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전설적 평양 갑부 집안의 화가 입문
[한겨레]
교과서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 국민화가 이중섭, 6·25 전쟁 당시 국군 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 장군, 박정희 대통령의 보스라고 불린 이용문 장군,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원어로 암송하던 불문학도 이휘창, 그리고 101살의 현역 화가 김병기. 이들은 공통점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바로 평양종로보통학교 동창생이다. 그것도 1929년 졸업의 동기생들이다. 1916년생 용띠 동갑이다. 이들 가운데 이중섭과 김병기는 제3조의 같은 반 친구였다. 그것도 6년간 같은 반에서 함께 지낸 ‘그림 잘 그리는 학생’이었다.
평양종로보통학교는 대동문 서쪽의 남북으로 길게 뻗은 종로에 있었다. 마침 이중섭 등이 입학했을 때 학교는 소실된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학교 건물을 빌려 사용하면서 교사를 신축했다. 건물이 완성되고 새 학교로 등교하니 입구에 명단이 붙어 있었다. 건물 신축에 거금을 희사한 평양 유지들의 이름이었다. 많은 이름 가운데 제일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 김진모, 바로 김병기의 할아버지였다. 출연금 500원. 당시 시세로 여러 채의 집을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냉면 한 그릇 값이 10전도 되지 않을 때였다. 재학생 김병기의 어깨를 펴게 했던 일화였다. 그만큼 김병기의 집안은 평양의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화가의 증언이다.
“우리 집은 신흥 부자가 아니고 옛날부터 내려오던 평양의 전설적인 갑부였다. 증조부 이름은 김광현(金光鉉), 청풍 김씨다. 평양에서는 보통 ‘노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광현’이란 이름에서 따 ‘금굉이’라고도 불렸다. 사실 집 안에 금괴를 숨겨두어 나온 별명이기도 했다. 창고에 쌓아 둔 엽전 뭉치가 녹아 엽전물이 마당을 채우기도 했다. 노할아버지는 재산을 한없이 축적했고, 또 집 안 곳곳에 이를 숨겨 두었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고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집을 수리하면서 벽 속이나 장독대 밑에서 금덩어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부자가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즉 먹고 싶을 때 먹지 않고, 입고 싶을 때 입지 않고, 근검절약했다는 의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아들 셋을 두었다. 큰아들이 우리 할아버지 김진모다. 그는 정3품으로 가산(嘉山) 군수를 지냈다. 가산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선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원님, 즉 사법권과 민권을 쥔 군수였다. 상투를 깎고 단발했다. 평양 사람으로는 제일 높은 벼슬을 지냈다. 어떻게 그런 벼슬을 했는지 모르겠다. 평양 사람들은 가산군수를 지냈다 하여 할아버지를 ‘김가산’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구두쇠였는지 ‘기가 막히다’라는 표현을 ‘김가산이가 막힌다’라고 할 정도였다. 할아버지의 일과는 수챗구멍의 ‘뜨물 검사’로 시작했고, 또 그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만약 쌀 한 톨이라도 버려져 있으면, 그날은 죽음의 날과 같았다. 쌀 한 알을 만들기 위해 일년 내내 고생하는 농부를 생각하라고 했다. 우리는 대지주 집안이어서 소작인이 많았다. 가을이 되면 소작인들이 선물을 들고 왔다. 대동강 숭어가 최고의 선물이었다. 소작인이 냉동 숭어를 선물하면 조부는 이를 먹지 않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면 다른 소작인이 사서 다시 조부에게 선물했다. 평양에서 제일 좋은 숭어는 당연히 ‘김가산’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유행했다. ‘제일 좋은 대동강 숭어는 김가산 집을 세 번 들락거린다.’
할아버지는 부인 셋을 두었다. 종가의 맏아들은 일찍 죽었다. 할머니는 황해도 곡산이라는 곳에서 왔다. 아가타라는 세례명의 천주교인이었다.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만 낳고 일찍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새할머니만 있었다. 새할머니는 2남2녀를 두었는데, 남의 일 간섭을 많이 했다. 할머니가 셋이나 되는 집안이어서 뭔가 풍성해 보였지만 사랑은 없었다. 우리 아버지(김찬영)는 외톨이였다. 가족들끼리 재산 싸움만 했다. 사랑이 없었다. 이게 어렸을 때 나의 기억이다. 아버지는 열세 살, 어머니는 열네 살 때 결혼을 했다. 사실 소년소녀가 무엇을 알겠는가. 아버지 열다섯 살 때 우리 형님을 낳았다. 그러니까 소년이 소년을 낳은 것이다. 조혼이어서 부부의 정은 없었다. 당시의 사회 풍습이었지만 부모들끼리 결혼시키는 조혼제도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평양 전설적인 갑부였던 증조부 김광현
“부자된 비결은 오로지 안먹고 안쓰기”
조부 가산군수 김진모도 소문난 구두쇠
“대동강 숭어 선물받아도 되팔아 유명”
부친 김찬영 도쿄미술대학 유학시절
방학때 억지로 합방해 태어난 김병기
어머니는 설움에 교회에서 살다시피
“우발적으로 생긴 애…늘 말없이 혼자”
보통학교 시절 ‘그림 잘 그리는 아이’
같은 반 이중섭과 미술잡지 보며 놀아
“세잔을 최고 화가로 알았던 12살 소년”
아버지는 1917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한 해 전 16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미술학교 재학생 때다. 방학 때 귀가한 아버지를 하인들이 어머니 방에 밀어 넣은 결과라 했다. 아버지 15살에 형님을 낳고, 24살에 나를 낳았다. 나는 ‘우발적으로 생긴 애’라고 생각했다. ‘계획도 없이 우연히 세상에 나왔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누가 말을 걸어도 나는 대답하지 않던 애였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책만 보았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서울로 가서 딴살림을 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립기도 하고 밉기도 한 존재였다. 어머니는 설움을 안고 교회에서 살았다. 당시 며느리가 비단옷 같은 것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일은 큰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집안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장로교회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였고, 그게 나의 환경이었다. 사랑이 없는 큰 집안에서 그리움과 증오가 생겼다. 처음부터 나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리움과 거기에 대한 증오심과 반항심이 있었다. 그것이 나의 예술의 출발이었다.
