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바다의 날 국채표와 세계 금연의 날 조봉암과 박인환

정종배 2020. 5. 31. 04:59

 

 

 

 

 

 

 

 

망우리공원 바다의 날 국채표와 세계 금연의 날 조봉암과 박인환

바다의 날
1996년 요약 바다 관련 산업의 중요성과 의의를 높이고 국민의 해양 사상을 고취하며, 관계 종사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목적으로 제정된 기념일.

5월 31일을 ‘바다의 날’로 정한 것은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을 설치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바다의 날’은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해양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국제상황에 적극 대처하고, 국내적으로는 국민의 해양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할 필요성에서 제정되었다.

바다의 날 망우리공원

국채표(鞠採表, 1906년~1967년)

국채표 중앙관상대장을 지낸 기상학자이다.

본관은 담양이며, 전라남도 담양군 출신이다.
한국 최초로 기상학 분야 이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의 태풍진로예상법은 ‘국(鞠)의 방법(Kook’s Method)’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수학과
1941년 일본 경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
1949년 ~ 1958년 :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1964년 일본 교토 대학 이학 박사
위스콘신 대학교 기상학과 강사 겸 연구원
1961년 9월 11일 ~ 1967년 7월 24일 중앙관상대장
제2대 기상학회회장
미국기상학회·미국지구물리학회 전문위원

본래의 전공은 수학이었으나 국립중앙관상대 부대장으로 취임하면서 기상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한국 기상학 분야에서 최초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기상전문가 후진양성과 기상대 현대화에 노력했다.

1929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마치고, 1941년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해방 직전까지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수학과 교사와 교감을 지내다

연희전문 은사인 이원철의 천거로 국립중앙관상대 부대장이 되었다.

기상분야의 인력난으로 고생하던 중 자신이 스스로 고급기술을 습득하여 인재양성을 하기로 작심하고,

1949년 미국 시카고대학교에 학부 1학년으로 등록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958년 대학원을 졸업한 후 위스콘신대학교 기상학과에서 강사 겸 연구원으로 있다가

1961년 귀국하여 제2대 중앙관상대장으로 1967년까지 재직하였다.

재직기간 중인 1963년 관상대에 있던 유명무실한 기상학회를 없애고

한국기상학회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1965년 한국의 기상학이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으로 평가되는 한국기상학회지 창간호를 발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또한 서울대학교에 개설된 천문기상학과에도 출강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64년 일본 교토대학에서 태풍진로예보법에 관한 논문으로 한국 최초로 기상학 분야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연구 결과인 태풍진로예보법 '국(鞠)의 방법'(Kook's Method)은 국제적인 기상예보법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기상학회, 미국지구물리학회 전문위원을 지냈다.

전 중앙관상대장 국채표박사(64·서울시 성북구 성북동38)가 5일 상오9시 우석대학부속병원에서 별세했다.

이날 국박사는 친지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뇌진탕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가료중이었다. 국박사는 연전 수물과를 나와 일본동도제대 수학과에서 수학하고 다시 영국「시카코」대학에서 기상학을 연구한 후 귀국, 5·16직후부터 67년7월까지 6년동안 관상대장으로 일했었다. 영결식은 8일 상오10시, 종로5가 연동교회, 장지는 망우리 가족묘지. 유족으로 부인과 3남이 있다. ㅡ[출처: 중앙일보 1969.02.06.]

묘지 앞 단비 비문

고 국채표 박사 영전에 드림

한떨기 설매꽃 처럼 청하하고
높은 님의 자취 이곳에 남기시니
님 가신 곳 더욱 빛나오리다
1969년 3월 25일
문학박사 이병도 글 문하생 씀

중랑구 마을지킴이 선두주자 김완숙 선생이 이끄는 중랑을 걸어요 일행과 찾은 국평정지 터와 이기붕 가족 묘지터를 확인하고 답사팀은 내려가고 다시 혼자 눈여겨 본 묘지를 찾았다.

국채표 씨 묘비인데 이병도 국사학자 글을 문하생이 썼다.

국채표 가족묘지였다. 부모님 유택은 옛 모습 그대로 잘 관리되고 있다. 국채표 묘지도 이장하지 않았다. 평장으로 묻힌 듯 봉분을 찾을 수 없다.

사가정공원에 올라오는 중랑 숲길 나무테크 중간 끝나는 지점 아래 독립지사 김진성 묘역을 찾았다. 이장하고 그대로 둬 나무가 우거져 정리가 필요하다.


세계금연의 날 망우리공원

세계보건기구(WHO)가 금연 캠페인을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WHO는 창립 40주년인 1988년부터 매년 5월 31일을 세계 금연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흡연과 건강문제를 생각하는 날로, 흡연이 개인과 공공의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세계적인 관심을 촉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WHO는 담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세계적 협력을 강조하며, 매년 세계 금연의 날에 공통된 주제를 정해 협력 국가와 함께 캠페인을 전개한다

박인환(朴寅煥, 1926~1956)

망우리공원 참배객들이 상석이나 묘비 앞에 담배를 태워 놓거나 술을 따르고 음복으로 마시는 묘역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죽산 조봉암과 1950년대 명동의 댄디보이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유택이다.

