘)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의 전반부는 머슴에 대한 고용주의 잔인성으로 인한 머슴의 비극성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고용주 김좌수는 아들 만득의 연주창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잔인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머슴 삼돌은 주인 연주의 부탁으로 뱀을 잡으러 다니다가 물리기도 하고 잡아 온 뱀에다 손을 대고 물리도록 시험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대나무통 속에 뱀을 넣고 한쪽 끝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물리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득이의 연주창을 뱀이 물어 버리면 치유된다는 처방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머슴 삼돌이가 인간 이하의 학대를 주인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는 이같은 김좌수의 횡포를 계속시켜 나가거나 삼돌이의 이에 대한 보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자신의 죄과로 인해서 고민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김좌수의 인간적인 약점을 파헤치고 그 비극적 종말에 대해 동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김좌수는 삼돌의 목에서 살점을 떼내어 만득이의 연주창 치료에 쓰려고 한다. 그러나 삼돌이를 타누르고 살점을 떼내게 하다가 마침내 살인의 과오를 범하고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마치 멕베드가 나약한 덩컨 왕을 죽인 후 그 환상에 쫓기어 고민하듯이 김좌수는 그같은 공포 속에서 영원히 평화의 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김좌수가 죽인 삼돌이의 시체는 암야의 빗줄기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지만 그로부터 그의 집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공포의 그림자만이 떠돌기 시작한다. 이웃들도 모두 웬일인지 흉가처럼 여기고 발을 끊는다. 이렇게 되자 김좌수의 공포증은 마침내 절정에 도달하고 만다. 그리고 보신용으로 비수를 품고 자던 그는 어느 날 야반에 삼돌이의 환상 앞에서 떨다가 아들 만득이를 죽이는 실수 끝에 자기도 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작품 결말은 김좌수가 그의 머슴에게 끼친 죄과의 당연한 응보라고 여기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약점에 대해서 지극히 동정을 품도록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발표 시기가 프로 문학의 문학사적 시기와 일치한다 하더라도 그같은 계급적 투쟁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서해는 결국 사회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계급의식이라기보다는 다만 학대받는 인간과 그 학대자를 인간 본연의 자세로 그려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만일 서해가 이 작품에서 계급적인 투쟁 의식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이 작품은 그보다 훨씬 앞부분에서 날카롭게 종결되어야 했을 것이다. 즉, 몸을 모로 뒤치면서 머리를 드는 삼돌이를 타 누르고 칼을 푹 찔러 버린 김좌수-살 한 점 떼어내려다가 동맥을 건드려서 피바다를 만드는 김좌수-죽어 버린 삼돌이를 둘러메고 캄캄한 빗속으로 사라져 버린 김좌수-김좌수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 끝맺고 작품 전체의 결론을 내렸다면 이 작품은 분명히 계급 투쟁 의식을 고취시키는 프로 문학의 방법과 일치했을 것이다. 왜냐면 이 장면은 머슴을 부리는 상층 계급의 잔인성, 그 잔인성의 극치를 폭로한 부분이며 따라서 유산 계급에 대한 증오심과 반항심을 선동하는 소재로서는 아주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해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의 대립 관계가 사회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분명한 계급의식이 아니었다는 점은 김좌수의 아내의 표현에서도 발견된다. 만일 서해가 사회주의자들이 지니는 그러한 계급의식을 표현하려고 했다면 그는 김좌수의 아내도 압박자로 그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좌수가 머슴을 쓰러뜨리고 발길로 짓밟을 때 그 다리를 끌어안고 울 듯이 애원하며 폭행을 말린 사람은 다름 아닌 김좌수의 아내였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유산 계급에 대한 반목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특정한 인물이나 그 인물의 특정 사건에 있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 유산 계급 전체를 착취자ㆍ압박자로 규정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때때로 나타낸 반목적인 저항 의식은 자연 발생적 본능적인 것이지 그가 당시의 김기진의 프로 문학론 같은 데서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같은 작품에서 그것이 사상적으로 정립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 제도의 심층적 구조를 유물 사관에 의해서 분석하고 그 모순성을 설명하는 형식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체험의 좁은 한계 속에서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르포르타지의 성격이 강하며 그것은 특히 <탈출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간도의 생활 경험을 그려낸 1925년작 <탈출기>는 그의 처참한 빈궁의 체험의 보고 기록으로서 대표적인 것이다. 그는 거기서 다음과 같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아아, 차라리 나의 고기가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내 눈앞에서 사랑하는 늙은 어머니와 아내가 배를 주리고 남의 멸시를 받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구나.

  서해는 <탈출기>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것을 계급의식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보고 형식으로 이 작품을 마무리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큰물 진 뒤> <아내의 자는 얼굴> <전아사> <기아와 살육> 등에서도 그같은 형식은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렵에 김기진은 창작평에서 주요섭의 작품과 아울러 서해의 <기아와 살육>을 높이 평가(1925년 [개벽] 7월호)하며 당시의 사회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적 태도'를 나타낸 새로운 작품이라고 추켜세웠다.

  이렇게 평가한 김기진은 당시 프로 문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그런데 문학 이론은 나왔지만 작품은 없었다. 작가들에게 하층 계급으로서의 체험도 없었고 사회 과학적ㆍ비판적 안목도 없었으며 또 대부분이 예술 지상파의 문학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고 고발하는 최서해야말로 그 방면의 문학을 성취시켜 나갈 유일한 후보자로 선택되어 버린 셈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자로서의 사상성도 없이 그같은 작가로 추켜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사회주의적 사상이 만일 있다고 하면 이것은 벌써 그때부터 희미하게 움돋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이 사회주의 사상인지 무언지 모르고 다만 내 환경이 내게 가르친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전아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사실로 남들에 의해서 사회주의자로 불리어졌을 뿐이지 자기 자신은 그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냐면 유물 사관에 입각한 사회주의 서적을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못했고, 전연 이론을 지니지 못했으며, 그저 고용주의 대한 반항심만 가졌다는 것으로는 결코 사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반항이 지극히 단순하며 사상적 이론의 배경이 없었다는 것은 <큰물 진뒤>(1925년)에서는 이렇게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홍수의 참상을 겪는데 그 원인은 일제의 폭정에 있었다. 그들은 홍수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견고한 방축을 쌓고, 물줄기를 산 아래로 돌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일본의 행정 당국은 이 마을 밖으로 철도를 건설하고 물줄기를 방축 쪽으로 흐르게 해서 방축이 무너질 원인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참상의 원인은 일제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무조건 잘 사는 이주사에게 반항심을 터뜨리고 강도질을 해 낸다. 그만큼 이 작품 속의 반항은 무분별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아와 살육>(1925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경수는 식칼을 들고 어머니와 아내를 찌르고 자식을 찌르고 지나가는 행인을 찌르고 중국 경찰서와 파수 보는 순사를 찌른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반항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자는 우리 민족이 왜 조국 땅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쫓겨가서 그같은 고통을 겪었는지 원인적인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식민지 수탈 정책이 빚은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암시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상에 나타난 가난한 자로서의 반항은 그만큼 무분별한 것으로 끝나고 있다.

