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 시인 초허 김동명
ㅡ오월 가정의 달 어버이날
어머니 사랑으로 일제, 북한, 제1공화국 독재에 까칠한 시인 초허 김동명(1900~1968)
남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은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다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러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라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김동명<조광>(1936.1)
평론가 백철 시인 백석과 영생고보 문예반을 지도하며 강소천 위선환 박창해 등을 지도하고 창씨개명 거부하고 절필한 '내 마음은' '수선화' '파초'의 시인 초허 김동명
망우리공원 묘지 터를 초허 김동명 경주 김씨 강릉 사천 수은공파 9대 종손인 김회기 선생과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망우산 능선을 오갔다
죽산 조봉암 선생 묘지를 중심으로 구리둘레길을 오르내리길 반복하다, 망우산제2보루 가는 방향 솔샘약수터 내려가기 전 좌측 서울을 바라보는, 지금은 나무가 자라 시계가 가려 서울 시내가 보이지 않지만, 묘지를 쓸 당시는 시원스레 툭 트였다며, 묘지 터를 지목했다
산자락 100여 미터 아래 독립지사 강학린추념비가 비스듬히 서 있는 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장례식 성묘 이장 등에 참가하고 주관한 종손은 자신 있게 큰 소나무와 출입하던 오솔길 등을 기억하고, 10여 만에 들어오니 찾기가 쉽지 않았다며,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밤나무 세 그루가 자라고 잡목이 자리 잡은 묘지 터에 묻혀 있는 묘비를 다시 세우는 날을 기대하고
만해와 죽산 선생 유택을 참배했다
코로나19로 점심을 함께 먹기 그렇지만 초허 김동명 시인의 일화를 더 듣기 위해 봉평막국수집에서 비빕막국수 먹으며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많이 해결했다
초허 김동명 시인의 묘지 풍수에서 손주들의 운명(큰 손자 요절과 작은 손자 신부님)으로 미루어 그럴 수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서울시 조례를 바꿔 이장한 분의 묘역을 다시 복원한다면 재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비 예보에도 어제 전화 드렸는데 곧바로 약속하고 오늘 답산을 하여
미뤄 두었던 일을 처리하신 종손께 깊이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리고, 일의 진척에 따라 다시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상봉역 3번 출구에 내려드렸다.
고맙습니다.
묘지번호 204707
“일제강점기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 [폐허]파에서 번영로. 오상순. 황석우, 조선어학회에 관계하면서 시와 수필을 쓴 이병기. 이희승, 젊은층으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과 박남수. 이한직 등 [문장] 출신, 제일 먼저 붓을 꺾었다는 홍로작과 김영랑. 이육사. 한흑구. 등이다. 이들은 친일 문장을 현재 조사한 범위 내에서 단 한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ㅡ임종국 『친일문학론』(1966)에서
필자가 파악한 한용운, 김동명, 백석, 심연수, 오일도, 이상화 시인도 친일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망우리공원에 한용운 시인 유택이 남아 있고, 김동명 김영랑 시인의 유택은 이장했다.
초허 김동명은 함흥의 영생고보 근무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 둔 백석이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초허보다 열두 살 어리고, 아오야마학원 후배인 백석은 졸업하며 영어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백석은 정규 수업시간에 영어를 가르쳤다. 수업 이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초허 김동명 선생을 도와 교지《영생》을 만들었다. 문학평론가 백철도 백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백철은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서 약 1년 반 년 정도 옥고를 치른 뒤 함흥에 왔다. 소설가 한설야도 카프 제2차 검거 때 체포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 함흥에 있었다. 서점과 인쇄소를 운영하며 초허와 교류하며 객지살이하는 백석의 정신적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소천 강용률의 함흥 영생고보 선생님으로 초허 김동명 백석 백철 등이 있었다. 특히 백석과는 나이 차이가 세 살 적은 늦깎이 학생이었다. 소천은 1931년 영생고보에 입학했다. 그 때 이미 강소천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시 <봄이 왔다> 등을 발표하여 등단한 소년문사였다. 강소천은 4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1년간 만주를 방랑하였다. 그 때 용정에서 윤동주와 만나 문학적 교류를 가졌다. 1936년 복학하여 이듬해까지 2년간 집중적으로 백석의 지도를 받았다. 소천은 백석의 하숙집에 자주 들러 틈틈이 써온 동시를 보여주었다. 스승인 백석은 제자 소천의 대표작 동시 <닭>을 1937년 《소년》창간호에 발표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발간한 이 잡지는 주간으로 윤석중이 맡고 있었다
김동명의 일생은 사실 서러운 일생이었다. 구박둥이에 천덕꾸러기 사주팔자를 타고났다 해서 자탄도 많이 했지만 또 서러움을 상쇄할 만한 도움의 손길도 있어서 뒤뚱뒤뚱 한세상을 살았다.
