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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화백 한겨레 연재 "문예지 표지화에 담긴 김찬영의 화려한 젊은 날"

정종배 2017. 3. 13. 19:02

"문예지 표지화에 담긴 김찬영의 화려했던 젊은 날"

입력 2017.03.08 21:06 수정 2017.03.08 21:2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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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기를 그리다 - 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
(9) 최초의 모더니스트 김찬영과 문예활동

[한겨레]

‘유학파 서양화가 3호’인 김병기의 부친 김찬영은 1920년대 다양한 문예동인 활동을 펼쳐 미술과 문학을 융합시킨 표지화를 남겼다. 1921년 3월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인 안서 김억의 <오뇌의 무도>에도 표지화와 컷만이 아니라 축시를 써서 참여했고, <동아일보>에는 사흘에 걸쳐 ‘포경’이란 아호로 서평도 기고했다. 그 시절 보기 드문 컬러로 인쇄된 표지화에는 양귀비꽃과 오선지를 통해 선진적인 ‘악마주의’를 상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지학자 엄동섭씨 제공

김찬영은 과연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인가. 이런 주장은 과연 도발적인 것일까. 하기야 20세기 초반의 지적 풍토와 비교해 볼 때, 최초의 모더니스트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미술가로서, 김찬영은 인습적 기예에 대한 반격과 더불어 주관적 생명성 추구에 집중했다. 1920년대 초 현대주의 미술론을 주창했고, 3차원적 재현 묘사로부터 벗어난 평면성과 상징성에 입각한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현대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위상을 정립할 근거가 있다(김현숙). 그렇다. 김찬영은 모더니스트였다. 그래서 최초라는 영예를 줄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찬영은 예술적 이해가 척박한 풍토에서 독자적 예술론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미술과 문학의 교류도 시도했다. 게다가 대중에게 ‘예술’이라는 개념을 이해시키려고 예술비평을 우선시했다(송민호).

김찬영은 도쿄미술학교 시절인 1916년 재일본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발간한 <학지광>에 미술론을 기고했다.
1920년 7월 김억이 편집을 주도한 문학동인지 <폐허> 창간호에도 ‘케이(K)형에게’란 김찬영의 글이 실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모더니스트 김찬영. 그의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현대주의 이외 자연주의, 유미주의, 탐미주의, 심지어 악마주의도 있다. 20년대 예술계 풍토로서는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김찬영의 선진성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오늘날 그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무엇보다 화가로서 유존 작품의 부재라는 약점이 있다. 게다가 문학과 미술의 장르 결합 활동, 요즘 같아서는 ‘융복합’이라고 칭찬받을 일이나, 당시로서는 전문성 미약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김찬영은 미술 창작과 더불어 시·희곡·비평 등 다양한 방면에서 문필 활동을 했다. 그는 20년의 <폐허> 창간 동인을 비롯해 <창조> 동인, 24년의 <영대>(靈臺) 동인에 이르는 문예 활동, 그리고 25년의 삭성회(朔星會) 미술동인 활동 등등, 10년가량 활발한 활동을 하다 문예계를 떠났다. 한때 그는 기신양행이라는 서양영화 배급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당대 ‘섹스 심벌’ 클래라 보 주연의 <날개> 같은 할리우드 영화의 수입도 기신양행에서 한 것이었다.

‘1920년대 최초의 모더니스트 김찬영’
재현 벗어나 상징성 추구한 미술가
문학동인 참여 시·희곡·비평 ‘융복합’
‘폐허’ ‘창조’ ‘학지광’ 등등 기고 활발

1921년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표지화 그리고 신문에 서평도 3회나
“예술지상주의보다 더 나간 악마주의”
김찬영 축시 보고 춘원 이광수도 ‘극찬’

1924년 김동인과 평양서 ‘영대’ 창간
편집·인쇄·발간 주도 5권만에 실패
그뒤 문학동네 떠나 ‘삭성회’ 참여

유학시절 연극 무대장치 맡은 김병기
“배우 되려는가” 부친 격노에 눈물
“내 전철 밟지 말고 한우물 파라는 뜻”

1924년 평양에서 김동인·김억 등과 함께 창간한 <영대> 창간호의 표지도 김찬영 작품이다. 5권까지 나오고 폐간한 ‘영대’의 표지화는 매번 디자인 색깔만 바꿨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본.