  단 이처럼 작품 속에 반영된 반항이 무분별하고 본능적인 것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약점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가 당시 유행하던 프로 문학의 이론과  방법이라도 그대로 적용시켜 나갔다면 그의 작품 역시 문학으로서의 순수성을 다분히 손상받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같은 도식적 방법을 도입하여 예술성을 손상시키고 정치적 목적의식에 예속시키기 전에 체험 자체를 솔직하게 그대로 표현해 나간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특히 고통받던 사람들의 아픔을 가장 리얼하게 대변했다는 점에 있어서 문학사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고국을 등지고 간도로 쫓겨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박진감 있게 그려 나간 <탈출기>는 문학이 지녀야 할 역사의 증언으로서 훌륭한 것이다. <박돌의 죽음>(1925년) 역시 가난 때문에 잃은 귀한 아들 '박돌'과 그 때문에 실성해 버린 그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의 어두운 시대상을 고발하고 있다. <홍염>(1927년) 역시 그렇다. 서간도 근처의 가난한 촌락을 배경으로 그린 러시아 땅의 묘사도 뛰어나지만 중국인 지주에게 딸을 빼앗긴 문서방네 부부의 종말은 비극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런 뜻에서 그의 작품들은 그 시대 우리 민족의 가장 어두운 사람을 증언한 체험의 기록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최서해 연구>

【약전 및 작품경향】

   1924년 <고국>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5년에 그의 대표작 <탈출기>가 발표되었고 이어 <살려는 사람들>, <박돌의 죽음>, <큰물 진 뒤>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이들 작품은 거의 공통적으로 작자의 직접 체험의 반영인 듯한 극도의 빈궁과 그에 대한 격렬한 반항적 태도를 포함하고 있는 신경향파적 경향의 작품들로 당시 문단의 조류에도 상응하는 것들이었다. 1925년에 카프에 가담하였다가 1929년에 카프를 탈퇴하여 이제까지의 경향파적 빈궁문학에서 인도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해간다.

【문학적 특성】

(1) 빈궁의 고발 : 최서해의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일생을 살아오며 직접 체험한 극단적인 빈궁의 참상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다. 빈궁을 작품의 제재로 삼는 것은 초기 프로문학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지만 당시 경향파의 작가들이 대부분 작가 자신의 사회 하층민으로서 직접적인 빈궁의 체험의 결여로 해서 불가피하게 관념적 성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데 반하여 그는 자신의 직접적이고 다양한 빈궁의 체험에 의해 작품에 직접성과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고 이것이 그가 문학활동 초기에 문단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주된 원인이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사회 하층민의 빈궁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격렬한 항거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빈곤 없는 통합된 사회에 대한 갈망을 암시하고 있다.

  <탈출기>는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자행된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조국을 떠나게 했던 간도 이주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생생하게 폭로 고발하고 있는 점에서 사회사적인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빈궁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사회의식, 빈궁의 문제를 구체적, 집단적 행동을 통해 해결하려는 적극적 태도 등으로서 식민지 시대 문학의 한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그 후 초기시기를 지나며 최서해는 국내를 배경으로 하는 다수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크게 나누어보면 첫째, 농토를 잃은 도시 노동자와 실업자들 통해 식민지 치하의 국내의 암담한 현실을 폭로, 고발하고 있다. 둘째, 간도 배경의 작품에서는 가족이 주대상이 되었으나 국내 배경의 작품에서는 걸인, 기자, 매춘부, 노동자 등으로 대상이 확대되어 있으며 따라서 전자에서는 가족애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나 후자에서는 빈민들끼리의 동류애로 발전되어 있다. 셋째는 간도의 배경의 작품에서 보이는 맹목적인 살인 행위가 없어지고 대신 의도적인 강도 행위나 테러 행위가 등장한다. 또한 전자에서는 반항의 대상이 비선택적이고 그 결과도 파멸로 끝나나 후자에서는 반항의 대상이 부자로 한정되어 있고 반항의 결과는 성공적이 된다. 넷째는 계급의식이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계급의식이 작품에 전면적으로 취급되기 보다 경구적(警句的)인 문구로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2) 인도주의 : 최서해는 1929년 카프를 탈퇴하며 이 때를 전후로 그의 문학은 프로 문학적 색채가 감소되고 차츰 인도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해 간다. 그의 인도주의적 경향을 나타내 주는 작품으로는 <인정(人情)>, <경계선>, <무명초(無名草)>, <호외시대(號外時代)> 등이 있고 이들 작품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개인적 도덕의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인도주의와 상관되어 있는 맥락에서 최서해의 작품에는 동포애에 입각, 민족적 고통과 궁핍의 원인인 일제에 대한 반항 의식과 민족 감정을 표명한 작품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오원칠십오전>, <해돋이>, <이중(二重)>, <폭풍우 시대>가 있다.

(3) 소재주의적 표현 : 최서해의 문학은 그의 직접적인 삶의 체험에 있는 소재주의 문학이다.  그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할 절박성으로 인해 그의 문학에는 세련된 문체의 조작이나 미적 결과 등의 문제는 중요시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해 고심과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이와 더불어 그의 문체에는 의성어, 의태어와 방언의 적절한 사용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관념적인 진술과 감상적 표백으로 현실의 객관적 묘사에 약한 작가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절히 구사하여 사실적이고도 생동감이 넘치는 특유한 스타일을 창조하였다. 또한 그는 작품의 배경에 따라 방언을 적절히 사용하여 작품의 효과를 높이기도 하였다.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에서는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간도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방언을 사용하여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구성에 있어서도 대개 사건의 전개가 평면적이고 유형적인 흠을 보이고 있다. 갈등의 양상이 단순하고 사건 해결에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많은 작품이 극적 효과만을 노려, 빈궁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의외의 살인 혹은 강도 행위를 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법상의 결함은 후기 작품에서야 다소 극복된 면모를 보일 뿐이다.
현대사 아리랑]잊혀진 시조시인 조운
 

 

 봄볕에 빨가장히 핀 ‘인민의 채송화’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채송화>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 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자유예원(自由藝苑)>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추인회(秋蚓會)>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조운(왼쪽)과 매제 서해 최학송. <도서출판 작가 제공>
49년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 듯

1941년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3남 명재, 차남 청재, 조운, 사위 임씨, 장남 홍재, 부인 노함풍, 딸 나나.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예기(禮記)>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추석전야>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조선문단>에 실리게 하였다. <석류>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한국문학통사>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어느 밤>은 <신가정>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서해야 분려야>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고향>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임꺽정>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조운 시조집>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조운 시조집>을 <조선사>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 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문학평론> 1947년 4월호. <얼굴의 바다>(어느 대회장에서)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필명(본명, 국적, 작품)
마크 트웨인(새무엘 랭혼 클레멘스. 미국, 톰 소여의 모험. 필명의 뜻은 강 깊이의 안전수역을 재는 '두 길' 2x6피트)
조지 오웰(에릭 아서 블레어. 영국, 동물농장)
스탕달(마리 앙리 베일. 프랑스, 필명이 100개가 넘는다)
막심 고리끼(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슈코프. 러시아, 필명의 뜻은 가장 큰 슬픔)
유쉰魯迅(저우수런周樹人, 중국)
모옌莫言(관모예管謨, 중국, 필명의 뜻은 말 없음, 노벨 문학상)
파블로 네루다(내프탈리 리카르도 레이에스 바소알토, 칠레 시인, 1971년 노벨 문학상 )
 
 
1. 성과 이름을 모두 바꿈.
시인: 이상(김해경, 조선총독부 내무부 건축과에 잇을 때 인부들이 '리상'으로 호칭한 것에 연유), 이탄(김형필), 임보(강홍기, 프랑스 시인 랭보의 영어발음), 류시화(안재찬), 유하(김영준),
소설가: 지하련(이현욱), 정이현(홍종현), 하일지(임종주), 전경린(안애금, 수필가 전혜린을 롤모델로 삼으려고)
평론가: 이인화(유철균), 성민엽(전형준)
 
2. 이름에서 한 글자를 가감
백철(백세철), 고은(고은태), 이문렬(이렬)
 
3. 이름 자 두 자 중 한 글자를 바꿈
시인: 금여정(금정순)
소설: 서정인(서정댁), 황석영(황수영), 조해일(조해룡), 황지우(황재우),
희곡: 강성희(강순희)
 
