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골이 상접한 이상을 일본 집에서 재워준 적도 있었지"
입력 2016.03.16 18:56 수정 2016.03.17 01:12 댓글 0개
[한겨레] ‘100살 최고령’ 김병기 화가 인터뷰
“백석 시인? 북으로 간 친구 문학수의 여동생과 결혼했다가 헤어졌지요. 흰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 모자 쓴 멋쟁이였어.”
“키다리 중섭이는 그림밖에 몰랐어요. 늘 손이 더러웠지. 외투 주머니 속엔 항상 골동품 조각들이 가득했어.”
“스포츠머리를 한 김일성을 45년 가을 만났죠. 글과 그림, 음악으로 자기선전을 해달라고 부탁해요. 억세고 허스키한 함경도 말투를 섞어썼지. 생각보다 유식하게 말하더군.”
한국·일본 20세기 예술사 산증인
전례없는 ‘백세청풍’ 100살 신작전
“동급생 이중섭 늘 손이 더러웠어
김환기와는 전위미술 함께 연구
김일성은 자기 선전을 해달랬지”
1965년 도미…대자연 추상화 그려
“내 그림은 추상성 통과 뒤 형상성
인생처럼, 예술은 언제나 미완성”
20세기와의 대화였다. 올해 100살이 된 국내 최고령 화가 김병기 화백이 걸걸한 목소리로 쏟아내는 회고담은 1930~60년대 우리 근현대사의 숲 속을 쉴 새 없이 종횡무진했다. 그는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박고석 같은 국내 근현대 화단의 대가들과 문학수, 길진섭, 최재덕, 백석, 안막 등 월북 예술인들과의 숨은 사연들을 어젯일처럼 털어놓았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30년대 유학시절 일본 문화계의 작가, 평론가들의 이름들을 또박또박 적으며 한국화단과의 연분을 설명하기도 했다. 해방 공간의 정계 거두였던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같은 정치가들에 대한 회상과 80년 넘는 화가 인생에 살집을 붙여준 서구 거장들-들라클르와, 세잔, 피카소, 몬드리안, 앤디 워홀-에 대한 단상까지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박진감이 넘치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경이로운 기억력과 믿기지 않는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25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김 화백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 ‘백세청풍(백세청풍):바람이 일어나다’(5월1일까지)가 열린다. 전시를 앞두고 11일 오후 화랑 뒤쪽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왕성한 기력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기자를 맞는 그의 얼굴 뒤로 작업실을 메운 신작 화폭들이 쌓여 있었다. 100살 넘어 신작 전시를 하는 것은 세계미술계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렵다. 30년대 일본서 유학하고 50~60년대 국내 화단에서 미술운동과 비평활동을 하다 65년 홀연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86년 가나화랑 전시 이래 수차례의 국내 소개전으로 간간이 건재를 알려왔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지난해 영구귀국했고, 백수를 넘은 나이에도 신작을 계속 그리고 있다. 한·중·일 화단 통틀어 100살 넘은 희귀한 현역작가이자 20세기초 한국과 일본의 문화사를 증언하는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는 전날 작품 마무리와 서명 작업로 밤을 샜다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기색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의 시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식해야 한다. 미지근하게 살면 안된다”고 운을 뗐다.
그는 1916년 평양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1917년 조선인으로 도쿄미술학교를 세번째 졸업한 근대화단의 선각자 김찬영(1889~1960)이다. “아이 때 방 아랫목 위에 늘 놓여있던 여인 그림을 보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부친이 영국화가 로제티의 화풍을 본떠 그린 작품이었죠. 열여섯살에 처음 어머니가 사준 물감과 화구를 들고 그림을 그렸어요.”
집안에 널린 화집과 미술잡지, 화구들을 보고 일본 유학중인 형이 건네준 문학전집과 잡지들을 읽으며 일찍부터 프랑스의 인상파, 상징주의 문예사조에 눈을 떴다. 화가 이중섭이 소학교 같은 반 동기생으로 함께 집에서 화집과 잡지를 읽는 사이였다. 앙드레 지드, 톨스토이 등의 소설에도 탐닉했던 터라 장래 소설가가 될 것도 고민했지만, 부친을 이어 화가가 되기로 하고 33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체질적으로 새로운 흐름을 좇았어요. 애초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석고상 데생수업을 했지만, 금새 싫증을 느꼈죠. 어느날 도쿄 간다 거리를 걷다 보니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간판이 걸린 것을 봤어요. 20년대 파리에서 피카소 등과 어울려 전위 미술을 하다 귀국한 미술계 총아 후치타 쓰쿠하루가 지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갔어요. 거기서 처음 일본대에 재학하던 김환기를 만났습니다.”