대가족이다 보니 매달 제사가 있었다. 그럴 때만 서울에서 아버지가 오셔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특별한 말씀은 없었다. 제사를 싫어했던 어머니는 늘 교회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여자성경학교를 다니면서 성경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다. 서춘 박사의 강연도 듣고 와 ‘경제’란 말도 썼다. 당시 경제라는 말은 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경제 관념’이 없다고 야단쳤다. 하기야 철학, 사학, 문학, 미술 같은 신조어는 일본에서 만든 말이었다. 평양은 신학문이 발달한 곳이었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양 시내는 이름난 고개가 있다. 곧 장대재와 남산재, 여기를 남산현이라고 불렀다. 고개마다 교회당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남녀유별이 심해 교회 건물은 ㄱ자로 구분되어 남녀가 볼 수 없게 출입시켰다. 평양에는 장로교회가 10개 있다면 감리교회는 2개쯤 있었다. 감리교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선교했다. 서울 중심의 이화학당이나 배재학당이 대표적이다. 장로교는 학교나 병원보다 교회 세우고 회개 운동 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런 장로교의 집결지가 평양이었다.
평양에 장로교가 얼마나 많은가 하면, 서양인이 사는 양촌(洋村)이라는 마을이 있을 정도였다. 서양인들이 사는 마을, 대단했다. 양촌에 사는 서양인 학생들만으로 하키팀을 만들 정도였다. 나는 감리교 계통의 광성학교에 다녔는데, 어느 날 그 서양 학생들과 하키 시합을 했다. 어머니가 하키 선수복과 운동 도구를 사주어 선수 생활을 했다. 우리 학교 하키팀의 골키퍼를 했다. 그런데 시합 중에 이상한 냄새가 났다. 서양인 선수들이 웃통을 다 벗고 뛰어서 그런지 노린 냄새 같은 게 났다. 그 냄새 때문에 내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골 하나를 먹었다.
평양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보다 공간감이 넓다. 멀리서 보면 5리 정도는 벌판이다. ‘넓은 공간’이 바로 평양이다. 평양 시가지 한복판을 흐르는 대동강, 그 대동강을 잊을 수 없다. 거기에 모란봉이 있고 만수대가 있다. 대동교의 중성(中城) 사거리를 경계선으로 하여 조선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로 나누어졌다. 모란봉 쪽 웃거리는 조선 사람 마을이었고, 아랫거리는 일본 마을이었다. 그 가운데 중성 사거리라는 곳을 우리 친척들이 점령하고 살았다. 우리 앞집은 일본 집이었고 뒷집은 한국 집이었다. 경계선이 우리 집이었기 때문에 나는 보통 한국 사람들보다 일본말을 잘했다. 집안에서 일본 신문을 배달해 보았다. 당시 평양 사람들은 서울보다 일본 유학을 선호했다. 대가족인 우리 집안은 항상 일본 유학생들로 넘쳤다. 우리 집 옆에 영화관이 생겼다. 영화관에서 떡을 던지면 우리 집 뜰에 떨어질 정도로 가까웠다. 어려서부터 영화관 출입을 자주 했다. 아홉 살쯤일 때, 영화관에 가면 양반집 아이가 왔다고 그냥 입장시켰다. 나는 영화관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나의 휴머니즘은 영화와 관계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통속적인 휴머니즘일지라도.
영화는 미술과 형제 같았다. 나의 화가 꿈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물론 아버지가 화가였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났다. 그 시절의 친구가 이중섭이다. 이중섭과는 6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나는 그의 이문골 집에도 놀러 갔다. 중섭은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외삼촌 댁에서 3식구와 함께 살았다. 물론 중섭도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가 쓰던 화구를 만져 보았고, 또 영국 미술잡지 <스튜디오> 같은 책도 보았다. 어린 꿈을 키우던 시절의 추억이다. 그런 이중섭이 어느 날 말했다. 다 모지라진 붓을 가지고, ‘병기야. 이거 너 뭔지 알아?’ ‘다 모지라진 붓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그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다’라고 했다. 그 이유는 수채화 그릴 때 쓰는 것이라 했다. 수채화는 물이 많이 들어가니까, 그걸 대면 물을 빨아먹는다는 것이었다.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미술 기법을 이해하고, 실제 그림 그릴 때 활용할 수 있는 아이였다.
나는 16살 때, 어머니가 미술 도구와 캔버스를 사주어 유화를 그렸다. 12살 무렵부터인가, 나는 이미 화가는 세잔 같은 수준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세잔 같은 그림이 진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12살이라면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나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잔을 생각했다는 것은 ‘생각하는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는가 여겨진다. 대가족 속에서 나의 외로움은 사색을 낳게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예술가의 꿈은 자랐던 것 같다.”
구술·집필 윤범모/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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