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조선 유일무이 식물분류학자 장형두
대한민국 1세대 식물학자 좌익으로 몰려 고문사 당한 장형두(張亨斗, 1906~1949.10.23.) 76주기

식물분류학자 장형두
오늘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 길을 오르내리며 답사를 하였다. 대상은 중랑구 sns 서포터즈 합동 워크숍에 참가한 활동가 14명이었다. 실제 답사 시간은 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25인승 버스로 사색의 길을 돌았다. 버스 안 의자에 앉아 지나가며 해당 인물에 대해 해설을 하였다. 버스에 내려 참배한 묘역은 시인 김영랑 한용운 아동문학가 방정환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 열사였다. 중랑전망대에서 한북정맥과 서울시 전경을 조망하였다. 대부분 답사를 몇 번씩 하였던 고수들이라, 포털에 떠 있지 않은 일화를 중심으로 해설을 요구하였다. 시간에 쫓기었지만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지금까지 망우리 해설 가운데 가장 다양하고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몇 분의 서포터즈가 인사를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중랑망우공간 망우카페로 올라왔다. 중랑구청 과 이름이 지난 7월부터 <망우리공원과>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과>로 바뀐 과장과 팀장 등 두 분과 미팅을 30여 분 가졌다. 다음에 기회 닿는 대로 나눈 얘기를 분석하여 기록하여 남겨야겠다.
나 홀로 세 시간 넘게 사색의 길을 걸으며 망우역사문화공원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길을 찾기로 다짐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579돌 한글날(10월 9일)을 맞아 한글 발전과 보급에 기여한 유공자 9명과 단체 1곳을 포상한다고 2025년 10월 8일 밝혔다.
보관문화훈장은 고(故) 장형두(1906∼1949) 전 서울대 사범대학 부교수가 받는다.
장형두 전 부교수는 일제강점기 식물학자로 활동하며 ‘바람꽃’, ‘애기똥풀’ 등 토착 식물에 우리말 이름을 붙이고 ‘학생식물도보’를 편찬하는 등 한글과 우리말 보존에 힘썼다.

1949년 10월 26일 제헌국회 제5회 국회임시회의가 열렸다.
성북동 요정이었던 대원사를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법명 ‘길상화’ 김영한 여사가 조선어학회 관련 독립운동가(애족장)인 신현모(1894~1975)가 갇혀 있는 함흥형무소에,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다. 다시 기생 ‘진향’으로 함흥 권번에 등록하여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의 계기기 되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오산고보를 나와 일본유학을 마치고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다 그만두고 영생고보에서 영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는 요즘 배우 공유를 닮은듯 하기도 했다.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 백석 26세 기생 진향 22세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당시 여인이 읽고 있던 <당나라 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서 그녀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준다. 백석은 자야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시인 백석의 부모가 기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고 반대한다.
백석은 부모님의 강요로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 그러나 백석은 신부를 보지도 않고 자야를 찾아 서울로 떠난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 뜨거운 밤을 보낸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서 같이 살자고 간청하나, 자야는 서울에 남겠다고 거절한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난다. 이때 백석이 자야에게 봉투를 건넨다.
봉투 속에는 자야를 그리워하며 지은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가 들어 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팍팍 쌓이는 밤 힌 당나귀 타고
산곬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곬로가 마가리(오막살이)에 살쟈.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곬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건 덜어워 벌이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날이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편지 봉투 주인공은 소설가 최정희라는 버전이 돌고 있다.

이면에 실제 주인에 대한 설이 분분한 대원사는 길상사로 변모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김영한 여사의 일본 유학까지 도왔다는 흥사단 단우(단우번호 67)인 신현모 의원이 발의한, '장형두 변사사건 진상보고의 건'의 속기록 일부다.