4. 이름만 바꾼 경우
시인: 이육사(이원록, 감옥의 수인 번호 264, 일본 역사를 도륙하겠다는 戮史), 김영랑(김윤식), 백석(백기행), 신석초(신응식), 조지훈(조동탁), 박목월(박영종)
김구용(김영탁), 조향(조섭제), 황명(황복동), 신경림(신응식), 허소라(허형석), 김芝河(김영일, 지하의 소리값이 地下를 연상하여 감옥살이를 은유함.),
김후란(김형덕, 여자), 이향아(이영희),
시조: 김어수(김소석), 송선영(송태홍)
소설: 나빈(나경손), 김남천(김효식), 심훈(심대섭). 이무영(이갑룡), 김동리(김창귀, 김시종, 삼국사기 동리 백결 선생에서 따온 이름.)
, 김병총(김성탁), 박화성(박경순), 손소희(손귀숙), 박경리(박금이), 김지영(김명자), 김이연(김영자), 서영은(서보영)
수필: 송도(송재웅), 정목일(정민석), 김시원(김정희)
아동문학: 강소천(강용률)
평론: 임화(임인식), 장백일(장병희), 김현(김광남), 임헌영(임준열), 염무웅(염홍경), 김인환(김일훈), 정과리(정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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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문학 2014년 봄호/ 이유식
호: 雅號(문인, 학자, 예술가 등의 본이름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 堂호( 본명이나 자(字) 이외에 쓰는 이름.), 自號(자기의 별호를 스스로 지어 부름. 또는 그러한 호.)
 
작호 불문율: 1. 환경, 인품, 직업에 상당할 것. 2. 지나치게 거창한 뜻은 피할 것. 3. 겸손하더라도 자기비하, 저속하지 않을 것. 4. 발음이 상스럽지 않을 것.
 
작호 소재
1. 고향, 거주지의 산, 강, 들 등 지명에서 한 자 따오거나 이와 관련 있는 것.
       栗谷(이이는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 盧溪(박인로가 살던 경북 영천 임고면 마을) 蛟山(허균이 태어난 강릉의  야산), 燕巖(박지원이 살던 황해도 금천 연암협)
       藥泉(남구만의 유배지 강릉의 샘 이름.) 花潭(서경덕이 제자를 가르치던 연못.)
       尨村(황희, 삽살개 우는 마을이라는 뜻), 西崖(유성룡, 화회 마을에 있는 서쪽 벼랑이라는 뜻) 八峰(김기진이 팔봉산 밑에서 태어남.), 鷺山(이은상의 집 뒤 마산 鷺飛산)
       樹州(변영로의 고향인 부천의 옛 이름), 片石村(김기림의 고향 함북 임명에 구들장 용 편석이 많음.)
2. 자기의 신념, 좌우명, 포부와 관련 있는 것.
       晦齋(이언적, 주희의 호 회암에서 한 자를 따와서 주자학을 따르려는 의지 ),
       退溪(이황, 고향 퇴계리에서 후학 양성 의지.), 南冥(장자에 나온 말로 노장사상 의지),
       與猶堂(정약용의 당호 겸 아호,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조심스레 살자는 의미.)
3. 자기의 기호, 좋아하는 자연물 관련.    
       月灘(박종화, 달여울이 좋아서), 가람(이병기, 강이 좋아서), 茶兄(김현숭, 커피가 좋아서)      
4. 자신의 환경, 여건 관련.
       은둔하려는 뜻 ; 牧隱 이색(소 기름), 圃隱 정몽주(채마밭), 冶隱 길재(대장간)
       은둔하면서 후학양성의 뜻: 齋
       橫步(염상섭은 만취하면 之 자 걸음.),
       三誤堂(김소운은 세 가지 잘못으로 이 나라에 태어난 것. 처자식을 굶기는 것, 일찍 죽지 못하는 것)
5. 겸손한 글자 小, 民, 下, 一 등을 넣은 것. 
       一石 이희승, 一茅 정한모
 
남이 지어준 호: 모윤숙(이광수가  嶺雲으로), 피천득(이광수가  琴兒으로), 나경손(월탄이 稻香으로) 서정주(친구가 未堂), 박두진(아버지가 兮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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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까지 160여 명인 문인에서 6.25 전후까지 급격히 불어서 200여 명이라 어림잡고 그 중 110여 명이 월북하고 6.25때 10여 명(이광수, 김억, 김기림,김동환, 김진섭 등) 납북됨. 월북작가도 거의 다 처형됨.
이북에 살다가 월남한 작가는 30여 명.
 
월남작가: 거의 다 성공하였음, 주 발표장이 발행인이나 편집자가 이북출신인 '자유문학, 문학예술지'였다.
6.25 직전까지 월남한 작가, 반공산주의 성향-김동명, 구상, 이인석, 김규동, 유정,안수길, 임옥인, 황순원, 최채응, 손소희, 박연희, 정한숙, 전광용, 이범선, 장용학, 박화목, 오영진 김진수,
1.4후퇴 시 월남 작가, 공산주의 경험 후 반공산주의- 박남수, 양명문, 김영삼, 김시철, 한정동, 강소천, 장수철, 박경종, 김이석, 윤병로, 원응서.
 