어릴 때는 외출복이 없어서 어머니가 외갓집 나들이를 할 때 데려가지도 않았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거지꼴 같은 아들을 친정에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김동명이 7세 때 처음 옷 한 벌을 얻어 입고 외가에를 갔는데, 그때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어머니가 친정살이를 하러 간 길이었다.
망우리공원 신립장군과 같은 평산 신씨 신희공파 신사임당 친정 동네였다.
원산으로 이사 가기 전 인사 드리려 간 외가 동네에서 열린 시 짓기에서 김동명이 장원을 하였다.
남들이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하고 두 학년을 건너뛰어 3년만에 영생(永生)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1년간 놀다가 간신히 근처에 있는 동진소학교(東進小學校) 선생이 되었지만 기구한 사주팔자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취직한 지 겨우 한 학기만에 학교를 쫓겨났다. 3.1독립운동 두 해 후인 21년이면 아직 살벌한 분위기인데 모친신석우를 닮아서 입이 촉바른 그가 그만 3ㆍ1운동 찬양 발언을 학생들 앞에서 해 버렸다.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일을 해 놓고 그는 '추방의 비운'을 맞이한다.
두 번째 추방은 서해안 남포 근처의 소학교에서 당했다. 평양 숭실대학에 다니는 선배 한 사람이 교장에게 애걸복걸해서 취직이 된 것인데 이 학교 또한 가을 학기 겨우 끝내고 나자 '나가 달라' 했다. 조선인을 일본 사람 만드는 교육 내용을 불평했기 때문이다. 속이 뭣같이 상했지만 그래도 대동 강변을 걸으며 시를 생각하는 재미 하나로 버티어 오던 학교생활을 별 수 없이 청산하고 시고(詩稿)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돌아섰다.
그 후 안주에 있는 U소학교에 세 번째로 취업, 여기서는 입조심을 대단히 해서 데뷔작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면>을 썼고 쫓겨나는 것도 한 학기만이 아니고 1년만에 파직 당하는 '행운'(?)도 있었다.
작곡가 김동명을 가르쳤다. 김동진은 김동명을 스승으로 높이 알리고 민족시인 제자라는 자부심이 높았다
김동명은 스승 시를 작곡했다. <내마음은>은 널리 알려졌으나, <수선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 이유는 김동명 시인이 제자 김동명 친일한 것을 알고 서운한 점을 밝힌 뒤로는 수선화는 자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수선화는 김동명이 시인 백석을 위해 쓴 시다
입 잘못 놀려 세 번씩이나 해고를 당한 김동명은 세상 살 맛이 안 났다. 고향 생각이 비로소 났다. 가난에 쫓겨 도망하듯 떠나온 고향이지만 워낙 세파에 시달리고 서러우니 몸서리나는 고향도 생각키웠다. 그는 고향 강릉으로 가 보기로 작정하고 봄비 내리는 4월 어느 날 길을 나섰다가 잠시 원산을 다녀갈 생각을 했다. 거기엔 조카 하나가 공무원을 하는데 거기 대고 하소연도 실컷 하고 여행 편의도 부탁할 생각이었다.
오즉했으면 딸을 입 하나 덜기 위해 친구 집에 양녀로 보낼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일제시대의 관리란 역시 끗발이 좋아서 조카의 말 한마디에 냉큼 사람을 보내어 정중히 초빙해 가는 소학교가 있었다. 김동명은 고향 길을 포기하고 그 학교에 눌러앉아 한 학기를 대과 없이 보내고 C여학교로 '자의에 의해서' 옮겨앉았다. 고약한 운명이 끝나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학교에 무슨 소송 사건이 생겼는데 김동명이 중뿔나게 거기 말려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물러나겠소.' 모친을 닮아서 큰 소리 잘 치고 객기도 있는 그가 '자의에 의해서' 퇴임을 했다. 그것이 C여학교로 옮긴 지 두 달 만이었다. 그러니 취직 최장기간은 1년이고 최단 기간은 2개월이었다.