“Free! Free! 모든 것에 으뜸이 되는 저들의 부르짖음은 쉼 없이 오오(??)한다. 저들은 저들의 감각과, 의식과, 교활한 이해가 (가장 저들이 자랑하는 그것이) 모든 허위와, 죄악과, 권태와, 공포와, 고통을 저들에게 공급하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든 죄악과 허위에 빠져 있는 저들은, 스스로 그것을 저주하고 모욕하고, 참책(慘責)한다. -미욱한 아이가 거울을 보고 자기의 그림자를 욕하듯이- Free! Free! 인생의 갈구하는 부르짖음은 오오하고, 자연은 인생의 모순을 묵묵히 냉소한다.”(<학지광>, 4호, 1916)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 김찬영이 도쿄 조선인유학생 잡지인 <학지광>(學之光)에 발표한 글이다. 자유를 구가하는 내면세계의 고백이다. 자연은 조용히 냉소를 보낼 따름인데 인생을 갈구하는 소리는 왜 그렇게 시끄러운가. 자유. 자유라는 단어를 강조한 김찬영의 내면세계는 눈길을 끈다. 초기의 김찬영 미술론은 ‘미술은 자연과 인생의 반영’이라는 것이었다. 선배 고희동과 김관호는 ‘해석’ 없는 자연의 단순 재현에 주력했다면, 즉 아카데미즘 형식으로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다면, 김찬영은 자신의 미술이론에 따른 ‘주장’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그래서 김찬영은 졸업미전 출품작 <님프의 죽음>처럼 상징성 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귀국 이후 김찬영은 미술작품 제작보다 문필 활동에 주력했다. 그의 글 ‘서양화의 계통 및 사명’은 국내 최초의 서양미술 이론으로 기록된다. 이 글은 예술의 개념을 비롯해 사조의 흐름을 정리 소개했다.

“‘예술은 생활의 거울(鏡)이라.’ 이러한 말은 이미 우리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전 생활이 예술 위에 나타날 때 어떠한 의혹과 또한 어떠한 비난을 시험하려 한다. 더욱이 비평가의 소질과 수양을 가지지 못한 인사 가운데서 더욱 심혹한 불평과 비난을 듣는다. 이것을 비해 말하자면 일찍이 면경을 대하지 못한 ‘추한 부인’(醜婦)이 처음 거울을 대할 때에 자기의 반영을 비난함과 일반이라 하겠다. 그러나 나는 항상 자기의 반영을 비난하는 추한 부인에게 그 반영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직언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만일 그 추한 부인이 그 말을 빨리 긍정하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오히려 반목을 사리라는 공포심에서 주저함을 금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면경은 어떤 것이라고 자세히 알리면 반드시 그 면경의 주인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 그와 같은 것을 깨달을 것을 믿는다.”(<동아일보> 1920년 7월20일)

1920년 김찬영은 한성도서주식회사 촉탁으로 서울에서 체류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무렵 그는 왕성한 활동상을 보였다. <창조> 표지화 2점을 비롯해 글쓰기에도 열중했다. 하지만 그는 1년 동안의 서울살이를 접고 평양으로 귀향해서는 다시 한량으로 돌아갔다. 소설가 김동인의 회고에 의하면, 김찬영과 김동인은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술집에서 새벽까지 풍류 세월을 보냈다. 침묵으로써 저항의 세월이었다. 게다가 미술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회적 풍토에서 화가의 입지는 너무 좁았다. 한마디로 식민지 치하에서 젊은 지식인의 역할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창조> 이후 김찬영은 김동인과 손을 잡고 <영대> 발행에 힘을 모았다. 1924년 창간한 영대는 불과 다섯 번 발행하고 종막을 고했지만, 편집과 인쇄 등 발간 과정을 평양에서 주도했다. 영대는 김찬영-김동인 콤비, 게다가 평양문화권의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특히 김찬영은 영대 실패 이후 문학 동네를 떠났기 때문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 영대에서 김찬영의 역할로 빛나는 부분은 집필 말고도 표지화 제작이다. 표지 디자인은 매호 색깔을 달리하면서 반복하여 사용했다. 표지를 상하로 양분하여 ‘靈臺’라는 제자(題字)의 ‘네모나고 묵직한 생김새도 노블리티하였고, 글자의 획수가 많으면서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글자라는 점도 마음’(김동인)에 든, ‘고답적 취미’의 반영이었다. 디자인을 보면 표지면 중앙에 전통 양식의 향로가 있고, 향로의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제목 글씨를 감싸는 형식이다. 영대라는 향을 피워 올리는 형상. 향로 좌우에는 기다란 촛대가 안정감을 자아내면서 역시 향을 감싸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꽃이다. 활짝 핀 꽃잎, 그것도 정면을 향하여 동그라미 형태로 보이는 꽃잎, ‘혼령의 만개’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는 ‘창조’의 표지화인 ‘평화’와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같은 상징적 도상과 달리 전통적 배경으로서의 도안 같은 이미지의 단순함을 느끼게 한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김찬영이 제작한 표지화들은 1920년대 초 모더니즘을 지향한 유미주의자들의 미술과 문학의 만남 첫 장을 보여주는 시각적 이미지들로 문헌사적으로도, 미술사적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비록 표지화와 컷이지만 이 자료들은 일본 유학을 막 다녀온 야심찬 모더니스트이자 데카당한 댄디였던 김찬영의 이루지 못했던 의욕을 담고 있는, 어쩌면 그에게 가장 화려했던 젊은 날의 기록일 것이다.”(권행가, <근대서지>, 2014)

