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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수기자 |
[문화=경기인터넷뉴스] 우리나라 1920년대 빈궁문학을 대표하는 서해(曙海=아침바다) 최학송 서거 83주기를 맞아 지난 8일 오후 망우리공원 유택(幽宅)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이 추모식은 최학송기념사업회(회장 곽근. 동국대 명예교수)가 주최하고, (사)중랑문화연구소(이사장 남화창)가 주관했으며, 망우인문학동호회, 중랑작회의, 우리문학기림회 회원과 청량고등학교 재학생 등 30여명이 함께했다.
서해의 묘역은 정종배 시인과 동국대 곽근 교수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내 2003년 곽근 교수가 문학계에 서해 묘역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서해의 묘역은 돌보는 이가 없어 나무와 풀이 뒤덮여 있었었다. 이듬해 우리리문학기림회에서 문학비를 세웠으며, 정종배 시인은 2006년 3월 아까시나무 뿌리가 얽혀 봉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유택을 사비를 들여 세 차례에 걸쳐 정비를 했으며, 올해 처음으로 대외적인 추모식을 거행했다. 소설가 서해 최학송의 31세 짧은 생애와 소설 문학의 8년간 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서해의 출생과 성장기 (1901~1917) 서해 최학송은 1901년에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소작농이다 혹은 작은 한약방을 했다는 등으로 알려졌으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의 가정사마저도 불확실하며, 다만 생모가 김소사 혹은 김능생이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서해의 아명은 저곡이며 설봉, 설봉산인, 풍년이란 호도 쓴 적이 있다. 그의 학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소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이며, 어린시절 부친과 서당을 통해 한문 공부를 한 정도다. 5세에는 함경북도 숙부의 집에서 한동안 기거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간도로 떠나고 그 후 서해는 나무를 베러 갔다가 남의 산을 태워 죽도록 얻어맞는 등 힘에 부치는 일을 했다. 15세부터 시장거리에 나가 “청춘, 학지광” 등의 잡지를 구해 구소설, 신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특히 춘원(이광수)을 존경해 그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춘원은 서해의 글을 읽고 평문도 써주고 간간이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그의 글재주를 예지했다. -서해의 간도생활 (1910~1922) 1918년에 간도로 가 유랑생활을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한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간도로 가기 전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했으나 두 번째 처는 곧 사망했다. 그는 부두 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 말단생활을 전전했으며, 이것이 후에 그의 소설에서 빈궁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21년 서간도에서 세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첫딸 백금이 태어났다. 서해가 간도로 온 후 같이 생활한 부친이 첫 딸 출생 1년 후 집을 나간다. 서해는 1918년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가 품팔이, 나무장수, 두부장수 등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문학에 손을 놓지 않았다. -귀국 후의 생활 (1923~1924)
이 시기가 그의 문학의 바탕이 됐으며, 비로서 '서해’의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생활이 일정치 못하여 회령을 떠나 나남, 경성, 성진을 떠돌다가 1924년 10월에는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서 약 3개월 정도 불목하니로 기거하면서 그의 대표작 “탈출기”를 여기서 퇴고했으며, 일본어로 발간한 된 서구문학에 빠졌다. 그 해 11월 어머니의 환갑날 “살려는 사람들”을 탈고했으나 발표하지 못하고 후에 “해돋이”로 제목을 바꾸어 발표했다. 봉선사 주지 이학수와 다투고 다시 춘원의 집으로 갔다가 상경했다. 이때 고향의 아내는 시어머니와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왕성한 작품 활동 (1925~1931) 1925년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자, “십 삼원, 탈출기, 살려는 사람들,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므로 중견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시기에 첫 딸 백금이 병사했다. 