월북작가: 홍명희,조영출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 나머지는 김일성의 숙청정책 때 제거됨 
6.25전 월북-이기영과 한설야(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리더), 송영, 한효, 이동규, 윤기정, 박세영,임화(조선문화건설중앙협위회 리더), 김남천. 이원조, 오장환, 안회남, 허준, 김동석, 조영출, 박팔양, 홍명희, 함세덕
6.25 때-설정식, 이용악, 엄흥섭
숙청 사례-임화(북로당에 의홰 스파이 죄목 사형), 김남천(종파분자), 설정식(미국 스파이), 이원조(반당행위, 이육사의 친동생), 안회남(임화 관련 곤욕. 숙청), 이태준(남로당 간부 처형 시 협동농장 배치 되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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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뒷이야기
무정-이광수, 한국 최초 장편 신문 연재, 매일신문, 와세다대학 철학과 학생인 25세 때. 연애도 기생도 몰랐던 때 상상만으로 쓴 것. 
님의 침묵-한용운. 초판 때 독자들이 외면, 재판 때 금서조치. 광복 후 베스트 셀러.
마도의 향불-방인근. 도색소설 판정받았고 이화여전 김활란 교장이 강간당하는 주인공이 이화학생으로 추정된다고 항의하여 연재가 중단됨.
찔레꽃-김말봉, 여자가 쓴 인기 소설. 마도의 향불보다 격이 높아 호응이 좋았음.
순애보-박계주, 매일신보사 현상공모. 당선 시 박계주는 25세. 중고 교사들이 제자에게 추천도서로 됨.
렌의 애가-모윤숙. 조지훈이 모윤숙의 집에 갔다가 모윤숙의 서간체 일기를 본인의 허락 없이 가져가서 출판. 조지훈이 장나하는 줄 알고 있다가  출판이 되자 모윤숙이 출판사에 항으했으나 수습책이 없어 량을 늘리는 보완작업 후 재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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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윤리나 책임감 없이 날뛴 세 여자
나혜석-이미 부인이 있으면서 허영숙과 사귀던 이광수와 연애. 아내가 있는 최승구와 연애 약혼한 해에 최승구 사망. 오빠 나경석이 소개한 김우영과 결혼, 김우영이 보내준 파리 유학 때 최린과 염문으로 이혼.
김일엽-재산가와 파혼 2년 후 외할머니에게 얹혀살다가 18세에 다리 하나 없이 이혼자인 연희전문 교수인 이노익과 결혼. 남편을 두고 일본 유학 때 아내가 있는 임장화와 연애 사건으로 이혼당하고 일본 청년 오오타 세이조의 아이를 출산. 귀국 후 임장화와 동거 중 임장화의 본처가 난동을 부려 결별. 장인근과 염문, 국기열과 동거. 이광수와 염문, 백성욱과 동거. 대처승 하윤실과 결혼 후 비구승이 됨.
김명순- 최초의 근대 여성소설가. 동거하던 김우방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동경여전 입학. 동경 유학 시절 김찬영과 결별 후 임장화와 연애. 귀국 후 숱한 염문으로 문단 망신. 김기진(평론가)이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이 되어 국내 이목 때문에 일본에 가서 행려병자로 뇌병원에서 사망, 김명순 사망 후 전영택의 '김탄실과 그 아들'의 모델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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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학파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PEN'
1920~30년대의 일제 압제로 발생한 저항문학이 무산계급투쟁 '카프문학운동'으로 결성됨.
순수문학과 카프의 대립
KAPF의 경향문학 활동 무대는 朝鮮之光(김동혁,장도빈)과 開闢(김기진 박영희), 문예월간, 예술운동.
카프파 문예지는 사회주의, 저항성이라 일제 검열 받은 부분을 삭제하고 그대로 발행하여 독자들의 반항심 유도. 백철, 윤기정이
KAPF 발기인은 박영희,김기진,한설야, 윤기정, 김온, 이태준, 이북만, 송영, 박세영, 이익상, 이상화, 조명희, 최학송, 박팔양, 이활, 이기영, 김남천, 안막, 임화.
순수문학파의 활동무대는 廢墟(예술지상주의, 곧 폐간함.오상순, 김억, 염상섭,남궁벽, 황석우), 白潮(3호 발간,외국인 안펜셀라,홍사용, 이상화,박종화 이광수, 나도향,현진건), 朝鮮文檀(방인근인 유학 후 귀국하여 전재산을 털어 카프에 정면대결, 20호 발간이광수,김억,염상섭,김동인,현진건, 주요섭, 나도향, 전영택, 이상화, 박종화, 김소월, 김동환, 노자영, 이은상, 양주동,발굴 신인으로 최학송, 채만식, 박화성, 이장희, 계용묵, 안수길), 東光(주요한이 안창호의 홍사단을 배경으로 창간,40호 발간. 주요한, 이광수, 김억,주요섭, 방인근, 김동환, 김동명, 이은상, 유진오, 양주동, 이효석), 박용철과 이하윤이 주도한  詩文學과 文藝月刊, 詩苑
순수문학파가 정치적인 카프에 대항하여 순수문학을 고수하려고 하자 카프가 인신공격으로까지 반항. 순수문학은 해외유학생들이 주동이 되었음.
카프와 순수문학의 격돌-일제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카프가 무산계급의 사회주의 좌경화투쟁으로 변하자 순수문학파가 반기를 들고 빠져나옴, 경향문학의 허구성을 느껴 카프문학의 지휘관이던 김기진, 백철이 농민문학 쪽으로 돌아서서 예술지상주의로 나옴.
해방 후 격돌(세가 불리해진 좌익문사들이 월북)
좌익-조선문학건설본부(임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기관)
우익-조선청년문학가협회(김동리, 조연현, 정태요, 곽종원)를 설립하였다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해외문학파의 태동과 역할-1920년대 유학 중인 학생들이 번역소개하던 외국문학연구회가 태동이 됨.(정인섭, 김진섭, 손우성, 이선근, 김명엽, 이하윤, 김온) 海外文學 창간 2호 발행(장기제, 김한욘, 이병호, 정규창, 함일돈, 함대훈, 이헌구, 김광섭, 이홍종, 김삼규,이동석이 가세함).
1930년대에 프로문학(정치도구 문학인 카프) 논객 김팔봉, 백철, 윤기정, 임화, 송영, 한설야 등이 해외문학파를 소부르주아 그룹, 개량주의자, 대중을 기만하는 반동분자로 매도하였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정치적인 참여문학이 쇠퇴함. 해방과 6.25 후 해외문학파들이 한국PEN 결성하고 국제펜 본부에 가입신청 승인받음. 해외문학파인 변영로,김기진 이하윤 이헌구, 김광섭, 양주동, 조용만, 오상순, 주요섭, 이은상, 손우성, 백철이 발기인이 되어 변영로 위원장 변영로, 부위원장 김기진, 모윤숙을 추대함.
국제PEN-영국 여류소설가 도슨 스코트가 정신문화가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으려고 1921년 10월 5일 40명의 문인들로 발족. 인권, 표현권, 창작 자유를 위해 해당국에 권고 피탄압자 원조, 국제사회에 알림 등으로 국제활동, 북한은 항상 권고대상임. 초대회장 존 골즈 워디,  회원 조셉 콘래드, 조지 버나드 쇼, 허버트 조지 월즈 등이 참여.

한국문학의 흐름과 감상
 
*개화기 발아 -> 1910년대 본격적 전개 -> 1920년대 퇴폐적 낭만주의, 계급문학, 민족의 전통과 정서를 계승하고자 하는 국민문학파 -> 1930년대 사상적 경향 퇴조, 순수시파, 구인회, 모더니즘파, 생명파 ->1940년대 암흑기 ->1950년대 모더니즘 운동, 전통주의 문학, 휴머니즘이나 전통적인 정한, 존재론적 성찰을 추구하는 경향 ->1960년대 참여와 저항정신 ->1990년대 다양한 경향의 문학
1. 개화기 : 1883년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 1896년 독립협회 [독립신문]
과도기적 형태 - 개화가사, 창가, 신체시 등 새로운 형식 발생
2. 1910년대 : 개화기의 자양분을 토대로 현대적인 시가가 탄생한 시기
[태서문예신보], [학우], [창조] - 김억 [봄은 간다], 황석우, 주요한 등
최초의 자유시 - 주요한 [불놀이][창조]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 [소년][청춘]
춘원 이광수 [무정] -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 계몽주의적 문학관
3. 1920년대 : 퇴폐적 낭만주의 -> 신경향, 경향, 프로문학, 계급문학, 국민문학파
[폐허], [장미촌], [백조], [개벽], [조선문단]
사회주의 사조의 유입과 급속한 확산
1910년대 춘원의 계몽주의 문학을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
단편소설이 중심
1)남궁벽, 오상순, 변영로 - [폐허], [장미촌]에 퇴폐적 경향 작품 발표
[폐허}는 당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데카당스적 사조의 반영
2)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박종화, 노자영 - [백조]
[백조]는 퇴폐적이고 유미주의적 경향으로 감상적, 현실도피적 경향의 작품
이상화 [나의 침실로] - 데카당스적 공간의 상상력
3)김소월, 한용운 - 자생과 이식의 두 가지 항목을 성공적으로 융합시켜 시를 빛낸 대표적 시인
김소월 [여자의 냄새] -민요시인, 당시 퇴폐적 감각의 영향이 농후
4)이광수, 최남선의 계몽주의, 김동인의 예술지상주의, 염상섭의 일본식 자연주의, [백조]의 퇴폐적 낭만주의와 함께 계급주의가 새로운 판도 형성
임화 [우리 오빠와 화로] - 계급주의 문학의 대표작
5)최남선, 이병기, 이은상, 조은 - 국민문학파 (민족혼, 민족의식, 조선심)
6)대표적 작가 -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최서해, 이기영, 조명희
김동인 - 평양 대부호 아들, 독선적이고 오만한 성격, 최초의 순수 문예동인 지인 [창조] 창간을 주도, 문학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개성적인 문체 의 가능성을 보여줌
[약한자의 슬픔][감자][배따라기] 등
빙허 현진건 -[희생화][빈처][술권하는 사회][운수좋은날][B사감과 러브레터]
횡보 염상섭 - [박래묘][표본실의 청개구리][묘지=만세전][삼대]
[묘지]는 일제 치하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후에 [만세전]으로 개작하여 단행
문학을 ‘개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계급문학론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
서해 최학송 - [고국][탈출기][기아와 살육][홍염]등 ‘경험문학’, ‘소재문학’
민촌 이기영 - 카프계열의 대표적 작가, [오빠의 비밀편지][민촌][서화][고향], 종촌과 농민의 이야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그린 작가
포석 조명희 - 카프계열 작가, [파사][봄 잔디 밭 우에][땅속으로][낙동강]
[낙동강]은 포석의 대표작이며 동시에 이 시기 프로계열 문단이 거둔 의미 있는 성과로 알려진 작품이다.
‘소련 작가동맹’에서 활동
4. 1930년대 : 다양한 유파 출현, 실험정신, 순수시파->모더니즘파->생명파
이념에서 벗어나서 시 자체의 순수성을 회복, 새로운 방향의 시
30년대 가장 큰 관심은 식민지 농촌의 계몽이었다. ->농민소설 등장
1)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 시문학파, 이념적 사회적 관심을 배제하고 유려하
고 정제된 언어의 조탁과 서정적 감수성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는다.
2)김기림 - 모더니즘의 문학이론 도입
3)서정주, 유치환 - 생명파, [시인부락]동인, 시가 건조해지고 형식화 됨을 비 판,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문제, 살아 있는 생명의 문제 등 다룬다.
서정주 [귀촉도] - 전통적인 사랑의 정서를 형상화
유치환 [청마시초] - 상상력의 근본이 되는 정신은 허무의 의지
1930년대 소설의 특징
1)소설기법에 관한 관심의 증대로 인한 소설 장르의 확대
2)소설 소재의 다양화
3)소설적 기법의 세련 : 세태소설, 풍자소설, 지식인소설, 농민소설, 역사소설 등장
4)장편소설의 창작방법에 관한 논의와 구체적인 작품 활동이 활발히 전개
주요작가 : 채만식, 이효석, 김유정, 이상, 심훈
백릉 채만식 : [세길로][레디메이드 인생][치숙][탁류][태평천하]등 ‘풍자문학’
[천하태평춘]은 후에 [태평천하]로 변경 - 대표작으로 30년대 가장 뛰어난 소설적 성과
가산 이효석 : [봄][기우][행진곡][돈][산][메밀꽃 필 무렵]등
자연의 심미세계와 인간의 내재적 본능의 순수를 그림
김유정 : [소낙비][노다지][가을][아내][따라지][만무방] 등
농촌과 농민의 삶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해학과 골계의 미학적 특징을 보여 준다. (소낙비의 춘호, 가을의 나,만무방의 응칠이)
여성을 사고파는 ‘여성의 상품화’ 라는 모티브가 많이 등장한다.
이상 : 우리문학을 시든 소설이든 근대문학에서 현대문학으로 끌어올린 작가
현대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오감도]와 [날개][종생기][봉별기]등
5. 1940년대 : 암흑기 - 이육사, 윤동주, 백석, 이용악, 청록파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산도화], 윤동주 [서시]
6. 1950년대 : 모더니즘 운동과 함께 전통파 시인들의 활동 - 정한모, 조병화, 송욱, 김춘수, 김종길 등의 휴머니즘이나 전통적인 정한, 존재론적 성찰을 추구하는 경향