이렇게 4 차례 실직의 비운을 겪은 다음부터는 대체로 일이 잘 풀린 셈이다. 몇 개월 조캇집에서 식객 노릇을 착실히 하다가 유림회(儒林會) 강습소의 일을 한 일년 보았다.
29세 되던 해에 그는 동경 유학을 떠나게 된다. 우연찮게 기독교 계층의 장학금을 받고 또 처가에서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기독교 자금이므로 일본 청산 학원(靑山學園) 신학과를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김동명은 아무래도 종교적 인간은 못되었다. 낮에는 청산 학원에 나가고 밤에는 일본 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그 시절의 학제는 돈과 시간과 체력만 허락되면 둘이 아니라 세 군데 학교를 다녀도 상관없었다.
그는 두 번 아내를 잃는 쓰라림을 겪고 세 번씩 장가를 가는 처복(?)을 누렸다. '김동명이 처복 없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토론회를 가졌다 한다.
첫 아내는 그의 첫 직장인 동진(東進)소학교 시절의 하숙집 딸이었다. 총각 선생이 용모는 볼 것 없었으나 재능과 인품은 출중하다 해서 장모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 한다. 첫 부인 지정덕(池貞德)은 영생고녀 출신의 전형적인 동양 여성이며 1남 2녀를 낳고 금슬 좋게 살다가 40도 못되어 타계했다.
42세에 김동명은 다시 장가를 가는데 상대는 이대(梨大) 음악과 출신의 석사 이복순(李福順)이었다. 그녀는 영생고녀 음악 교사로 있었는데 성악가 김자경 선생의 모친 강신앙 여사가 중매를 섰다. 이 결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김동명은 '그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라는 무용담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고심참담한 난관의 시간을 극복하고 나니 그렇게 쌀쌀맞던 이복순(李福順)양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천하에 다시없는 현모양처로 변하더라고 그는 수필 <천환 180도>에 써 놓았다. 그는 이(李) 부인의 몸에서 난 첫딸 월정(月汀)을 가장 사랑해서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는 어떤 글에서 월정(月汀)의 이름 풀이를 '아름답고 깨끗함, 아름답고 영원한 것의 참된 모습, 노래의 시작, 탄식의 종말'이라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李)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 결실이라 더 귀중, 소중했다.
그러나 귀신의 시기인지 이(李) 부인도 둘째딸 월령을 낳고 59년 대학 수련회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첫날 입수하다 심장마비로 남편 곁을 영영 떠났다. 김동명은 그 충격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하다가 잘 다니던 다방 마담과 세 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간신히 위안을 얻는다. 가난과 실의와 병고 속을 살아간 말년에도 그는 세 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서럽지는 않았다
김동명의 일생은 곡절이 너무 많고 가슴 아픈 참변도 여러 번 있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갔다. 강원도 명주군 노동리 산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장부 어머니 덕분에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다.
68세 되던 1968년 1월 그가 중풍으로 타계할 무렵, 그는 직업도 없고 원고료 수입도 없는 빨간 맨손이었다. 살던 집을 줄이고 줄여서 약값 대다가 마지막은 '서울의 시골 지역' 남가좌동 모래내의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빈수래빈수거(貧手來貧手去)라고나 할까.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습격사건이 일어난 그날 신산스런 삶을 마감했다.
망우리공원 지금의 구리둘레길 솔샘 약수터와 설태희 가족묘지 사이 능선에 부인 이복순 옆에 안장됐다. 2010년 10월 10일 고향 선영으로 납골 봉안했다. 본인 묘비는 세우지 못하고 부인 이복순 묘비는 묻고 갔다
김동명은 자기의 아호를 초허(超虛)라고 스스로 지었으나 한 번도 써먹지 않았고 또 자기의 일생을 초허(超虛)스럽게 살지도 않았다. 일 욕심이 많은 그는 남이 하는 짓은 모두 해보려고 했다. 20대에는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고 30대에는 장사 수완을 발휘해서 목재상, 땔나무 장사, 양곡배급소까지 경영해서 큰돈을 만져 보았는데 심지어는 흥남 역전에 부동산 투기를 크게 하기도 했다. 통일이 되어서 요행히 원 소유권이 찾아지면 그 자녀들이 막대한 땅을 유산 받게 될 것이다.