죽산 조봉암 선생 유택에서는 술은 막걸리 담배는 어느 급이나 구분이 하지 않는다. 죽산의 유택은 사색의 길과 인접해 있기에 한여름밤 유택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도 지인들과 몇 번 경험했다. 죽산이 사형 집행 전 마시고 싶다는 술 한 잔을 막걸리로 하는 것은 죽산이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시인 박인환 유택에서는 술은 양주 담배도 양담배를 말하고, 실제 그렇게 의식을 치르는 참배객이나 단체기 있다. 장례식에서 문우들이 술 조니워커와 담배 카멜을 묻어 주었다 점을 기억하고 지금도 담배불이 타고 있는 상황을 종종 본다.

박인환은 통속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 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박인환은 약관의 나이에 서점 마리서사를 운영하며 문인들 중심으로 많은 예술인들과 나이와 관계하지 않고 활발하게 소통을 하였다.

여장부 끝뫼 김말봉 소설가에게만 그 자리에서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고 전해질 정도다. 그 현장에 죽산 조봉암의 사위 이봉래 영화인이 함께 했다.

“나(이봉래)는 박인환 등과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다방에 들어가 김말봉 앞에 앉게 되었다. 박인환은 나를 소개한다면서 입을 열었는데,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였지만 ‘말봉씨, 이봉래를 소개하지요’라고 큰 실수를 저질렀다.

김말봉은 ‘인환씨. 말봉씨가 뭡니까…시를 쓴다는 사람이 그게 무슨 말툽니까’ 하고 호통을 쳤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박인환도 추상과 같은 호통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취기는 한꺼번에 가시고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순간 박인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김말봉 선생님,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박인환이가 사과하는 모습, 그것도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사과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박인환은 설령 자기가 실수를 저질러도 절대 사과하는 위인이 아니다.

무슨 궤변을 쓰더라도 자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소피스트였다. 그 궤변가가 그것도 술기가 가득한 상태에서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낭만과 우수에 젖은 명동거리를 누비며 시대를 앞서가는 시를 쓰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천재 시인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송지영, 김광주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세월이 가면'을 써낸 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훤칠한 키에 용모가 수려한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시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그는 여름에도 곧잘 정장을 차려 입고 나타나서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라고 불평을 하곤 했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도 늘 외상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술이야?” “어이구, 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 꽃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함도 없이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6·25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차츰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 1956년의 이른 봄.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한 막걸리를 주로 파는 ‘경상도집’에 박인환을 비롯해 송지영, 김광주, 김규동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도 함께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였다. 그러나 나애심은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청을 거절했다. 이때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이어 완성된 시를 이진섭에게 넘겼고, 이진섭은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나애심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한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테너 임만섭, 소설가 이봉구 등이 새로 합석을 했다. 임만섭이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부르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주 기이한 음악회가 열린 것이다. 술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이후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여기저기서 사람들에 의해 흥얼거려졌다. 그리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담고 있는 듯한 이 노래는 ‘명동 엘리지’라고도 불리었다.

망우리공원 박인환 유택에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세월이 가면' 노래와 시 '목마와 숙녀'를 1970년대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박인환의 시와 노래를 널리 알린 시인이자 가수인 박인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송시설을 설치하였다. 특히 낙엽이 다 떨어진 늦가을 저녁노을 물들 때 박인환 유택에서 흥얼거리고 낭송하는 노래와 시는 누구나 한 번쯤은 시도해 볼만한 낭만적인 꿈이 아닐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마음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이상(李箱)을 유별나게 좋아한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하였다. 이날부터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당시 약이자 음료수이며 강장제인 요즘의 활명수와 같은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였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 세였다.

박인환의 갑작스런 죽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눈을 치뜬 채 꼿꼿이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감겨준 것은 송지영이었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위스키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詩人葬)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그 자리에서 시인 모윤숙이 고인의 시를 낭송하였고 친구인 시인 조병화가 조시(弔詩)를 읽었다.

"인환이 너 가는구나
대답이 없이 가는구나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았고
멋있는 시를 쓰고..."


죽산 조봉암(曺奉岩, 1899~1959)

2년뒤 민심을 잃을 대로 잃은 이승만과 자유당은 56년 대선을 치루게 됩니다.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부통령에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은 대통령 신익희, 부통령은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또는 심장마비라고도 합니다)로 급사하자 대선은 자유당의 이승만과 무소속의 조봉암의 대결이 됩니다.

대선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70%에 가까운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됩니다.

하지만 놀라운건 조봉암의 30% 득표율이였고 이승만 은 이를 경계해 1958년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을 빨갱이라 모함하여 진보당사건을 일으키고

1년뒤 1958년 7월 31일 조봉암은 서대문 형무소 에서 사형집행 5분전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고 싶다고 하였으나 술은 마시고 못하고 간수가 전해 준 담배 한대를 피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조봉암 사형 집행 시각인 11시에 맞춰 추모식이 거행된다.

한여름 밤 죽산의 묘역 앞에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죽산의 뜻과 꿈을 되새기는 일도 의미가 있다고
지인들과 몇 번 시도해, 지나가는 산책객들이 놀라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