*한국 근대소설 : 1900년대 초 신소설 -> 1945년 해방 직전까지의 소설
*신소설 : 이인직 [혈의 누][은세계], 이해조 [자유종][탄금대],
안국선 [금수회의록][공진회], 최찬식 [추월색]
*[혈의 누] : 이인직의 첫 장편소설, 최초의 신소설, [만세보]에 연재

*2000년은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이다. - [붉은 산줄기][삼천리강산][전환][서해전역]
[붉은 산줄기] : 이종력, 김일성이 항일무쟁투쟁을 펼친 과정을 역사적으로 미화
[전환] : 권정웅, 1960년대 국제공산주의운동 앞에 몰아치는 수정주의의 역풍을 맞받아 김정일의 고귀한 업적을 담은 작품
*북한문학의 창작원리 : 주체적 인간학의 정립
당성, 노동계급성, 인민성의 구현
종자론 과 수령형상 창조이론
*2000년대 초의 북한문학의 경향
1. ‘태양민족문학’ 건설의 주창
2. 강성대국 건설의 3대 기둥 : 사상, 총대, 과학기술
*정론시 : 사회, 정치적 사변, 중요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평가가 보다 강하게 표현되는 서정시로 호소성과 선동성이 강하다.
*담시 : 담시란 ‘이야기’란 말로 극적인 이야기를 깊은 감동을 가지고 정서적으로 노래하는 시문학의 형태로 아름답고 영웅적이다. 가장 극적인 한 순간의 계기 속에서 주인공의 성격을 노래하는 이야기
*최근 북한 시문학
1. 조국애와 향토애를 강조한 시가 많다.
2. ‘사회주의 건설’ 주제의 작품이 많다. - 리연희 [밤하늘의 처녀들]
3. ‘조국해방전쟁’ 주제
4. ‘조국통일’ 주제 - 리영삼 [기다리는 땅]
5. 풍자시

 북한문학사의 쟁점

1. 우리 문학사에서 북한문학의 위상

‘한국문학’과 ‘조선문학’의 상호인식

민족문학사란 용어와 개념을 사용한다면, 그 내용물은 남북문학을 합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민족문학사란 표현이 한반도 남북문학의 공통항을 찾고 언젠가 서술될 통일된 민족문학사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정도라면 어떨까. 최동호 편 『남북한 현대문학사』의 경우 또는 김병민, 김춘선 등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이 우리 문학을 언급할 때, ‘조선-한국문학사’라고 쓴다. 조동일은 2005년에 새로 고친 『한국문학통사』 제4판 제1권에서 둘을 통합하여 우리문학사로 쓰자고 제안한 바 있다. 최근 대표적인 문학사 서술에 나타난 북한문학에 대한 기본 인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북한문학은 논외로 한다: 김윤식 외 『한국 현대문학사』; 신동욱 편저 『한국 현대문학사』; 장석주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1~5권 등.
(나) 북한문학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일종의 부록이다: 권영민 『한국 현대문학사』 제2권; 민족문학사연구소 편 『민족문학사 강좌』 하권.
(다) 북한문학은 한국 현대문학사와 병렬되는 남북문학사, ‘(남)한국-(북)조선문학사’의 일부이다. 최동호 『남북한 현대문학사』; 김병민 외 『조선-한국 당대문학사』; 김춘선 『한국-조선현대문학사』
한반도의 당대문학은 한국문학인가, 조선문학인가, 아니면 한반도문학인가, 우리문학인가? 그도 아니면 ‘통일신라-발해’ 이래 제2기 남북국시대의 남한국(대한민국)/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북조문학인가? 과거사는 오늘날의 거울이다. 불행히도 1200~1300전 신라 육두품 지식인들은 발해를 분단된 조국의 일부로 생각하지 못하고 말갈족 중심의 중국 변방으로 치부한 결과, 우리 역사에서 다시는 대륙적 인식을 만회하지 못하게 되었다.
분단을 경험한 다른 나라의 선례를 참조해도 그렇고 6.15선언 이후의 교류 협력 노력에 비추어봐도, 우리 민족문학사 서술에서 북한문학을 원천 배제하거나 외국문학(학술진흥재단의 학문분류표상 북한문학은 ‘기타 동양어문학’에 속한다)으로 취급했던 통념은 바뀌어야 한다. 언젠가는 통합적으로 인식해야 할 우리 근현대문학사의 하위범주로 재규정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2기 남북국시대의 조선문학’을 사용할 정도로 용어의 개념까지 상대 입장을 배려하는 전향적 자세(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북한문학은 그 자체로 근대문학이며 한반도문학의 일부인 지역문학, 지방문학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제 ‘북한문학’ 연구는 ‘남북문학ㆍ통일문학’연구로 내포와 외연을 심화 확대할 시점이다.