당시 일본엔 서구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가 물밀듯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후치타와 함께 도쿄 교외를 사생하면서 쓰다 세이쥬 같은 당대 전위 작가들과 교유하며 문화학원에 진학한다. 이 학교에서 문학수, 유영국, 이중섭을 만났고, 연극무대 미술도 하면서 당대의 상징주의, 추상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말수가 적었던 친구 이중섭과는 신라 금관과 비슷한 고대 북방유목민 스키타이인들의 황금유물 화집을 함께 보면서 우리 고대 문화의 기원에 대해 교감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36년 일본에 온 문인 이상을 자기 숙소에서 묵게 한 적도 있다고 그는 회상했다. “같이 살며 학생 연극운동을 하던 유학생 주영섭(작가 주요한의 동생)이 이상의 친구였는데, 이상이 엽서를 보내와서 잠시 묵겠다고 했지요. 병으로 피골이 상접한 50대 노인의 몰골이었어요. 냄새도 나고. 내 침대에 자게 했는데 밤새도록 빗소리에 잠을 못자고 낙숫물을 세었다고 말하던 기억이 나요.”
39년 귀국 뒤 문학수, 이중섭 등과 평양에서 가끔 전시를 벌인 것 외에는 묵묵히 작업과 독서만 했다. 이중섭과 어깨동무를 하고 행진곡풍으로 ‘소나무’를 부르며 서울 성북동에 살던 친구 김환기의 집을 찾아가 부인 김향안이 차린 술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고 떠올렸다. 유복한 환경에서 작업으로 소일하던 청년화가 김병기는 해방 직후 조국의 건국과 미술제도를 다지기 위한 활동에 뛰어든다. 해방 직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고하 송진우와 조만식 등 두 지역 정계 인사들을 연락하는 밀사 구실을 도맡았다. 이쾌대, 문학수 등 동료화가들과도 만나면서 화단의 정비와 개편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이다.
“8월16일을 잊을 수 없어요. 그날 무장한 일본군 장교들과 경의선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어요. 서울 원서동의 고하 송진우 선생 댁에 평양 민족주의 인사들이 앞으로의 정국 방향을 묻는 서한을 전하기 위해서였지요. 개성 부근을 지나다 민가에 일장기를 덧칠해 만든 태극기가 걸린 모습을 열차에서 봤는데 일본군 장교들이 그걸 일본의 패망이 슬퍼 일본기를 내걸었다고 수군거리길래 비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역에 몰린 환영인파며,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 탱크들도 눈에 선해. 전차가 안다녀서 아버지 집이 있던 돈암동까지 걸어갔는데 길거리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해방의 감격에 겨워 껴안고 눈물 흘리고 춤을 추는 풍경들이 계속 이어졌어. 나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갔는데, 그뒤로는 좌우 대립이 심해져 8월16일 같은 풍경은 두번 다시 없었어요.”
그는 17일 원서동의 고하 자택에 찾아가 서신을 전한 뒤 잠방이차림의 고하로부터 은인자중해야한다는 답신을 건네받았다고 한다. 서한을 품고 돌아가기 직전인 18일 뜻밖에도 당대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 이쾌대(1913~1965)를 만나게 된다. 서울 종각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건국준비위 미술본부’란 간판이 걸린 한청빌딩에 들어갔더니 이쾌대가 일하고 있어 독립을 축하하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는 회고였다. “이쾌대는 저보다 세살이 많았지만, 친구처럼 지냈어요. 해방 전 전시에서 본 적은 있으나 둘이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죠. 쾌대가 태극기의 태극 둘레에 있는 사괘는 봉건적인 잔재니 새나라 국기에서는 태극만 남기자고 하더군요. 저도 그러자고 동의했어요. 해방 뒤 남북을 자주 오고갔던 이쾌대는 날 좋아했어요. 제가 47년 월남하기 직전에 해주로 이사가서 남한 사탕을 떼어 평양에 파는 장사를 했는데, 마침 북한에 온 쾌대가 자신이 타고온 트럭에 저를 몰래 태워 평양에 데려다주기도 했죠.”
김 화백은 평양문화예술협회를 꾸렸다가 이후 북한 정권 주도로 생긴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서기장을 맡아 노동절 행사 등에 쓰일 벽화와 조형물 제작을 감독했다. 해방 뒤 평양시군중대회에 모습을 처음 드러낸 김일성이 그뒤 그를 불러 작품을 청탁하기도 했다.
“평양의 작가들 상당수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북한 정권의 선전예술만을 추종하진 않았어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사거를 추모해 시 낭송회를 여는 등 정권의 이념과 배치되는 행사도 종종 벌였습니다.”