"장형두씨로 말하면 본래 전남 광주 사람으로 조선의 유일무이한 식물학자입니다. 그이로 말하면 식물연구를 한 20년 동안이나 하고 자기 추수 2,000석이나 되는 재산을 다 없애고, 백두산으로부터 태백산, 지리산으로 돌아당기면서 식물을 수집해서 표본을 맨들고 장차 사범대학에 식물표본실을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을 맨들겠다고 그런 포부를 가지고 지금 사범대학 부설중학 조고만 강실(講室)을 하나 빌려 가지구서 거기서 자기 부인과 어린 자제와 거기서 자취를 하고 있을 터입니다.“
1949년 10월 21일 좌익으로 몰리던 이종 조카에 대한 연루 혐의?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이종 조카가 운전 일을 하며 밀수에 걸려들었다. 경찰들이 네 집에서 빽 쓸 사람을 대라고 윽박지르니, 이모부인 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인 장형두를 말하였다. 그로 인해 장형두 식물분류학자는 서울 중부서에 21일 연행되어 인천경찰국으로 이송된 후, 3일만인 23일에 고문치사에 의해, 조선의 유일한 권위자로 천재적인 식물분류학자를 어이없이 잃어버렸다.
독립유공자 신현모 국어학자 및 제헌국회의원은 국회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여 이 고문사 문제를 다루었으나 지금도 좌익과 연류되었다는 억움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면에는 '국대안' 반대투쟁이 좌절된 후 학교 내 진보적인 교수와 학생들을 제거하며 '교육의 자주성'을 잘라낸 사건의 결과였다. 오재도 검사의 반공이란 이름에 걸려든 인재의 손실로 볼 수 있다.
장형두는 1906년 광주 북쪽 부자 4형제 중 장남으로 누문동 119번지 출생으로서, 12살 때 도쿄원예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일본부립원예학교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을 피하여 귀국한 뒤, 전학한 이리농림학교를 잠시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 고등조원학과를 1928년 졸업했다.
1920년경부터 동경제국대학 식물학 강사로서, 일본 식물연구의 개척자인 마키노 도미타로오(牧野富太郞·1862~1957년) 선생에게 사사하고,
식물 공부에 정진하여, 그가 주최한 "일본전국식물명찾기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영재였다. 1923년 9월 15일 관동대지진 피란 동포 11명 도착 기사 명단에, 광주군 광주면 동면 장형두(조선일보, 1923.09.18.)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조선일보 문화부·숭실전문학교·성대 강사·서울중·서울대 사범대 등에도 근무하였다. 1933년 거금 2만원을 들여 10여 년간에 걸쳐 심혈을 받쳐 채집한 7,000여 점의 표본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하여 1년 만에 정리했다. 그의 표본은 국내에는 찾아볼 수 없고, 일본에 3000여 점이 남아있다. 만약 국내에서 찾는다면 문화재로 수집할 정도로 뿌리부터 꽃까지 전체를 표본으로 한 국보급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우리나라 식물학계에서 선배 학자 이름을 학명에 넣은 경우가 있다. 장억새는 경기도 가평 등 중부 지방에 분포하는 희귀 억새다. 식물학자 이영노가 발견한 뒤 1964년 선배 학자 장형두를 기려 그의 성(姓)을 따서 명명했다. 장억새의 학명은 ‘Miscanthus changii Y.N.Lee’인데, 종소명에도 장형두 이름이 들어 있다.

1933년 5월 '조선박물연구회' 설립 참여하고, 1934년 2월 '경성식물회' 창립하여 조선향토식물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생과 애호가들이 참여했다. 장형두와 박만규는 전라남도에서 초등교원을 하다, 1933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일본 문부성 중등박물교원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경성식물회를 주도하고, 3명의 일본인 쓰다, 오오타니, 미야가와 등과 열렬히 활동했다.
장형두는 1935년 3월 '정태현, 이덕봉, 박만규, 석주명'과 함께 ‘경성식물회’를 개칭하며 '조선식물학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조선향토식물> 제1호에 2편의 논문 기고 수록했다. ’조선식물학연구회‘는 당시 우리나라 생물교원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활동의 폭은 넓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근대 생물학 분야의 초석이 되었던 학회로, 해방 이후 ’한국생물학회‘를 거쳐 ’한국식물학회‘와 ’동물학회‘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식물향명집』과 『조선식물명집』 발간 등 향토생물에 연구에 집중하던 이 학회의 정기간행물이 없었다.
당시 일제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20년 동안 조선의 식물을 연구·분류하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이라는 거물 학자가 있었다.
