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송대회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의 세계시민교육으로 2016년 10월 22일 오전 10~12시에 수림문화재단 동교 김희수 기념 아트센터 아트홀에서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송대회(주최: (재)수림문화재단, 주관: (사)중랑문화연구소, 릿쿄대학교 한국사무소)가 열렸다. 이날 참가 학생(보인고, 숭실고, 신현고)들은 윤동주 시 낭송을 통해 식민지 시대 한 청년의 올곧은 정신과 순수한 시심을 맘껏 드러내 암울한 시대 희망의 분위기를 환하게 띄웠다. 내년 2월 16일 릿쿄대학교에서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송회(우수 학생 2명과 지도 교사 1명 초청)가 뜻 깊고 의미 있게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 매년 시낭송대회에서 선발한 한국 우수 학생을 초대할 예정이다. 오후 2시~5시까지 망우리공원묘지 망우인문학 투어와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의 묘역에서 2016년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수료식을 가졌다.
수림문화재단 하정웅 이사장은 시낭송대회 축사를 통해 윤동주 삶과 시 정신을 이어 받아 세계적인 대문호로 발전하기를 기원하였다. 또한 올해 탄생 100주년 기념 김병기 화백 일본 동경 탐(TOM)미술관 전시를 맞아, 김화백의 1세기 삶과 기운을 받아 큰 꿈을 실현하는 나날을 기대한다며 참가 학생을 북돋웠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다 한국의 흙이 되어 망우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인간의 가치 실천에 감명 받아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은 청리은하숙(키요사토 긴카쥬크)을 2006년부터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 호쿠토시 기요사토(청리고원-미국성공회 선교사 폴 러쉬의 농촌계몽선교 활동으로 현재 일본 최고의 낙농과 유기농 지역)에 사비로 설립하여 올해 13회째 개최하였다. 그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해 한국에서도 2015년부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숙장대행 정종배 시인)를 설립하여 올해 2회째 활동하고 있다. 지난 6월 24일~27일까지 일본 제13회 청리은하숙에 2015년 제1회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활동에 참가하여 선발한 우수학생 5명과 지도교사 4명이 참가하였다. 매년 일본 청리은하숙에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활동 우수학생과 지도교사가 참가할 예정이다. 오는 11월 5일 오전 10시~12시 30분까지 서울시청 시민청 동그라미홀에서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을 조명한 영화 ‘백자의 사람’을 상영한다. 이 자리에서 청리학을 강의(중앙대 일어일문과 박전열 명예교수)와 관객과 질의응답을 통해 청리학의 뜻을 홍보하고 확산시킬 예정이다.
일본 릿쿄대학 윤동주 시낭송회 산파역인 대한성공회 유시경 신부는 ‘다시 만난 윤동주’의 강의를 통해 시낭송회 개최와 윤동주 장학금 수여 과정을 자세하게 말씀하여 가슴에 큰 울림과 시낭송대회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의 릿쿄대학교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강의 내용을 요약하여 게재한다.