사회주의리얼리즘문학의 변동과 주체문학으로의 도정

북한문학의 역사적 흐름을 개괄한다면 초창기에는 사회주의문학, 1967년 이후에는 주체문학이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이후 정권 초기에는 맑스레닌주의미학에 기초한 사회주의리얼리즘문학이 공식원리로 채택되었다. 즉 개인이 서정과 낭만, 상상력의 자유를 부르주아 미학사상이라 배제하고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당과 노동계급에 복무하는 정치적 무기로서의 당문학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리얼리즘문학의 핵심을 민중성, 계급성, 당파성(현재는 인민성, 노동계급성, 당성)이라 규정하여, 노동계급 등 피지배층을 중심으로 문학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그 때문에 서정적, 낭만적 경향의 순수문학은 아예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북한문학의 기본이 되는 당 문예정책과 노선을 보면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체계화’되는 1967년부터 주체사상에 기초한 주체문학예술이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잡는다. 전통적인 사회주의문학의 기반위에 이른바 ‘항일혁명문학예술’의 전통과 수령론을 앞세운 주체문예가 덧붙은 것이다. ‘주체문학’이란 현금의 북한문학을 그들 스스로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의 북한문학사 전체를 주체문학으로의 일방적 도정으로 일컫는 것으로 보아 역사와 이념이 합쳐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주체문학은 예술방법으로 말하면 해방 직후의 ‘고상한 리얼리즘문학’, 전쟁 전후 부르주아문학과의 투쟁에서 형성된 ‘사회주의리얼리즘문학’, 1967년 유일사상체계의 확립 전후 항일혁명문학예술의 발굴과 그에 근거한 ‘주체사상에 기초한 문학예술’, 그리고 1992년 김정일의 주도로 새롭게 재편된 ‘주체사실주의’문학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1967년 이전에는 맑스레닌주의 보편론에 입각한 사회주의리얼리즘미학이 중심이었으나 이후에는 주체사상, 김일성주의라는 특수성에 무게중심이 실린 주체문예이론이 강화되었다. 1970년대 이후는 주체문학의 전성기였고 80년대 후반에 일상적 영웅의 형상화 등 사회주의 현실을 중시하는 유연한 문학이 잠시 성행했으나, 90년대초 세계주의 진영의 몰락에 자극받아 다시 체제문학으로 경직되는 성향이 강화되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기존입장을 종합한 ‘주체문학론’과 체제위기의 극복 과정에서 나온 ‘선군문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2. 건설기ㆍ전쟁기(1945~53)북한문학의 쟁점

건설기 북한문학은 남한의 문학 동향에서 자립적인 위상을 설정하며 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제도개혁과 사회변화 속에서 문학은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둔 정체성을 새롭게 주조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문학은 인민민주주의와 고상한 리얼리즘, 사회주의리얼리즘 원리에 입각하여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북한문학이 정치의 선전선동 도구로 활용되면서 체제문학을 표방하기에 이른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 초기 문학의 형성과정

1946년 10월, 북조선예술총동맹에서 개편되어 출범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질적인 문인들의 작품을 배제하는 한편, 사회주의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창작방법론을 일률적으로 전파해나갔다. 이렇게 해서 북한의 해방기 문단은 인민성과 낙관성, 혁명성을 담은 고상한 리얼리즘을 채택하여 문학의 이념과 색채를 단일화해나갔다. 초기 북한문학의 양상은 당과 국가, 인민이 우선시되는 국가사회주의에서 문학의 역할은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한 건국사업에 동참해야하는 정치와 이념 선전의 수단으로 규정되었다.

토지개혁과 혁명적인 사회변화의 문학적 반영

「개벽」(리기영 1946)은 새로운 계층으로 부상한 소작인과 노동자계급이 개벽에 가까운 혁명적인 사회변화를 실감하는 모습을 포착한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작농 가족이 토지개혁 같은 민주개혁으로 새로운 세계를 실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리기영의 『땅』(1948~49)이다. 이 작품은 토지개혁으로 촉발된 사회 전반의 변화를 담아낸 첫 장편으로, 토지개혁의 의의를 적출해낸 「개벽」 이후 북한사회의 엄청난 변화와 활력을 담아낸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다. 『땅』은 북한의 민주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대중적인 인물상으로 주인공 곽바위를 제시한다.
1946~48년에 북한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파괴된 산업시설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북한문학의 과제였다. 「로동일가」(리북명 1947), 「칠현금」(김사랑 1948), 「탄맥」(황건 1949) 등은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할당된 증산계획에 매진하는 노동자 농민의 모습을 담아냈다. 이 시기 작가들은 노동자들의 활력에 주목하여 그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 새로운 사회 건설에 매진하는 헌신적 모습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조국에 바친 쌀」(김우철 1947), 「나무리벌의 증산보」(강승한 1947), 「축제의 날도 가까워」(안룡만 1947), 「용광로 앞에서」(김북원 1947), 희곡 「새날의 설계」(한태천 1947), 「원동력」(류기홍 1948)이, 이 밖에 「생활의 흐름」(김조규 1946), 「흘러라 보통 강 노래처럼 그림처럼」(리찬 1946) 등이 꼽힌다.

북한에 불어 닥친 소련 열풍

북한사회에서는 소련은 해방군이자 참된 우정의 원조자, 국제주의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북한사회는 소련의 인민민주주의 사회제도를 자본주의의 힘과 제국주의화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삼았다. 조소문화협회가 결성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태준은 소련기행에서 사회주의 선진국 소련에 대한 찬양과 동경을 피력했다. 「영광을 모쓰크바에」(김상오 1947), 「니꼴라이 나의 마음의 형제야」(강승한 1948)등이 보이고, 리기영은 장편 「땅」에서 소련을 해방자, 원조자, 선진국으로 묘사했다. 김사량도 「칠현금」에서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소련인 의사를 사상과 인간성이 결합된 이상적 인간형으로 지목했다. 「얼굴」(한설야 1948), 「남매」(한설야 1949), 「안나」(리춘진 1948), 「지질기사」(윤시철 1948)도 소련사회를 선진화의 전형으로 그렸다. 그렇다고 북한문학이 소련을 동경의 대상으로만 그린 것은 아니다. 한설야는 「모자」(1946)에서 독일군에서 가족을 잃은 소련군 병사가 북한에서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 작품은 소련군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소군정 당국의 항의를 받았으며, 그 결과 작품을 게재한 『문화전선』 창간호가 폐간되기도 했다.

김일성 우상화와 항일무장투쟁의 문학화

북한의 초기 문학에서도 김일성의 지도자 위상은 중요한 문학적 소재로 취급되었다. 그에 대한 문화적 형상화는 귀국 직후부터 건국사업에 매진하는 모습을 그린 「김일성장군 찬가」(리찬 1946), 「햇볕에서 살리라」(박세형 1946), 「3천만의 태양」(김우철 1947), 「김일성 장군님께 올린는 시」(윤시철 1947) 등의 시에서 확인된다. 소설에서 김일성의 형상화는 「혈로」(1946), 「개선」(1948) 등을 창작한 한설야가 주도했다. 시와 소설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그의 지도자적 덕성을 담아내는데 주력했다. 그중에서도 장편서사시 「백두산」(조기천 1947)은 보천보전투를 통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국내 항일조직과의 연계를 서사화한 성과작으로 거론된다.
이렇듯 문학을 통한 김일성 우상화 작업은 해방 후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김일성 우상화와 빨치산 세력의 역사화는 ‘총서 불멸의 력사’로 수렴되었고 수령형상문학으로 이론화되었다.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북한의 문학은 정치의 과잉상태가 빚어낸 문학의 도구화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정치에서 복속된 북한의 문학은 훗날 문학의 도식성을 반복 재생하는 가운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외세에 저항한 신성한 민족 이야기로 격상시켜나갔다.