지금도 한반도의 고유식물 527종 중 327종에 식물 발견자 ‘나카이’ 성(姓)이 새겨져 있다.
장형두는 전국의 수많은 식물표본을 수집하며 이전 일부 우리나라 식물에 대한 '나카이‘의 연구 결과에 대한 반박을 시도한다.
1940년 전라남도교육회 주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전지역의 식물을 조사하여 출간한 『전라남도식물』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연구하였으나, 출판 직전에 비록 일본 학자에게 배웠지만,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는 장형두가 고집하는 의견 차이로 탈퇴했다.
장형두 선생은 '일본과 맞짱 뜬 식물학자', "조선 식물상은 조선인 손으로 규명되어야 한다"고 절규하는 민족주의자로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48년 9월 1일 국립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에 임용됐다.
1949년 학생용 식물도감 『학생 조선식물도보』(수문관 판, 조선생물교육회 사정)를 발간하여 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비록 종이 질이 떨어지지만 많은 식물의 그림은 나카이의 '조선삼림식물편'의 그것에 못지않다. 그래서인지 초판후 1년 동안 제4판까지 인쇄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도감이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과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참고가 되기를 서문에서 밝혔다.
'식물'을 '묻사리'로 '고산식물'을 '높산묻사리'로 ’동물‘은 ’옮사리‘로 하는 등 철저하게 한글로 표기했다. ’묻사리‘는 '땅에 묻혀서 사는 생물'이라는, '옮사리'는 ’움직여 옮겨가며 사는 생물‘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당시 한글학자 최현배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광복회장을 역임한 처조카인 김승곤(독립장, 중국방면, 1977)이 광복 후 고모부인 장형두 선생 집의 식객으로 있으며 『학생 조선식물도보』의 그림을 그렸다.
장형두가 남긴 저서와 논문은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산(産) 수목의 종류와 그의 분포지」, 《전남 산림회 기관지 청구(靑邱), 1938》, 『(학생)조선식물도보』(서울: 수문관, 1948). 『(학생)식물도보(圖譜): 보통(譜通)식물대백종(大百種)수록』(서울: 수문관, 1949), 『(학생)식물도보: 초등학교, 중등학교 통용(通用)』(서울: 수문관, 1949), 『(학생)식물도보: 초등학교. 중등학교 통용』(서울: 수문관, 1950), 『(학생)조선식물도보』(서울: 수문관, 1958년), 『식물도보: 보통식물대백종수록(학생, 초등학교, 중등학교 통용』(서울: 수문관, 1960) 등이다.
2022년 6월 수원 요양원에서 찾아뵌 둘째 아들 장득성(1936년생) 선생의 증언을 소개한다. 그 많은 재산을 까칠하고 고집스레 식물학자로 답사와 연구로 써버렸다. 식구들에겐 오히려 답사 나가는 시간이 집 안 분위기가 따뜻하고 행복했다. 집에 들어오면 채집한 풀꽃을 정리하고 표본을 만들면서 식구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이 오롯이 식물연구에 집중했다. 세 번째 식물도감 출간을 위한 원고 3차 교정지를 품에 안고 억울한 죽음으로 눈을 감지 못했다. 그 원고를 친구가 책 서문에 ’장형두 선생 고맙다‘는 한 마디하고 본인 이름으로 발간했다. 장득성 선생은 그 내용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 식물연구 답사로 재산이 사라지고 돈이 떨어지자, 담양 객사리 부자 처가에서 해준 결혼 예물 금반지 금목걸이까지 팔아 답사비를 마련할 정도였다.
장지는 망우리공동묘지였다. 묘지는 2019년 서거 70년 만에 단장했다. 묘지번호 201271이다. 2020년 광주MBC 8.15특집다큐 <장형두와 우리 묻사리>가 방영되었다. 둘째 아들 장득성 씨와 손을 잡고 조선 천재 식물학자 장형두의 피맺힌 신원을 풀어드려야겠다. 중랑구청 어느 꽃밭이나 식물 관련 텃밭에 장형두 이름을 정하여 그를 뜻을 기리고 후학들이 이어가길 바란다.
76주기인 오늘 오후 묘역을 찾아가 참배하며 길을 열어 주시라 합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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