<오뇌의 무도> 속지에 실린 삽화에도 여인과 해골 등 상징 이미지들로 김찬영 특유의 서사성을 표현했다. 윤범모 교수 제공

1921년 발행한 김억의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는 한국 최초의 서양 번역시집으로 주목을 받았다. 폴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 유럽의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 소개했다. 이 시집에 김찬영은 표지화를 그렸고 축시와 서평까지 발표했다. 표지화는 예쁜 꽃과 오선지 형식 위에 꽃 문양을 배치했다. 주요 이미지인 예쁜 꽃, 그것은 아편의 향기를 품은 양귀비꽃이다. 바로 축시의 한 구절과 상통했다. 김찬영의 축시 ‘오뇌의 무도의 출생된 날’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사람의 영(靈)은 오직/ 깊은 잠에서 깨지 아니 하리라/ 육체는 그 위에서 방황하여라.” 제법 긴 축시는 5절에서 이렇게 마무리된다.

“햇빛은 붉어지고/ 이상한 구름은 춤추어라/ 굳센 자극의 노래 부르다/ 천사는 육감의/ 그윽한 환희에 절규하여라/ 신령은 술통을 안고/ 기절하여라/ 요정은 도끼를 들어/ 천국의 문을 허물어라/ 악마는 신에게/ 결혼을 청하다/ 죄악과 선미(善美)는 화의(和意)하여라/ 양귀비 아편의 빼어난 향기는/ 망각의 리듬 위에서 춤춘다/ 병들었던 사람의 영은/ 희미한 눈을 뜨다/ 이름 모를 자극의 빛은/ 온 세계에 가득 차서/ 전광, 화염, 붉은 피/ 영은 비로소 웃음 웃다/ 또한 춤추다. 노래 부르다/ 이때는 오뇌의 무도의/ 출생된 날이어라”

‘악마는 신에게 결혼을 청한다. 이는 악마의 노래인가. 악마주의는 예술지상주의가 한 걸음 더 나간 것’(이광수)이라고 했다. 죽음과 퇴폐적 분위기, 거기에 아편 향내 짙은 꽃이 피어올랐다.

1920년대 초창기 문예동인 활동을 주도했던 김찬영과 김억·김동인은 모두 구한말 평안도 갑부 집안 출신의 일본 유학파이자 ‘데카당’으로 불리던 장안의 멋쟁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사진은 1930년대 초반 신문기자로 일하던 문인들 모임으로, 뒷줄 왼쪽부터 김억·김동인·최학송·김동환, 앞줄 맨 왼쪽부터 현진건·김일엽·이선희·최정희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찬영은 문학 논쟁에도 참여했다. 김동인과 염상섭의 논쟁 즉 의고비평과 과학비평의 주장 속에서 김찬영은 감상비평을 내세우기도 했다(1921). 거기서 김찬영은 비평에 대하여 비평가 자신의 감정 고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연극 논쟁에도 참여했다. 현철과 이기세의 ‘신파극 신극 논쟁’이 그것이었다(1921). 이들 논쟁에서 김찬영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그의 관심사를 짐작하게 하는 사례들이어서 흥미롭다. 하기야 김찬영은 <3천량>이라는 희곡도 발표한 바 있다. 김병기 화가는 증언한다.

김병기의 장인 김동원의 동생이기도 했던 김동인은 애초 가와바타미술학교를 다니다 중퇴해 화가 김찬영과 콤비를 이뤄 문예동인 활동을 펼쳤다. 1928년 모습으로 가족 소장본이다.
안서 김억은 국내 첫 번역가, 에스페란토어 선구자, 오산학교 교사 시절 김소월의 스승 등 다방면에 재능과 기록을 남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희곡 <3천량>은 평안도 사투리로 쓴 작품이다. 중국에 팔려가는 조선 여자를 위해 그의 남자친구가 3천량을 도둑질하여 감옥 간다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그림도 그리고 평론 등 많은 글을 썼다. 다재다능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도 그런 소질을 물려받은 것 같다. 화가인 내가 한때 미술평론가로 활동한 것도 그렇다. 1935년께인가, 일본 유학 시절 어느 날 아버지가 도쿄에 오셨다. 기차역으로 마중 나갔다. 마침 역에는 ‘동경학생예술좌’라는 극단의 연극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주영섭 연출에 이어 무대장치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본 아버지가 ‘너는 그림 그리지 않고 배우가 되려는가?’라면서 야단을 치셨다. 그렇게 격노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나에 대하여 관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격노는 한 우물을 파라는 뜻이었다. 아버지의 충고는, ‘나의 전철을 밟지 마라’,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