40대부터 김동명은 흥남을 떠나 서울에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날 그는 신문지에 세면도구를 싸서 들고 '어슬렁어슬렁' 동해안 금강산 산기슭을 걸어 그만 월남을 해 버렸다. 해방 후에 생긴 정당에 관여했다가 별재미를 못보고 흥남에서 여러모로 물을 먹은 그는 서울살이를 결심하고 가족들을 잇달아 불러들였다. 서울에는 김사익(金士翼), 김재준(金在俊), 송창근(宋昌根) 등 신학 계통의 선배들이 있어 큰 도움을 받게 되고 곧 이화여대 교수직을 얻게 된다.
학자의 일을 하는 한편, 그는 정치가적 기질도 발휘해서 조선 민주당 정치부장도 하고 민주 국민당 문화부장도 한다. 흥남에 있을 때는 조선 민주당 흥남시 지부당 위원장까지 했는데 최용건(崔鏞健)에게 밟혀서 내쫓기고 절치부심하다가 월남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4ㆍ19 이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60세 되던 해에 참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5.16으로 그 자리마저 잃은 후로는 정해진 수입 없이 정치 평론, 시, 수필 등 닥치는 대로 써서 생활을 꾸려 나갔다.
제1공화국 이승만 독재 정치에 날가로운 정치평론을 발표했다.
그래도 특별히 위해를 당하지 않는 이유는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의 동향출신이라는 뒷배경의 힘이 작용했다.
동명의 일생이 이처럼 좌충우돌 뛰는 말 같은 것은 그가 꽁생원 아버지를 닮지 않고 성격이 시원시원 틘 어머니의 기질을 이어받은 탓이었다. 그는 수필 등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별로 안하고 어머니 이야기를 열심히 썼다. 어릴 때 어머니는 수없이 많은 설화, 고담을 들려주었고 심청전이니 장화홍련전이니 하여간 그때 나온 이야기책은 모두 읽어 아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결코 외아들을 과보호하지 않았는데 아들을 새삼스레 한참 바라보다가 암만 봐도 너는 못생겼다. 이러기도 하고, 아들이 집에 편지 한 장이라도 보내면 꼭 흠을 잡아서 '아직 멀었다. 너 친구 아무개의 글보다는 못하다.'하는 식으로 아들을 채찍질했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살림살이 박차고 흥남 부둣가에서 생선 장수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였다. 금강산 아랫자락 산골에서 금강산 윗동네 항구 도시로 이사간 그 일이 바로 김동명을 오늘의 김동명으로 만든 계기였다. 산골 가난한 농군으로 늙어 죽을 아들을 시인으로, 대학교수로, 사업가로, 정치가로 만든 것은 바로 여장부 어머니의 넓은 식견 덕분이었다.
사실상 김동명의 야단스럽고 요란한 인생도 자기의 뜻에 의한 인생이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살아진' 인생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학생 시절에는 어머니에 얹혀서 살아졌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선배 동료의 도움으로 혹은 능력 있는 아내들(그는 세 번 결혼했는데 모두 처복이 있었다)의 뒷바라지 덕에 적토마 같은 한평생을 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내 마음은>에는 청순가련형의 '수동적 마음'만 나타나 있을 뿐이다.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이 모두가 연약하고 피동적인 상징물들이다. 흰 그림자, 비단 옷자락, 피리, 뜰은 모두 여성의 상징물이다. 김동명에 있어서 여성은 어머니의 상징어이자 아내들의 상징어라 보아도 좋다.
그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여성을 사랑했고 모든 여성적인 것에 대해 다소곳이 포용하는 마음 자세를 평생 지니고 살았다. 그런 그의 마음 상태가 <내 마음은>과 같은 절창(絶唱)을 낳게 했다고 보아서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주로 여학생들이 김동명의 시들을 줄줄 잘 외운다.
그는 어떤 글 속에서, '세상에 여자를 있게 해 주신 신의 은총이 한량없이 가슴 벅차고 감격스럽다고 했으며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어느새 버릇으로 되었다'고 쓴 일도 있다.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玉)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 김동명, 〈내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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