다시 만난 윤동주
- 시인 윤동주(尹東柱)
유시경 신부(성공회 신부, 전 릿쿄대학 교목, 전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 사무국장, 릿쿄대학교 한국사무소장)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신약성서 요한복음 12:24)
일본이 15년 전쟁=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8월 15일로부터 반년 전인 1945(쇼와20)년 2월 16일,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현재의 모모치공원)에서 27세의 짧은 인생을 접은 조선 출신 청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히라누마 토쥬(平沼東柱), 본명은 윤동주.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그는 일본의 식민지 압제에 의해 원치 않는 개명을 강요당했다.(창씨개명) 문학을 향한 일념으로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치안유지법에 따른 일본식 이름으로 도항증명서를 받아야만 했다.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히는 분노를 삭이며 식민지 종주국으로 더 큰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식민지 청년 '동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시 총동원 체제의 압박과 전쟁 훈련, 나아가 체포와 조사와 투옥, 그리고 옥중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1942년 4월, 동주는 미국성공회 선교사가 설립한 미션스쿨인 릿쿄대학 영문과에서 선과생(選科生)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선과생은 전시하에 일본 국적이 아닌 학생을 위해 임시로 개설된 과정이었다. 당시 릿쿄대학은 황군 배속 장교 이이지마 대위의 통솔하에 놓여, 대학생 군사교육이 강화되고 학도병을 모집해서 전쟁터로 보냈다.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는 수도 동경의 하늘 아래에서, 이런 릿쿄대학의 분위기에서 한 한기를 지낸 윤동주는, 그 해 7월에 일시 귀향한 후, 10월에 쿄토의 동지사(同志社)대학으로 전학한다. 릿쿄대학과 같은 영문과, 같은 기독교대학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크리스찬이던 윤동주에게 기독교 대학인 릿쿄대학은 과연 어떤 곳이었던가 묻고 싶어진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진상을 알 방법은 없고, 그가 릿쿄대학 재학 중에 남긴 시를 통해 그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해볼 따름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쉽게 씌어진 시, 1942.6.3)
동지사대학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시인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 후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구 후쿠오카구치소에 수감된다. 조선독립을 반년 남긴 1945년 2월, 원인불명의 병으로 그는 짧은 인생의 막을 내린다.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진상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그 때 증거품으로 압수된 작품들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그가 일본 체재 중에 남긴 5편의 시는, 모두 릿쿄대학 시절에 쓴 것이다. 그는 릿쿄대학의 편지지에, 당시 금지였던 조선어(한글)로 시를 엮어, 서울의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남겨진 5편의 시가 후일 발견되면서 윤동주의 존재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쉽게 씌어진 시>는 시인의 사후 2년째인 19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 당시 신문사 주필이던 정지용(후에 월북)의 소개문과 함께 해방 후 최초로 발표된 작품이다. 정지용은 윤동주와 면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경향신문 기자였고 윤동주의 대학 동창이던 강처중(후에 월북, 행방불명, 초판본 시집의 발문을 썼다)의 추천으로 시를 받아 읽고, “이런 천재적인 시가 어째서 묻혀 있었던가?”하며 감탄했다 한다. 윤동주는 경향신문 보도 이후, 죽어서 비로소 시인의 이름과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표작 "서시"와 함께 누구나 아는 국민적 민족시인 윤동주의 존재가, 릿쿄대학에서는, 일본 사회에서는 잊혀가고 있었다. 2001년 (한국에서 릿쿄대학으로) 부임한 이래, 나는 줄곧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 후 몇 가지 활동을 통해 윤동주를 기념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본교 졸업생과 인연이 닿아, 2007년 2월, 윤동주가 재학 중에 분명 다녔을 이케부쿠로 캠퍼스의 대학 채플에서 기념집회를 열 수 있었다. 이어 2008년 2월 26일, 63주기 기일에는 윤동주가 재적했던 문학부 영문과(현 영미문학 전수)의 백주년 기념행사로 추도예배와 기념강연을 개최하면서 동시에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를 발족했다. 2010년부터는 3년간의 협의를 거쳐, 릿쿄대학 10개 학부마다 1명씩, 성적우수 한국 유학생 10명을 대상으로 윤동주 국제교류장학금도 실시되고 있다.(1인당 60만엔, 총액 600만엔)
제국주의의 광풍 아래에서 식민지지배와 모국어 사용금지 등, 시대의 비극 가운데 한 청년의 인생은 너무도 일찍 막을 내리고 잠들었다. 지금 윤동주를 기념하는 것은,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한 명의 시인만이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시대 속에서 인생과 생명을 빼앗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또 한명의 윤동주를 낳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異国)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에 건너와 꿈을 펼치려 했던 윤동주의 강요당한 국제성과 방황을 생각할 때, 진정한 국제화를 지향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금 윤동주를 기념하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동주가 동경의 하늘 아래에서 눈물로 써내려갔을 시를 다시 한 번 새겨 본다.
■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 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 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194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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