대남 선전선동과 냉전구도

남한사회를 향한 선전선동과 격화된 냉전구도를 반영하는 북한 초기 서정시로는 최석두의 「레포」(1946), 「삐라대」(1947), 「앞으로만 간다」(1947), 박세영의 정론시 「그치라 요녀의 소리」(1946), 리정구의 「분노」(1947), 유진오의 「누구를 위한 벅찬 우리의 젊음이냐」(1946), 제주 4.3사태를 소재로 한 강승한의 서사시 「한나산」(1948), 여순사태를 다룬 조기천의 연작시 「항쟁의 려수」(1949), 안룡만의 서정시 「동백꽃」(1948) 등이 있다. 소설에서는 김사량의 「남에서 온 편지」(1948), 「태양은 대오를 향하여」(1950), 리둉규의 「그 전날 밤」(1948), 남궁만의 희곡 「하의도」(1947), 송영의 희곡 「금산군수」(1949) 등이 있다.
북한 초기 문학이 남한의 지배세력을 향해 분노와 적개심을 피력하는 한편으로, 북한정치가 남한 노동자 농민의 혁명투쟁을 선동하는 모습은 냉전시기 북한정치가 남한의 사회현실에 관여하는 또 다른 모습이다. 문학에 표현된 냉전의 양상은 남북한의 가파른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조국해방’과 ‘국토완정’(국토의 통일)이라는 전쟁담론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전쟁과 냉전체제의 고착: ‘조국해방전쟁’과 북한문학

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의 문인들은 ‘북조선문학가동맹 열성자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는 “창작과 종군활동으로 종국적 승리에 이바지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북조선문학가동맹은 동맹사업의 군대규율화, 인민적 민족문학 수립을 위한 사상적 무장, 고상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예술이론의 실천, 인민군대의 투쟁과 산업 분야 복구사업에 동원된 인민상의 표현 등을 내용으로 한 결정서를 채택했다. 전시 북한문학은 인민군의 활약상을 부각하여 혁명성과 전투적 기백을 고양하는 도식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전시에 종군실기문학의 창작이 장려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종군실기문학은 전장의 현장성을 전달하는 강한 선동력을 지니고 있어서 선전계몽의 수단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김사량, 김남천, 리북명, 남궁만, 고일환, 박울걸, 리정구, 리동규, 황건 등 많은 문인들이 종군기를 써서 발표하였다.
전투현장을 다룬 단편소설로는 황건의 「불타는 섬」(1952), 윤세중의 「구대원과 신대원」(1952), 리종렬의 「명령」(1953) 등도 자주 거론되는 전쟁소설이다. 전장체험을 다룬 시로는 「전선에로! 전선에로! 인민 의용군은 나아간다」(임화 1950), 「진격의 밤」(박팔양 1950), 「나의 따발총」(안룡만 1950), 「이 사람들 속에서」(김조규 1950), 「독로강 기슭에서」(김학연 1951), 「숲속의 사수 임명식」(박세영 1951), 「나의 고지」(조기천 1951) 등이 있다. 이들 서정시는 한결같이 전투 현장의 긴박한 모습과 격앙된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전쟁기 북한문학은 ‘고상한 리얼리즘’ 원리에 따라 인민군의 영웅적인 활약상과 후방 인민들의 헌신적인 투쟁, 반미구국을 소재로 한 애국심과 영웅주의,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전쟁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인민군 전사의 영웅성과 고향을 침범한 미국과 국군을 축출하기 위한 후방 민간인들의 헌신성을 담아내는 체제문학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3. 전후복구와 사회주의 건설기 북한문학의 쟁점

전후 북한문학제도의 재편

해방이 되자 남쪽에서는 조선문학동맹이 좌익문단의 중심 조직이 되었고, 북쪽에서는 좌익문단의 통합체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출범했다. 그러다 남쪽의 조선문학가동맹의 구성원들이 대거 월북하면서 북쪽에서는 두 개의 문단조직이 공존하게 되었고, 결국 1951년 3월 평양에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통합되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이 임화, 김남천, 이원조 등이었다는 사실은 남쪽의 조선문학가동맹 출신이 북한문단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
1947년, 당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고상한 리얼리즘’이 주창된 이후 긍정적 주인공의 형상화가 북한문학의 과제였다. 주인공의 인물형상과 관련해 새로운 조선문학의 창조자로서 노동자, 농민, 인테리겐쟈 등 전인민을 긍정적으로 형상화할 것을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인물 형상이 애국적 인간, 즉 주권 확립을 위한 사회적 투사, 민주개혁 및 경제건설에서의 애국적 노동자, 노력 농민 및 인민항쟁의 애국적 투사로 제시되기까지 했다. 조선문학은 전후복구시기에 부르주아 미학사상의 잔재 청산을 강렬하게 주창하면서 전후문학의 특수성에 기반한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과업을 강조했다. 임화의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와 김남천의 단편 「꿀」, 이태준의 「농토」는 부르주아미학의 잔재가 남아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규정되어 젊은 평론가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1953년 전국작가예술대회에서 남로당계 작가들이 축출된 후 북한문단은 안함광, 한효, 윤세평, 신구현, 김하명 등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작가 현지파견 사업과 사회주의리얼리즘

전후 북한문학은 전쟁 이전의 상태로 북한사회를 재건하는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 시기 북한문학은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기초 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혁명투쟁을 힘있고 고무추동하는 투쟁의 무기로, 생활의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전후 복구에 문학이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제도 중 하나가 ‘작가 현지파견 사업’이었다. 1950년대 천세봉은 함경남도 고원에 머물면서 농업협동조합 창성 과정을 관찰했고 스스로 준비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며 『석개울의 새봄』(1~3부 1955~63)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전후복구시기 북한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근영의 중편소설 『첫 수확』(1956)도 북한 농촌의 협동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인데, 직접 평남 문덕군에서 생활하며 창작한 것이다.
전후복구시기의 노동문학에서 노동계급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은 윤세중의 『시련 속에서』(1957)이다. 이 작품은 전후복구의 기본정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에 북한문학사에서 주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의 경우, 노동자계급의 창조적 노동생활을 고양하고 집단주의 정신을 시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주요 쟁점이었다. 따라서 서정시 속에서 노동계급의 전형을 창출하기 위해 이야기적 성격이 가미되었다. 이 시기 북한 시문학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명천의 「보통로동일」이 있다. 이 작품은 흥남비료공장 노동자가 시적 화자로 등장해 노동계급의 연대를 강조한다.

속도의 정치와 천리마 기수 형상화

천리마운동이 시작된 것은 1957년이었다. 전후복구 3개년 계획(1954~56)이 끝난 후,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천리마운동’이 제기되었다. 천리마운동은 속도를 중시하는 성과주의 운동으로, 그 궁극 목표는 사회주의 공업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속도에 대한 강박적 열정은 최영화의 「천리마로!」(1959)가 대표적이다. 천리마는 궁극적 극복의 대상으로 미제국주의, 종파주의, 수정주의를 상정했고 이를 위해 노동계급의 열정과 속도를 중시했다. 소설의 경우 서칠성이라는 청년 건설노동자를 천리마 기수로 형상화한 김병훈의 「해주-하성서온 편지」(1960)는 낭만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작품이다. 윤시철의 장편소설 『거센 흐름』(1964)은 건설현장의 과제를 해결해가는 청년 노동자의 불굴의 의지를 다룬다. 작품은 1960년대초 북한사회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갈등하면서 이른바 독자노선을 채택한 맥락과 거센 흐름의 서사가 맞닿아 있어 이채롭다. 북한사회의 주체사상을 제창한 배경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천리마 기수 형상화와 관련해 이 시기 북한문학이 요구한 서정시의 과제는 “천리마의 진군을 다그쳐가는 로동계급의 숭고한 내면세계를 깊이있게 개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필연적으로 내면성과 갈등하게 마련이다. 천리마운동 시기의 북한 시가 과도한 영탄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속도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시 속에서 “힘차게 앞으로!” “마음이여” “기쁨이여!” 같은 감정의 즉각적인 분출이 빈번하다. 도식주의 경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비교적 차분한 면모를 보여주는 시는 오영재의 「조국이 사랑하는 처녀」(1963)가 이채롭다.
개인의 정체성을 집단의지 속에서 구현하려 했던 1960년대 북한문학의 태도는 이후 문학의 정치화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체문학론이 강조하는 주체성은 ‘개인의 주체성’이 아니라 ‘집단의 주체성’이다.