결국 선전미술을 계속 채근하는 정권의 압박에 견디다못한 그는 47년 월남해 국방부 한국문화연구소에서 대북선전활동을 벌이게 된다. 1950년초엔 ‘50년미술협회’를 결성해 좌우작가 합작도 꾀하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무산되고 만다.
그는 전쟁초기 피난을 못가고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겪어야 했다. 장인인 국회부의장 김동원(소설가 김동인의 형)이 납북되고 그도 의용군에 끌려가기 직전 신체검사장에서 만난 인민군 군의관의 호의로 겨우 사지를 빠져나왔다. 마침 북에서 문화기관장으로 파견된 유학시절 친구 문학수의 도움으로 집에 숨어서 연명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뒤엔 북한 정권과 함께 도피한 문학수의 부인과 어머니를 찾아가 보살피기도 했다. “중공군 개입으로 평양을 철수할 때는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소설가 선우휘와 함께 수리해 많은 양민을 피난시켰어요. 그 시절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51년1월 30대의 김 화백은 피난수도 부산으로 내려간 뒤 종군화가단 부단장으로 활동한다. 부산항 부두에 노숙자처럼 널브러져 있던 이중섭 가족을 발견해 거처를 알선해주고 종군화가단에 가입시켜 생계대책을 마련해준 것이 그 즈음이었다. 당시 부산 화단엔 미군의 양민학살을 고발한 피카소의 대작 ‘조선의 학살’(1951)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반공의식이 강했던 그는 이 작품이 전쟁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피카소와 결별을 선언하는 편지 낭독회를 열어 일약 유명세를 탔다. 그뒤 ‘강단에서 예술을 논해보라’는 서울대 쪽의 권유로 전쟁 직후 서울미대교수가 된 그는 많은 글을 <사상계> 등의 평단에 발표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발생과 전개 양상을 정리한 당시 그의 논문과 비평글들은 한국현대미술사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박서보, 김창렬, 정창섭 같은 추상미술 원로작가들이 50년대 청년시절 ‘반국전’을 표방하면서 전위미술 운동을 벌일 때는 든든한 지원자가 되기도 했다.
1965년 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석했다가 “비평을 접고 작품에만 전념하겠다”면서 미국으로 아예 작업터전을 옮겨 화단을 놀라게했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관심사였던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실체를 본바닥에서 체험하며 한국에서 작업한 추상미술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는 뉴욕을 거쳐 사라토가에 정착한 뒤 미국의 동서부의 대자연을 그리면서 선과 선의 엇갈림으로 표상되는 추상화 작업을 40여년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도미한 뒤 뉴욕에 먼저 와있던 수화 김환기와 종종 만났는데, 욕구불만 상태였어요. 수화가 잘 그렸던 특유의 달과 항아리를 냉혹한 미국에서 떠올릴 수 없어 화폭에 점을 찍는다고 하더군요. 북으로 떠나 사라진 친구들 생각하며 목탁 두드리듯 찍은 거지요. 그 점은 조선 분청사기에 도공이 찍은 인화문과 똑같습니다.”
김 화백은 인생의 첫 절반은 남북한에서, 나머지 절반은 미국에서 갈고닦은 자기 화풍을 ‘추상성을 통과한 뒤에 나온 형상성 ’으로 집약한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이 20세기말 지나친 형식주의로 흘러 정신성을 잃었으니 이제 100살 작가의 연륜에 맞게 노장사상 등의 영감을 얻어 이를 복원하는 게 전인미답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70년대부터 화면에 드러난 형상성은 그가 한국과 미국에서 맞닥뜨렸던 현실 풍경을 담은 것으로, 선과 색의 역동적 교차와 율동이 두드러진다. 한국 사회와 군중의 모습을 극도의 추상화된 선으로 형상화한 신작 <공간 반응>(2016)>은 이런 양상을 힘차게 붓질한 검은 빛의 화폭과 여백으로 표현했다.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한다’로 이름붙인 이번 전시의 대표 연작들은 월남하면서 되뇌었던 발레리의 명시 ‘해변묘지’의 첫 구절을 빌어다 제목을 쓴 것이다.
김 화백과의 대화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태산 같은 역사적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그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지만, 기자는 손사래를 치며 일어서야 했다. 무연고 처리된 이중섭의 주검을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손수 찾아내 화장했던 60년전 일화를 마지막으로 들려주면서 김 화백이 말했다. “예술은 인생처럼 언제나 진행중이고 미완성입니다. 완결이란 담벼락 그림처럼 전락하는 겁니다. 저는 끊임없이 보충하고 변화시키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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