그 후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26년 2월 창작집 “혈흔”을 글벗집에서 발간했다. 그 해 4월에는 시조시인 조운의 누이 분려와 조선문단사에서 네 번째 혼인을 하고 명륜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6월에는 조선문단이 휴간되어, 현대평론 문예란 기자로 취업했으며,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여러 문예지에 발표했다. 1927년 1월 장남 백이 출생했으며, 같은 달 조선문예가협회에서 이익상, 김광배 등과 함께 간사직을 맡았으며, 조선문단사에 다시 입사했다. 1931년,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부친이 찾아오지만 몇 달 만에 다시 간도로 떠난다. -기생들의 잡지 “장한” ...살기 위해 관여(1927) 목구멍이 포도청, 서해는 1927년 1월 10일. 먹거 살기위해 기생들이 펴낸 잡지 "장한"에 관여한다. 이책의 편집·발행인은 김보패, 인쇄인은 노기정, 인쇄소는 한성도서며 발행소는 ‘장한사(長恨社)’다. 흥미를 더하는 것은 장한사의 주소가 ‘서울 관수(觀水)동 14-1’로, 당시 대표적 요리집이었던 ‘국일관’의 주소와 일치한다. 이는 국일관에서 자본을 대고, 발행인 김보패는 가명이거나 필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11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의 가격은 40전, 필진은 대부분 당시 이름을 떨쳤던 유명 기생이다. 소설가 김유정이 사랑한 여인이자 훗날 여류 판소리의 대가가 된 명창 박녹주(朴綠珠)는 물론 김월선(金月仙), 윤옥향(尹玉香), 김남수(金南洙), 백홍황(白紅黃) 등 소개된 40여 편의 글 대부분이 현직 기생들의 작품을 수록했다. 중견작가의 반열에 있으면서 가난을 늘 달고 다니던 서해에게는 장한의 출판은 흥미로웠고, 주머니 사정도 좋아지니 일석이조라 편집 일을 맡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문사들과 대중은 장한을 기생들이 낸 '도색 잡지'로 치부하고, 편집장이었던 궁핍한 서해는 지식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당시 사회의 핫-이슈였던 이 책은 2회 분을 발행하고 폐간된다. -서해의 사망과 그 후 1932년부터 위문협착증으로 6월 말 관훈동 삼호병원에 입원한 뒤, 7월 의전병원으로 옮겨 대수술을 받았으나 과다한 출혈로 수술 이틀 만에 31세로 사망했다. 그 후 23일에는 서울 백합원에서 ‘최서해유족구제발기회’가 결성됐다. 1933년에 생전의 동지들이 주축이 되어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추도식이 열었으며, 이듬 해 6월 미아리의 묘에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 후 묘지는 1958년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돼 오늘에 이른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도 않는다 그의 문학적 가치는 스스로 자평한 1925년 2월 24일자 일기를 살피면 서해의 문학적 고집을 알 수 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련다. 나에게는 고민이 있다. 내가 어째 글을 쓰며 쓰려고 하는가? 내 글이 과연 많은 노동자, 인쇄 직공의 수고를 빌려 세상에 내놓을 가치가 있는 가. 있다 하면 있거니와 없다 하면 나는 백일청천(白日晴天)에 낯을 못 들 죄인이다. 죄인 되기를 누가 원하랴. 나는 양심의 부끄럽지 아니한 글을 쓰련다. 나는 나의 사사로운 감정을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경험 없는 것은 쓰지 아니하련다." 그는 빈궁했던 자신의 경험을 글로 표현했으며, 우리나라 문단에 "빈궁문학" 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으며, 31년의 짧은 삶, 8년간 작가로서 6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망우리공원은 내일 인문학의 보고 서해 최학송의 83주기를 살피면서, 망우리공원의 9천여기 무덤 속으로 눈을 돌린다. 근현대의 파란만장했던, 1백여 년 세월을 함께한 문인, 사상가, 예술가, 독립운동가. 의사(醫師) 등 50여 명이 누워있으며, 그들이 지닌 인문학적 가치도 함께 품고 있다.
망우리공원 묻힌 문인은 “백치 아다다”의 계용묵 . 통속소설의 대모 김말봉, “그냥 웃지요” 시인 김상용, 혼란했던 시기 남북작가 교류에 있어서 가교(架橋)였던 김이석 소설가, 영원한 “목마와 숙녀” 박인환, 어린이의 벗 방정환, 아동문학가이나 우리나라 수필문학 싹을 틔운 수필문학잡지 “박문”을 출판했던 최신복(영주), “님의 침묵” 한용운, 명연극 “동승”을 창작한 함세덕 극작가 등의 무덤 앞의 비석이 값진 보석으로 빛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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