4. 주체문학시대(1967~현재) 북한문학의 쟁점

항일빨치산문학의 전통 발굴과 주체문학의 형성

1967년 5월에 이르면 유일사상체제에 대한 전인민의 동의를 얻기위한 대대적인 선전작업이 행해지면서 문예계에도 엄청난 정세변화가 나타난다. 항일 빨치산 회상기가 폭발적으로 소개되면서 그동안 꾸준히 소개되고 연구되었으나 문예의 전체 위상에서 보면 부분적이었던 항일빨치산문학이 전면적으로 부상된다. 이후 북한문학에서는 김일성의 ‘항일혁명문학’이 최고 유일의 정통성과 권위를 가지게 되며, 나아가 김일성 가계의 문학이 발굴, 성역화되면서 ‘주체문예론으로의 일방통행식 도정’이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체계화’되는 1967년부터 보편적인 사회주의리얼리즘문학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초기에 들어서서 문학사 인식이 전면 개편되었다. 1930년대 빨치산 활동기의 촌극 대본인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 단원의 운명」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등이 문학사적 전통으로 재발견(호명)되며, 1970년대 초중반에 김정일이 주도한 이른바 ‘문학예술혁명’과정에서 4.15창작단 등 집단창작 팀이 이를 문헌으로 정착시켰다. 이들은 가난하고 평범한 민중(인민대중)이 일제 치하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김일성 빨치산부대의 투쟁을 중심으로 혁명대열에 참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들 작품은 주체문학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항일혁명문학예술의 발굴 그리고 문헌 재창작과 병행해서 1970년대엔 수령형상문학도 자리잡게 된다. 당의 유일사상체계, 전체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내세우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송가문학이 정착된 것이다. 대표작으로 정서촌의 「어버이 수령님께 드리는 헌시」, 집체창작 「영원히 빛나라 충성의 해발이여」, 김상오의 「나의 조국」 등이 있다.

사회주의 현실과 수령론 사이

1980년대 이후에는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많이 나왔다. ‘사회주의 현실’을 소재로 한 리얼리즘 작품은 이전처럼 영웅적인 인물의 형상화라는 창작지침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속에서 평범하고 진실한 인물을 그려내자는 ‘숨은 영웅 찾기’에 주력한다.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개성과 철학적 심도를 지닌 ‘사상예술성’의 강화가 창작에 적극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남대현의 『청춘송가』(1987), 림종상의 「쇠찌르레기」, 백남룡의 『벗』(1987) 「생명」, 박찬은의 「해빛」(1985)과 김봉철의 「그를 알기까지」(1981), 변희근의 「뜨거운 심장」(1984) 등이 있다. 문학 본연의 내적 자율성과 체제유지를 전제로 한 자기반성이 어느 정도 허용되자 남녀간의 애정, 직장 갈등, 이혼, 도농 격차, 세대갈등 같은, 예전 혁명영웅과는 거리가 있는 일반인들의 일상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민족문학사의 시각에서 볼 때 1980년대 후반기 문학의 다양함과 이념적 유연성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남한 독자에게도 인기 있었던 청춘송가나 벗은 일상의 리얼리즘에 근접했으며,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정조 속에 구세대의 관료주의적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과 신세대에 대한 희망을 담았다. 사회주의 현실을 다룬 80년대 대표 시로는 간척사업을 그린 권태연의 「사랑의 지평선」(1982)이 있고, 자연 풍치 그 자체를 민족적 정서로 노래한 유영하의 「진주담」(1987)은 정교한 언어구사와 서경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80년대 다양하게 개화한 현실을 주제로 한 리얼리즘 작품들의 성과와 함께 역사소설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 역사소설로는 셔먼호 사건을 다룬 박태민의 『성벽에 비낀 물결』(1983), 박태원과 권영희의 『갑오농민전쟁』(1977~86), 삼포왜란을 그린 홍석중의 『높새바람』(1983), 임진왜란을 그린 리영규의 『평양성 사람들』(1981) 등이 있다. 이중 수령론, 주체사상에 침윤되지 않고 민중이 역사의 주역이라는 인식을 방대한 서사시적 화폭과 화려한 한글문체로 형상화한 박태원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이 가장 우수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지칭되는 사회주의체제 붕과 이후 1980년대 같은 문학적 다양화, 유연성을 시나브로 사라지고 체제옹호적 이념성이 다시금 강화되었다. 사회주의 현실의 다양한 형상화보다 수령 형상이 더욱 늘어난 것이 문제이다. 외면하긴 쉽지만 객관적 자리매김이 어려운 수령문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야말로 우리 민족문학사 서술의 주요 쟁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2천년대 들어 민족문학의 대의와 리얼리즘에 충실한 1980년대적 경향은 더 이상 발전되지 않고 있으며 대표작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식량난, 에너지난으로 대표되는 체제 위기 속에서도 나남지역 탄광지대 사람들의 자력갱생을 그린 김문창의 『열망』이나 7.1신경제 관리체제 이후 변화하는 농촌 현실을 다룬 변창률의 「영근 이삭」등이 그나마 북한 현실을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5. 남는 문제들: 선군문학의 현실과 문학사 통합의 이상

북한문학은 해방정국과 인민정권 출범, 북한체제의 고착화와 보조를 맞추며 당의 지도를 받는 국가사회주의하의 체제문학으로 기획되었다. 북한문학은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통해 계급성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 문화 건설을 지향했고, 전쟁 후 ‘정치의 문학화’로 전개되었다. 이후 ‘천리마 기수 형상화’를 통해 전사회적 동원체제 안에서 사상과 교양을 계몽하는 속성을 강화해나갔다. 1967년 이후 혁명성과 사상성, 선전적, 선동적 기능을 강조하였고, 1990년대 중반 ‘수령형상문학’ 내에서 ‘수령영생문학’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추모문학과 그 연장선상에서 ‘단군문학’이 변주, 반복되었다. 현재 ‘주체사실주의’ 창작방법을 내용으로 한 김정일 시대의 주체문학과 체제붕괴 위기를 군대를 통해 돌파하려는 ‘선군문학’이 중심이다.
선군혁명문학은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1990년대 중후반의 체제붕괴 위기의 극복을 반영하는 문학적 슬로건이며, 수령형상문학론의 현실적 변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통일문학사의 기준으로 볼 때 북한의 주체문학, 그 현실적 변이 형태인 선군문학은 대부분 민족문학사의 반열에 올려놓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민중사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민족적 형식을 떠올릴 문체수준을 보인 홍석중의 『황진이』, 김혜성의 『군바바』 같은 역사소설이나, 비전향장기수의 북한 정착기라 할 남대현의 『통일련가』 등에서 1967년 이전의 사회주의리얼리즘미학이나 1980년대식의 유연한 사고를 연상할 수 있어 희망을 갖게 한다. 앞으로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에 입각한 통일문학사가 서술되길 기대한다. 이를 통해 남북문학사의 통합도 궁극적으로 가능하리라 전망한다.
이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대의에 따라 문학사의 어느 시기에는 북측 성과를 강조하고 어느 국면에서는 남측 성과를 부각하면서 서술하는 가운데 남북문학사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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